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
외유(外遊) (1)
제주도 이주 22일 차.
이주 4주 차에 접어들면서 주민들도 제주의 신질서와 사회체계에 적응하면서 서서히 안정을 구가하기 시작했다.
극초신성 사태 이전만큼은 아니지만, 기본적인 욕구는 모두 충족된 삶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유류 재고가 현 상태라면 보름을 넘지 못할 것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주차 회의가 시작되고 가장 먼저 논의가 이루어진 것은 석유 문제였다.
당장 가솔린이나 등유(항공유)가 크게 부족해 차량 운행 및 항공기 사용을 제한적으로 실시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대안은 울산공업단지, 즉 석유화학 콤비나트를 중심으로 한 중화학 공업단지를 가동하는 것입니다. 다만 문제는, 제주와 너무 멀다는 데 있습니다. 차선으로는 제주와 가까운 여수 국가산업단지 또한 나쁘지 않습니다.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이것 또한 한정적인 자원을 토대로 재가동을 시작하는 만큼 이에 앞서 원유수급에 대한 대책이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상보다도 시기가 앞당겨졌다.
제주의 산업은 아직은 그 규모나 크기가 작았지만, 빠른 속도로 확장되고 있었다.
이를 뒷받침해줄 기초 자원을 확보해야만 했다
즉, 석유가 필요했다.
자동차나 항공기의 원료로써만이 아닌 나프타(화학약품원료)가 절실했다.
섬유, 고무, 수지, 전자, 정밀화학 등등 석유화학공업을 통한 기초 원료의 공급 없이는 산업발전을 도모할 수 없었다.
성현은 나주 영지의 첫 수확을 보고, 문제를 해결을 위해 나설 참이었지만, 이제는 더 늦출 여유가 없었다.
“이 부분은 최우선으로 해결하도록 할 테니, 모두 걱정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보다 박사님 플라즈마 발전기 2호기는 언제쯤 완성될 것 같습니까?”
과학기술부의 장관에 임명된 정우현 박사도 회의에 참석해 있었고,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모아졌다.
“네. 사령관님. 2호기와 3호기 동시 제작에 들어간 탓에 앞으로도 5일 정도의 시간은 더 필요합니다. 그나마 마정석덕분에 이전보다 출력도 높아졌고, 내구성 또한 크게 증가해서 안정적인 면에서도 프로토타입인 1호기를 월등히 넘어설 것으로 보입니다.”
“오-! 동시 제작에 들어가셨군요. 생각지도 않았던 선물을 받은 기분입니다. 감사합니다. 조금만 더 고생해주십시오.”
정우현 박사는 언제나 기대치를 웃도는 성과를 보여주고 있었다.
어찌 보면 선견지명에 밝은 이였다.
매번 성현에게 감사의 인사를 받는 유일한 이라 할 수 있었다.
“별말씀을요. 당연히 해야 할 일들일 뿐입니다.”
겸양의 미덕을 아는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따르는 연구원들이 많았고, 그에 대해서만큼은 작은 구설조차 들리는 바가 없었다.
이후 석유 문제는 성현이 직접 해결한다는 말에 다음 안건으로 넘어갔다.
내정위원회 산하 교육부 장관이 1차 학교 개관에 관한 사항을 보고했다.
“13개 학교가 개교예정입니다. 초등학교 5개, 중학교 4개, 고등학교 4개가 명일부터 운영에 들어갑니다. 초등학생 1077명, 중학생 482명, 고등학생 536명입니다. 다만, 대학은 학생 수도 적을뿐더러 아직 신설하는 건 시기상조로 판단되어 우선 기술전문학교를 개관해서 필요한 교육을 대신할 예정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고등학생부터는 군사훈련과목을 편성할 겁니다. 군위원회와 상의해서 빠른 시간 안에 교육할 수 있도록 하세요.”
“넵. 사령관님.”
외세의 침입은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여겨지지만, 그보다 위험한 좀비와 구울로부터 자신과 주변을 지킬 역량을 키우기 위한 군사교육은 반드시 필요했다.
사실 성현의 영지 안에서 위험할 일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지만, 영원할 수는 없었다.
언제가 될지 알 수 없으나 대비하고 준비해서 나쁠 건 없었다.
“그리고 현시대에 맞게 사회, 역사교육을 제대로 하길 바랍니다. 현실을 정확하게 직시한 교육이 필요합니다. 왜곡된 교육은 이곳 제주에 있어서는 안 됩니다.”
지구 역사와 민족의 역사를 배우는 게 지금 세상에 무슨 소용인가 할 수도 있었지만, 과거를 앎으로 미래를 준비하는데 이보다 좋은 교육은 없었다.
그리고 현재는 역사로 남게 될 것이고.
성현은 그 중심에 서 있었다.
멸망한 세계의 게이머로 후대에 영세토록 전해질 운명이었다.
* * *
회의를 마치고 잠시 집무실에 들린 성현은 최동원과 독대를 하고 있었다.
“한번 만나보시는 게 어떨까 합니다.”
“흐음. 달리 원하는 건 없고?”
성현을 만나고자 하는 이는 이필성 대통령이었다.
그는 V-1 대피소 3구역에서 100여 명이 넘는 이들과 함께 발견되었고, 지금은 광양 영지에서 구슬땀을 흘리며 노역을 하고 있었다.
“네. 그런 건 없었습니다. 작업환경이 열악하고, 손에 익지 않은 일이라 실수는 있지만, 묵묵히 맡은 바 일을 해내고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불온한 움직임이 있다면, 그걸 구실로 삼아볼까도 했던 성현이었다.
헌데 광양 영지로 보내진 이들 대부분이 힘들어할지언정, 누구 하나 지시에 불응하는 이들이 없었다.
거기다 이필성이 나서서 모두를 독려하며, 작업에 솔선수범한다니 조금은 의외였다.
“알겠다. 어쩌면 그가 싫다 해도 한번은 만나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성현도 그를 만나 듣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다.
꼭 그랬어야만 했는지.
정말 다른 길은 없었던 것인지.
“지금 가자.”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지금이 적기로 여겨졌다.
성현과 최동원을 태운 헬기가 제주도를 이륙해 광양 영지에 도착한 건 그로부터 30여 분이 지난 뒤였다.
* * *
광양 백운 메디컬센터, 현재 이곳은 광양 영지 주둔군 숙영지로 사용되고 있는 장소였다.
제주에서 날아온 성현과 최동원은 이곳 1층의 너른 한 장소에서 이필성 대통령을 만나고 있었다.
“절 만나고 싶다 들었습니다. 왜 보자고 한 겁니까?”
성현은 서로 간에 인사나 어떤 안부의 말조차 생략한 체 본론부터 꺼냈다.
“드디어 뵙게 되었군요.”
이필성 대통령은 상당히 초췌한 모습이었다.
많이 여위고 안색 또한 파리한 게 툭 치면 억하고 쓰러질 것만 같았다.
‘해미에게 힐을 받아 몸에 이상이 있지는 않을 텐데.’
대통령씩이나 되던 양반이 딱히 지병이나 병이 있어 그런 것도 아닐 터였다
소위 말하는 심병(心病)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만나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저희를 비롯해 많은 국민들을 구해주셔서 또 한 번 감사드립니다.”
“그쪽한테 감사의 인사나 듣자고 한 일이 아닙니다. 할 수 있으니 했을 뿐이고, 할 수밖에 없어 한 일들입니다. 댁들을 구한 건 할 수밖에 없어서 한 일이 되겠군요.”
성현의 어조는 딱딱하다 못해 냉담했다.
“그런 얼굴을 하고 있는 것부터가 짜증 나는군요.”
차라리 당당하고, 자신이 행한 일에 일체의 의구심도 없는 모습이었다면.
어쩌면 최선을 다해서 한일이라 여겨줄 수도 있겠건만, 저런 회한 가득한 얼굴을 하고 죄책감에 사로잡힌 모습을 하고 있으니.
스스로가 죄지었음을 자인하고 있는 것과 같았다.
“아니 할 말을 듣기 전에 먼저 물읍시다. 당신들이 한 선택이 정말 최선이었습니까?”
성현은 입을 꼭 다문 이필성 대통령에게 가장 묻고 싶었던 바를 물었다.
이 대답 여하에 따라 성현은 대화를 좀 더 가질지 그도 아니면, 그대로 일어서 돌아갈지를 결정하려 했다.
“······당시로는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이필성 대통령의 말은 구구절절했다.
그렇다 한들 저들의 행위 모두가 정당화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이들에 대한 처우를 변경할 만큼의 이유는 되지 못했다.
강대국들의 외교적 수식어를 생략한 압박? 협박?
국민들이 극초신성의 존재를 알게 되므로 인한 극심한 사회 혼란으로 인한 국가시스템마비?
최소한의 사회재건을 위한 섹터의 마련?
“뭐 특별한 건 없네요. 더 할 말 없습니까?”
이필성 대통령의 말 중 한번쯤 생각 안 해본 내용들이 없었다. 더 들어줄 가치 있는 말들이 없었다.
괜히 귀중한 시간을 헛되이 낭비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한 가지 있습니다. 몇몇 강대국들은 최소 6개월 전에 극초신성의 존재를 알고, 대비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중 미국은 1년 이상일 것으로 파악됩니다. 그들은···.”
생소한 정보였다.
미국은 최소 1년 전에 극초신성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소수의 국가들 또한 6개월 이상은 사전에 이를 알고 대비를 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미국에서 순순히 극초신성의 정보를 세계 각국에 전달해 준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자국의 안전만 모두 도모했다는 거군요.”
“그리고 극초신성의 존재를 미국에서 정보를 공유하게 된 것도 자의에 의해서 그런 것이 아니랍니다.”
때 아닌 초대형 토목공사가 강대국들 사이에서 앞 다투어 시작되면서 이를 수상히 여기는 것은 당연했다.
각국의 정보부가 바보가 아닌 바에야 이상 징후를 포착하게 되었고, 전 방위에서 정보를 수집하게 되었다.
이는 적대국이나, 적성 국가가 아니라 해도 통상적인 첩보 활동의 하나였지만, 조금씩 취합되는 정보는 절대 일반적인 것은 아니었다.
극초신성 발발 3개월이 남은 시점에서 진실에 근접한 국가들이 있었고, 미국에 사실여부를 묻게 되었다.
더는 정보 통제가 힘들어진 미국은 전 세계 정부에 정보를 공유하게 된 것이었다.
성현이 아는 것과는 일의 과정은 좀 더 복잡했으나 결과는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다만, 미국이나 소위 말하는 강대국들이 조금만 더 빨리 정보를 공유했어도 지금의 몇 배는 되는 사람들을 살릴 수 있었다는 거였다.
* * *
이필성 대통령과의 면담을 끝내고 제주로 돌아온 성현은 기분이 가히 좋지만은 않았다.
딱히 다른 나라에까지 신경 쓸 만한 상황도 아니었지만, 그들의 행태가 심히 거슬렸다.
만약 성현이었다고 해도 그 상황에서 자국의 안전과 최대한의 국민들을 살리기 위해 노력했을 터였다.
그럼에도 화가 나고 놈들을 속으로 욕을 할 수밖에 없었다.
시쳇말로 ‘내로남불’이라 할 수 있었다.
머리로 이해는 하지만 가슴으로 받아들이지는 못했다.
“사령관님. 다들 모여계십니다.”
집무실에 홀로 상념에 빠져 있던 성현을 두식이 깨웠다.
성현은 고개를 끄덕거리고, 곧장 소회의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번엔 좀 멀리 나갔다 올 생각이다. 알다시피 내게 문제가 생기면 바로 제주도로 귀환할 안전한 방법이 있는 건 다들 알 테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이미 오전 전체회의 때 성현이 언급한 바 있어 모두 짐작하고 있던 내용이었다.
다만, 자리한 모두의 표정이 그다지 좋지만은 않았다.
“저희들이 아무런 도움도 못 드리는 것 같아, 그저 죄송할 따름입니다.”
매번 사령관이 직접 움직여야만 해결 가능하다는 부분에서 부하 된 입장으로 곤혹스럽기 그지 없었다.
대체불가의 능력을 가진 성현이 아니면 시도조차 못할 일이었고, 대안이 없는 지금과 같은 일은 이후에도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괜한 소리 말아라. 너희가 없다면 내가 안심하고 이곳을 비워 둘 수가 있겠나. 충분히 너희들은 그 몫을 다해주고 있다.”
성현은 신뢰 가득한 눈빛을 보내며, 침울해하는 수하들의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주었다.
“사령관님. 그럼 염두에 두신 곳은 어딥니까?”
성현의 목적은 알고 있지만, 그 행선지는 아직 전해 듣지 못해 조만호 대령이 모두를 대변해서 물었다.
“일단은 중국이다. 신장 위구르 지역에 10억 톤 규모의 유전이 있다고 한다. 아무래도 최근에 발견된 가장 큰 유전이라고 하니 그곳을 가장 먼저 들릴 예정이다. 그다음은 러시아를 좀 둘러봐야 할 듯해.”
자원 부국들이 주변에 있다는 게 이럴 때는 편하기도 했다.
과거였다면 마냥 부러워하고 바라볼 수밖에 없을 테지만, 세상이 이리 변한 마당에 국경 같은 것에 연연할 필요가 없었다.
내가 먼저고 우리가 우선이었다.
선점하고 가져오면 내 것이 되는 거고, 내가 찜하면 우리 땅이 된다.
성현은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