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판멸망한 세계의 게이머-34화 (34/176)

# 34

제주도 선발대 (1)

“히잉, 파파. 그럼 몇 밤이나 지나야 오는 거예요?”

줄리가 성현의 품에서 애잔한 눈으로 묻고 있었다.

“우리 줄리 숫자 셀 수 있어?”

“응! 나 할 수 있어요. 하나, 둘, 셋, 넷, 다섯.”

줄리가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으며 숫자를 센다.

“줄리가 한 손 다 세기 전에 다녀올게.”

“정말? 다섯 밤? 파파 약속-.”

줄리는 새끼손가락을 걸고, 엄지로 도장까지 찍고서야 성현의 품에서 내려왔다.

아픈 기억이 떠올라서 인지 유달리 성현에게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는 줄리였다.

여러모로 걱정이 되기도 해서 병원장인 김원일 박사에게 데려가 줄리를 보이기도 했었다.

그리고 받은 검사에서 현실 인지 부분에서는 큰문제가 없다는 결과를 받았지만, 문제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있다는 진단이었다.

외부 충격에 대한 면역이 극도로 떨어진 상태라 될 수 있음 자극을 주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별도의 심리 치료가 필요하지만, 당장에는 정서적인 안정이 유지된다면 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전해줬다.

그래서 해미는 남아 줄리를 돌보기로 한 것 이었다.

“나도 같이 가고 싶은데…….”

못내 아쉬움이 남는 해미였지만, 말을 아꼈다.

그런 해미의 마음을 잘 알고 있는 성현은 해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안함과 고마움을 동시에 전했다.

“후웅, 나도 나도.”

줄리가 자신의 키만 한 인형을 안고 성현을 바라보고 말했다.

줄리의 토라진 듯한 모습에 완전 무장 해제를 당한 성현은 줄리를 번쩍 안아들었다.

한 손에는 줄리를 안고 한 팔로 해미를 다독이는 성현의 양팔은 바쁘기 그지없었다.

다음날.

해미는 관사에서 줄리와 함께 배웅하고 터널 입구 까지는 나오지 못했다.

시간을 길게 마중을 하게 되면 하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 모두 마음이 좋지 못하다 생각한 성현이 어르고 달래 그리하도록 했다.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그래, 동원이 네가 있으니 마음 놓고 다녀오마.”

두 사람은 신뢰 가득한 눈빛을 나누고, 긴 말을 하지 않았다. 사족을 붙여 본들 지금한 말보다 낫다 할 수 없었다.

“대령님! 모두 탑승 완료했습니다.”

“알겠다.”

성현의 뒤로 보좌관중 하나인 용칠이 다가와 보고했다.

두식과 용칠도 성현의 보좌관이라는 직책에 맞게 이번 제주도 선발팀에 합류해 따르고 있었다.

우우우웅.

공터에는 4대의 UH-60 블랙호크가 로터를 서서히 회전하며, 이륙 준비를 하고 있었다.

치누크 헬기가 수송 능력은 탁월하지만 그에 반해 무장 능력이 빈약했다.

램프도어에 기관총을 거치할 수는 있지만 블랙호크에 비하면 강점이라고 할 수 없었고, 또 육중한 동체로 인해 순간 기동 능력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성현은 여러 대를 운용해야하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블랙호크를 낙점해 이번 임무에 투입했다.

해밀턴 중령을 포함한 헬기 조종사 31명이 임무에 동원되었고, 직할 전투 부대 1개 팀 12명이 함께 하고 있었다.

성현과 비서관인 두식과 용칠까지 더한 선발대 인원은 모두 46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중 전투 부대원들은 헬기에 각 2명씩 배정하고, 유사시 사수로서 헬기 양쪽에 있는 미니건을 쓸 수 있도록 했다.

“자-, 출발해.”

성현은 출발 신호에 4대의 블랙호크가 서서히 상공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대피소 공터에서 이륙한 블랙호크 편대는 일정 고도에 오르자 정남으로 방향을 잡고 가속을 시작했다.

푸른 하늘은 구름한 점 없이 맑았고, 바람도 잠잠해 비행에 최적화된 날씨였다.

“대령님 150노트(280㎞)로 순항 중입니다. 1차 포인트 까지 45분이면 도착할 것으로 보여 집니다.”

지상에서 이륙한지 30여분이 흘러 해밀턴 중령이 지도와 나침판을 들고 계측을 완료해 보고했다.

GPS가 무용지물이 된 지금, 문명에 역행한 구시대의 유물이 된 방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알겠다. 1차 포인트에서 연료 보급을 하고 이동할 테니 그리 전달해라, 지상에 특이 사항 없는지 계속 주시하라고 해.”

그럴 일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혹시 모를 대공 공격을 염두에 둔 성현의 당부였다.

‘충천남도 경계쯤 되겠구나.’

성현이 창가로 고개를 돌려 지상을 내려다 봤다. 녹음이 짙은 이름 모를 산들과 그사이에 수천 명은 살았음직한 읍락들도 눈에 들어왔다.

‘이리 보고 있으면 너무도 고요해 보이건만…….’

고요하고 평화로워 보이는 지상의 모습이었다.

다만, 그 안에 숨은 진실 된 악의를 알고 있기에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성현이 상념에 젖어 있는 동안 블랙호크 편대는 어느덧 1차 목표로 한 완도의 개활지에 다다르고 있었다.

완도 호를 곁에 둔 너른 논에는 제때 물을 대지 못해 메마른 땅에 벼들이 모두 말라 있었다.

블랙호크 편대가 착륙하고, 성현이 창고에서 항공유를 가득 적재한 유조차를 꺼내어 두자 해밀턴 중령의 지시를 받은 군인들이 헬기에 급유를 시작했다.

사실 블랙호크의 최대 항속 거리는 550㎞에 이르러 편도로 제주도까지 충분히 도달하고도 남았지만, 중간 급유를 통해 성현은 만전을 기하고자 했다.

“바다구나.”

비릿한 바다 내음이 해풍을 타고 코끝에 맴돌고, 지평선이 아닌 수평선이 저 멀리 펼쳐져 있었다.

잠시 감상에 젖기에 충분한 풍광이 시야에 맺혔다.

“대령님, 급유 완료 했습니다.”

해밀턴의 보고에 성현은 고개를 돌리고 말없이 머리를 끄덕였다. 이제 바다 건너 제주도에 갈 시간이었다.

* * *

제주도 V-1 대피소 상황실.

“어, 어디서 온 무전인가?”

무전이 왔다는 소식에 이재문 대통령이 한달음에 상황실을 찾아왔다.

“공용 통신으로 온 무전입니다. 생존자를 찾고 있었습니다.”

어떤 희망을 엿본 탓인지 상황실에 있는 모두의 얼굴에 화색이 감돌고 있었다.

“다른 대피소에서 우릴 찾아온 것인가?”

“그게…. 좀 이상합니다.”

무전 소식에 가장먼저 도착해서 직접 대화까지 한 김석형 외교안보수석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뭐가 이상하다는 건가?”

시원스럽지 못한 대답에 이재문 대통령이 채근했다.

“생존자를 찾는 무전에 V-1 대피소임을 밝히고, 상황을 알려 구조를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어디 소속이고 누구인지 물었는데 잠시 기다리라는 말을 끝으로 아직까지 답이 없습니다.”

“허어…….”

어찌된 영문인지 알 길이 없다는 외교 안보수석의 말에 이재문 대통령이 한숨지었다.

“이런 답답한! 내가 직접 무전할 테니 연결해보게, 어서!”

언제 사라질지 모를 신기루 같은 상황에 이주혁 국방부 장관이 다급히 앞으로 나섰다.

“여기 버튼을 누르시고 말씀하시면 됩니다.”

상황실의 상주 중이던 이가 무전이 연결되었음을 알리고, 사용법을 알려줬다.

“들리나? 국방부 장관 이주혁이다. 무전이 들린다면 답을 주게.”

국방부 장관이 무전에 대고 말하고 잠시 기다렸지만 묵묵부답이었다.

설마 이대로 끝인가 하고 다시 무전을 넣으려던 차에 대답이 들렸다.

-잘 들린다.

“소, 소속을 말해주게. 이곳은 V-1대피소이고 나는 국방부 장관 이주혁일세.”

무전이 다시 들렸지만, 상대방의 목소리는 상당히 냉담했고, 왠지 모를 불안감에 다급히 말하는 국방부 장관이었다.

-그쪽 소개는 그만해도 알고 있다. 전 국민을 배신하고 살아남은 놈들 중 하나가 아니냐.

무전이 들리고 순식간에 상황실은 정적에 휩싸였다.

자신들이 원하던 대답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소름이 돋고 머리카락이 주뼛 설 정도로 놀라 누구하나 입을 열고 말을 하지 못했다.

-그리도 살고 싶었나?

뒤이어온 무전은 두렵기까지 했다. 한기마저 감도는 목소리에는 비웃음이 가득했다.

“도, 도대체 왜 이러는 건가?”

자신들을 한껏 비꼬아 이야기 하지만, 상대의 심기를 건드려서 좋을 게 없다는 걸 인지한 국방부 장관이 애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흥! 내가 왜 이러는 모르는 건가? 처박혀 살아서 밖의 상황을 모르는 모양이군. 지상은 이미 지옥이고, 살아남은 사람이 없다는 걸 말이야.

완전한 진실은 아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인세의 지옥이 펼쳐져 지상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좀비가 되고 살아남은 이들은 그야 말로 극소수였다.

“그… 그런!”

대피소에서 겪은 일을 토대로 대략 짐작은 했지만, 확신하지는 못했었다. 근데 이름 모를 이의 무전은 그 짐작이 맞음을 알려줬다.

털썩.

여태 애써 부정하던 사실에 몇몇 이들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 그 무슨!”

국방부 장관을 밀쳐내고 이재문 대통령이 무전기에 대고 말했다.

-이건 누구신가?

“대, 대통령일세. 바, 밖의 상황을 다시 한 번 알려주게. 부탁하네.”

-국민 앞에 엎드려 빌던 양반이군. 뭐 좋아, 간단히 말해주지. 지상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좀비가 되었고, 좀비가 되지 않은 극소수의 사람들은 그 좀비들의 한 끼 식사가 되었다. 나는 운 좋게 살아남은 지상의 생존자다.

* * *

성현의 편대는 제주 상공 한라산 남서쪽에서 기수를 돌려 제주도 동쪽 해상에 있는 우도로 향했다.

“쳇!”

성현은 무전을 마치고 그 끝 맛이 좋지 않았다.

마지막에 이르러 누군지는 모르지만, 구해달라는 외침에 무전을 아예 차단해 버렸다.

더는 듣고 싶지도 않았다.

어쩌면 자신의 생각보다 수월하게 제주도를 새로운 거점으로 삼을 수 있게 되었지만, 기분이 가히 좋지만은 않았다.

V-1 대피소는 일반인과 군인들이 괴멸적인 피해를 입었고, 소위 말하는 VIP급 인사들만 살아남아있었다.

차라리 모두 죽었다면 안타까울지언정 이런 더러운 기분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제주도에 있던 또 다른 대피소인 V-2 대피소는 무전에 아무런 응답을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생존자를 기대하는 건 힘들 듯했다.

“대령님, 말씀하신 섬에 곧 도착 합니다.”

“섬의 남쪽 선착장이나 그 인근에 착륙시켜.”

상념에서 깬 성현은 우도 남쪽에 위치한 우도 천진항으로 향하도록 지시했다.

선착장 상공에 도달한 편대는 천천히 하강을 시작했다.

다행이 방파제 겸 선착장 역할을 하는 콘크리트 지면은 블랙호크 네 대가 충분히 착륙할 만큼의 공간을 확보하고 있었다.

투타타타.

지상에 안전하게 착륙을 마친 헬기는 엔진의 시동을 완전히 정지 시키고, 전투 부대원과 공군소속 미군들이 쏟아 냈다.

“전투대원들은 2인 1조로 차량에 탑승해서 방어라인 구축해!”

전투 부대원들은 성현이 꺼내 놓은 6대의 험비에 탑승하고 한 명은 운전석에 다른 한 명은 사수가 되어 자리했다.

부아아앙.

방파제 역할을 하는 긴 선착장에서 벗어난 차량들이 앞을 달려 선착장 입구를 지나 방어라인을 만들고 차량을 정차했다.

“해밀턴.”

“네, 사령관님.”

“해가 지면 작전을 시작한다.”

해밀턴을 부른 성현은 우도 항공 사진을 펼쳐 놓고, 계획을 설명했다.

성현은 우도를 전초기지 삼아 제주도 전체 공략을 준비할 심산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도에 있는 좀비를 먼저 소탕해야 했다.

V-1 대피소에 대한 처분은 후일로 미루어 두었다. 어쩌면 그대로 고사시켜도 나쁠 것이 없다는 게 당장의 생각이었고, 지금 할 일은 따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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