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
원치 않은 만남 (2)
“줄리야 간식 먹어.”
“웅, 마마-.”
해미는 지휘본부의 연락을 받고 급히 대피소 공터에 헬기를 꺼내주고 다시 거주지에 돌아와 있었다.
앞서 큰일은 없을 거라는 생각에 줄리를 유치원에서 데려와 간식을 챙기고 있었다.
“줄리야, 오늘 유치원에서 재미있었어?”
최근 들어 줄리와 소통을 하려고 어지간히 영어공부에 열심인 해미였다. 그 노력의 결과로 하루가 다르게 일취월장 중이었다.
“응-. 오늘 재미있는 노래 배웠어. 마마 내가 들려줄게.”
줄리가 큼지막한 쿠키를 한 손에 쥐고 마이크 인양 들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한국어 노래가 아직 익숙지 못했지만, 그 모습이 더욱 귀엽게만 보이는 해미였다.
“아기 상얼 뚜루루 뚜루. 기여울 뚜루루 뚜루…….”
“푸훕.”
“힝, 마마 지금 웃었쩡.”
해미와 줄리가 즐거운 한때를 보낼 때 관사의 벨이 울렸다.
“누구지? 올 사람이 없는데 혹시 아저씨? 아저씨-!”
해미가 성현이 아니고는 직접 찾아올 이가 없음을 깨닫고 급히 문으로 달려갔다.
지휘본부에서는 급한 연락은 매번 거실에 있는 무전기로 해오고 있던 터라 올 사람이라면 단연코 한 사람 성현뿐.
벌컥.
“잉? 아저씨가 아니네. 어라, 아저씨 동생분도 같이 오셨네. 웬일이세요?”
해미는 자신을 이상한 눈으로 노려보는 여자를 무시하고 뒤에 있는 최 중령에게 말했다.
“이 애에요?”
“……네. 형수님.”
이유진의 물음에 최 중령이 힘없이 답했다.
“이 아줌마는 누구세요?”
해미가 이상한 분위기에 이유진을 바라보고 섰다.
“나? 나 성현 씨 와이프 되는 사람인데. 넌 뭐니?”
“……헐. 이 아줌마 장난이 지나치시네. 아저씨 오면 혼나요. 빨랑 가세요.”
해미는 잡상인을 내쫒듯 손짓하고 돌아서려 했지만, 어색한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최 중령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에이, 장난치지 말구요. 빨리 아니라고 말하세요.”
해미는 문뜩 이상한 기분이 들어, 불안한 눈동자로 답을 재촉했다.
“저… 해미양. 사실…”
짜악.
이유진의 손이 해미의 뺨을 때렸다.
“아니 형수님! 이게 무슨 짓이세요.”
짜악. 짜악.
그리고 두 번 더 손찌검을 했다. 최 중령이 말리고 자시고할 틈이 없었다.
“더러운 년. 당장 성현 씨 집에서 꺼져. 당장 나가!”
해미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뺨을 맞은 고통은 전혀 없었지만, 정신적인 충격이 너무 컸다.
“…….”
“이년 당장 끌어내요. 안 끌어내? 이년 내가 죽여 버려도 돼요?”
이유진의 혼신을 다한 연기인지, 진심인지 모를 행동에 모두가 할 말을 잃었다.
이유진이 해미의 머리끄덩이를 잡고 흔들었다.
해미의 완력이라면 이유진을 뿌리치고도 남겠지만,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마마-. 우리 마마 괴롭히지 마!”
줄리가 달려와 이유진의 다리에 매달려, ‘앙’하고 물었다.
“아얏!”
이유진이 해미의 머리를 붙잡던 손을 놓고, 급히 다리에 있는 줄리를 발길질로 떨쳐냈다.
“흐아앙-.”
“주, 줄리야.”
해미가 넘어져 훌쩍이는 줄리를 급히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이유진이 해코지를 하지 않을지 품안에 깊이 안아 들였다.
“마마, 괜찮아? 안 아퍼? 내가 파파 오면 다 일러 줄 거야.”
해미는 끝내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한번 터진 눈물은 하염없이 흘러내렸고, ‘끄윽끄윽’하며 소리 내어 울었다.
숨조차 쉬이 쉬어지지 않는지 가슴에 말아 쥔 주먹엔 핏기 하나 없었다.
왜인지 모르겠다.
아저씨는 그냥 자신만의 아저씨라 생각했었다.
부인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해본 적이 없는 해미였다.
그리고 최근 들어서는 어서 빨리 성인이 되고 싶었다.
성현에게 성년의 나이가 되면 마음에 담아둔 말을 꼭 하고 싶었다.
좋아한다고, 그리고 사랑한다고.
작은 욕심이라고는 성현과 행복하게만 살고 싶었다.
“우아아앙. 마마 울지마. 우아앙.”
줄리가 해미의 눈물을 닦으며 따라 울었다.
“하-아. 더는 제가 용납 못합니다. 형수님 그만하세요.”
최동원 중령이 사나운 얼굴로 이유진에게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도가 지나쳤다.
이유진에게 무례하게 굴어 나중에 성현에게 한소리 듣더라도 더는 묵과할 수는 없었다.
“저년 대피소 밖으로 안 쫒아 내면 내가 나갈 테니 그리 아세요. 어차피 성현 씨가 오면 저년 쫒아 낼 테지만, 내가 그때까지 못 참겠네요.”
해미를 매섭게 노려본 이유진은 관사에 신동호 대령을 안으로 들게 하고 문을 거칠게 닫아버렸다.
* * *
투타타타.
거센 빗줄기를 뚫고 해밀턴과 조나단 대위가 탄 헬기가 청계산 대피소에 도착했다.
“해밀턴 중령, 대령님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최동원 중령은 헬기가 도착한다는 소식에 부리나케 공터에 나와 이들을 맞이했다.
“지금은 제주도 동쪽 해상에 있는 우도라는 작은 섬에 계십니다. 아마도 기상이 좋지 못해 금일은 아마 움직이지 않았을 겁니다.”
하늘은 오전부터 짙은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현재는 장대비가 되어 쏟아져 내렸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바람마저 강하게 불고 있었다.
“대령님께 급히 전할 소식이 있습니다. 지금 우도로 비행이 가능하겠습니까?”
“흐음, 그건 아무래도 위험합니다. 이정도의 악천후에는 전투 헬기라 해도 조종이 불가능합니다.”
“제기랄!”
성현에게 지금 상황을 전해야 하는데 그리할 수 없어 애가 타는 최 중령이었다.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해밀턴 중령의 물음에 한숨만 쉰 최 중령은 말을 아꼈다.
“다치신 거 같은데 먼저 병원에 들러 치료부터 받으시죠. 이야기는 차차 하기로 합시다.”
해밀턴 중령은 당장에 큰 문제가 있는 것처럼 급히 소식을 전하려던 이유가 궁금했지만, 최 중령의 안색이 좋지 못함에 더는 묻지 않았다.
그날 밤.
해미는 최동원 중령이 임시로 내어준 집에서 줄리와 함께 있었다.
많이 놀란 탓인지 줄리는 잠자리에 들고도 한참동안 뒤척이다 밤이 깊어서야 겨우 잠이 들었다.
해미의 손을 꼭 잡고서.
“줄리야. 미안해……. 마마가 없더라도 건강해야 돼.”
해미는 줄리의 곁에서 끊임없이 눈물지으며 밤을 지새웠다.
“내가 있으면 아저씨가 더 곤란해 하실 거야…. 그리고 아저씨가 나보고 나가라고 하실 수도 있어 그건……”
너무도 끔찍했다.
만일 성현이 나가라고 한다면, 죽는 거 보다 더한 고통으로 남을 것 같았다.
그래서 결심했다.
아침 일찍 터널 입구가 개방될 때를 기다린 해미는 밖으로 나섰고, 공터에 헬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최동원 중령 앞으로 작은 쪽지를 전달해줄 것을 경비대에 부탁하고 폭풍우 속으로 사라졌다.
쪽지에는 줄리를 잘 부탁하고, 성현에게 미안하다는 짤막한 글이 남겨져있었다.
안타깝게도 경비대나 그 누구도 해미의 출입을 제제 하는 이들이 없었다.
성현과의 관계도 그렇고, 해미가 가진 능력으로 말미암아 대피소 내에서 해미는 불가침의 성역이나 마찬가지였다.
* * *
벌떡.
“후욱-, 후욱. 무슨 꿈이 이따위야.”
성현은 이불을 거칠게 차내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꿈이라지만 너무도 생생했고, 가슴이 아팠다.
가위에 눌린 듯 웬만해서는 흘리지 않은 땀이 몸에 흥건했다.
꿈에서 해미가 너무도 서럽게 울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걸 지켜볼 수밖에 없는 상태였다.
가까이 다가갈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었다.
어찌나 처연하게 우는지 꿈이지만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아직도 여운이 남은 탓인지 쉽사리 진정되지 않은 심장이 크게 뛰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겠지.”
성현은 창문 넘어 북녘하늘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했다.
어두컴컴한 하늘은 어제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빗줄기는 다소 약해졌지만, 강풍은 여전했고 헬기를 운행하기에는 아직 힘든 실정이었다.
“어쩔 수 없지.”
별수 없이 비바람이 그치기만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하던 일이나 계속하자.”
성현은 방에 틀어박혀 할 일이 없자. 매설할 TNT 폭약을 미리 준비했다.
한 묶음이 4파운드짜리 3개씩 12파운드로 만들고, 뇌관까지 꽂아 두었다.
앞서 시행착오를 크게 격고, 적당량의 폭약을 나누는데 신중을 기했다.
그리고 새로이 개화된 스킬의 영향까지 감안해 철두철미하게 준비를 했다.
정오까지 반복 노동을 하고 대원들과 간단히 점심을 먹은 성현은 기상 상태를 살피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바람은 남서 방향에서 북동쪽으로 불고 있고, 사람이 휘청거릴 정도의 강풍은 그칠 줄을 몰랐다.
“지긋지긋 하네 정말.”
또다시 방에 틀어박혀 반복된 행동을 계속했다.
수백 개의 묶음을 만들고 창고에 넣다보니 어느덧 시간은 흘러 오후 4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똑똑.
“들어와.”
“단결! 대령님. 스웨든 소령이 지금 비행이 가능 하다고 합니다.”
“그래?”
성현이 폭약 묶음을 만드는데 정신이 팔려 미처 바깥 상황을 살피지 못했다.
창을 열고 바깥을 살폈다.
아직 비가 완전히 그치지는 않았지만, 바람은 상당히 약해져있었다.
제주도는 그나마 태풍의 영향권에 막 벗어나고 있는 듯했다.
“좋아! 두식아. 내가 먼저 가서 폭약 매설 작업 하고 있을 테니. 대원들에게 이 지도 숙지하고 있도록 전달해라.”
성현은 미리 준비해둔 지도중 하나를 전하고, 빠르게 밖으로 나섰다.
늦었지만, 오늘은 좀 더 많은 곳에서 몰이를 할 참이었다. 그러려면 서둘러야했다.
바이퍼 공격 헬기 한 대를 창고에서 꺼낸 성현은 로터를 풀가동하고, 상공으로 날아올랐다.
제주도 중문관광단지.
성현은 중문관광단지 인근의 중문 중학교 운동장에 헬기를 착륙 시켰다.
성현은 내리자마자 창고에서 K2c1 한 자루를 꺼내어 주변을 살폈다. 이미 해는 저물어 주변은 어둠에 잠기어 있다.
도합 20군데에 폭약을 매설하고 마지막 지점이었다.
최대한 빠르게 움직인다고 했지만, 워낙 느지막이 시작한 일이었고, 이동 간에도 상당한 시간을 잡아먹었다.
타타타탕.
네댓 마리의 좀비가 헬기의 소음을 듣고 어슬렁어슬렁 접근하다 성현의 총탄에 고이 경험치로 화했다.
“화력이 확실히 강해졌다.”
패시브 스킬인 ‘마력부여’ 효과로 15% 증가된 공격력은 육안으로 그 차이를 확연히 알아볼 정도였다.
“슬슬 몰려오는데”
성현의 발놀림이 한층 빨라졌다.
헬기의 로터 소리와 총성으로 주변에 있던 좀비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마지막이다.”
한 묶음의 폭약을 매설하고 기폭 장치까지 달았다.
타타탕.
헬기 주변에 몰려있는 좀비들을 빠르게 제거했다.
그어어어.
퍼펑, 성현은 가까이 접근한 좀비를 지우개로 지우듯 했다. 몸통의 살점들이 뭉텅이로 떨어져 나가고, 큰 소리를 내며 터져 나갔다.
악착같이 접근하는 놈들에게는 좀 더 많은 탄환들이 박혀들 뿐이었다.
“언제 이리 몰린 거야.”
성현은 연신 총구를 돌리며, 주변의 좀비들을 제거하며 헬기로 다가갔다.
탄창을 순식간에 갈아 끼우고, 노리쇠를 후퇴시켜 몇 마리 남지 않은 좀비들을 학살했다.
피륙으로 이루어진 몸뚱이일 뿐인 좀비들에게 성현은 가열 차게 공격을 퍼부었다.
[좀비 Lv3]
[좀비 Lv4]
타타타타탕!
비슷한 키의 좀비들의 머리통이 수박 터지듯 바수어지며 한꺼번에 쓰러졌다.
“더 몰려오기 전에 일단 뜨자.”
좀비들이 무서운 게 아니라, 귀찮을 뿐이다.
한껏 달아오르던 전투의 열기를 안고 성현은 헬기의 주조종석에 날듯이 뛰어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