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판멸망한 세계의 게이머-127화 (127/176)

# 127

과거에서 돌아온 악연 (5)

김도훈은 지하 방공호에 피신하고, 30여 분도 지나지 않아 다시 자신의 침소로 돌아와 있었다.

그리고 노한 그의 목소리가 누군가를 질책하고 있었다.

“뭐라! 처치한 게 아니라 그저 쫓아냈다는 말이냐!”

“폐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무려 55기나 되는 지대공 미사일을 맞고도 건재한 괴수였습니다. 결코 군의 잘못만은 아닐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일본 자민당 총재이자 현재 황거의 총 집사를 겸임 중인 후쿠다가 군을 대변해 말했다.

“더 강한 공격으로 없앨 수는 없는 건가? 더 강한 무기는 없나?”

김도훈은 고개를 숙이고 있는 이토 관방장관을 향한 물었다.

“폐하. 사실 평화헌법이 무력화된 2015년부터 본격적인 무기개발에 착수했습니다. 그리고 군에 신형무기가 보급하기 직전 극초신성 사태로 말미암아 빛을 보지 못한 물건들이 있습니다.”

“그런 게 있었나?”

“예! 폐하. 정식명칭은 없지만, 레일건이라는 신형 무기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쓰면 될 것이 아닌가!”

“레일건은 대량의 전력을 필요로 하는 무기인지라 반드시 폐하의 윤허가 필요했습니다.”

군은 극초신성 사태 이후 실전 배치를 다시 서둘렀지만, 제한적인 전력 공급이 문제였다.

시험 발사를 하려 해도, 도쿄 전역이 한시적인 정전상태에 돌입하게 되어 버리는 탓에 실전 테스트를 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현재 도쿄에는 750MW급 화력 발전기가 가동 중이었지만, 이도 정상적인 운용이 되고 있지는 못했다.

그런 와중에 레일건을 사용하기는 큰 부담으로 작용했고, 이대로라면 사장될 비운의 무기였다.

하지만 천황의 이름하에 불가능은 없었다.

전력 공급에 차질이 생겨도 괜찮다면 이야기는 달라졌다.

“허락할 테니 다음번에도 그 같은 괴수가 나타나면 절대 놓치지 마라!”

“예! 폐하. 당장 조치하도록 하겠습니다.”

김도훈이 손을 휘휘 저으며 축객령을 내리자, 모두가 깊이 읍을 하며 밖으로 나섰다.

모두를 내보낸 직후 김도훈은 자신의 나이에 반도 안 되는 여인을 다시 품에 안으려 침상으로 향했다.

그렇게 식혀진 몸이 달아오르려던 차였다.

“폐, 폐하!”

“아-. 또 뭐!”

몇 번의 방해로 거사를 치르지 못한 김도훈은 울화통이 치밀어 올라 소리쳤다.

* * *

“요란법석 떨 필요는 없겠지.”

조용히 다녀갈 생각인 성현은 소란이 일어날 것에 대비해 높은 상공에서 비행 중이었다.

‘찬란한 날개’ 스킬로 생성된 빛의 날개는 눈부시게 밝은 빛을 발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어두운 밤하늘에 눈에 띄는 것임이 분명했다.

남들 보기에 어떨지 모르지만, 너무 눈에 띈다는 자체가 성현에게 단점으로 작용했다.

“저기가 일왕이 산다는 곳인가?”

일본이 천황이라고 우러르는 것이 못내 못마땅한 성현이었다.

엠페러(Emperor). 즉, ‘황제’라는 호칭 자체가 논리적으로 맞지 않았다. 여러 나라를 지배하는 나라가 아닌 단일 국가체제인 일본이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하는 건 웃기는 일이라 생각했다.

천황이라는 이름이 우리나라의 일제강점기를 떠오르게 하는 탓에 성현은 호칭 자체가 몹시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말이지 이쪽 놈들은 영 정이 안가.”

앞서 심문한 군 간부는 천황을 가히 신으로 추앙하고 있었다.

명령만 떨어진다면 당장이라도 할복할 것만 같은 표정과 말에 성현은 학을 떼고 말았다.

“좋은데 사네.”

상공에서 내려다본 황거는 깊고 넓은 해자로 둘러져 있었고, 성벽을 연상케 하는 돌담이 높게 쌓여져 있었다.

그리고 내부에는 넓은 정원과 수십 채의 건물들로 들어차 있었다.

그중 길이가 150m를 넘는 이름 모를 길쭉한 건물과 망루로 쓰였음 알 수 있는 성루(城樓)가 유독 눈에 띄었다.

“저기다.”

지상을 면밀하게 살피던 성현의 신형이 10㎞ 상공에서 자유 낙하해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가속도가 붙은 성현의 육체는 공기를 가르며 지면에 근접하고 있었다.

츠파파팟!

건물과 충돌하기 직전 성현은 비행 스킬을 다시금 활성화했고, 찰나의 순간만을 이용했다.

그리고 일순간에 정지 상태가 되면서 급격한 반작용이 성현의 육체를 덮쳤지만, 별다른 부담을 주지는 못했다.

“자-, 황제가 사는 방 좀 구경해 보자.”

2층 누각의 기와에 사뿐히 내려선 성현은 소리 없이 움직였다.

열려진 2층 창을 통해 은밀하게 누각 내로 들어선 성현은, 두 명의 근위병들을 향해 바람처럼 이동했다.

파팟!

“잠시 잠 좀 자 둬라.”

간단히 뒷목을 쳐서 기절시킨 성현은 이들을 벽에 기대어 앉혀 놓고, 천황의 침소일 것으로 짐작되는 방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 * *

화려함보다 고풍스러운 느낌의 침소는 한바탕 열풍이 지나간 이후였다.

남녀 모두 피로했던지 잠에 빠져 있었고, 성현은 천황으로 짐작되는 자의 곁으로 갔다.

“이거 어디서 많이 본 면상인데···. 누구랑 닮은 건가?”

물끄러미 침상에 잠든 사내를 내려다보던 성현이 중얼댔다.

“······이, 이 자식 이거 김도훈 아냐!”

성현이 생각지도 않았던 이를 보게 되어 적잖이 놀랐다.

십중팔구는 죽었을 거라 생각하고 애써 잊힌 자였음이다.

“이 새끼가 어떻게! 야, 일어나.”

성현은 원목으로 된 침상을 발로 툭툭 찼다.

우지끈.

은밀히 왔다 가려던 생각은 이제 더는 없었다.

다른 이라면 몰라도 김도훈이라면 어떻게 해서 지금과 같은 일들이 모두 일어났는지 짐작되는 바가 있었다.

“으음. 감히 누가 짐의 처소에서 허락도 없이 발을 디뎠느냐!”

실눈을 뜨며 잠에서 깬 김도훈은 대뜸 호통부터 쳤다.

“이 새끼, 이거 가관이네.”

성현은 팔짱을 끼고 김도훈을 비딱한 시선으로 내려다봤다.

“뭐라? 감히··· 헉!”

침소의 어스름한 불빛에 드러난 침입자의 모습을 살피던 김도훈은 숨이 턱하고 막혔다.

매일 같이 자신의 왼손을 보며 이를 갈아온 장본인이 바로 눈앞에 서 있었다.

“사, 살려······.”

김도훈은 사색이 되어 허둥댔다.

“하-. 이거 살아있는 것도 놀라운데 네가 천황이냐?”

“사, 사령관님. 살려만 주신다면 이, 일본을 모두 바치겠습니다. 제발 목숨만은······.”

상황파악을 단숨에 완료한 김도훈이 침상에서 뛰어 내리듯 내려와 성현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폐, 폐하!”

소란한 와중에 잠에서 깬 여인이 소리를 질렀다.

차창!

짧은 단도를 어느 틈에 꺼내든 여인이 나신의 몸으로 성현을 향해 짓쳐 들었다.

궁내부 소속의 사토미 아야는 육체계열 이능력자로 천황의 밤 시중은 물론 최측근에서 호위하는 수신호위였다.

캉!

사토미의 검격은 일격필살의 기세를 머금고 있었으나, 성현의 가벼운 손짓 한 번에 단도의 검 날은 산산 조각나 흩어졌다.

“쯧······.”

성현은 나신의 여인에게 손을 쓰는 게 조금 꺼림칙했지만, 더 날뛰게 놔두어 보고 있기는 좀 민망했다.

순식간에 수도로 여인을 기절시킨 성현은 침상의 이불로 나신의 여인을 가렸다.

“이번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세뇌한 거냐?”

성현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당장에 쳐 죽였어야 함이 맞지만, 그리된다면 이미 세뇌된 이들을 정상으로 되돌리는 게 불가능해 졌다.

거기다 궁금한 것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일단은 살려두마.”

성현은 창고에서 큼지막한 가방을 하나 꺼냈다.

일전에 선진홍 남부전구 사령관을 집어넣었던 것과 같은 가방이었다.

* * *

“어쩐다······.”

성현은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김도훈을 발치에 두고 고민했다.

이미 놈에게서 얻을만한 정보는 모두 들었고, 이제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어차피 원상복구는 안 되는 일이고.”

김도훈은 능력이 가일층 진보해 대단위의 광역 세뇌가 가능해졌고, 이를 이용해 수백만에 이르는 일본인들을 세뇌한 상태였다.

도쿄에만 400만에 이르는 이들이 있었고, 모두 김도훈의 매혹에 걸려있었다.

김도훈을 살려두고, 일본인들의 세뇌를 풀어내는 건 어차피 불가능한 일이었다.

기존 세뇌에 다른 세뇌를 덮어씌워야 하는데 강력한 충성심이 심어진 이들에게 다른 대상으로 대체해줘야 했다.

“시간도 걸리고, 헌데 꼭 그래야 하나?”

적잖은 시간이 걸릴 일이었다.

더군다나 그 대상을 할 만한 이도 없었고, 하려면 성현이 되어야 하는데, 별로 내키지 않았다.

그러다 생각을 다른 관점에서 해본 성현은 어쩌면 김도훈이 사라져도 큰 문제가 없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도훈의 매혹에 걸린 이들은 일상생활에 문제가 없고, 기본적인 사고는 매혹에 걸리기 전이나 이후나 큰 차이가 없었다.

김도훈을 신격화해서 나타나는 충성심은 김도훈이 사라짐으로써 없어지지는 않겠지만, 그 대상이 없는 이상 문제 될게 없었다.

“그래도 좀비나 구울들까지 매혹시키는 능력은 정말 아깝긴 한데.”

인간은 미울지언정 그 능력만큼은 아깝기 그지없었다.

허나, 아쉽다 해서 살려두는 어리석은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겪어본바 김도훈은 자신이 아니고서는 관리가 되는 이가 아니었고, 살려뒀다가는 두고두고 후회하는 일이 다시 생길 수 있었다.

“크으윽.”

성현은 정신을 차리는 김도훈을 차갑게 내려다봤다.

“넌 어떻게 해도 살려두기는 힘들겠다. 능력을 올바로 썼다면 갱생의 여지가 있었겠다만, 그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제주를 공격할 생각까지 한 이상 용서할 수는 없다.”

김도훈은 이전 제주에서 당해본 경험이 있어서인지 의외로 모든 것을 술술 털어놓았다.

성현이 크게 손을 쓸 것도 없이 그저 제스처를 취하는 것만으로 김도훈은 아직 실행하지 못한 제주를 공격할 계획까지 모두 토설했다.

다른 건 몰라도 제주를 공격하려 했던 것은 상당히 위험한 발상이었다.

전투기나 전폭기들로 폭격을 해서 단 한 발이라도 영지에 떨어져 누군가 다치거나 죽게 되었다면, 이는 적을 아무리 많이 죽여도 회복되지 못하는 상처였다.

“시, 시발!”

의식을 차린 김도훈은 성현의 눈빛에서 어떤 결연한 의지를 읽었음인지 욕지거리부터 내뱉었다.

그리고 자포자기했음인지 얼굴에 묘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이제 끝내자.”

“크크큭.”

김도훈은 미친 듯이 웃어 댔다.

자신의 죽음을 눈앞에 두고 미쳐버린 것인지, 침까지 질질 흘려가며 웃어 제쳤다.

“죽여, 흐흐흐, 이 시발 놈아. 내가 죽어서도 복수하러 간다. 크크큭.”

성현은 고개를 모로 꼬고 자신이 모르는 뭔가 있나 했지만, 죽기 직전의 발악 정도로 치부했다.

절대 놈이 살 수 있는, 단 1의 가능성도 남겨둘 생각이 없었다.

힘들게 일어선 김도훈은 하늘을 보며, 파안광소(破顔大笑)했다.

“크하하하!”

서걱!

어느새 성현의 손에는 기다란 장검이 들려져 있었고, 가공할 속도로 공간을 헤집었다.

수십, 수백 수천 번의 검격이 김도훈을 향해 휘둘러졌다.

확실한 죽음, 썩어 없어질 육신조차 남기지 않으려는 성현의 의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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