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판멸망한 세계의 게이머-123화 (123/176)

# 123

과거에서 돌아온 악연(1)

“우아아앙! 파파 미어!”

지상에 내려온 성현은 어쩔 줄 몰라 했다.

줄리가 자신도 날개를 달아 달라며 졸라 대는데 들어 줄 수 있는 일도 아닐뿐더러 만일 된다고 해도 그것도 문제였다.

급기야 울음을 터트리고 그치질 않으니 성현은 안절부절못했다.

“에고, 오빠 애들 앞에서 물도 함부로 못 마신다는 말 몰라요.”

“아니 난 그냥······.”

성현이라고 자랑삼아 줄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게 아니었지만, 괜히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해미도 덩달아 같이 달래고 있지만, 뾰족한 수가 있을 리 없었다.

“저······.”

하나가 조심스레 성현을 보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줄리 몰래 비슷한 날개 장난감을 하나 만들어 주세요. 꼭 진짜일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애들이잖아요.”

“아-아. 예. 이거 고맙습니다.”

하나의 말이 틀린 이야기도 아니었고, 성현이 찬물 더운물 가릴 처지도 아닌지라 하나의 조언을 따르기로 했다.

“크흠. 줄리야 파파가 그럼 줄리 날개도 만들어 줄게 조금 기다려 줄 수 있어?”

“우응? 정말?”

“그럼~ 파파가 약속할게.”

줄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울음을 뚝 그치고 조막만 한 손으로 턱에 다소곳이 댔다.

‘정말 애들 앞에서는 조심해야겠다.’

줄리의 모습은 성현이 생각에 잠길 때의 습관을 그대로 닮아 있었다.

아이들은 어른의 행동을 보고 그대로 답습하게 된다는 말을 다시 한 번 상기했다.

하얀 도화지에 어떤 바탕의 어떤 그림을 그릴지는 어른들의 몫이 그만큼 큰 것이다.

“아라쩌. 그럼 몇 밤?”

“음, 파파가 다섯 밤 되기 전에 우리 줄리 날개를 가져다줄게.”

“우웅, 너무 많아.”

“그래 좋아. 그럼 세 밤!”

줄리가 딜을 하겠다는 의미로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성현은 줄리의 손가락에 자신의 손가락을 걸고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날 이후로 성현에게는 별칭이 하나 더 생겨났다.

날개 달린 영주님, 빛통령 등등 호사가들의 입을 통해 널리 퍼져나갔다.

* * *

성현이 공작에 오른 8일 째 되는 날.

9월 4째 주 화요일, 오늘은 24절기의 하나인 추분(秋分)으로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진다는 날이기도 했다.

“여, 여기가 진정 제주여?”

“그렇다 카데요. 인자 여서 살끼라고 카던데. 아재는 어디서 왔는교.”

“웜마 이게 꿈인겨 생신겨, 참말인겨.”

한반도 전역의 대피소에서 이주되어 오는 이들로 공항은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마침 때가 맞닿아 충청도와 경상도의 대피소에서 출발한 기동요새가 동시에 제주 공항에 착륙했고, 수만에 달하는 이주민들을 쏟아 내고 있었다.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지하 대피소와는 생소한 환경에 놀랄 틈도 없이 한곳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아, 아! 여러분 모두 환영합니다. 이미 지급받으신 순번대로 이동이 곧 시작될 겁니다. 자신의 순번이 앞쪽이라 생각되시는 분들은 앞으로 나오시고 1만 번대 이상이신 분들은 우선 뒤로 물러나 계셔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같은 번호표를 받으신 분들은 반드시 같은 차량에 탑승해 주셔야 합니다. 이점 유념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제 경험이 쌓일 대로 쌓인 공무원들은 빠르게 주민들의 이동을 독려하며, 과거와 달리 철밥통이라 불리며 늑장 부리는 일 따위는 없었다.

“이제 서울경기 지역만 남은 겁니까?”

“예. 사령관님. 그리고 금일 이후부터는 광양 영지와 여수 영지로 주민들을 수송하게 됩니다.”

이미 제주는 거의 포화상태에 다다라 있었다.

성현이 공작에 오른 뒤 두 개의 영지를 추가로 만들고, 거기다 기존의 영지를 권위의 상승으로 크게 확장했지만 한반도의 모든 생존자들을 받아들이는 건 제주의 여건상 무리가 따르는 일이었다.

“모두 고생이 많습니다. 이제 조금만 더 하면 그 끝이 보이는 만큼 조금 더 분발해 주시기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성현은 오랜만에 영지 전반을 둘러보다 기동요새가 곧 도착한다는 전갈에 공항에 와있었다.

그 옆에는 안영식 내정위원회 의장과 성현의 보좌관인 친구 정한이 동행하고 있었다.

다수의 공무원들이 영지 순시에 동행하려 했으나 성현의 제지로 모두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 업무에 매진하고 있었다.

“어! 성현이 아냐? 맞네. 야-! 박성현!”

주민들 틈을 비집고 나오는 한 사내가 성현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어느새 주민들의 대열을 이탈해 이송 대기 라인을 벗어나고 있었다.

질서유지를 위해 인근에 있던 군인들이 이를 제지하려다 사령관의 이름을 동네 강아지 이름 부르듯 부르는 탓에 혹시나 하는 생각에 이를 막지 못했다.

“누구?”

성현은 기억이 날 듯하면서도 잘나지 않았다.

분명 안면이 있는 사람이 분명했지만, 크게 가까이 지낸 이가 아닌 이였다.

“응? 나야 인마! 형이야.”

성현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조금 거리를 두는가 싶더니 다시금 한 발짝 앞으로 나서서 이야기했다.

“이 새끼 출세했네. 여기서 한자리하고 있어?”

성현이 붉은 띠로 이어진 라인 안의 이송 주민들과는 다른 입장에 있음을 알고는 더욱 알은체 해왔다.

거기다 이곳에서 신분이 평범하지 않음을 주변 분위기로 알아챘다.

“이거 참.”

성현도 그제야 이자가 누구인지 생각이 났다.

고교시절 한 학년 위의 선배였던 사람이었다.

별로 좋은 기억은 없는 이였다.

“자식이 성공했네.”

“살아 있었네. 그다지 반갑지는 않지만, 어쨌든 제주에 온 걸 환영한다.”

“뭐? 있었네, 환영한다? 세상 많이 변했다지만 이 자식이······.”

성현은 상대할 가치가 없다 여겼다.

고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불편한 관계로 엮여 앞에 있는 선배라는 이가 졸업할 때까지 힘든 고교생활을 해야만 했었다.

“어라! 이 새끼 기동이 이기동 아냐? 너 이 새끼 잘 걸렸다.”

“정한아. 됐다. 그냥 둬.”

뒤에 있던 정한도 그제야 누구인지 알아본 듯 팔을 걷어붙이며 앞으로 나서는 걸 성현이 말렸다.

“야! 저 새끼한테 그렇게 당했는데 그걸 그냥 놔, 놔둡니까?”

정한이 살짝 흥분했음인지 살짝 언성이 높아졌지만, 이내 자신의 언행이 지나침을 깨닫고 급히 말을 바꾸었다.

“이미 십 년도 더 지난 일이다.”

성현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리고 다시 이기동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내가 알기론 학년은 달라도 나이는 같은 걸로 아는데 내 반말이 듣기 싫어도 틀리지는 않았을걸. 어떻게 대피소에 들어가 살았는지는 모르지만 예전같이 개차반 같은 식으로 살면 이곳에서 살기는 힘들 거다. 그리고 넌 지금 선을 넘었다. 이주 주민들 대열로 다시 합류해.”

성현은 더는 두고 볼 것이 없다는 듯 뒤돌아 공항 청사를 빠져나갔고, 그 뒤를 씩씩거리며 정한이 따라 나갔다.

그리고 그 뒤를 향에 욕지거리해대는 이기동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 *

“야, 난 아직 이기동 그 새끼한테 부러진 갈비뼈가 겨울만 되면 욱신거린다. 너도 나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지 않냐?”

과거 성현과 정한은 이기동에게 상당한 고초를 겪었었다.

그 이유가 어찌 보면 치기 어리게 보일 수 있지만 당시에는 자못 심각했다.

성현과 정한이 같은 동네에서 친하게 지내던 초등학교 동창 여자애가 한때 성현을 좋아했고, 이기동은 성현을 좋아하는 그 여자애를 짝사랑했었다.

처음 괴롭힘을 당할 당시 몰랐지만, 나중에 그 이유를 알고 나서는 허탈했다.

초등학교 동창 여자애가 보낸 한 통의 편지가 화근이었다. 그리고 그 여자애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른 남자애와 사귀는 상태였지만, 이기동은 성현에게 모든 화풀이를 해댔던 것이다.

“야, 그리고 우리가 당한 것만 있는 것도 아니잖아.”

성현은 예나 지금이나 당하고만 있을 성격의 인사는 못되었고, 그래서 더욱 시달림을 받았었다.

“쪽수 아니면 뭣도 안 되는 놈들이었는데······.”

정한도 성현의 말을 곱씹으며 지난날을 회상하는지 말을 길게 늘였다.

“근데 기동이 저 새끼 3학년 말미에 너희 부모님 장례 끝나고 전학은 갑자기 왜 갔데?”

“한국에서는 성적이 안 되고, 집안은 좀 살겠다. 어디 유학이라도 갔겠지.”

성현은 잠시 생각하는 듯했지만, 크게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당시 부모님이 화재로 돌아가시고 경황이 없기도 했지만, 겨울방학 직전이라 전학을 갔다는 사실은 알아도 그 시기는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그래? 어쨌든 집이 좀 살긴 했지.”

“됐다. 그 이야기는 그만하고, 열흘만 있으면 너한테 특성 부여해 줄 수 있는데 그거나 이야기하자.”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어?

성현은 일전에 정한에게 특성을 부여해 줄 것이란 약속을 했었다.

그 약속은 성현이 정한에게 은혜를 갚는다는 것도 있지만, 정한이 했던 게임이 그 유명한 ‘별들의 전쟁’이었기 때문이었다.

“특별히 할 말이 있겠냐. 너도 알잖아. 스타 시즌 원부터 쓰리까지 그것만 했는데.”

“자식, 한 우물만 줄 창 팠으니 딴 게 튀어나올 일은 없겠다.”

별들의 전쟁은 온 국민의 최애 게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게임으로, 우주를 전장으로 펼쳐지는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이었다.

인간을 비롯한 4종족 중 한 종족을 선택해 전투를 벌여 승패를 가르는 대전형식으로 게임은 치러졌다.

미래형 기계화 보병부터 시작해 전자포와 우주전함까지 등장하는 게임의 설정은 단순하지만, 성현에게는 결코 단순하지가 않았다.

“근데 데미칼 광석이나 베린 가스 같은 것은 어떻게 구하냐? 그런 게 없으면 게임 진행이 안 될 텐데.”

“흐음, 그것도 그러네.”

일부 불안한 부분도 있었다.

게임을 진행하면서 필요한 물자는 각자의 스타팅 포인트에 있는 광석과 가스를 캐면 모여지는데, 이를 활용해서 전투 유닛과 화기를 생산해 낼 수 있었다.

“설마 지구에 없는 그런 걸 필요로 하면 말짱 도루묵인데.”

“그렇다 한들 좋은 점은 틀림없이 있을 거다. 시즌 2부터 플레이어를 직접 유닛으로 전투에 참여했으니, 그리고 혹시 아냐. 네가 커맨드센터 타고 우주를 활보할지.”

성현과 정한은 기동이라는 악연이라면 악연일 수 있는 과거의 인연을 만난 것은 잊은 채, 곧 있을 특성 부여에 관한 이야기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만날 인연은 꼭 만나게 된다는 것이 반드시 선연만이 아닌 듯, 얽히고설킨 과거의 인연들은 끊임없이 돌아와 다시 얽힌 매듭을 풀고 가고자 했다.

* * *

“시발 새끼! 존만 한 새끼가 뭐, 사령관?”

이기동은 이를 뿌드득 갈아대며, 연신 혼잣말로 욕설을 내뱉었다.

“키키킥. 시발, 감히 날 업신여겨? 지 부모가 어떻게 뒤졌는지도 모르는 병신이······.”

자신도 모르게 속에 있는 말을 중얼거린 기동은 급히 고개를 들어 누가 들은 이가 없는지 살폈다.

다행히 작은 소리였고, 상당히 소란한 와중이라 누구 하나들은 이가 없었다.

“조심해야지. 그 새끼가 아무래도 여기 먹은 거 같은데. 주둥아리 함부로 놀리다 골로 갈라. 그래 이까짓 일쯤이야. 그리고 혹시 알아 언제고 기회가 되면······. 크큭. 넌 또 좆 되는 거야, 이 새끼야. 룰룰루.”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기동은 잔뜩 찌푸린 언짢은 기색이 봄눈 녹듯 풀리고, 휘파람까지 불어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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