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판멸망한 세계의 게이머-111화 (111/176)

# 111

일상 속으로 (1)

“이거 도움이 되지 못해서 어쩌죠?”

“아닙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던 탓이죠. 진실과 거짓을 구분해 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선진홍의 털어놓은 말들의 진실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시작된 신문은 반쪽짜리에 불과했다.

이지애의 생각을 읽어 내는 능력도 언어의 장벽에 가로 막혀 그녀의 능력을 십분 발휘하기는 어려웠다.

“무기력하고 혼란스럽지만 거짓을 이야기하지는 않았습니다. 큰 도움이 되지 못해 죄송해요.”

“아닙니다. 지애 씨. 고생하셨습니다. 해미야 나는 아직 할 일이 좀 남았으니까 지애 씨 하고 먼저 돌아가 있을래.”

성현은 생각과 달리 쉽지만은 않은 신문을 마치고, 이지애와 해미를 먼저 돌려보내려 했다.

“네. 아저씨~ 지애 언니, 우리 미경 언니도 불러서 맛있는 거 먹으러 가요.”

“그럴까?”

“저기 시내에 생긴 스테이크집이 맛 집으로 소문났어요. 우리 거기 가요. 아참, 아저씨 오늘 저녁에 집들이 있으니 늦지 말구요. 꼭 최 준장님이랑 1대대장 그분도 데려오세요.”

“어? 어. 그래 알았어.”

두 여인이 다정히 팔짱을 끼고 모니터실을 나서 대기하고, 있던 부대원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성현은 해미와 이지애 그리고 김미경까지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는 게 좋기도 하지만, 조금 우려스럽기도 했다.

“저분들한테 이상한 거 배우면 안 되는데……. 근데 집들이를 원래 이사한 다음 날 하는 건 좀 이르지 않나 모르겠네. 뭐, 알아서 잘하겠지.”

뇌리에는 해미와 미경이 여객기 안에서 나누던 대화가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이사한 직후 바로 집들이를 하겠다는 해미를 말리지 않았다. 더없이 행복해 보이는 얼굴에 초를 치고 싶지는 않았던 탓이다.

“일단 이 녀석부터 처리를 하자.”

성현은 선진홍을 다시 가방에 구겨 넣고, 새벽에 도착한 이룡을 불러 데려가게 했다.

“멀리 갈 건 없는데, 한적한 곳에서 해.”

-알겠다. 주인.

이룡은 성현의 뜻에 따라 인적 드문 곳에 가서 선진홍을 자연의 품으로 돌려보내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 * *

“저장 가능 용량은 56만 킬로리터(KL)입니다. 배럴로 따지면 352만 배럴 정도입니다.”

내정위원회 산하 새로이 신설된 산업자원부 장관이 성현에게 말했다.

“저장 공간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생산량이 하루에 36만 배럴인데 10일 치도 저장 못 할 텐데.”

성현은 여수 영지 중흥부두에서 동쪽으로 9㎞ 떨어진 유류 저장시설을 살펴보고 있었다.

신장위구르 석유 영지에 세워진 ‘2급 시설’에서 생산되는 석유는 시간당 1만 5천 배럴에 달했고, 이를 저장할 시설이 시급했다.

별도의 저장 시설을 지정하지 않아 계속해서 성현의 ‘가용 자원’으로 등록되고 있던 탓에, 버려지는 것은 없었지만, 필요할 때마다 자신이 석유를 가져다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 정도입니까? 그러시다면 이곳 말고도 네 곳의 저장 시설이 더 있습니다. 해안을 따라 내려가시면 두 곳의 오일 터미널이 있고, 한곳의 비축시설이 있습니다. 이곳과 모두 더한다면 약 310만 킬로리터 1,950만 배럴은 소화가 가능할 거 같습니다. 그리고 차후에 울산까지 염두에 두신다면, 족히 1천만 킬로리터는 저장하실 수 있을 겁니다.”

성현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거리며, 그 정도면 충분하다 여겼다.

어찌 보면 작은 저장시설이라 해도 지정된 저장고의 용량이 줄어들면, 다시 채워져 석유가 모자랄 일이 없기도 했다.

다만, 자신에게 뭔가가 계속해서 집중되는 것을 피하고 싶은 심리가 있었다.

보다 현실적인 저장 창고에 보관하기를 원했다.

차량을 타고 이동하면서 성현은 일일이 저장시설을 둘러보고, 석유 영지의 2급 채취 시설과 연동시켜 석유가 저장되도록 했다.

이 후, 성현은 여수 영지와 본격적인 가동에 들어간 광양 영지의 제철시설을 시찰하고, 식량 생산기지인 나주 영지까지 둘러 본 연후에 다시 제주로 복귀했다.

제주에 도착하고 보니 군위원회 단독 회의가 한참이었다.

성현은 그 중간에 참석해 주재자가 아닌 참관인으로 회의 진행을 지켜봤다.

“내장산 대피소는 앞서 무등산 대피소와 관계도 적지 않아. 대화로 설득이 가능할 걸로 보여 집니다. 특수군 A팀 기준과 경호 두 형제가 상당히 적극적입니다.”

특수군 대장으로 자리를 옮긴 두식이 휴가를 모두 마치고, 업무에 복귀해 있었다.

두식은 A팀 팀장과 부팀장으로 있는 두 형제가 건네준 정보를 토대로 발언을 했다.

“무등산 대피소 때는 우호적이었다 해도 지금은 상황이 변했는데 괜찮겠습니까?”

“저의 생각도 3대대장과 같습니다. 우선은 저희의 의도를 숨기고 일단 접촉해서 저쪽의 사정을 한 번 더 살피는 게 좋을 듯합니다.”

성현은 모두의 말이 맞기는 하나, 원하는 방향으로 작전회의가 진행되지 못하고 있었다.

“모두 관가하고 있는 게 있는데 과연 한반도에서 지금 우리의 전력을 보고도 대항할 세력이 있다고 보나?”

지켜보던 성현이 던진 한마디에 모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준 항공모함 크기의 부유 요새에 10층 빌딩 크기와 맞먹는 스컬 드래곤을 보고도 저항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길 리 없었다.

“뭐, 자유 투항이 좋기는 하지만 그만큼 공들일 필요가 있을까? 만약 현대무기로만 전투가 있다 한들 저들과 우리의 차이는 극복하지 못할 정도라 보는데.”

거기다 현대 무기도 압도적으로 우세한 전력을 보유한 제주는 동원 가능한 무력이 1개 대피소가 감당할 무력이 아니었다.

“모두 맞는 말이긴 하나. 우리와 저들의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본다면 답은 정해져 있다고 본다. 특수군을 필두로 투입 가능한 무력은 모두 동원한다. 확실하게 기를 죽이고, 단번에 장악해서 주민들을 수송하도록 해라.”

성현은 그 말을 끝으로 회의장을 떠났다.

그 뒤를 따라 최동원이 급히 일어서 따라 나왔다.

“저…….”

“왜? 무슨 문제 있어?”

“사령관님 혹시 스컬 드래곤 지원이 좀 더 가능하신지….”

최동원은 성현이 군 위원회에 인계해준 일룡과 삼룡이 있지만, 보다 많은 스컬 드래곤으로 무력충원을 원했다.

군은 언제나 배가 고팠다.

압도적인 힘을 가진 스컬 드래곤 1마리는 공격헬기 1개 편대보다 강력하다는 판단이었고, 효율을 따질 문제가 아니었다.

탄약이라는 제한적인 물품을 소모하지 않아서 좋았고, 투입 후 연료 재보급과 같은 일을 할 필요도 없었다.

“얼마나 필요해? 얼마면 되겠냐?”

“어, 얼마나 주, 주실 수 있으십니까?”

“자식이 말 더듬지 말고, 다 털어 갈 생각이냐? 필요한 숫자나 이야기 해봐.”

“……그럼 10마리.”

“콜!”

“아니 20마리만.”

“준다.”

“그럼 30마리!”

“그쯤 하자 인마. 30마리 지원해 줄 테니 알아서 잘 굴려봐. 지금 당장은 힘들고 모레면 가능할 거다. 모레 인계해줄 테니 받아가.”

성현은 이러다가는 끝이 날 것 같지 않아서 선을 그었다.

중국에 풀어 놓고 온 스컬 드래곤들이 시간당 2천만 골드, 하루면 4억 8천만 골드를 벌어 주고 있었다.

당장 3억 골드 정도에 불과했지만, 이틀 후면 10억 골드를 훌쩍 넘게 되어있었다.

스컬 드래곤 30마리는 문제 될게 없었다.

다만, 성현은 2급 무기는 최대한 생성을 자제하려고 했던 의도에서는 벗어난 것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가장 신임하는 부하인 동시에 동생인 동원이 오랜만에 하는 부탁을 들어주지 않기도 그랬다.

이번만은 예외로 두기로 했다.

“저…….”

“저 뭐?”

“제가 어제부로 자작에 올랐는데. 크흠. 골드도 좀 주시면…….”

최동원은 권위가 20에 도달해 ‘자작’으로 승급해 있었다. 수천 마리의 닭을 도축하고 수백 마리의 돼지와 소를 도축해 이룬 성과였다.

“그래? 축하할 일이네. 내가 미리 챙겨줘야 하는데 일이 바쁘다 보니 그리됐다. 좀 넉넉히 줄 테니 필요하면 나나 해미한테 언제든지 이야기해라.”

“넵. 감사합니다.”

성현은 최동원의 손을 잡고 게이머간 교환을 활성화해서 무려 1억 골드를 넘겨주었다.

“헉! 이렇게나 많이 주셔도 됩니까?”

“자식이 스컬 드래곤 30마리는 별로 놀라지도 않더니, 1억 골드가 스컬 드래곤 3마리 값밖에 안 돼 인마.”

“허험. 그도 보니 그렇군요. 하하하.”

“그건 그렇고 오늘 저녁에 해미가 다 같이 저녁 먹는다고 하면서 너하고 만호도 데려오라고 하던데, 늦지 말고.”

“넵. 이따 뵙겠습니다.”

* * *

“아이렌 언니 하나 언니 어서 오세요~.”

“아, 오랜만이에요. 해미 씨.”

“어머! 이건 뭐에요?”

“빈손으로 오기가 그래서…….”

“뭘 이런 걸 다. 이러지 말고 어서 안으로 들어오세요.”

성현은 호텔의 스위트룸을 사택으로 이용하다. 어제부로 주택으로 자리를 옮겼다.

줄리가 항상 뛰어놀기를 좋아하는 것도 있었고, 해미도 답답한 호텔보다는 넓은 주택을 원해서 괜찮은 주택을 하나 골라 옮겨왔다.

번개 불에 콩 볶아 먹듯 해미는 그다음 날인 오늘 갑자기 집들이를 한다면, 부산스러웠다.

“와 집이 너무 좋아요.”

“언니. 여기 옆에 모두 빈집이거든요. 옆으로 이사 오실래요? 전 언니하고 하나 언니 모두 가까이 지내고 싶은데 어때요?”

“……제가 어떻게.”

“에이. 최 준장님하고 잘되면 모두 가족이 될 텐데 괜찮아요. 그리고 2대대장님 하고 하나 언니 요즘 만난다고 들었는데…….”

“네. 네? 아 그게.”

극초신성 사태 이전 걸 그룹으로 활동했던 블루벨벳의 아이렌과 리와이스의 하나는 갑작스러운 해미의 돌직구에 당황했다.

사실 아이렌은 최동원이 자신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지만, 단번에 그 마음을 받아들이기에는 마음이 넉넉지 못했다.

대피소 안에서 겪었던 충격적인 일들이 뇌리에 남아있어. 인간에 대한 불신과 남자에 대한 거부감이 아직 많이 남아있었다.

최근 들어 이지애 씨와 상담을 통해 많이 희석되고 있었지만, 아직은 힘든 것이 사실이었다.

“정말? 그럼 난 이곳 옆에 살고 싶기는 한데.”

아이렌과 달리 하나는 얼굴을 붉히고, 해미의 말에 호응하고 있었다.

“하나 언니 제가 제일 좋은 곳으로 알아봐 드릴 테니 걱정 마세요. 아이렌 언니도 생각해보고 언제든 말해주세요.”

“네. 그, 그럴게요.”

아이렌과 달리 하나는 이미 조만호 2대대장과 상당히 친밀한 사이가 되어 있었다.

그만큼 조만호는 최동원보다 적극적이기도 했었고, 하나 또한 그런 조만호가 싫지만은 않아 최근 들어 마음을 열고 사귀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나이 차는 8살이나 나지만, 큰 거부감이 들 정도는 아니어서 둘은 만나면 죽이 잘 맞았다.

“동생들 보니 우리는 너무 늙은 거 같네요.”

“에휴-. 세월에 장사 있나요.”

이지애와 김미경은 반짝이듯 아름다움을 가진 해미와 아이렌 그리고 하나를 보며 푸념했다.

* * *

성현은 친구인 정한과 제주 인근을 함께 시찰하고 관사로 돌아오니 이미 모두가 모여 있었다.

본관 앞에 너른 잔디밭 한가운데 테이블이 펼쳐져 있었고, 그 옆에는 숯불에 고기가 노릇하게 구워지고 있었다.

“사령관님 오셨습니까.”

큼지막한 집게를 들고 고기를 굽고 있던 두식이 성현을 반겼다.

“퇴근하고는 그냥 다들 편하게 하자니까 또 그런다. 인마 형님 해봐.”

“아-. 혀, 형님. 오셨습니까. 정한이 형님도 같이 오셨네요. 다들 자리에 앉으시죠.”

“어. 그래 두식이 고생이 많네.”

두식은 성현의 전 보좌관으로서 정한에게 인수인계를 할 당시 상당히 친해져 이미 형, 동생 하는 사이가 되어있었다.

“파파-.”

“어이쿠. 우리 줄리 오늘 하루도 잘 놀았어?”

“응 파파. 이거 너무 맛있어. 파파도 같이 먹어.”

“그래, 그래.”

줄리가 달려와 성현의 품에 넙죽 안기면서 포크에든 고기를 보여주며 말했다.

성현은 줄리의 입가에 묻은 기름기를 살짝 닦아주며,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른 것 같았다.

옛말에 내 새끼 입에 들어가는 음식만 봐도 배부르다더니 틀린 말이 하나 없었다.

성현은 줄리를 내려놓고, 고기를 굽고 있는 두식에게로 향했다.

고기 한 점을 입안에 넣은 성현이 익숙한 인기척에 뒤를 돌아보던 때였다.

“오, 오빠-. 오셨어요.”

“푸, 푸헙!”

성현은 두식이 굽고 있는 잘라둔 고기 한 점을 입에 넣다 사례가 걸려 컥컥거렸다.

“어머! 오빠 괜찮아요?”

해미가 성현을 오빠라 부르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