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판멸망한 세계의 게이머-44화 (44/176)

# 44

악연의 굴레 (2)

8011호.

성현은 자신의 오피스텔 입구에서 멈춰서 있었다.

문의 형상이 괴이했다.

자물쇠 부분이 크게 우그러져 있고, 물리적인 힘으로 문을 건든 흔적이 역력했다.

‘있다! 해미가 있어!

그그긍, 쾅.

성현의 완력에 문이 버티다 크게 소리 내며 열렸다.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보인다.

그토록 애타게 찾던 해미가 놀란 토끼 눈을 하고 서 있는 게 보였다.

순간, 가슴이 벅차 기쁨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크게 안도했다.

무사했고, 다시 만난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밥은, 먹고 다닌 거니.”

성현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며칠 사이 해미의 얼굴이 반쪽이 되어있었다. 안쓰럽고 미안해 무심코 튀어나온 말이었다.

“아, 아저씨…….”

해미는 놀라 말을 더듬었다.

작은 희망을 품어 보기도 했었다.

자신을 찾으러 오지 않을까? 하지만, 이내 기대를 버렸었다.

해미가 마주했던 성현의 부인이 절대 가만있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성현도 어쩔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헌데, 지금 성현이 눈앞에 있다.

“다 큰 애가 가출이라니, 그것도 하루나 이틀도 아니고… 이리 찾아 나서야 되겠어. 해미 너, 정말 혼나야 되겠다.”

성현은 해미가 더 당황하지 않게 딴에는 유쾌하게 말했다.

그리고 성큼성큼 다가가 해미 앞에 섰다.

와락!

해미를 품에 안았다.

홀로 아파했을 시간을 보상해 주고 싶었다.

“내가 그리 미덥지 못하던?”

해미의 어깨가 들썩인다.

감정이 북받치는지 소리죽여 흐느껴 울었다.

성현은 그런 해미의 등을 토닥여 줬다. 지금은 이보다 더한 위로가 없을 터였다.

“무서웠어요. 아저씨가 나보고 나가라고 할까봐……. 너무 무서웠어요. 그게 죽기보다 싫었어요. 그래서…. 그래서 그랬어요. 흐흐흑.”

해미가 성현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힘겹게 말 했다.

“내가 이야기 했었지. 우리만 보고 우리만 생각하고 살자고. 난 그 생각 변함없는데… 해미는 바뀐 거니?”

해미가 아기처럼 크게 도리질 하며 아니라고 말했다.

“이번일은 내 잘못도 크다. 누구에게도 말 못한 사정이 있었는데, 이리 일이 커질 줄은 몰랐구나.”

자조 섞인 말을 내뱉은 성현은 좀 더 해미가 안정되기를 기다려주었다.

그리고 가만히 해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신의 안정감도 찾았다.

“이제 가자. 네가 있어야 할 곳으로 가자. 줄리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오피스텔을 나서 대피소로 가는 게 망설여지는 해미였다.

해미는 발길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지 성현에 이끌려 헬기에 타는 순간에도 주춤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성현은 하는 수 없이 짧게나마 그간의 사정을 해미에게 이야기해 줬다.

해미를 힘겹게 하는 원인을 제거 해줘야만 했다.

아내의 진실 된 참모습에 대해 모두 알려 줬다.

극초신성 사태가 없었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이혼을 했을 거라는 사실을.

법적인 절차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성현의 마음만은 오래전에 정리된 여자였고, 기억조차도 하기 싫은 인연임을 말해줬다.

그리고 그런 이유진이 대피소에 오고 나서의 행각을 듣고서, 해미는 치를 떨었다.

“어떻게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죠? 무슨 막장드라마의 악역도 아니고!”

해미가 발끈하며 한말이다.

그런 여자가 성현과 자신이 있던 관사에 들어와 한 짓을 두고 더럽다며 집을 옮기고 싶다고도 했고, 성현은 모두 들어 주겠다 약속했다.

헬기가 이륙하고 10분이 되지 않아 과천 서울대공원 상공을 지나 청계산 부근에 이르고 있었다.

투타타타.

I-5 대피소 착륙장에 성현과 해미가 탄 헬기가 서서히 내려오고 있었다.

무전으로 미리 알린 탓에 입구에는 최동원 중령을 비롯한 군 지휘관들이 마중 나와 있었다.

그리고 줄리가 해밀턴 중령의 손을 잡고 기다리고 있었다.

“줄리-!”

다다다닷.

해밀턴 중령의 잡은 손을 놓고 줄 리가 작디작은 발로 달려와 해미의 품에 안겨들었다.

“으아앙! 마미 미워. 마미 줄리만 혼자 두고 갔어. 마미 미워-.”

밉다 하면서도 해미의 목을 꼭 끓어 안고 줄리는 놓지 않았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다신 안 그럴게.”

성현은 해미와 줄리가 해후하는 모습을 보고, 제자리를 다시 찾았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대령님, 다행입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최동원 중령이 다가와 성현에게 말했다.

“사람 시켜서 내가 쓰던 관사 말고 적당한 곳 좀 알아봐라.”

“네, 알겠습니다.”

최동원 중령은 성현의 말을 듣고 곧바로 지휘본부에 일러 지시를 내렸다.

“해미야, 줄리 데리고 먼저 가서 쉬고 있어라. 나는 일 좀 보고 바로 가마.”

품안에 줄리를 안고 있던 해미가 젖은 눈가를 닦아 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  *  *

I-5 대피소 중앙지휘본부.

성현은 집무실에서 보고를 받고 있었다.

“동원아 둘뿐이니 편하게 말해라. 그래 사인은 뭐냐?”

“네, 형님. 청산가리를 먹었습니다. 발견했을 당시에는 이미 사망한 상태였습니다.”

성현이 처음 받은 보고는 이유진이 자진(自盡)했다는 소식이었다.

모질게도 살아남아 끝내 스스로 삶을 포기한 거다.

슬프거나 안타깝다는 심정은 들지 않았다.

다만, 한때나마 부부였던 여자에 대한 연민으로 잠시 동정하는 마음이 스칠 뿐이다.

“청산가리가 일반인이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닐 텐데.”

“신동호 대령을 취조하는 과정에서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지니고 있었음이 밝혀졌습니다. 형님을 제거할 목적이었다고 합니다. 이 새끼들 절대 가만두면 안 됩니다.”

듣는 성현도 모골이 송연해졌다.

설마 했지만 정말 이유진이 그런 계획을 하고 온 것 까지는 생각지 못했다.

제아무리 성현이라 해도 이는 위험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내성 스텟의 영향을 받고 있다지만, 과연 청산가리의 독성까지 중화해 낼지는 미지수였다.

“하-, 이거 정말…….”

잠시나마 죽은 이유진을 동정했던 자신이 멍청했음을 자책했다.

“형님을 제거하고 대피소에 들인 병력으로 기습하려 했습니다. 이대로 둔다면 재차 도발해올 것이 분명합니다.”

“아무래도 그럴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저쪽 전투 병력은 얼마나 있어?”

“병력은 총 2,100명으로 구성되어있고, 저희 대피소에 구금된 인원을 제외하면 약 1,750여명 정도 됩니다. 500여 명은 해병대에서 차출된 정예들이고 나머지는 일반 보병과 기갑병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병력만 놓고 보면 우리보다 3배가 많네. 무장 상황은 어느 정도나 되는지 파악 됐어?”

“저희 대피소까지 투입은 불가능하겠지만, 우선 1개 전차대대에 총 35대의 K-2흑표가 있는 걸로 확인됩니다. 그 외 K-21등 보병전투 장갑차가 다수 있는 것으로 파악됩니다.”

K2흑표 전차는 4세대 전차로 육군에 2014년부터 보급된 신형 전차였다. 120mm/55구경 활강포를 주포로, 12.7mm K6 기관총과 7.62mm 동축기관총을 장비하고 있다.

K-21보병전투 장갑차는 9명의 무장병력을 수송할 수 있고, 무장능력이 탁월했다. 40mm 기관포와 부 무장으로 7.62mm 공축기관총을 장비했고, 대전차 미사일을 2기까지 장착할 수 있다.

“어차피 전차야 우리 대피소 까지 투입 하기는 힘들 테고, 즉시 전력은 아니라고 봐야겠지. 다른 건?”

“우려스러운 전력으로는 K9 자주포 10대와 천마를 장착한 K-200 장갑차가 5대 있습니다.”

K9 자주포는 사거리가 최대 53㎞에 이르러, 양자산에 있는 I-3 대피소에서 마음만 먹는다면 충분히 공격 가능한 거리였다.

거기다 천마는 대공능력이 탁월해 공격 헬기를 투입함에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건 더없고?”

“다행히 코브라 공격 헬기나 무장 헬기인 500MD는 병참이 지상에 가까워 모두 무용지물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 하나는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흐음.”

성현은 한 손을 미간에 대고 고심했다.

지금 당장이야 놈들이 투입한 병력과 신동호 대령을 믿고 기다릴 테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었다.

장시간 아무런 소식이 없다면 자신들이 벌인 짓이 있어 반드시라고 할 만큼 무력 도발을 감행할 것이었다.

진다고 생각은 안 하지만, 피해가 없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시간은 성현의 편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선공이 최선인 것 같다. 군 지휘관 전체 회의 소집해라.”

“네, 알겠습니다.”

성현은 군 지휘관을 소집해두고, 잠시 해미와 줄리가 있는 곳으로 갔다.

이전 관사에 비해 협소한 곳이지만 세 식구가 지내기엔 부족함이 없는 집이었다.

“파파-!”

“아저씨 오셨어요.”

성현이 현관에 들어서자 줄리가 냉큼 뛰어와 안기고 해미가 주방에서 나와 반겼다.

어둡던 해미의 얼굴은 어느새 밝아져있고 며칠 고생한 탓에 조금 핼쑥한 얼굴을 빼면 이전의 모습과 변한 게 없었다.

“저녁 드셔야죠. 손 씻고 오세요. 같이 드세요.”

“그래, 줄리야. 파파 손 씻고 올게요.”

“앗! 따가워.”

성현이 얼굴을 줄리에게 비비자 며칠사이 자란 수세미 같은 수염에 줄리가 기함하며 밀어냈다.

“어이쿠, 미안, 미안.”

“마마. 파파가 나 괴롭혔쩌.”

성현이 쩔쩔 매는 사이 줄리가 쪼르르 달려가 해미에게 이른다.

해미가 줄리의 볼에다 대고 ‘호호’하며, 힐 스킬을 쓰며 달랬다.

주방으로 가던 줄리가 혀를 쑥 내밀며, ‘빼’ 하고 성현을 놀려댔다.

성현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감돈다.

아무것도 아닌 일상이지만, 더없이 행복한 시간이다.

그러다 문뜩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결코 누구에게도 지금의 일상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  *  *

“직접적인 무력 충돌은 상호간에 피해가 막심할 듯합니다. 선제공격이라는 이점이 있긴 하겠지만, 수적으로 열세이고 놈들의 무장도 만만치 않습니다.”

“김 대위의 말에 저도 동감합니다. 전면전 보다는 기습 공격해서 적 수뇌부를 제거하는 쪽으로 가야합니다.”

“기습 침투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대피소라는 특수성으로 미루어보아 초전에는 어떨지 몰라도 놈들이 대응하기 시작하면 소수 병력으로 목적 달성이 어렵습니다. 차라리 대피소 입구를 야간을 틈타 타격해서 봉쇄하는 게 어떨까합니다.”

군 지휘관들이 모두 소집된 작전회의가 한참이었다.

많은 의견들이 나오지만 결론은 전면전은 안 된다는 것이었다.

“대피소 입구를 완전히 무너뜨리자는 건데, 민간인까지 모두 죽이자는 것은 너무하지 않습니까?”

지휘관들 마다 성향이 다른 탓에 의견 합일이 안 되고 있었다.

그중 가장 많은 의견은 공격 헬기로 화력을 집중해 I-3 대피소 자체를 지우자는 것이었다.

“그만.”

소란한 가운데 성현이 주위를 환기시키며 말했다.

“모두 잘 들었다. 전면전은 나도 무리라고 본다. 그리고 아군을 희생하면서까지 적들의 사정을 봐줄 생각은 없다. 다만, 민간인 희생은 가급적 피해야 하는 사안이다.”

“대령님, 혹 생각하신 계획이 있으십니까?”

“꼭 정공만 생각할 문제는 아니지 않나? 놈들이 잔머리 굴려 한 것처럼 우리도 방법을 달리 해보면 어떨까 한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