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판멸망한 세계의 게이머-98화 (98/176)

# 98

북한산 (1)

정체가 불분명한 외부인과의 접촉을 꺼리는 게 아주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상당한 피해를 감수하고 식량을 구하러 나온 이들의 입에서 나올법한 소리는 아니었다.

최소한 전후 사정을 들어볼 법한 일임에도 완강하게 접촉을 꺼리고 있었다.

분명 켕기는 게 있음이다.

일룡이가 북한산 대피소의 생존자들을 발견할 당시, 상당수의 인원이 외부에서 식량을 조달키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다 대단위 좀비 때와 조우해 치열하다 못해 처절한 전투를 치렀다.

이를 일룡이가 도움을 주었고, 저들은 급박한 상황에서도 식량을 손에서 놓지 않고 챙겨 대피소로 복귀했다.

대피소 입구만 보아도 미쳐 못 챙긴 것으로 추정되는 수송 차량들이 아무렇게나 세워져 있고, 일룡이의 광선 공격에 새카맣게 탄 좀비들의 사체가 수두룩했다.

성현은 한 대의 트럭에 있는 짐칸을 살펴보았다. 모두가 식량들로 채워져 있음을 보고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청계산 대피소의 책임자 겸 현재 제주도 전체를 총괄하는 사령관이다. 인도적인 차원에서 귀하의 대피소에 도움을 주고자 왔을 뿐이다. 다시 한 번 묻겠다. 도움이 필요하지 않은가?”

성현의 성정으로 미루어보아 싫다는데 억지로 밥을 떠먹일 일은 없었지만, 이곳 대피소는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공용 통신으로 무전을 보내고, 잠시 이를 지켜보기로 했다.

그때.

구어어어!

[ 정신 공격에 저항하였습니다 ]

“쫓아온 모양인데.”

-주인, 주변에 하찮은 것들이 모여들고 있다.

“당장 경험치 올려서 레벨업 하기엔 좀 그런데.”

주변 가까운 곳에 구울이 좀비들을 끌고, 대피소로 다가오고 있었다.

처리하는 게 어려울 리 없지만, 성현은 두식에게 부여한 게이머의 특성이 자신에게 완전히 동화되길 기다렸다가 레벨업할 생각이었다.

[ 동기화 완료까지 236시 52분 42초 ]

“열흘이라……. 정 안되면 60렙에 보너스 스텟 초기화하면 되는 부분이긴 하니까.”

열흘을 기다려 3레벨을 올리게 되면 공작까지 이를 수 있었지만, 굳이 기다릴 필요가 없기도 했다.

60렙에 도달하기만 하면, 모든 게 해결될 수 있었다.

“일룡아 주변에 다른 생존자는 없어?”

-주인을 제외한 주변에 심상으로 대화가 가능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럼 대략 500m 안쪽에는 아무도 없다는 건데.”

스컬 드래곤이 일종의 텔레파시로 소통이 가능한 거리는 중국에서 일전에 확인한 바 있었다. 그 거리가 최대로 잡았을 경우 500m 정도 되었다.

“일룡아 사냥 시작해라. 모조리 태워버려!”

-알겠다. 주인.

크롸롸롸!

일룡이는 200여 미터 상공에서 전신을 부르르 떨며 거친 포효를 내질렀다.

공기가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터져 나가 초목이 크게 꺾이며 휘청했다. 일순 좀비와 구울이 당황했음인지 사방에서 들려오던 괴성도 모두 멈추었다.

-하찮은 것들아. 모두 죽어라!

일룡의 입에서 굵직굵직한 광선들이 지상을 향해 난사를 시작했다.

아름드리나무가 터져나가고 지상에 거센 불꽃이 피워 올랐다. 한 번의 공격으로 좀비 수십 마리가 불길에 휩싸여 타올랐다.

사고 기능이 없는 좀비들조차도 주춤하는 사이 일룡의 공격은 더욱 거세게 좀비들을 몰아쳤다. 인근을 삽시간에 초토화하는 광역 공격은 가히 융단폭격을 방불케 했다.

헌데.

“어!”

예상치 못한 일로 성현이 흠칫했다.

일룡의 광선포가 지상에 도달하자 사방으로 불이 번지기 시작했다.

“일룡아! 잠깐만!”

-주인, 왜 그러나?

“이래서야 여기 산 다 태워 먹겠다.”

산불 따위야 하고 치부해 넘겨도 되겠지만, 고작 좀비 몇 마리 잡자고 불필요한 피해를 만들 필요는 없었다.

성현은 즉시 창고를 열고 거신병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오로지 물리력만 행사하는 거신병들은 산림이 훼손될지언정 산불 같은 규모 면에서는 비교가 되지 못할 터였다.

쿠쿵.

거신병이란 이름답지 않게 아담한, 3.7m의 체고를 가진 중세 기사 형상의 병기들이 지상에 나타났다.

성현은 거신병들을 전투태세로 만들고 주변으로 산개시켰다.

자신의 키만 한 검을 치켜든 거신병들의 진격에 땅거죽이 뒤집히고, 중량감 넘치는 진동이 전해져왔다.

-주인. 내게도 명령을 내려달라.

“넌 저기 불난 곳으로 가서 발로 밟아 끄던 어떻게 좀 해 더 번지기 전에.”

-아, 알겠다. 주인.

성현은 불이 더 크게 번지기 전에 일룡을 이용해 진화를 서둘렀다.

그때.

-치지지…. 여…북한산 대…피소, 구조를 요청합니다. ……장악되어, 지직…. 모두가 위험….

성현의 트랜스듀서 무전기에 공용통신으로 가냘프고 끊어질 듯 약한 무전이 들려왔다.

지상과 연결된 중계기에 이상이 있던지, 출력이 약하든 성능이 좋지 못한 무전기를 사용했음이다.

“흐음.”

성현은 침음을 삼키며, 인상을 썼다.

내용은 불명확했지만, 확실한 건 이름 모를 여성의 무전은 처음 이곳을 떠나라고 소리치던 이와는 상반된 것이었다.

*  *  *

북한산 대피소는 서울 경기 지방에 마련된 다섯 개의 대피소 중 가장 많은 사람들을 수용한 곳이었다.

총인원 6만 8천 명에 민간인 6만5천, 군부대와 치안 유지에 필요한 인력이 3천가량 되었다.

초기에 정부에서 임명한 관리자들에 의해 별다른 무리 없이 대피소는 운영되었고, 사태발발에 따른 매뉴얼을 충실히 이행했다.

하지만 극초신성 사태 한 달을 기점으로 대피소의 상황은 크게 달라졌다.

이능력을 각성한 약 150여 명이 자신들을 선택받은 인간으로 칭하며, ‘선지자 협회’를 만들기에 이르렀고, 이들의 집단행동을 우려한 대피소 지도부에서 자제를 권유했지만, 이를 빌미로 이능력자들이 거세게 반발했다.

그러다 ‘선지자 협회’ 회장이라는 이진석이 이능력자들을 선동해 대피소 전복을 시도했고, 결과적으로 대피소를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강력한 이능력을 바탕으로 한순간에 지도부를 일소하고, 스스로가 대피소의 대표임을 자처했다.

이후 군부대와 이능력자 간에 대규모 전투가 발생했지만, 대피소 내에서 화기 운용에 제한이 있는 군인들이 밀리다 못해 전투 중에 무수한 사망자를 내고 그만 항복하고 말았다.

이진석은 항복한 일부 지도부와 군 간부들을 잔혹하게 살해하고, 공포 정치를 시작했다.

“이런 썅! 이거 어디서 나오는 무전이야! 어서 막아 아니 중계기 전부 부숴버려!”

북한산 대피소 지휘통제실에 고함이 난무했다.

“회장님. 아무래도 무전 상태가 조잡한 걸로 미루어보아 생활용 무전기를 개조한 게 아닐까 합니다. 외부까지 송출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걱정 안 하셔도 될 겁니다.”

30대 초반의 사내가 그나마 침착한 음색으로 소리치는 이진석을 진정시켰다.

“만에 하나, 밖에서 저걸 듣고 돕는답시고 쳐들어오면?”

“그럴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겠지만, 저희도 약하지 않습니다. 괴물들에게 조금 밀릴 뿐이지, 아시다 시피 같은 사람을 상대하는데 절대 지지 않을 겁니다.”

그의 말에 크게 틀린 점이 없음에, 이진석은 그제야 평상심을 되찾은 듯 신색을 바로 했다.

“어쨌든 아직 불만을 가진 연놈들이 있다는 건데…….”

무전에서 들려온 신원을 알 수 없는 여자의 목소리, 혼자서 간 크게 그런 무전을 보냈을 리 없다 판단했다.

“그저께 잡은 정부 비밀 요원이었다는 놈들을 좀 더 족쳐 볼까요?”

이틀 전 이진석을 기습한 이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능력 하나만큼은 대단한 이진석이었고, 완벽에 가까운 기습조차도 통하지 않았다.

이진석은 여타의 이능력자와 달리 트리플 어빌리티(다중 능력자)라 할 수 있었다.

그는 사실상 세 가지의 능력을 구사할 수 있었다.

근거리 순간이동과 순간가속이 가능했고, 동시에 육체 계열 강화자였다.

“그런 놈이 숨죽이고 있을 줄이야. 놈과 한 패일 수도 있겠지. 좀 더 알아봐.”

“이번 기회에 뿌리까지 뽑아 놓겠습니다.”

이틀 전. 이진석을 기습 공격했던 남자 네 명과 여자 한 명은 정부에서 비밀리에 심어놓은 자들이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모든 대피소에 이들과 비슷한 이들이 존재했지만, 성현이 있던 청계산이나 양자산 대피소의 이들은 숨죽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할 수 있는 게 없기도 했지만, 순리에 순응했다 보는 게 맞았다.

*  *  *

‘그렇게 전달해.’

-알겠다. 주인, 더 할 말은 없는가?

‘최대한 빨리 준비해서 출발하라고 전해.’

성현은 북한산 대피소를 인도적인 차원에서 취할 뜻을 세웠다.

제주의 삼룡이의 중계로 최동원에게 주민 수송에 대비토록 했고, 특수군과 1개 대대병력 그리고 공군을 즉시 지원할 것을 지시했다.

그리고 휴가 중이던 두식을 호출함에, 이번 일이 끝나면 다시 휴가를 주겠다고 달래었다.

“일단 영지 선포부터 좀 하자.”

영지 선포를 해서 인근 지역을 안전지대로 만들고, 제주에서 출발한 병력이 안정적으로 착륙할 활주로를 만들어야 했다.

[기본 영지 선포를 진행하시겠습니까? (수락, 거부)]

미니맵이 오픈되고 디테일한 영지 구조를 설정할 수 있었지만, 영지의 넓이를 살펴보고 크게 변경할만한 이유를 찾지 못했다.

두둥.

잔잔하게 가슴을 울리는 진동이 성현을 중심으로 퍼져나갔다.

[영지 귀속 완료]

[영지의 이름을 부여해 주시기 바랍니다]

영지 귀속 완료 알림과 동시에 영지의 이름을 부여해달라는 메시지가 나타났다.

성현은 미리 생각해둔 문장을 영지의 이름으로 설정했다.

[영지 이름을 ‘북한산 대피소의 모든 주민을 구하러 왔습니다. 영지민 수락을 해주세요.’로 지정하시겠습니까? (수락, 거부)]

영지의 명칭으로는 어울리지 않았지만, 성현이 대피소에 들기 전 주민들에게 대피소를 해방할 뜻을 가진 사람이 있음을 알리는 방법으로 이를 활용했다.

반면 이를 알고 미리 대비할 이들이 있겠지만, 성현은 개의치 않았다.

영지가 활성화되자 성은 빠르게 성벽을 두르고 수성 병기들을 설치했다. 그리고 가까운 지대에 2k㎞에 해당하는 활주로를 만들었다.

‘넌 여기서 삼룡이하고 같이 오는 내 부하들을 기다려라.’

-알겠다. 주인.

성현은 일룡이에게 지시를 내리고 뒤로 돌아섰다.

그리고.

“발포!”

대피소 입구 공터에 정렬해둔 마력 포탑들이 일제히 포문을 열었다.

꽈과과과광!

고열과 물리력을 동반한 강력한 공격에 거대한 문이 굉음을 내며 터져나갔다.

특수 콘크리트로 외벽을 감싸고 내부에는 30mm의 강판들로 겹겹이 덧대어진 터널의 문이 첫 포성이 들림과 동시에 무용지물이 되어 버렸다.

31대의 마력 포탑의 일점사에 콘크리트는 먼지가 되어 흩날렸고, 내부의 강판은 초고열에 녹아내려 벌건 아가리를 벌린 형상으로 크게 뚫려 버렸다.

“휘유~.”

성현은 올려두었던 헬멧의 바이저를 내리고, 흙먼지를 차단했다.

“저 정도면 된 거 같네. 슬슬 가볼까.”

성현의 손에는 오랜만에 K2 소총 한 자루가 쥐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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