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
악연의 굴레 (1)
쾅!
포탄에 직격당한 것처럼 관사의 문이 폭발하며 터져나갔다.
성현이 자신의 관사 문으로 달려가 그대로 주먹을 강타한 것이다.
“꺄아악-!”
하이톤의 여자 비명이 들려왔다.
저벅. 저벅.
성현이 관사에 들어섰다.
익숙한 여자 하나가 목욕 가운을 걸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제 버릇 개 못준다더니, 하-.”
같이 있다던 신동호 대령 또한 몸에 달랑 팬티 한 장만 걸치고 있었다.
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보지 않고도 알만했다.
자신들의 안방도 아닌 성현의 관사였다.
언제 누가 올 줄 알고 저러고 있는지 달리 보면 배짱하나는 두둑한 연놈들이었다.
사실 신동호 대령이나 이유진은 안심하고 있었다.
성현의 소식이 전해지면 가장 먼저 무전으로 알려준다고 했다. 거기다 굳게 잠긴 문을 두고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이유진이 신동호 대령을 유혹한 것은 단순히 성욕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김종석만 믿기엔 자신의 신변이 안전하지 못함을 깨닫고 보험을 들어 둔 것이다.
“커억, 컥!”
성현이 순식간에 뛰어들어 신동호 대령의 목을 한 손으로 들어 올렸다. 단숨에 목을 꺾어 버릴 수도 있었지만, 참았다. 편안한 죽음을 주기 싫었다.
“자, 자기야. 오해야. 아무 일도 없었어. 내가 자기만 사랑하는 거 알잖아!”
아내는 치졸한 변명을 했다.
“크크큭.”
저 더럽고 추악한 여자와 함께 살았다는 게 믿겨지지가 않았다.
“저, 정말 아냐. 자기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냐!”
정말 뻔뻔함의 극치고, 거짓말 하나는 타고났다.
“그 더러운 주둥이… 그만 닥쳐라. 네년부터 죽여 버리기 전에.”
너무도 가증스러운 모습에 진심으로 ‘당장 죽여 버릴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얼음장 같은 스산한 목소리에 이유진은 저도 모르게 몇 걸음 물러섰다.
너무나도 무서운 눈빛이었다.
이유진은 단 한 번도 성현의 이런 모습을 본적이 없었다.
어떤 상황이라도 성현을 구워삶아 낼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리고 기회를 보아서 행동하려 했다.
헌데 성현의 번들거리는 눈빛을 보니 그런 생각이 싹 사라졌고 낯선 그 모습에 오히려 두렵기만 했다.
“끄륵. 끄르륵.”
철퍼덕.
성현은 곧 숨이 넘어갈 듯한 신동호 대령을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동댕이쳤다.
그리고 이유진을 향해 다가갔다.
“고개 들어.”
“그래! 나 외로워서 그랬어. 너무 외로 꺅-!”
철썩! 짝! 철썩!
이유진의 고개가 좌우로 크게 ‘획획’하며 돌아가고, 몸조차 가누지 못했다.
성현에게 이유진의 거짓부렁을 계속해서 들어줄 용의가 없었다.
주르륵.
끈적끈적한 피가 이유진의 입술을 헤집고 흘러내렸다.
성현이 진심을 다해 때렸다면 안면 두개골이 모두 바스러졌을 테지만, 그리 하지는 않았다.
“내가 그 더러운 주둥아리 다물라고 했지. 내가 내입으로 네년의 더러운 몸뚱이가 한 짓들을 나열해 줘야 되겠냐?”
성현은 부들부들 떨며, 고통에 겨워하는 이유진을 두고 뒤로 돌아섰다.
“이 연놈들 끌고 가서 무슨 짓을 계획했는지 알아내. 인간적인 대우는 필요 없다. 끌고 가!”
특전 부사관들은 적에게 포로로 잡혔을 경우 고문이나 심문에 대비해 상당히 강도 높은 훈련을 한다.
그만큼 다양한 고문 방법에 능숙했다.
민간인에 불과한 이유진은 물론, 신동호 대령은 3살 때 먹었던 분유 맛까지 줄줄이 토설할 터였다.
성현의 지시에 이미 관사 내부에 들어와 있던 부대원들이 둘을 거칠게 끌어냈다.
“대령님, 양자산 병력 전원 진압했습니다. 어찌할까요?”
“위관급하고 부사관은 따로 구금하고 정보를 캐내라. 일반 사병들에 대해서는 조금 더 생각해보자.”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우도에 헬기 띄워 보내서 일단 대기하라고 전해라.”
“그리하겠습니다.”
“동원아.”
“네, 대령님.”
성현이 최 중령을 부르고 잠시 뜸을 들였다.
“난 잠시 해미 찾으러 나갈 거다. 최대 5일 정도 걸릴 거 같다. 그리고 하나만 당부하마.”
“네. 말씀하십시오.”
“다른 대피소와 접촉이 발생하면 경계하고 무조건 의심해라. 우리의 입장을 생각하면 선제공격을 해도 무리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지금 세상이 어떤지 다시 한 번 생각하길 바란다.”
성현은 최 중령에게 전할 말을 하고, 관사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대기하고 있던 차량을 타고 대피소 입구로 향했다.
* * *
무턱대고 대피소를 나서 해미를 찾아 헤맨 지 사흘이 지났다.
첫날은 대피소 인근을 이 잡듯이 뒤졌다. 모래사장에 떨어진 바늘 찾기도 아니고 너무도 막막했다.
이틀째 되는 날은 아이템인 대검 한 자루를 들고 밤낮을 잊고 확성기로 해미를 부르짖으며, 돌아다녔다.
성현은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해미가 나타나길 간절히 빌었다.
그러나 끝내 해미는 나타나지 않았고, 수많은 좀비들만이 성현을 반겼다.
그날 밤 성현의 수백이 넘는 좀비들을 베어내며 밤을 지새웠다.
그리고 지금 사흘째 되는 날 해가 밝아 왔다.
성현은 상당히 초췌한 모습이었다.
사흘 동안 제대로 먹고 자지를 않았던 탓에 강인한 게이머의 육체도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도대체 어디 있는 거니…….”
날이 밝아와 햇살이 지상을 데우기 시작했다.
성현은 정처 없이 걷고, 또 걷다가 이따금씩 확성기로 ‘해미야. 아저씨 왔다.’하며 크게 소리치기를 반복했다.
“혹시…….”
그러다 문득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 봤다.
자신이 해미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본거다.
혼자 가기에는 너무 멀다 생각해서 아닐 거라고 생각했지만, 단정하긴 어려웠다.
일반적인 소녀가 아닌 해미의 능력이라면 충분히 가고도 남았으리라 여겼다.
“처음부터 가봤어야 했어.”
성현은 갑작스레 떠오른 생각에 급히 창고를 열고 한 대의 전투 헬기를 꺼내었다.
성현은 영등포로 향했다.
* * *
성현은 영중 초등학교 운동장에 헬기를 착륙시켰다.
헬기의 로터가 완전히 정지하자 창고에 넣은 성현은 빠르게 이동했다.
극초신성 사태 때 해미와 숨어들었던 영등포시장역에 도착해 1번 출구로 내려갔다.
크르르릉.
역사 초입부터 좀비들의 울음소리가 귓가에 들어왔다.
꽈곽.
성현은 창고에서 칼날의 길이가 1.2미터는 되는 한 손 장검을 꺼내 손에 움켜쥐었다.
게임에서 애용하던 근접 무기 중 하나였다.
좁은 공간을 돌파하며 움직이기에는 총화기 보다 도검 따위의 무기가 좀 더 효율적이었다.
거기다 직접 좀비를 베다보면 먹먹한 가슴이 조금은 뚫리는 듯했고, 크게 솟구치던 살심마저 일부나마 갈무리되고 있었다.
[좀비 Lv6]
‘레벨들이 많이 올랐다.’
며칠 사이 좀비들의 레벨 상승이 눈에 뛰게 올라 있었다.
자외선에 면역력이 높아지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는 듯했다.
구오오.
좀비 한 마리가 성현을 발견하고 크게 소리치며 달려들었다.
성현은 걷던 발걸음을 늦추지 않고 곧바로 늘어진 검을 가볍게 휘둘렀다.
서걱!
군더더기가 없는 깔끔한 올려 베기.
좀비의 우측 옆구리에서 시작된 균열이 왼쪽 어깨로 이어졌고, 이내 몸통의 절반이 바닥에 떨어졌다.
철퍼덕, 몇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던 남은 몸뚱이마저도 바닥에 널브러졌다.
‘놈들이 레벨이 올랐어도 아직은 잡몹 수준에 불과하다.’
파바바팟!
성현은 걷던 발걸음에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어두운 실내지만 사물을 구분하는데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근력이나 민첩의 상승이 안력에도 지대한 영향 주고 있어, 충분할 정도의 시야를 확보했다.
그어어억!
성현이 안으로 들어설수록 좀비들의 수는 점차 늘어나고 있었다.
검광이 번뜩일 때마다 좀비들은 우수수 쓰러지며, 피분수를 뿜어냈다.
1초에 십여 번이 넘는 베기가 터져 나왔고, 앞을 가로막는 좀비들을 조각조각 내고 있었다.
크에에액!
팔과 몸통이 동시에 잘려진 좀비가 괴성을 질러대며 바닥에 쓰러졌다.
푸콱! 버둥거리는 좀비의 가슴을 밟고, 머리에 검을 꽂아 넣어 안식을 주었다.
허공에다 검을 휘둘러 피와 살점들을 털어내고 뒤를 돌아봤다.
수십 마리의 좀비 시체들이 성현이 지나온 길에 사지가 분리되어 널려 있었다.
그어어어.
한 무리의 좀비들이 후방에서 나타나 달려온다.
성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창고에서 꺼낸 수류탄을 뒤로 던지며 앞으로 달려갔다.
콰콰쾅.
도합 3개의 수류탄이 시차를 두고 폭발했다. 굉음과 함께 후폭풍이 성현에게 밀려왔다.
‘따다다당’하며 라이트 아머와 헬멧에 작은 탄자들이 날아들었다.
불나방처럼 덤벼드는 좀비들을 처리하며, 성현은 빠르게 역사 안으로 진입했다.
개찰구를 지나 극초신성 사태 때 숨어있었던 유령역으로 통하는 복도에 발을 디뎠다.
그리고…….
“하-아.”
해미는 이곳에 없었다.
땅이 꺼져라 한숨짓고 미련 없이 발길을 돌렸다.
역을 나와 성현이 향한 곳은 자신의 오피스텔 건물이었다.
11층짜리 건물 8층에 자신의 집이 있었다.
1층에서 좀비 두 마리를 처리하고, 비상계단으로 통해 문을 열고 들어섰다.
7층에 이르자 심장이 두근거린다.
이곳에도 없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에 몹시도 두렵기까지 했다.
저벅, 저벅.
성현의 발걸음 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 * *
해미는 대피소를 나선 직후 폭풍우 속을 정처 없이 뛰어갔다. 마치 누가 쫒아오기라도 하는 듯 달려 나갔다.
어딜 정하고 나온 것도 아니었고, 딱히 갈 곳도 없었다.
한참을 뛰다 멈춰서 대성통곡했다.
자신의 신세가 너무 처량했다.
그러다 소리 내어 성현을 원망하기도 했다.
이럴 거면 왜 구해줬냐고, 그냥 죽게 내버려 두지 왜 살렸냐고.
그러다 다시 아저씨 죄송해요, 줄리야 미안해하며 오열했다.
그 후로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발길 닿는 대로 걷다 주저 않아 울고 다시 걷다 울기를 반복했다.
한나절을 빗속을 뛰고 걸으니 차츰 진정이 되어 정신을 추스르고 주위를 둘러봤다.
해미는 어느덧 여의도 부근까지 와있었다.
그리고 문뜩,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아저씨 집이 생각났다.
하루였지만 편하고 아늑하게 느껴졌던 곳이었다.
그렇게 갈 곳은 정해졌다.
하지만, 가는 길이 결코 순탄치만은 않았다.
비 오는 날에도 자외선은 강한 탓인지 보이지 않던 좀비들이 저녁이 되자 해미의 앞을 가로막았다.
사실 해미는 성현에게 짐이 되기 싫어 항상 강한 모습만 보여주었다.
강한 척을 했던 거다.
정신적으로 많이 성숙해 지긴 했지만, 홀로 좀비들을 처치하고 가는 길은 외롭고 두렵기만 했다.
간신히 좀비 무리들을 물리치고 가까운 건물의 옥상에 올라 밤새워 비를 맞으며 밤을 지새웠다.
길고긴 밤이 지나고 아침이 왔지만, 굵은 빗줄기에 세찬 바람은 여전했고 가실 줄을 몰랐다.
해미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