소설리스트

현판멸망한 세계의 게이머-29화 (29/176)

# 29

진화의 시작 (3)

성현과 해미는 선혈이 낭자한 전투현장을 지나 원래 가고자 했던 병기창을 찾아 이동했다.

“이쯤이 분명한데.”

영문으로 ‘ordnance depot’ 병기창이라고 지도상에는 표기되어있지만, 성현이 도착해서 보니 휑한 공터에 주차장으로 쓰이는 곳이었다.

엉뚱하게 대형 탱크로리 차량 5대가 줄지어 서 있었다.

“급유 차량? 어쩐지 활주로 인근에 없다 싶더니… 잘 됐다.”

사실 연료 보급 문제는 조금 우려되는 부분이었다. 대피소에도 항공유가 있기는 했지만, 소량에 불과했다.

장기간 운용할 정도는 되지 못했다.

5대의 탱크로리의 저장 탱크를 손으로 툭 쳐보고, 울림이 없이 묵직한 느낌에 적지 않은 양의 항공유가 들어있음을 확인했다.

“이걸로 한시름 놓긴 했네. 그나저나, 흐음…….”

탱크로리 차량을 창고에 넣은 성현은 지도에 오차가 있나 싶어 주변을 돌아봤다.

그러다 눈에 띄는 곳이 있었다.

80여 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긴 담벼락이 있었고, 높이 2.5m의 담장에 보안 펜스가 추가로 50cm가량 솟아 있었다.

그 끝은 날카로운 가시 철선들로 둘려있어 부대 안에서도 보안유지에 신경을 쓰는 구역임을 알 수 있었다.

“해미야, 저기 벽 넘어 인 거 같다.”

성현은 해미에게 말하고, 곧장 뛰어갔다.

쾅!

성현이 담장 근처에 이르자 크게 도약해서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높이 3m에 이르는 담벼락을 도움닫기 한 번으로 뛰어넘었다.

허공에서 공중제비를 멋지게 한 바퀴 돈 성현은 가볍게 바닥에 착지했다.

그리고 성현의 한참 앞쪽에 해미가 ‘쿵’하며 제법 묵직한 소리를 내고 내려섰다.

순간 가속이며 점프력이 확실히 해미가 윗줄임을 알게 해주는 착지였다.

잘깍인 질 좋은 잔디에 깊은 족적을 남긴 해미는 성현을 돌아봤다.

“아저씨. 여기 맞아요?”

“그래, 찾은 거 같다.”

둥근 돔 형태로 지어진 병기창 이였다. 지면 위로 도출된 건물의 구조로 보아 지하에 더 큰 공간이 있음을 유추할 수 있었다.

지상과 지하에 걸쳐져 있는 출입로는 경사가 완만하게 만들어져 있었고, 그 끝에는 대형 철제 슬라이더 도어가 입구를 막고 있었다.

외관만으로도 만만치 않음을 짐작했다. 앞서 격납고보다 훨씬 튼튼해 보였다.

‘유폭 때문에 폭약은 쓰기는 힘든데… 해미가 가능하려나?’

성현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병기창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멈칫.

문을 어떻게 열까 하며 걷던 순간, 작지만 분명한 인기척을 들었다. 좀비와 다른 분명한 사람들의 말소리였다.

철컥.

대형 슬라이더 도어 옆의 작은 비상용 문이 열리고, 다수의 군인들이 튀어 나왔다.

“Freeze! Don't move or I will shoot you.(꼼짝 마. 움직이면 쏜다.)”

"Hey. Take off your helmet.(어이. 헬멧 벗어.)"

다섯 명의 미군들이 총구를 겨눈 체, 저마다 소리를 질러 성현과 해미를 압박했다.

“우-씨!”

“해미야, 일단 기다려보자. 우리가 침입자인 건 맞아.”

해미가 미군들이 총을 겨누고 있자 움찔움찔하며, 당장이라도 튀어나갈 듯했다.

성현은 그런 해미를 달래고, 기다릴 것을 알렸다.

남의 집을 기웃거리다 담까지 넘었으니 집주인이 화가 날만 했다.

주인 없는 물건이라 생각하고 막가져 가지만, 강도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대화를 해보고 이도 저도 안 되면 그때 가서 제압해도 늦지 않은 일이었다.

*  *  *

다가오는 다섯 명의 미군들을 잠시 훑어본 성현은 이들이 강도 높은 전투훈련을 받은 정예가 아님을 알아챘다.

‘일반 보병이든지, 다른 병과에 있는 군인들로 봐야겠어.’

총을 잡은 자세나 군인들 간 위치선정이 좋지 않았고, 총의 파지법 또한 제각각이었다.

한마디로 오합지졸로 성현은 판단했다.

“Hey. Calm down. Who are you commanders?(진정해. 너희들 지휘관이 누구냐?)”

이런 이들은 오발 사고가 날 수도 있어 긴장을 풀도록 성현이 대화를 시도했다.

‘총을 들고 있는 것은 지들이면서 왜 떨어?’

성현과 해미를 겨누고 있는 이들의 눈동자는 불안과 초조한 기색이 완연했다.

“I have no intention of attack. Ask again. Who is the commander?(난 공격할 의사가 없다. 다시 한 번 묻지 지휘관이 누군가?)”

공격을 당하면 성현도 손을 쓸 수밖에 없었고, 사전에 이를 방지하고 싶었다. 괜한 피를 손에 묻히고 싶지는 않았다.

성현의 유창한 발음에 미군 군복을 입은 다섯 명 중 네 명이 일순 고개를 돌려 중년의 백인을 바라봤다.

“이곳은 미 공군 관할의 기지다 무단 침입한 너희들은 누구냐?”

이들 중 상급자로 보이는 백인 남자가 되물어 왔다.

“우선 긴장 좀 푸는 게 어때? 우린 비무장이다. 무단 침입은 사정이 있어서 그런 거니 양해 바란다. 너희도 세상이 어떻게 변했다는 것은 대충은 알 거라 생각해. 우린 이곳에서 약 50㎞ 떨어진 대피소에서 왔다. 오산기지에 생존자들이 있을 줄은 미처 몰랐군.”

성현은 양손을 들었다 내리며 무기가 없음을 피력했다. 긴장을 풀도록 유도하고, 자신의 목적은 의도적으로 가리며 말했다.

딱히 이들이 본래 목적을 안다고 해도 두렵지는 않지만, 굳이 경계를 살 필요는 없었다.

“대피소? 생존자 그룹이 있다는 이야기인가?”

정보가 제한된 곳에만 있던 이들이다 보니 밖의 소식을 접하고, 약간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 우리가 온 곳에는 약 4만 명의 시민들이 있고, 대대급 이상의 군 병력이 대피소를 보호하고 있다.”

“맙소사. 정말인가?”

“그렇다.”

미군들이 저마다의 감탄사를 발하고,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리고 자기들끼리 작은 말로 의견을 나누는 듯했다.

“난 미태평양공군 제 7공군 소속 51전투비행단 예하 25전투비행대대 부대장 해밀턴 중령이라고 한다. 당신은 군인인가?”

해밀턴 중령이 상당히 긴 자신의 소속을 밝히며, 성현의 신분을 물었다.

“반갑다 해밀턴 중령. 난 I-5 대피소 소속 군사령관이다. 직급은 대령, 이름은 박성현이다.”

해밀턴 중령의 질문에 속사정까지 모두 이야기할 필요는 없던 터라 성현은 현재 대피소 내 자신의 직급을 알려주었다.

“흐음. 어떻게 군사령관이나 되시는 분이 일탈 행위에 가까운 단독 행동을 하고 있는 겁니까?”

해밀턴 중령은 성현의 직위와 계급을 듣고 colonel(대령), sir(님)같은 경어를 붙였다.

국가가 다르고 지휘 계통이 다르지만, 한 명의 군인으로서 성현을 예우했다.

하지만 예우는 예우이고, 의문은 해소해야 했다.

규모가 작다 하나 한 군의 책임자로서 지금의 행동은 일탈 행위로 볼 수 있는 일이었다.

먼저 동맹인 미군 기지에 침입했다.

세상이 멸망 직전으로 치닫던 상황에서 이 부분은 어떻게 넘어간다 해도, 위험한 시기에 호위로 단 한 명 거기다 무기도 없이 무방비에 가까운 상태로 다닌다는 점은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해밀턴 중령. 우리에게도 사정이란 게 있다. 그런 부분까지 세세히 알려 줄 수는 없으니 양해 바란다. 다만, 현재는 부대 단위로 전술적인 작전이 불가능하고, 기민한 대응을 위해 움직여야 하는 상황임을 감안해 행동 중이다. 그 적임자가 나였을 뿐이다. 지금은 여기까지 알려줄 수 있다.”

해밀턴 중령은 성현의 말에 완전히 납득하지 못했지만 어느 정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말의 진실 여부를 확인할 길이 없으니 보이는 상황만으로 판단해야 했다.

잠시 생각하던 해밀턴 중령은 완전히 경계를 풀도록 부하들에게 지시를 하고, 성현을 돌아봤다.

혹, 상황이 돌변한다 해도 성현과 해미가 비무장이란 점에서 크게 문제 될게 없다고 해밀턴 중령은 판단했다.

“박 대령님. 장소를 옮겨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습니까?”

이는 성현도 원하던 바다.

과연 최강대국인 미국은 해외 주둔 중인 부대와 통신은 가능한지 여부와 이들에 대해서도 궁금했다.

“좋다. 아직은 시간 여유가 충분하니 그렇게 하지.”

“감사합니다. 저를 따라 오시죠.”

해밀턴 중령이 자신을 따라 오라며, 병기창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해미야 가자.”

“와! 아저씨 대박! 영어 왤케 잘해요? 도대체 못하는 게 뭐에요?”

해미가 헬멧 바이저를 들어, 반짝이는 눈망울을 깜빡이며 말했다.

“크흠. 그 정도는 다들 하잖아.”

왠지 멋쩍어 성현은 헛기침을 했다. 기분 좋은 칭찬에 겸양해 하면서도 뿌듯한 얼굴이었다.

“박 대령님. 이쪽입니다.”

성현과 해미가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저만치 멀리 간 해밀턴 중령이 불렀다.

해밀턴 중령은 이미 병기창 입구에 다다라 기다리고 있었다.

“가자 해미야. 일단 헬멧은 쓰고 있어라. 그다지 위험해 보이지는 않지만, 일부러 벗지는 마라. 바이저도 내리고.”

“네-에.”

성현과 해미가 병기창의 비상문에 도착해 안을 살펴보자 의외로 안은 그리 어둡지 않았다.

기존의 조명들은 모두 고장이 났지만, 어디서 구한 것인지 새로이 배선했고, 전등 또한 달아놓았다.

병기창 규모에 비해 좁은 지역을 밝혀주고 있지만, 이 정도만 해도 이동 간에 불편함이 없는 충분한 광원이었다.

병기창 초입에는 각종 병기를 실어 나르는 차량과 장치들이 가득했고, 대량의 병기를 이동시키는 컨베이어벨트가 설치되어있었다.

철컹.

성현과 해미가 병기창 안으로 들어서고 조금 지나자 세 명의 군인들이 전동 비상문을 수동으로 닫고 잠금장치를 걸었다.

‘이들도 외부에 위험한 놈들이 있음은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문을 닫으면서도 한 명은 밖을 주시하고 있었고, 드문드문 몬스터나 좀비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미국의 유명한 드라마 중에 좀비물이 있고, 그 형태나 형상이 비슷하니 충분히 좀비라 칭할 만했다.

‘저기서 우리를 확인하고 나왔구나.’

문을 완전히 닫고 나서도 손바닥만 한 방탄유리로 보이는 창을 통해 두 명의 군인들이 경계에 임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  *  *

오산공군기지 병기창 내 핵 방공호.

성현과 해미가 해밀턴 중령을 따라 들어온 곳은 지하 깊은 곳에 위치한 핵 공격에 대비한 방공호였다.

병기창과 연결된 이곳에는 무려 370여 명의 사람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미군 소속 조종사, 또는 정비 대원과 이를 보조하는 군속과 그들의 가족들이었다.

지하 방공호는 지표면으로부터 약 350m에 이르는 깊이였고, 대규모의 방공호가 아닌 탓에 좁은 공간에 많은 이들이 생활하고 있었다.

다행이라면 물자는 충분해서 생존에 큰 어려움은 없는 듯했다.

“해밀턴 중령. 당신들에 비해 우리가 현 상황을 좀 더 깊이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큰 틀에서 보면 차이가 없다.”

서로 알고 있는 정보는 크게 다를 게 없었다.

무선통신과 위성을 이용한 장거리 통신은 모두 두절된 상태였고, 이들도 상급 부대나 본국의 지휘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또 전자기기들은 일정 깊이의 지하에 있던 물품을 제외하고 모두 고장 나 사용이 불가능했다.

해밀턴 중령은 처음 전자기 펄스(EMP)를 의심했지만, 전자기기를 뜯어보고 나서야 전자기 펄스에 당한 게 아님을 알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인간이 좀비로 변해 인간을 공격 중이란 사실을 해밀턴 중령과 방공호의 모든 이들이 알고 있었다.

외부의 전투 흔적이 방공호에 있던 일부가 정찰 활동을 하다 일어난 일임을 들을 수 있었고, 그때 나간 이들은 아무도 돌아오지 못했음도 전해 들었다.

그날 이후 충격이 컸던 탓에 모두가 방공호에서 나오려 하지 않는 상태라고도 했다.

“저희 모두를 받아 주실 수 있으십니까?”

저간의 사정을 상호 간에 주고받고 나서 해밀턴 중령이 성현에게 한 말이었다.

“흐음…….”

해밀턴 중령의 말에 고심하는 성현이었다.

이들을 대피소에 모두 데려가는 건 대피소에 크게 부담이 되는 일은 아니었다.

다만, 이들이 제대로 된 자기 몫을 하고, 융화되느냐다.

기존에 있던 대피소 거주민과 반목하는 일은 절대 사절이었다.

앞서 대화할 때 해밀턴 중령이 가장 많이 질문한 것은 대피소의 현황 부분이었다. 질문이 크게 비밀스러운 것이 없기에 성현은 모두 답해줬다.

거주민들은 몇 명이고, 의식주는 어찌 해결하고 있는지와. 생활환경 같은 문제였다.

거주민들은 전문 분야별로 또는 단순노동을 일요일을 제외한 일별 6시간의 정도 일을 하고 있고, 노약자나 성년이 되지 못한 이들은 제외되어있다고 말해줬다.

그리고 가족 단위나 함께 있을 지인들의 수에 따라 개별 공간이 주어짐을 알려줬고, 취사는 불가능해서 단체 급식소에서 원하는 시간에 하고 있다고 말해주었다.

해밀턴 중령이 답을 기다림에 슬슬 초조해할 즈음 성현이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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