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
재회 (3)
공동으로 돌아온 성현은 한시가 급했다.
하지만 해미가 있는 제주에 이 상태로 정한을 데려가는 건 더욱 무리였다.
방법을 달리해야 했다.
“살려놔. 내가 돌아올 때까지 어떻게든 살려놔! 안 된다는 이야기는 하지 마! 숨만 붙여 놓으면 돼. 수단 방법 가리지 말고 숨만 쉬게 해.”
성현은 의사이자 군의관으로 있는 대위에게 지상과제를 던져주고, 미경을 돌아봤다.
“미경 씨 금방 돌아올 테니 조금만 기다리세요. 반드시 정한이 살릴 겁니다. 반드시.”
“흑흑, 성현 씨 부탁드려요.”
성현은 더 지체할 겨를이 없었다.
단 1분 1초라도 빨리 다녀와야 했다.
“귀환!”
성현은 즉시귀환을 사용해 제주로 이동했다.
“해미야!”
“어머 아저씨!”
해미가 마침 관사에 있었다.
찾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되어 성현은 크게 다행스러워했다.
해미는 이지애와 가볍게 차를 마시고 담소 중인 듯했다.
“해미야 미안한데 지금 시간이 없다. 나와 같이 가자.”
“네에?”
성현은 해미의 대답을 들을 새도 없이 해미의 손을 잡았다.
“지애 씨 조금 늦을 수도 있을 겁니다. 줄리를 좀 부탁드립니다.”
“아-. 네. 조심히 다녀오세요.”
이지애는 성현의 표정에서도 느껴지는 다급함을 보고 이유를 묻지 않았다.
현명한 여자였다.
성현은 해미의 잡은 손을 당겨 품에 안아 들고 베란다에서 그대로 뛰어내렸다.
“꺅-!”
해미도 15층에서 뛰어내린들 크게 상처 입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성현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조금 놀라 소리를 질렀다.
쿠쿵.
성현이 지상에 내려서면서 상당히 묵직한 소리를 냈다.
“에공, 허리야.”
해미가 혀를 샐쭉이 내밀며 허리를 토닥였다.
“괜찮니?”
“빨리도 물어보시네요. 그나저나 급하다면서요.”
“그, 그래. 가면서 자세히 이야기해줄게.”
성현은 창고에서 F-15K ‘슬램이글’한 대를 꺼내었다. 혹시나 몰라 챙겨둔 복좌기였다.
거기다 외부에 드롭 탱크까지 추가되어 있어 넉넉한 기름으로 맘 놓고 에프터 버너를 써도 될 듯했다.
쿠콰콰콰!
엔진에 점화가 되고, 전투기가 어마어마한 속도로 활주로를 타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F-15K의 최고 속도는 에프터버너를 사용해 마하 2.5까지 가속이 가능했다.
하지만 성현이 탄 F-15K 이미 그 속도를 넘어서 계속해서 가속하고 있었다.
무려 마하 11을 정점으로 찍고 그 속도로 순항을 시작했다.
【 민첩 1차 한계돌파 】
[광속 돌파]
-공격속도, 이동속도 300% 증가 (격투계열 육체적용 및 모든 무기 상시적용
모두 스킬의 힘이었다.
제주에서 서울의 북한산까지 고작 3분이 안 되는 시간에 도착하는 무지막지한 속도로 비행 중이었다.
* * *
정한은 꿈을 꾸고 있었다.
인생의 반 이상을 함께 했던 친우 성현을 만났고, 그가 처연하게 울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초, 중, 고 이후 군대까지, 사회에 나와서도 한결같이 절친했던 녀석이 애잔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미안한 건 자신이건만, 한낱 꿈일지언정 너무 속상했다.
그러다 꿈의 장면이 바뀌고 연인인 미경이 보였다.
더 이상 인류가 주인이 아닌 세상.
인격이 말살되어 혼돈만이 가득한 곳에 그녀를 혼자 두고 가려니 다시 한 번 삶에 대한 열망이 샘솟는 듯했다.
허나, 그것도 찰나에 불과했다.
너무도 지치고 힘에 부쳤다.
모든 걸 잊고 안식에 들어야 한다고, 누군가가 자신을 이끄는 것만 같았다.
의식이 점멸하며, 더 이상 꿈이 이어지지 않자, 이제는 정말 끝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해미야, 빨리!”
해미의 손끝에서 발현된 휘황찬란한 빛이 정한의 전신을 휘감았다.
치유계열 스킬을 1회에 한해 500% 증폭시켜 주는 해미의 특수스킬이 가미된 ‘그레이트 힐’이 정한에게 발현된 것이다.
두둑 뚝!
빛에 휩싸인 정한의 골절된 왼쪽 어깨가 자리를 찾아 들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피부의 상처들이 봉합되고, 파리한 안색은 차츰 혈색을 찾아가고 있었다.
“일단 충전된 힐링 계열 스킬은 모두 썼어요. 이제 안심하셔도 괜찮아요.”
성현은 해미의 말을 듣지 않아도 정한이 소생했음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뽑힌 손톱이 다시 자라나 제 모습을 찾았고, 멍들고 찢어진 상처들은 아물어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으음.”
“정한아!”
“정한 씨!”
정한이 낮은 침음을 흘리며 슬며시 눈을 떴다.
“또 꿈이냐.”
그러고 다시 눈을 감는다.
찰싹-!
미경이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정한의 뺨을 한 대 때렸다.
“어억! 뭐, 뭐야? 왜 이리 아파.”
“……이래도, 이래도 꿈같아요?”
정한이 누워있던 침상에서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동그랗게 뜬 눈이 송아지 눈만큼이나 커져 있었다.
“서, 성현이 맞아? 미경아 이게 어떻게…. 이거 꿈이 아냐? 현실 맞아?”
정한이 정신없이 사람처럼 성현과 미경을 번갈아 바라보며 횡설수설했다.
그리고 의식을 잃기 전 걸레짝이 된 자신의 몸이 생각나 이리저리 살폈다.
“이 새끼, 형을 보고한다는 소리가 고작 그거냐 맞아 인마.”
성현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어렸다.
죽은 줄만 알았던 둘도 없던 친구를 만났다.
너무도 반갑고 또 고마웠다.
‘살아있어 줘서.’
정한의 눈시울이 붉어지면서, 성현의 어깨며 팔 얼굴을 매만졌다.
꿈이라 해도 좋았고, 생시라면 더할 나위 없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지만, 그런 것을 따질 경황조차 없었다.
“꿈이 아니었어. 꿈이. 이 새끼 살아있었구나!”
정한이 왈칵하고 성현을 껴안았다.
성현은 가만히 정한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얌마. 순서가 틀린 거 같은데, 제수 씨 먼저 안아드려야 하는 거 아니냐?”
정한은 그제야 성현에게서 떨어져, 아직도 눈시울이 젖어 있는 미경을 바라봤다.
정한이 미경의 손을 잡아 자신에게 이끌었다.
“미안…. 걱정시켜서 미안해.”
모두가 재회의 기쁨을 만끽하는 하며, 웃음꽃을 피워 냈다.
그리고 성현은 다시 한 번 안도했다.
만약 북한산 대피소 구조를 조금이라도 늦추어 후일로 미루었다면, 자신은 지옥을 경험했을 거라 생각했다.
순간의 선택이 친구를 살렸고, 성현 본인의 정신 또한 살렸음이었다.
이번 구조는 대성공이었고, 대만족을 안겨주었다.
“이제 말해봐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분명 나는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중상을 입고 있었어. 지금 이리 멀쩡한 것도 그렇고, 넌 어떻게 여기 있는 거야? 그리고 선지자 그 개 같은 새끼들은 어떻게…….”
정한은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상황에 대해 성현을 보며 물었다.
“일단 좀 앉아서 이야기하자. 제수씨도 여기 앉아서 같이 들으시죠. 우선 소개부터 할게. 여기는 이해미양 널 살려준 장본인이시다.”
성현의 말에 정한은 해미를 바라보고 상당한 동안의 닥터 정도로 생각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이 은혜 제가 죽어도 잊지 않겠습니다.”
“에이~ 별걸요. 우리 아저씨 가장 친한 친구 분이시라는데 당연히 할 일을 했을 뿐이에요. 감사 인사 받으려고 한 것도 아니에요.”
“우, 우리 아저씨요?”
“정한아, 이야기가 좀 길다 모두 이야기해줄 테니 잠깐만 기다려 주라. 우선 밖의 상황을 좀 마무리해야겠다. 그리고 좀 있으면 네가 반가워할 애들이 많이 올 테니 마음 단단히 먹어라. 하하하.”
“성현 씨 제가 곁에 있을 테니 나가셔서 일보세요. 제가 대충이라도 설명하고 있을게요.”
“네. 제수 씨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그리고 말씀 드렸다시피 떠날 채비를 하시면 될 겁니다.”
“네. 그럴게요.”
정한은 둘의 대화에 끼지 못하고, 멍하니 가만히 있었다.
오가는 이야기가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알 턱이 없던지라. 세이경청(洗耳傾聽)하는 수밖에 도리 없기도 했다.
* * *
성현은 해미와 임시막사에서 나와 주 소령을 찾았다.
“앞서는 오해 해서 미안했다.”
“아, 아닙니다. 충분히 그럴 만한 상황이었습니다.”
성현의 사과에 주 소령이 주뼛거리며 말을 받았다.
“그리 생각해 주어 고맙다. 그리고 무엇보다 미경 씨를 보호해 줘서 너무 고맙다. 그에 대한 보답은 내 반드시 하지.”
성현은 진심으로 주 소령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그가 친구의 연인인 미경을 비밀리에 보호해 주어서 그녀가 안전할 수 있었고, 또 외부에 무전을 보내는 데도 도움이 컸다고 전해 들었다.
이번 일은 주 소령의 공이 컸다.
삐빅.
-사령관님 들리십니까?
“도착했구나.”
-넵! 사령관님.
마침 귓가로 최동원의 무전이 들려왔다.
긴급 출동 명령이 내려지고, 거의 4시간 남짓한 시간 만에 북한산에 부대를 이끌고 도착한 것이었다.
-특수군 1팀에서 4팀을 선발대로 천두식 대령의 지휘하에 대피소 경내로 진입했습니다. 터널 입구 파손된 문은 현재 해체 중이고, 완료되는 즉시, 제가 1개 중대를 데리고 내려갈 예정입니다.
“알겠다. 주민 수송에 별문제는 없어?”
-네 사령관님. 천두식 대령이 여객기 41대 등 필요한 장비는 모두 챙겨 왔습니다. 제주에서도 추가 영지민을 받기 위한 준비를 서두르고 있습니다.
“그래 알겠다. 잠시 후에 보도록 하자.”
-넵. 사령관님.
성현은 최동원과 무전을 끝내고, 어리둥절해 하는 주 소령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궁금한 게 많을 걸로 안다. 지금 내 수하들이 이곳 대피소 입구에 도착했다고 한다. 곧 일부 부대가 이곳으로 진입할 테니 그들을 통해 일부나마 의문을 해소할 수 있을 거다.”
“아, 알겠습니다.”
* * *
-아아, 모두 질서 있게 저기 앞에 보이는 기수를 따라 이동해 주시면 됩니다. 그리고 절대 안전하니 겁먹지 않으셔도 됩니다.
확성기를 잡은 부대원들이 북한산 주민들의 수송을 독려하고 있었다.
상공에는 일룡이와 삼룡이가 주변을 경계 중이었고, 대 좀비 전투에 특화된 무장을 갖춘 병사들이 지근에서 이들을 호위 중이었다.
“그럼 먼저 출발하십시오.”
최동원이 성현과 일행을 배웅하고 있었다.
북한산에서 성현이 할 일이 크게 없었다.
인벤토리를 가지고 있는 두식이 성현의 할 일을 대체하고 있었고, 스컬 드래곤 두 마리와 각종 공격 헬기들이 성현의 빈자리를 채워줄 것이었다.
“그래, 고생 좀 해라.”
이미 사전에 충분한 이야기를 나눈 상태여서 덧붙여 할 말이 없었다.
다른 할 일이 많은 성현은 이번 북한산 주민 수송을 최동원에게 일임 했고, 제주로 복귀할 예정이었다.
성현과 해미 그리고 친구 정한과 연인 미경은 같은 여객기에 올라 제주로 향했다.
긴급 귀환을 사용한 성현은 도리 없었지만, 해미도 성현과 함께하길 원했다.
그리고 정한과 못다 한 이야기가 많은 성현은 짧게나마 그간의 이야기를 할 시간을 가졌다.
극초신성 사태가 발발할 당시 정한이 과거에 넌지시 알려준 유령역에 들어간 일이며, 해미와 함께 하게 된 이야기.
그리고 정한이 건네준 팔찌 덕분에 각성에 이르기까지.
“왜, 지금 생각하니 아깝냐?”
“그럼 아깝지 안 아까워? 그런 능력이 있었으면 그 고생을 하지도 않았을 텐데.”
“돌려 달라면 지금이라도 돌려줄 테니 말만 해라.”
“이자슥이 누굴 좀팽이로 아나. 아마 나한테는 소용없을 거 같다. 내가 너 주기 전에 나도 차봤는데 그런 게 나타나지는 않았거든. 팔찌가 주인을 찾아간 거겠지.”
“뭐? 이미 차봤었어?”
“처음 살 때 차보고 국내 입국 전에 아마 몇 번 더 있었을걸.”
성현은 정한의 말에 다시금 팔찌를 바라봤다.
자신이 뭔가 특별해서였을까? 그도 아니면 때가 되어 팔찌가 깨어난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커흠. 어찌 되었든 다음 차례는 나다.”
“그건 좀 생각해보고.”
“야아! 그 팔찌 나도 일정 부분 권리는 인정해 줘야지. 상도덕이 없냐.”
“아따, 고놈 참 알았다 알았어.”
성현과 정한이 투덕거리며, 이야기를 할 때 해미와 미경은 둘만의 은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언니. 제가 아직 어려서 그런 걸까요?”
“아니 어딜 봐서 해미가 어리다는 거니? 어머머 이 가슴 봐봐 D컵?"
“E, E컵이에요…….”
“어머나 성현 씨 복 터졌네. 언니만 믿어 내가 힘껏 도와줄게.”
해미는 성현과 함께 살고 있지만, 그 사이가 미묘하고 애매했다. 마음은 예전부터 성현을 담아두고 있지만, 성현의 마음을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을 여자로 보는 것이 아닌 것은 아닌지 최근 들어 부쩍 불안한 마음이 떠나질 않았다.
과감한 수영복을 입고 스킨십을 해보기도 했고, 우연히 마주친 자신의 나신을 성현이 보고도 목석같이 대했었다.
“해미야 걱정 마. 언니가 산전수전 공중전 육탄전까지 모두 알려줄게. 언니만 믿어.”
“언니 고마워요.”
두 여인의 대화는 떨어져 있던 탓에 정한은 들을 수 없었지만, 성현은 충분히 들을 수 있었다.
“너 볼이 왜 이리 빨개?”
이유를 모르는 정한이 고개를 갸웃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