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
대륙에서 (3)
-주인. 이제 우리는 무얼 하면 되는가?
‘내가 이 사람들과 직접 대화할 방법이 없으니 너희들의 힘을 좀 빌려야겠다. 여기 대장 나오라고 해라.’
성현은 지금 스컬 드래곤 한 마리의 경추뼈에 앉아 있었다.
비교적 넓은 뼈에 엉덩이를 붙이고, 한 손으로는 뼈 사이를 감음 줄을 잡고 있었다.
-주인. 장진이란 인간에게 말해두었다. 그자를 지금 이곳으로 데리고 오겠다고 한다.
‘근데 그 장진이란 자가 왜 너희들을 돕고 있는 거지?’
-그는 주인에 미치지는 못하겠지만, 이미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인외의 존재라 할 만했다. 위험을 무릅쓰고 우리 앞에 나타나 주인을 만나게 해 달라 간청했다. 그게 전부다.
‘이능력자인가.’
성현은 스컬 드래곤이 말에 장진이란 자가 이능력자임을 확신했다. 헌데, 일면식도 없는 자신을 왜 만나려는지 그 이유는 짐작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성현은 그 장진이라는 자를 만날 수 있었다.
장진이란 자는 주변에서 쉽사리 볼 수 있는 그런 이가 아니었다.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선풍도골(仙風道骨) 호리호리한 하지만, 고아(高雅)한 풍채로 희고 정갈한 긴 수염을 하고 있는 노인이었다.
더군다나 상당히 강력한 이능력을 보유했음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대인, 일찍이 뵙고 싶어 저 멀리 장백산 넘어 반도로 찾아갔지만, 이미 대인께서는 떠난 직후였습니다. 늦게나마 인사 올리겠습니다. 소인, 장진이라 합니다.”
성현은 장진의 말에 많은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응? 생면부지인 이자가 날 어찌 알고 나를 알아보고… 아니, 그보다 내가 어디 있는지 어떻게 알고 찾아간 건지 물어봐.’
-알겠다. 주인.
스컬 드래곤의 양방향 통역을 이용한 성현은 어렵지 않게 대화를 이어갈 수 있었다.
이후 장진과의 대화는 성현으로써도 생각지도 못했던 내용들이었다.
-일찍이 천기를 읽고 주인의 존재함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인연이 닿아 만나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때를 기다려야 했지만, 자신의 성급함이 주인의 행사에 큰 도움을 못 주어 죄송하다고 말했다.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원…….’
장진의 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일종의 예언과 비슷한 것을 하고 성현을 알고 있었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찾아 나선 것까지 이해는 하겠는데, 왜 자신을 이리도 돕길 원하는지, 그리고 무엇을 위해 이러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주인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고 한다. 자신은 주인을 뜻에 따르고, 모두를 이끌어 주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이거 참…….’
일이 공교롭게도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뜻하지 않은 곳에서 조력자를 얻게 된 것이다.
그것도 한둘이 아니었다.
얼추 200을 헤아리는 이능력자들을 데리고 성현에게 투신하겠다고 했다.
‘일단 그 이야기는 잠시 후에 더하기로 하고, 이자들 중 최고 지휘관이 누구인지 물어봐.’
성현의 말을 스컬 드래곤이 장진에게 전하자 장진은 한 명의 남자를 앞으로 데리고 나와 성현 앞에 무릎을 꿇렸다.
장진은 스컬 드래곤을 마주하고, 천기에서 읽은 신인이 제남에 도래했음을 알게 되자 신속하게 움직였다.
먼저 군 지휘관들이 모여 회의 중인 곳으로 가서 그 신인의 존재를 알리고 투항을 권고했다.
하지만, 그들이 순순히 장진의 말을 들을 리 없었고, 이능력자와 군 간에 소소한 다툼이 발생했다.
이러한 일이 발생할 것이라 예상치 못했던 군 지휘관들은 순식간에 이능력자들에게 제압되어 버렸고, 모두가 굴비 역이듯 포승에 묶여 지금 구청 앞 광장에 끌려와 있었다.
-주인. 이자가 이곳의 사령관이라고 한다.
‘그래? 장진에게 말해 내가 이자를 죽인다면 어떻게 할 건지.’
성현은 거짓 투항이라 믿지는 않지만, 이런 질문을 던져 장진의 반응을 보려 했다.
-주인. 주인의 뜻대로 하면 된다고 한다. 자신들이 사심이 있어 주인을 따르는 것이 아님을 알려왔다.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주인의 뜻에 반할 생각이 없으니 안심하고 시험치 않아도 좋다고 전했다.
성현은 속마음을 읽은 듯한 대답에 조금 멋쩍었지만, 헬멧 바이저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래? 내가 손을 쓰긴 좀 그런 상황이긴 한데, 너희가 공격수단으로 쓰는 광선의 위력을 줄여서 사용할 수 있어?’
어차피 살려둘 자가 아니었다.
이런 자를 살려둬서 구심점이 되길 원치 않았고, 이자를 죽임으로써 본보기로 삼아 경각심을 심어두는 게 좋았다.
그리고 핵을 사용한 죄를 치러야 함이다.
-주인. 가능하다.
‘저자를 죽여라.’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명령을 내렸다.
성현의 손가락이 한웨이궈를 가리키자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는 그는 작은 뱁새눈을 끔뻑일 뿐이었다.
-죄인은 죗값을 받아라!
성현은 스컬 드래곤이 인간이었다면, 배우의 기질이 있었을 거란 생각을 잠시나마 했다.
시키지도 않은 말들을 상황에 맞춰 적절히 대사를 읊듯이 하는 게 영락없는 인간과 다를 게 없었다.
우우웅. 퓨슝!
스컬 드래곤의 입으로 모래알갱이만 한 작은 빛무리가 빨려들 듯 모여들더니, 이내 손가락 굵기만 한 빛줄기가 뻗어 나와 한웨이궈를 강타했다.
고통은 없었으리라.
초고열의 광선이 한웨이궈는 전신을 찰나의 순간 탄화시켜 버렸고, 그가 있던 자리엔 허연 재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 * *
성현은 장진의 도움을 받아 동부전구 전체에 대한 장악을 시작했다.
무려 20만이 넘는 군인들이 있었다.
제남 인근을 사수 중인 중앙군 7만과 후방이랄 수 있는 태산(泰山)의 섹터에 대기하며 제남까지의 보급로를 지키는 3만의 병사가 있었다.
그리고 외곽에서 좀비들을 상대로 연일 전투를 속행하고 있는 6개 여단 총 10만의 병력들이 있었다.
스컬 드래곤을 통해 지시를 받은 장진은 소수의 군 간부를 추려냈고, 성현은 이들에게 정보를 얻고자 했다.
-주인. 시키는 대로 전달했다. 그것들을 이곳으로 옮기는 일은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어떻게 하면 좋겠나?
‘위치만 알려주면 된다고 해라. 내가 직접 그곳으로 가면 돼.’
-알겠다. 주인.
성현은 군 소속 상교(대령)한 명과 장진, 그리고 소수의 이능력자들을 대동해 태산으로 향했다.
동부전구는 핵전력은 피난 섹터에 그대로 보관하고 있었고, 일전에 쯔보시에 투하된 둥평15도 그곳에서 발사된 것이라고 했다.
‘너희들 이름이 없으니 부르기가 마땅치 않다. 혹시 이름이 있나?’
-주인. 그렇지는 않다.
‘그럼 내가 이름을 지어주도록 할 테니 괜찮겠나.’
-주인이 그러하다면 그런 것일 뿐. 우리에게 선택권은 없다.
‘좋아, 그럼 너는 일룡이라고 부르고 너는 이룡이로 하자.’
성현은 표정이 없는 스컬 드래곤이지만, 일룡이 왠지 모르게 희미하게나마 웃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
반대로 이룡이는 성현과 일룡을 번갈아 보는 게 작은 불만이 있는 듯했지만, 애써 무시했다.
-주인. 일룡에게 명령을…….
-주인. 이룡에게 명령을 내려다오.
‘일룡이는 나를 따르고, 이룡이 너는 너무 멀리는 가지 않아도 좋으니 인근에서 좀비와 구울을 사냥하고 있어야겠다.’
성현은 통역사 겸 호위로 일룡이를 데리고 가려 했고, 이룡은 밖으로 내보내 경험치와 골드 벌이를 시켰다.
골드가 쪼들리다 못해 말라 버린 상태였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벌이에 박차를 가해야 할 때였다.
-주인. 명령을 수행하러 가겠다.
이룡이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차량들이 준비되어 성현과 일행들이 출발준비를 했다.
성현은 이들이 준비한 차량을 타지 않고 일룡의 목 뒤 경추에 타서 이들과 보조를 맞추었다.
‘다음에는 여기 앉을 만한 자리를 하나 만들어야겠다. 자주 타야 하는데 이건 영 모양이 안 사네.’
-주, 주인. 나는 탈것이 아니다.
‘뭐? 너 조금 전에는 내가 그러하다면 그런 것이라면서, 왜 싫어? 너 일룡이 하기 싫다면 새로 하나 만들어서 일룡이 시키고, 넌 그럼 삼룡이 하던지.
-주인. 난 주인을 태우는 것이 영광스럽다. 삼룡이라니! 그런 말은 못들은 것으로 하겠다. 일룡으로 남을 것을 택하겠다.
성현과 일룡이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 어느덧 태산의 북쪽 초입에 다다르고 있었다.
간간히 나타나는 좀비들은 상공의 일룡이 광선포로 간단히 소멸시켜버렸고, 별다른 사고 없이 지상의 일행들은 계속해서 길을 재촉했다.
* * *
중국의 5대 명산(名山) 중 하나인 동악(東岳)으로 신성하게 여겨지는 태산은 기암괴석들이 즐비한 돌산이었다.
그렇다 한들 초목이 없지는 않았고, 우거진 수림과 함께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총면적이 426㎢로 동서로 길게 늘어진 형태의 산맥은 좌측에 태산이 우뚝 솟아 있었고, 그 높이는 해발 1,545m로 우리나라의 설악산과 비슷한 높이였다.
동부전구는 이곳에 총 14개의 피난민 섹터를 만들어, 그중 5개의 섹터를 아직도 유지 중이었다.
성현은 우후샨 댐 남서쪽 분지 안에 있는 9호 섹터를 찾았다.
콰쾅! 꽈과과광!
아직 이곳 대피소 경비대에는 중앙의 사태가 전달되지 못한 탓에 작은 오해가 있었고, 대피소에서 지대공 미사일 다수가 날아와 일용을 강타했다.
쿠롸롸롸!
워낙 거리가 가까운 탓에 미처 요격하지 못한 미사일 3발을 맞은 일용이가 크게 포효했다.
‘워, 워. 진정해. 저기 잘못 건들면 큰 게 터질지도 모른다.’
사실 핵폭탄은 사용 직전 안전장치를 제거해서 활성화하지 않는다면 폭발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평상시 외부에 쉽게 노출되어 있지는 않을 테지만, 성현은 그저 조심할 뿐이다.
핵은 솔직히 좀 무섭긴 했다.
지상의 일행들이 마침 9호 섹터에 도착하고, 더는 미사일 공격이 없자 일용이도 지상으로 하강하기 시작했다.
-감히 이 몸과 주인에게 위해를 가하려 한 놈이 누구냐!
어지간한 10층 빌딩보다 큰 일용이가 강렬한 존재감과 함께 뇌리를 울리는 음성을 토해냈다.
이를 처음 접하는 9호 섹터의 경계병들은 오금이 저려 바닥에 주저 않는 자들이 태반이 넘어갔다.
‘어허. 사람들 겁먹잖아 몰라서 그런 거니 이해해 주자.’
-주인의 넓은 아량으로 이번 한번만 용서해주마.
성현은 일용이의 경추에서 뛰어내려 일행이 있는 곳으로 갔다.
이미 오간 대화가 상당했는지 이곳 경비대 대장이라는 자는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경비대 대장으로 보이는 이가 떠듬떠듬 말을 했지만, 성현이 이를 알아듣지는 못했다.
잠시 후 일용이가 통역을 해주어 그 내용을 알 수 있었다.
-주인. 모두 12기가 있다고 한다. DF-15 5기, DF-11 4기, 그리고 DF-21 3기가 있다고 말해줬다.
‘지금 바로 가져갈 테니 미사일이 있는 곳으로 안내하라고 전해.’
성현은 어쩌면 무력 저항을 완강하게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함께 데려온 대령 계급에 해당하는 장교와 장진의 영향력이 생각 이상이었는지 의외로 말을 잘 따르고 있었다.
성현은 경비대장의 안내로 9호 섹터 안으로 발을 디뎠다.
* * *
중국의 대피소인 피난민 섹터는 대한민국의 대피소보다는 그 규모가 더욱 방대했다.
병기창으로 이용되는 장소에 도착한 성현은 가히 엄청난 재래식 무기와 미사일들을 보고 기함했다.
‘이놈들은 먹고살 것보다 이것만 챙긴 거야? 뭐가 이리 많아.’
장갑차, 경전차 등등 기갑차량들이 수백 대 이상에 중소형 항공기와 헬기들도 그 정도 숫자는 되어 보였다.
혀를 내두르던 성현이 더욱 안쪽으로 들어가 상당히 큰 폐쇄 도어를 열자 드디어 찾던 물건들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