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판멸망한 세계의 게이머-86화 (86/176)

# 86

브이. 아이. 피 (3)

따다다다다당.

다수의 스트라이커 보병 전투차가 1구역에 진입해 전투가 한창이었다.

특수군 A팀이 상당한 좀비들을 처리했다고는 하나, 아직 제법 많은 수의 좀비들이 남아있었다.

상판에 장착된 12.7mm 브라우닝 기관총이 전방의 좀비들을 휩쓸며 수평으로 긁듯이 갈아댔다.

“주행 정지, 즉시 하차!”

1구역 내의 연결 통로로 진입한 장갑 차량이 장애물로 인해 더는 차량 이동이 불가능해지자, 탑승 중인 부대원들은 즉시 하차하기 시작했다.

후방 해치가 열리고 열 명의 소대원들이 신속히 하차해 사주경계를 하며 개별 무장을 재확인했다.

철컥!

노리쇠를 후퇴 장전시킨 부대원들의 눈매가 매섭게 번뜩였다.

“3소대 현 위치 대기! 2소대 후방 퇴로 확인. 1, 4, 5소대 전진!”

자동 소총정도의 소화기로 무장했던 대원들의 개별 장비에 큰 변화가 생겼다.

모든 대원들이 K12, M60 등 기관총을 일부 개량해 개인화기로 사용 중이었다. 그 무게가 탄약과 합쳐지며 자그마치 21㎏에 육박하고 있었다.

그 외 예비 탄약과 부무장까지 더해져 한 명당 기본 70㎏에 가까운 무게를 짊어지고 있음이다.

그럼에도 누구 하나 힘들어하거나 지친 기색이 없었다. 이 모두가 극초신성 사태 이후 진일보한 육체 덕분이었다.

좀비들이 레벨업을 했다면, 살아남은 인류 또한 육체적인 능력이 크게 상승했다.

이능력자나 고유한 능력을 각성한 이들이 아닌 일반인들도 극초신성 사태 이후 모두가 근력과 체력 등 모든 방면에서 과거보다 뛰어난 힘을 발휘했다.

화력 부족에 허덕이며 좀비들에게 속수무책이던 보병들의 무기에도 큰 변화가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기본무장이 7.62mm를 사용하는 기관총이 개인 무장인 시대가 도래 했다.

-2구역 C터널 상당 규모 좀비 발견! 예비대 지원 바란다!

“절대 무리하지 마! 제1 신속기동군 화력 지원하고, 6, 7소대 추가 지원토록 한다.”

-3중대 제2 신속기동군 2구역 D터널 클리어!

“3중대는 계속해서 2구역 좀비 섬멸에 집중한다. 1중대는 특수군 A팀과 함께 3구역까지 진입로 개척을 시작한다.”

최동원은 사방에서 날아드는 무전에 일일이 지시를 내리며, 성현이 기다리는 3구역을 향해 부대를 빠르게 진군시켰다.

*  *  *

V-1 대피소 경내 3구역 초입에 상당히 많은 이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성현을 비롯해 해미와 최동원 준장 그리고 일반 부대원까지 3구역에 진입해 있었다.

그중 아이렌을 보고 놀란 눈이 된 해미가 좀처럼 사용하지 않는 고급 치료를 사용해주기도 했다.

“언니, 괜찮아요?”

“네. 이제…….”

아이렌은 자신을 향한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운 것인지, 아니면 아직 충격이 가시지 않은 탓인지 불안한 눈을 하고 있었다.

간혹 자신의 옷깃을 고치고 유달리 속살이 드러나는 것을 조심스러워 했다.

“저 이거…….”

최동원이 아이렌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

시선을 살짝 든 아이렌은 최동원을 곁눈질해 살피다 그가 건넨 손수건을 받으며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원체 낯을 가리는 내성적인 성격이라 낯선 남자와 말 한마디 섞는 것조차 어려웠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괜찮아… 졌어요.”

최동원의 질문에 아이렌은 반사적으로 대답하다 끝에 가서는 모깃소리만큼 작은 목소리로 변했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생사(生死)의 기로에서 고민했던 아이렌에게 정상적인 멘탈을 기대하는 건 무리였다.

“저·····. 이거 좀 드시죠.”

“이, 이건.”

최동원이 언제 준비를 한 것인지 아직 김이 모락모락 나는 편의점표 죽을 손에 들고 있었다.

아이렌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죽이 담긴 작은 용기와 플라스틱 숟가락을 받았다.

그리고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일주일을 넘게 공복이었던 아이렌이지만, 해미의 치료로 기본적인 건강 상태는 회복되어 있었다.

급하게 먹는다지만, 당장 음식을 섭취하고 탈이 날 염려는 없었다.

“저어···. 이것도.”

최동원의 손에는 앞서 건넨 호박죽 말고, 전복죽이 하나 더 들려있었다.

모두가 아이렌이 가장 좋아하는 죽임에 진작부터 아이렌을 생각하고 준비해 둔 것이 틀림없었다.

“어쭈, 지금 하라는 일은 안 하고 연애질이네.”

성현은 해미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 최동원의 모습을 보고 장난기가 발동했다.

“에이. 좋을 때잖아요. 좀 놔두세요.”

성현은 최동원에게 가려던 발걸음을 일순 멈춰 세웠다.

이상하리만치 설득력 있는 해미의 대꾸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리다 흠칫했다.

“그, 그래?”

너무도 자연스러웠지만, 해미의 입에서 나올 만한 소리가 아니었다.

뭔가 자신과 결부되어 작용한 듯했지만, 이를 입 밖으로 꺼내기도 무안한 입장이었다.

“보기 좋잖아요.”

손윗사람이나 할법한 소리를 아무런 거리낌 없이 하는 해미를 그저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  *  *

성현은 1, 2구역 좀비 소탕이 막바지에 이르렀음을 보고 받고 대피소를 나섰다.

해미는 아이렌을 혼자 두기 불쌍하다며 남길 원했고, 그녀가 지상으로 후송될 때 같이 나오기로 했다.

또 해미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어 자리를 비우기에는 마땅찮은 이유도 있었다.

“정말 좀 쉬고 싶다.”

솔직한 심정이었다.

이후의 일은 최동원과 군위원회에 모두 일임했다.

사실 많이 지치기도 했고, 자신이 직접 나서야 할 만큼 위급을 요하는 일이 없었다.

육체적 피로보다 심리적인 영향이 컸다.

V-1 대피소를 나서기 전 성현이 내린 지침은 크게 네 가지였다.

먼저 일부 생존자들을 찾았지만, 아직 남아 있을 생존자들에 대한 수색을 지시했다.

그리고 1, 2구역의 좀비 박멸은 당연했고, 발전시설을 재가동해서 대피소 자체를 활성화하도록 했다.

이곳의 물류를 모두 옮기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었다.

셋째는 생존자들을 최동원이 영지민으로 거두어, 최동원의 2번째 영지인 서귀포로 이동하도록 했다.

일단 기존 주민들과 왕래하는 일은 없도록 조치한 거다.

그리고 네 번째 지시는 그들 중 VIP에 해당하는 이들은 성현의 영지인 광양 제철소로 보내도록 했다.

“아오지탄광쯤 될런가?”

과거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 ‘아 오지 말라.’라는 말에서 비롯된 아오지탄광과 광양영지를 비교한다면 성현의 영지는 천국일 터였다.

그렇지만 강제 노역을 부당하다 여길 수도 있고, 자신의 억울함을 토로하는 이들도 틀림없이 있을 터였다.

사연 없는 이들이 어딘들 없을까.

그들의 이야기 하나하나 모두 듣고 정상을 참작하는 건 또 다른 이야기였다.

어찌되었든, 그들은 VIP라는 이름하에 모인 것이고,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전 국민을 기만하고 우롱한 일에 일정 부문 책임이 없을 수 없었다.

“좋게 말해서 기만이고, 우롱이지. 삶의 기회를 박탈한 거나 마찬가지다.”

광양에 보내지는 이들은 차후에 제철소가 본격 가동되면 강제 노역에 처해질 예정이었다.

만약 불응하던지 선동하는 자는, 그 죄질에 따라 작게는 영지민 자격을 박탈해 추방하도록 했고, 심할 경우 즉결 처분토록 하는 엄중한 처벌을 지시했다.

“알아서 잘하겠지. 하아, 진짜 좀 쉬자.”

그 외 나머지 자잘한 부분은 군위원회에 일임해서 처리토록 했다.

*  *  *

V-1 대피소 생존자 구출이 끝난 지 이틀이 지난날, 성현은 자못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제주항 서쪽 방파제 끝에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단결!”

“아-, 왜 또!”

쉬고 있다 생각하지만 쉬는 게 아니었다.

한 시간이 멀다하고 두식이 찾아와 각 위원회 별로 이런저런 일로 의중을 묻고 있다는 둥, 급하지는 않지만 성현의 자문을 묻는 일이 수시로 있었다.

“저···. 그게 저녁은 탕이 좋을지 찌개가 좋을지 물어보라고 해서.”

“응? 그래?”

그러고 보니 성현은 트랜스듀서 무전기를 착용하고 있지 않았다. 해미가 물어보려고 해도 두식을 통하는 방법 말고는 딱히 대안이 없었다.

두식은 급 침울해 졌다.

“어허, 자식이 진작 말을 하지. 너도 배고프지 지애 씨 불러서 우리 다 같이 밥이나 먹자.”

“저… 근데 이미 같이 있습니다. 거기다 최 준장님과 아이렌양도 함께 있습니다.”

“뭐? 아이렌양은 서귀포 영지에 있지 않아?”

“해미양이 서귀포 영지에 있습니다. 그리로 오시라는 말도 함께 전해드리라고…….”

잠시 후, 방파제에서 한 대의 헬기가 날아올랐다.

서귀포 영지는 서귀포 시청 제1 청사와 제2 청사를 모두 포함하는 영지로 최동원의 2번째 영지였다.

성현은 이륙하고 7분 만에 저녁 식사 장소에 다다르고 있었다.

축구장 세 개 정도 크기의 인공정원이 펼쳐진 호텔건물 뒤편에 성현은 헬기를 착륙시켰다.

“파파~”

“줄리야. 조심해 그러다 넘어질라.”

앙증맞은 비키니 수영복을 입은 줄리가 저만치에서부터 달려와 성현에게 안겨들었다.

“파파. 여기 우리 사는 데보다 이만큼 더 좋아요. 바로 옆에 수영장도 있고, 놀이기구도 있어요.”

어지간히 이곳이 마음에 들었는지 줄리가 성현을 보자마자 자랑이 끊이질 않았다.

“그렇게 좋아?”

“네. 파파 우리도 여기서 살면 안 돼요?”

“안될 건 없지만, 여기 살면 줄리 유치원이 너무 멀어서 못 갈 텐데. 친구들 못 보게 돼도 괜찮아?”

“우웅, 그건 싫은데.”

“줄리가 원하면 언제든지 여기 놀러 올 수 있으니 그렇게 하면 어떨까?”

“응! 좋아요. 파파 우리도 수영하러 가요. 마마랑 예쁜 언니들도 수영하고 있어요.”

성현은 아무런 생각 없이 줄리의 손에 이끌려 따라갔다.

호텔 서편에 마련된 야외 수영장은 하트를 형상화한 상당히 큰 규모로 만들어져 있고, 수영장 바로 옆에서 최동원이 연신 땀을 훔치며 숯불에 고기를 굽느라 정신이 없었다.

“사령관님. 오셨습니까.”

“사석인데 편히 이야기하자. 두식이도 마찬가지고.”

성현은 최동원과 두식을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단결!”

“어라, 만호 넌 또 여기 웬일이냐?”

조만호 2대대장이 양손에 한 아름 채소를 든 채로 어중간한 자세로 경례를 했다.

반바지에 편한 티셔츠를 입은 모습이 휴양지의 바캉스 나온 모습과 같았다.

“아…. 저 그게 최 준장이 식사나 같이하자고 해서.”

같은 기수에 나이까지 동갑이라 둘은 성현과 군복무 당시도 둘도 없는 친구였고, 동지였다.

최동원과 조만호가 서로 수신호와 눈짓을 주고받는 게 모종의 이야기가 더 있는 듯했지만, 어차피 부처님 손바닥 안의 미후왕(美猴王)들이다.

이럴 때는 모르는 척 넘어가 주는 게 상례였다

“아저씨~”

성현은 자신의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고, 순간 입을 헤하고 벌리고 말았다.

네 명의 아리따운 미녀들이 한 줌의 비키니를 입고 다가오고 있었다.

아직 어리게만 생각했던 해미의 몸매가 그중 군계일학이라는 게 더욱 놀랄 노자였다.

이지애는 와인색 비키니를 입어서인지 더욱 농염함이 가미되어 있었고, 블루벨벳의 아이렌은 청초함과 함께 미의 여신이 강림한 듯했다.

그리고 못 보던 여인.

“어머! 어딜 보는 거예요.”

어느새 성현의 곁에 다가온 해미가 양팔로 자신의 가슴을 가리며 말했다.

헌데 더욱 돋보이는 건 성현의 착각만은 아니었다.

‘의도적인 건가?’

해미의 영특함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지 않나라는 생각이 잠시 스쳤다.

“커흠. 아, 아니 못 보던 분이 계셔서.”

“아저씨 리와이스 하나 언니 몰라요?”

“아아, 그러고 보니 유하나 씨가 있었지.”

성현이 V-1 대피소에서 먼저 복귀하는 바람에 직접 보는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역시 아이돌 중에서도 역대급이라 칭하는 게 다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젖은 머리칼의 물기를 손으로 짜내는 모습조차도 화보가 따로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미가 이들 중에서도 돋보이는 현 상황이 쉽게 납득되지 않았다.

‘해미가 원래 이리 예뻤나?’

성현은 고개를 갸웃하며, 해미를 다시 돌아봤다.

그야말로 빛이 난다는 착각이 일 정도였다.

성현은 저도 모르게 심장이 두방망이질 치자 화들짝 놀랐다.

‘미친! 지금 무슨 생각을…….’

성현은 놀란 가슴을 추슬렀지만, 이후 저녁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른 체 식사를 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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