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판멸망한 세계의 게이머-55화 (55/176)

# 55

진화 (1)

첫날 재판은 아침 7시부터 시작해 점심 저녁을 먹고 밤 10시까지 진행되었다.

재판 한 번에 평균 5분이 걸렸고 첫날만 149명의 재판을 마쳤다.

긴 재판은 10여 분을 넘기는 적도 있었지만, 이때는 가해자의 감정 기복이 너무 컸고, 극심한 신경쇠약으로 이지애 박사가 생각을 읽는 게 어려워진 탓이었다.

그 외의 재판은 대부분이 속전속결로 끝이 났다.

그리고 둘째 날은 162명, 이틀간 도합 311명의 재판을 모두 끝마쳤다.

우려했던 바와 달리 무고한 자는 나오지 않았다. 모두가 죄를 지은 자들이 맞았고, 그에 합당한 대가를 치르게 되었다.

다만 계속해서 타인의 감정을 여과 없이 공유한 탓인지 이지애 박사가 상당히 힘들어했다.

성현은 그녀의 상태가 좋지 못함을 느끼고 더는 재판에 참석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이지애 박사의 고집을 꺾지는 못했다.

그러다 재판 마지막에 이르러 거의 탈진 직전에 다다른 이지애 박사는 끝내 실신하게 되었고, 급히 병원으로 옮겨졌다.

소식을 듣고 김원일 박사가 검진했지만, 딱히 치료제가 있는 병환이 아닌 터라 영양제와 신경안정제를 투여하고 쉬도록 조치했다.

‘결코 안정적인 능력은 아니야.’

혹시나 했던 그녀의 능력이 제 살을 깎아 먹는 행위임을 성현은 이번 계기로 확신할 수 있었다.

한 인간이 수백에 이르는 이들의 감정을 순간이지만 공유한다는 자체가 무리가 따르는 일이었다.

차후에 그녀의 능력은 될 수 있으면, 봉인해 두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음날.

제주도 병력 수송을 위해 분주한 대피소는 갑작스럽게 내리는 비와 돌풍으로 차질을 빚고 있었다.

“병력 해산시키고 기상 상황이 완화되면 재집합 시키도록 해라. 이륙도 문제지만, 제주도 착륙이 불가능할 수도 있다.”

오전부터 시작된 비는 그칠 줄을 몰랐고, 시간이 갈수록 거세진 비바람으로 인해 비행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성형은 병력을 해산시키고 경비대 본부에서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  *  *

집하장에 위치한 경비대 본부. 최 중령의 집무실에 들른 성현은 미처 듣지 못한 보고를 듣고 있었다.

“총원 311명 사망 244명, 중경상자 67명입니다. 죽은 이들은 대부분이 죄질이 극악했고, 배심원들의 자비는 없었습니다.”

성현도 예상했던 바다.

근데 문제는 살아남은 놈들이었다.

어쩌나 하고 생각을 하다 결국 죗값을 마저 치루 게 하는 것이 맞는다고 생각했다.

“참회 기간 끝날 때까지 살아남는 놈들은 제주도에 가면 노역형으로 남은 죗값을 치루 게 할 생각이다. 응급 치료하고 목숨 줄만 붙여놔. 아니면 해미 네가 치료해 주는 것도 좋겠다만.”

“히잉, 나쁜 사람들 치료해 주기는 싫은데… 지애 언니가 재판 갔다 와서 모두 나쁜 사람들이고, 그런 사람들은 사형시켜야 한다고 했는걸요.”

“어? 너 이지애 씨 하고 친해?”

“네, 병원 자주 드나들다 언니랑 친해졌어요. 왜요?”

“……이지애 씨는 언니고 난 왜 아저씨야? 이지애 씨랑 나랑 한 살 밖에 차이 안 나는데.”

“…….”

뭔가 크게 손해 보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 성현이었다.

“지애 언니는 언니 맞는데…. 그리고 아저씨는 아저씨고…….”

해미는 멀뚱멀뚱 쳐다보며, 무슨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눈을 했다.

영악한 건지 정말 모르는 건지 성현도 감을 못 잡겠다. 그리고 말로는 표현 못하겠지만, 왠지 이지애에게 의문의 패배를 당한 느낌이 들었다.

“아-참. 저는 줄리 데리러 가야해요. 아저씨, 집에서 봐요~.”

영악한 게 맞는 듯했다.

해미가 나가고 집무실에는 성현과 최 중령 그리고 두식이과 용칠만이 남아있었다.

“휘유-, 해미가 저리 말해도 살려는 놓을 거다. 그 일은 그렇게 하기로 하고, 혹시 모르니 활주로 점검을 출발 전에 좀 더 꼼꼼히 할 필요가 있을 거 같다. 두식이 용칠이 너희 둘이 수고 좀 해줘야겠다.”

“넵! 사령관님.”

성현의 지시를 받고 둘이 나가려 하자, 최동원 중령이 잠시 시계를 봤다.

“천 대위, 강 중위. 12시 정오에 활주로 경비대 교대 시간이니 그때 함께 가면 될 거다. 관리과에 이야기해서 활주로 점검에 필요한 인력 지원받으면 된다. 판초우의 꼭 챙기도록 하고.”

최 중령의 덧붙이는 말에 두식과 용칠은 알겠다 답하고 20여 분 밖에 남지 않은 교대 시간에 맞추어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동원아, 생각은 좀 해봤어?”

“아-, 넵. 형님 말씀 듣고 많이 생각해 봤습니다. 완전한 구현은 안 될 수도 있다고 하셔서 대략적인 큰 틀에서 활용할 방법을 모색해봤습니다.”

둘만 남게 되자 성현은 최 중령에게 각성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어차피 능력을 각성하고 나면 좀 더 명확해질 거다. 그리고 혹여 능력을 얻게 되어도 내가 따로 이야기하기 전까지는 비밀로 하자 그편이 여러모로 편할 거 같다.”

“······네, 알겠습니다.”

성현이 능력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알리기에는 여러모로 부담되는 게 사실이었다.

어쩌면 부하들 간에 불화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고, 달리 보면 충성 경쟁을 불러일으키는 일이 될 수도 있었다.

긍정적이기 보다 부정적인 효과가 크다고 성현은 생각했다. 당장에는 최 중령 하나뿐이지만, 1년이면 12명이나 된다.

시기와 질투, 그러다 반목하게 되면 종국에는 능력을 부여받은 이들과 그렇지 못한 이들로 나뉘는 양극화가 뚜렷해질 것이다.

“시간 끌 거 없이 지금 바로 하자.”

성현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최동원 중령은 긴장이 역력한 표정으로 마음의 준비를 하는 듯했다.

“시작하마.”

성현의 손길이 최 중령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갔다.

[ 게이머 ]

[ 슈퍼 솔저 ]

‘특성 부여 가능’ 텍스트를 터치하자 두 개의 선택지가 나타났다.

거침없는 손길이 ‘게이머’에 닿았다.

그리고.

화아아악!

성현이 팔에서 한시도 때어놓지 않은 팔찌에서 찬란한 빛이 터져 나왔다.

‘그때와 다르지 않다.’

극초신성 사태 당시 성현이 각성하고, 해미에게 부여할 때의 모습과 다르지 않은 과정의 반복이었다.

신비롭고 아름답기까지 한 광경에 성현도 넋을 놓고 바라만 봤다.

팔찌의 구슬 하나가 미세한 빛으로 쪼개어져 산란하더니 서서히 허공에서 뭉치기 시작했다.

츠츠츠츠.

빛의 구체가 중력을 거슬러 올라 이내 최 중령의 머리맡에 부유했다.

그리고 더욱 강렬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고오오오.

태동하듯 일정한 간격을 두고 빛은 수축과 팽창을 반복하더니, 순간 분화하듯 무수히 많은 빛의 알갱이로 화해 최 중령 몸 곳곳으로 스며들어 이내 사멸했다.

[ 특성 부여 완료 ]

[ 게이머 최동원의 능력을 공유 받습니다 ]

[ ★게이머 박성현의 환경을 재설정 합니다 ]

[ 동기화 완료까지 23시 59분 59초 ]

‘이건 뭐야?’

특성 부여 과정은 달라진 점이 없었다.

하지만, 완료 시점에 나타난 반투명한 텍스트 창이 성현을 크게 당황 시켰다.

*  *  *

활주로 점검을 위해 밖으로 나선 두식과 용칠은 타고 온 차량에서 내려 직접 활주로 점검에 나서고 있었다.

쏴아아아.

“뭔 놈의 빗줄기가.”

두식이 쏟아지는 빗줄기를 보고 중얼댔다.

폭포수를 연상케 할 정도의 빗줄기는 시야조차 제대로 확보하지 못할 만큼 내려 붇고 있었다.

말 그대로 폭우였다.

“보수할 곳이 있어도 지금은 불가능합니다. 비가 그치고 나서야 작업이 가능하니 그냥 복귀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시설 관리과 팀장으로 보이는 이가 악천후에도 불구하고 점검을 나선 게 못마땅한지 잔뜩 찌푸린 얼굴로 두식에게 말했다.

“당장 보수를 못한다 해도 점검은 모두 마쳐야만 철수합니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세요. 그리 알고 모두에게 철저하게 점검하라 전달하십시오. 대충하다 감당 못 할 상황 만들지 말고.”

두식이 관리과 직원에게 경고조로 말했다.

어쭙잖게 말 붙였다 본전도 못 찾은 관리과 팀장은 찔끔해 하며, 빠른 걸음으로 다른 직원들을 찾아 멀어졌다.

“형님 근데 경비대 쪽이 많이 어수선합니다.”

“무전 내용이 심상치 않다.”

얼핏 들으면 생존자 그룹이 찾아온듯했지만, 이런 악천후에 찾아오는 생존자가 있을지 의문이었다.

혹여 이전처럼 다른 대피소와 조우하는 건 아닌지 걱정인 두식이었다.

그리고 설마 하며, 다른 가능성은 열어두지 못했다.

치직.

-여기는 N6, 거리 삼오공. 미확인 물체 다수확인! 이상.

“N6 생존자인지 신속히 근접 확인 바란다. 이상.”

활주로 경비대 임시본부에 무전이 전해졌고, 임시본부에서는 대상을 확인할 것을 지시했다.

그리고 잠시 후.

북쪽 경계 최전방에 있던 경비조가 열화상에 감지된 이들을 확인하기 위해 빗속을 뚫고 전진 중이었다.

“중위님, 육안 식별이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가야 합니다.”

“하늘에 구멍이 뚫렸나?”

이진수 중위는 연신 얼굴에 흘러내리는 빗줄기를 훔쳐내고 있었다.

폭우로 인한 경계 시야가 확연히 줄어 제대로 된 확인이 되지 않는 상황.

“거리는?”

“둘둘공 입니다.”

N6 경비조 이진수 조장이 망원경을 들어보지만, 시계가 그야말로 뿌옇기만 했다.

“안 보여···. 경계하며 좀 더 전진한다.”

“중위님! 열화상에 감지되는 물체 급속도로 접근 중입니다!”

“뭐? 모두 전투준비! 사격 명령 전에 절대 사격하지 마라.”

생존자 그룹일 것으로 생각하고 확인을 위해 빗속을 헤치며 전진한 경비조는 갑작스러운 상황을 맞이하고 있었다.

“빠릅니다! 거리 하나오공! 하나둘공! 팔공! 헉! 좀빕니다!”

“전원 사격!”

타타타타타탕!

N6 경비조 전원의 총구에서 시뻘건 화염이 튀어 나왔다. 연속되는 사격에 달구어진 총신이 빗물을 증발시키며 수증기를 피워냈다.

“수, 숫자가 너무 많습니다.”

“당황하지 마! 수류탄 투척! 순차적으로 퇴각한다. 엄호해!”

정오를 조금 넘긴 시각 구름 낀 빗속이지만 자외선만큼은 충만한 시각이었다.

우려했던 사태가 드디어 발발했다.

*  *  *

-본부, 본부! 상황 레드, 레드다!

“……숫자는!”

-젠장! 세, 셀 수도 없다! 당장 지원 바란다!

“N1, N2 현 위치 전투대비! 그 외 전 경비조 N6의 퇴출을 지원한다! N6 지금 즉시 퇴각해!”

성현이 언급했던 ‘레드’ 상황이 경비조에서 실제상황임을 알려왔다.

대낮에 대규모의 좀비 출현.

성현은 이것을 두고 상황 ‘레드’라 명명했고, 이는 모든 부대원들에게 전달되어있었다.

활주로 경비대대 본부는 갑작스러운 상황에도 신속히 대처하며, 어지럽게 난무하는 무전에 침착하게 대응을 지시했다.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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