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판멸망한 세계의 게이머-54화 (54/176)

# 54

사필귀정 (3)

“만나서 반갑습니다. 박성현입니다.”

“네, 직접 뵙는 건 처음이지만, 먼발치에서 몇 번 뵌 적은 있습니다. 이지애입니다.”

이재애는 여성치고는 상당히 큰 키에 살짝 마른 체형을 하고 있었다. 어깨까지 오는 단발이 잘 어울리는 30대 초반의 보기 드문 미인이었다.

다만 호감 가는 모습과 달리 차가운 표정은 쉬이 다가가 말 붙이기가 어려운, 그런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바쁜 분을 이리 모셔 미안합니다.”

“별말씀을요. 제가 아무리 바빠도 사령관님보다 바쁘지는 않을 거예요.”

이지애는 옅게 웃으며, 성현의 말을 받았다.

“그리 양해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저는 둘러 말하는 성격이 아닌지라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김원일 박사님께 들었는데,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는 게 사실입니까?”

성현의 말을 들은 이지애는 그다지 놀라거나 당황하는 모습이 없었다. 어쩌면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있었다는 눈빛이었다.

차분히 성현의 눈을 마주 보고 있었다.

“……경고합니다. 하지마세요.”

의미를 알 수 없는 성현의 말.

분노의 감정을 고스란히 담은 목소리는 명백한 적의를 드러내고 있었다.

이지애의 감정 없던 메마른 눈빛이 놀람과 당황으로 물들었다.

[ 정신 공격에 저항하였습니다 ]

‘뭐 하는 여자야.’

성현의 시야에 난데없는 알림 메시지가 나타나 있었다.

원인은 눈앞의 이지애가 물리적인 힘이 아닌, 육안으로는 식별이 불가능한 방법을 통해 성현에게 무슨 짓인가 하려고 했던 거다.

“죄, 죄송합니다.”

“불쾌하군요. 지금 방금 하신 일은 상대방에 대한 일체의 존중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당신…. 상당히 위험한 사람이군요.”

“저, 전… 그저…….”

“제대로 된 변명이 아니라면, 이지애 씨에 대한 판단을 달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처음 만나 인사를 하고 화기애애했던 분위기는 경직되다 못해 차게 얼어붙었다.

이지애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극초신성 사태 이후 차츰 자각하게 된 능력을 최근에는 미숙하지만, 스스로의 의지로 발현이 가능한 단계에 접어들어 있었다.

그 누구도 자신의 능력을 간파하지 못했고, 다른 사람의 현재의 기분과 단편적이지만 생각을 읽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성현은 심연 그 자체였다.

그의 표면화된 말과 행동으로 추측은 가능할지언정 내면의 기분이나 생각 따위는 전혀 읽어 낼 수 없었다.

도리어 자신이 발가벗겨진 기분이었다.

이지애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댔다.

“……정말 죄송합니다. 나쁜 뜻은 없었어요. 변명처럼 들리시겠지만, 제겐 자연스러운 습관과도 같은 거였어요. 그리고 달리 능력을 증명할 방법은 이것뿐이지 않나요?”

잔뜩 위축된 이지애는 성현의 눈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눈길을 피하며 말했다.

“그걸 변명이라고 합니까? 다시 한 번 경고하지만, 앞으로 저나 다른 사람에게는 그 능력을 자제할 것을 권고합니다. 차후에 같은 일이 저나 제 주위에서 발생한다면 용서하지 않겠습니다.”

“…….”

“왜 대답이 없습니까? 싫습니까?”

“아, 아니에요. 실은…. 아직은 완전하게 컨트롤하기가 힘듭니다. 가끔은 시도 때도 없이 발현되고는 해요.”

“그 말을 나보고 믿으라는 겁니까?”

“사실이에요!”

이지애가 억울하다는 얼굴로 성현을 바라봤다.

사실 성현에게 이지애의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구분할 방법은 없다. 허나, 압박함으로써 성현이 얻을 수 있는 건 있었다.

대화에 좀 더 유리한 입장을 시작 할 수 있다는 거다.

“이제 이야기할 준비는 된 거 같은데, 말해보세요. 당신이 가진 능력이 어떤 건지.”

*  *  *

성현은 이지애와 만나고 나서 혼자 남아 생각을 정리했다.

이지애의 능력은 자신과 해미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치명적인 무기가 될 수 있었다.

“잘만하면 제대로 그림 나오겠는데.”

그녀가 자각한 능력은 그다지 복잡하거나 직접적으로 타인에게 영향을 주는 능력은 아니었다.

스스로가 크게 두 가지의 능력으로 구분하고 있었다.

첫 번째가 타인의 현재의 감정 상태를 색으로써 알 수 있다.

확인된 감정 상태는 공포나 두려움은 검은색, 기쁨과 환희 같은 긍정적인 것은 백색에 가깝고, 살의나 적의 같은 적개심은 붉은색으로 보인다고 했다.

색의 농도에 따라 그 감정의 크기와 깊이 또한 추측할 수도 있다고 한다.

두 번째는 단편적이지만, 상대의 생각을 문장으로 읽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대상이 거짓말을 하는지 진실을 말하는지는 명확하게 확인 가능하다고 했다.

“극초신성 사태 이전부터라…….”

그녀는 극초신성 사태 이전부터 감각 기관에 의존하지 않고 사물을 인지(認知)하거나 남의 마음을 읽는 흔히 육감(六感)이라고 하는, 즉 초감각적 지각(ESP)이 상당히 발달해 있었다고 한다.

극초신성 사태 이후에는 좀 더 구체적이면서 형상화할 정도로 발전했고, 현재에 이른 것이었다.

성현은 아무래도 선천적인 능력이 극초신성 사태를 기점으로 일반인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고 판단했다.

“이주가 완료되면 전 거주민을 대상으로 알아봐야겠다.”

분명 이지애 말고도 비이상적인 능력을 가진 이들이 존재할 걸로 생각한 성현은 그런 이들을 찾고, 문제가 생기기전에 별도의 관리하에 두기로 작정했다.

“내일 재판이 아주 기대돼.”

내일이면 300여 명이 넘는 이들을 대상으로 심판을 하게 된다.

과거 재판과 비슷한 모양새를 갖추고 있지만, 다를 수밖에 없고 그리고 죄 값을 치루는 방법 또한 크게 다르게 될 것이다.

*  *  *

다음날.

재판장으로 쓰이는 중앙 지휘본부 1층의 대회의실은 많은 이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성명 이박명, 죄명 살인 2회 미성년자 강간 8회, 부녀자 강간 6회, 폭행 9회입니다.”

최동원 중령이 가해자 즉 피고의 성명과 죄명을 읊었다.

구체적인 법안을 따져가며 무슨 특수니 처벌법 따위의 수식어는 모두 생략된 말 그대로 범죄의 유무만을 밝혔다.

“죄를 인정하나?”

성현이 솟구치는 화를 참아내며, 앙다문 입술만 겨우 열고 물었다.

“인정 못합니다. 그런 적 없습니다. 내가 그랬다는 증거 있습니까!”

“이이! 개만도 못한 새끼. 네 놈이 그러고도 사람이냐. 16살이다, 16살! 내 딸이 네놈한테 당하고 목을 맸다. 이 씹어 죽일 놈아!”

“저놈이 제 동생을 죽였습니다. 제수씨를 겁탈하고 제 동생을 총으로 쏴 죽인 놈입니다!”

이박명이 스스로를 변호하는 말에 장내가 크게 술렁였다. 한두 사람이 아니라 20여 명 이상이 그 소란에 동참하고 있었다.

모두 배심원자격으로 참석한 피의자 본인과 그 가족 내지는 친인들이었다.

“뭐, 서로 좋아서 그런 게 잘못이라면 죄 값을 받겠소. 그리고 살인이 아니라 우발적인 일입니다. 먼저 흉기를 휘둘러 어쩔 수 없었을 뿐이었습니다. 정당방위를 주장하는 바입니다.”

이박명이 제 딴에 핑계랍시고, 입을 열자 배심원석에 있던 한 중년인이 이박명에게 달려들었다.

“뭐! 좋아서라고? 이 개잡놈 내가 오늘 네놈 죽이고 나도 죽으련다.”

재판장 안에 뛰어드는 중년인을 지켜보던 군인들이 다치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해서 말리고, 겨우 진정시켜 배심원 자리로 데려갔다.

“모두 조용, 시간 관계상 빠르게 판결한다.”

성현의 옆에 있는 이지애가 넘겨준 쪽지를 확인하고 크게 소리쳤다.

[저 더러운 놈 처음부터 끝까지 다 거짓말이에요. 사형 같은 건 없나요?]

이지애도 감정이 이입되는지 여태까지 진실 거짓말 등 짧은 단문만 적어주던 쪽지에 조금 긴 장문의 글을 써서 전해주었다.

한 재판당 6분 1시간에 10명을 재판해야 하는 성현은 길게 끌고 갈 생각이 없었다.

“이박명에 대한 선고를 시작한다. 피고 이박명 유죄! 강제 노역 100년을 선고한다. 또한 이박명은 피해자 가족에게 용서를 구할 참회의 시간을 2일간 갖도록 한다. 끌고 가!”

“재, 재판장님 이,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여기 있다. 이 새끼야! 뭐해! 저 개새끼 빨리 끌고 가 보기도 역겹다.”

이박명이 재판장 밖으로 끌려 나가자, 짧은 시간 심력을 크게 소비한 탓인지 배심원단 중 몇 명이 자리에 털썩하고 주저 않는다.

“배심원단 여러분은 참회의 방으로 이동해 주시면 됩니다. 가서들 일보세요.”

성현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배심원단은 영문을 몰라 엉거주춤했다.

대기 중이던 대원 한 명이 따라오시면 됩니다, 라고 하자 그때서야 하나둘 대원을 따라나섰다.

참회 4호실.

배심원들이 이동한 곳은 참회 4호 실이라 적혀 있는 곳이었다.

바닥에는 입에 재갈을 문 이박명이 얇은 천으로 돌돌 말려 있었고, 그 모양새가 멍석말이를 해둔 것과 진배없었다.

“배심원 여러분 이곳은 참회의 방입니다. 재판장께서 허용하신 저 물건들로 죄인에게 참회하도록 도와주시면 됩니다.”

벽 한쪽에는 야구방망이, 쇠 파이프 등 여러 종류의 둔기와 날붙이 들이 붙어 있었고, 이미 한두 번 사용이 된 것인지 군데군데 선혈이 묻어 있었다.

“만일, 저놈이 죽으면 어찌합니까?”

지금 상황이 무슨 상황인지 단번에 눈치 챈 이가 물었다.

그는 바로 재판장에서 16살 된 딸을 잃었다고 했던 배심원이었고, 손에는 야구방망이 하나를 쥐고 있었다.

“커흠, 이 방안에서 행하는 일은 모두 법적으로 보호받을 수 있습니다. 어떠한 경우라도 처벌받지 않습니다. 걱정하실 일은 절대 없습니다.”

성현은 피해자들의 마음을 십분 이해하고 있었고, 죽일 놈들을 결코 좌시하지 않았다.

그리고 피해자들이 그 한을 풀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고, 그로 인해 또 다른 고통을 떠안고 살아가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그래서 합법으로 포장된 면죄부를 주어 이들을 배려했다.

이들이 추후에 받을 심리적 죄책감과 죄의식을 한 푼이라도 덜어주기 위한 방법이었다.

“내 재판장님의 은혜는 죽어서도 잊지 않겠습니다. 필요하다면 이 한목숨 내 드리리다. 정말 감사하다 꼭 전해 주십시오. 죽어서도 눈 감지 못한 딸자식의 한을 풀도록 해주신 여러분 모두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중년인은 시뻘겋게 변한 눈시울로 멍석말이를 하고 있는 이박명을 노려봤다.

그리고.

퍼-억!

“끄어어억.”

이박명이 입에 재갈을 문 상태로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질렀다.

퍽퍽퍼억. 팡!

중년인이 힘껏 같은 곳을 연달아 내려쳤다.

이박명은 극한의 고통에 눈에 흰자만 보일 정도로 치켜뜬 채 비명조차 쉬이 지르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새 가랑이 사이에서 번진 피가 몸통을 두른 천을 흠뻑 적시고 있었다.

“이놈!”

그제야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알게 된 이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손에 뭔가를 쥐고 이박명을 내리쳤다.

“머리는 치지 마세요! 이놈을 쉬이 죽이시렵니까?”

“미안허이, 내 마음만 너무 앞섰네.”

배심원들이 할 일을 시작하자 안에 있던 대원은 자리를 비켜 줬다. 구경 못할 일도 아니지만, 이들을 위한 작은 배려라 생각했다.

“거긴 어때?”

마침 이박명 앞에 있었던 재판에 배심원 안내를 담당했던 대원이 다가왔다.

“뭐, 똑같지. 근데 앞에 들어간 놈은 어떻게 됐어?”

“죽었어. 참회 하루 받았는데 하루는커녕 10분도 못 버티고 갔다. 그러고 보니 네가 맡은 이놈 이거 아주 악질이라고 하지 않았냐?”

“응, 난 바로 끝날 줄 알았는데 시간 좀 걸리겠다. 한 아저씨가 적당히 조절하면서 참회시키고 있거든.”

배심원 안내를 담당한 대원들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는 사이 또 새로운 놈이 끌려왔고 참회실에 들어갔다.

그 뒤로 줄줄이 배심원들이 따라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방안에서도 매타작 소리와 비명이 끊이지 않고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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