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3
왕국 (2)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왕국의 조건과 마법 결계를 확인한 성현은 더 기다리고 자시고 할 이유가 없었다.
“왕국 선포!”
[왕국에 포함될 영지를 선택해 주시기 바랍니다]
1.제주 1영지
2.나주 영지
3.제주 2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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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임시 영지13
성현은 나열된 영지 중 왕국에 포함될 제주 내에 있는 영지 10개를 선택했다.
현재 제주에는 성현이 만든 5개의 영지가 거의 대부분의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기존에 있던 최동원의 영지는 그 크기도 작고, 외부 작전에 필요한 일이 있을 경우에 대비해 회수한 상태여서 제주에는 성현의 영지만이 존재했다.
[왕국의 이름을 부여해 주시기 바랍니다]
“대한!”
[왕국의 이름을 ‘대한’으로 지정하시겠습니까? (수락, 거부)]
이름 정도야 어렵게 생각할 거 없었다.
그저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유지하고, 소속감을 줄 수 있는 정도의 이름이면 족했다.
[왕국 ‘대한’이 귀속되었습니다.]
[왕국 영토에 속한 영지의 주민들은 ‘대한’ 왕국의 주민으로 자동 전환됩니다.]
“사령관님!”
성현의 왕국 선포가 모두 완료된 직후 친구 정한이 급히 문을 열고 들이닥쳤다.
그리고 무슨 말을 하려다 말고 그저 멍하니 바라보고 섰다.
“어? 어!”
정한이 성현을 바라보며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말문이 막히는지 ‘어어’ 하는 소리만 내고 있었다.
“왜? 방금 무슨 메시지창이라도 떴어?”
“그, 그것도 있지만, 머리 위에 쓰고 있는 그건?”
성현은 정한이 무얼 보고 저런 말을 하는지 몰라 고개를 들어도 보고, 자신의 머리를 쓱 하고 한번 쓰다듬어봤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정한의 시선이 자신의 머리맡에서 떠나질 않자 성현은 집무실 한편에 있는 전신 거울로 다가갔다.
“아-. 젠장!”
휘황찬란한 황금빛 왕관이 성현의 머리 위에 떠 있었다.
성현은 왠지 모르게 손발이 오그라드는 느낌을 받아야만 했다.
* * *
왕국 선포를 마치고, ‘앱솔루트 베리어’ 설치까지 일사천리로 처리한 성현은 제주 하늘과 해상까지 모두 포함한 반투명한 결계를 바라봤다.
일반인의 눈에는 보이지도 않은 막이 제주 전체를 보호하고 있었다.
“100억 골드 값어치는 하겠지.”
성현은 가슴 한구석이 언제나 불안했는데 이번을 계기로 어느 정도 희석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와~! 파파 나도, 나도!”
집으로 돌아가자 줄리가 달려 나와 성현에게 덥석 하고 안겨들었다.
그리고 양손을 성현의 머리 위로 뻗으며 말했다.
성현의 머리 위에 보이는 왕관을 보고 처음에는 신기해하고 좋아했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줄리가 자신도 왕관을 달라고 보채는 통에 어디 문구점이라도 가서 당장 하나 구해 와야 할 판이었다.
‘안 돼. 그랬다간······.’
왠지 더 큰 사단이 날것만 같았다.
“오빠 제건요?”
줄리만 이런다면 어떻게든 해결이 가능하겠지만, 해미도 ‘나 뿔났어요.’ 하는 표정으로 하고 있었다.
해미는 진작부터 자신이 왕비라는 말을 입에 달고 있었는데 성현과 달리 해미에게는 왕관이 없었다.
* * *
다음날 오전 일찍 7시가 조금 지난 시각.
성현은 친구 정한의 집을 찾았다.
“이거 긴장되네.”
정한은 연신 시계를 훔쳐보며, 긴장한 기색이 완연했다.
그리고 성현도 시간이 거의 다 되었음을 확인하고는 창고에 고이 넣어둔 팔찌를 꺼내 오른 손목에 채웠다.
그럴 일은 없을 거라 생각하지만, 팔이 절단된다던지 그도 아니면 어떤 계기로 말미암아 부서진다면 이보다 더 큰 일은 없었다.
혹시라도 모를 유실이나 파손이 우려되면서부터 성현은 창고에 팔찌를 넣어두고 있었다.
어떤 한 유무형의 피해도 입지 않는 창고만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라 할 만했다.
“시간 됐다.”
“지금 바로 하게?”
“일 분 일 초라도 빨리하는 게 좋아.”
얼떨떨해하는 정한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성현의 손길이 정한의 머리 위를 스쳐 갔다.
[ 게이머 ]
[ 스페셜 에이전트 ]
성현이 정한의 머리 위 ‘특성 부여 가능’ 텍스트를 터치하자 두 개의 선택지가 나타났다.
다른 선택지는 고려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거침없는 손길이 ‘게이머’에 닿았다.
화아아악!
그 순간 팔찌에서 찬란한 빛이 터져 나왔다.
이미 몇 번을 반복했지만, 특성 부여와 함께 나타나는 광경은 언제나 신비롭기만 했다.
강렬한 빛을 발하던 팔찌에서 구슬 하나가 미세한 빛으로 쪼개어져 산란하더니 서서히 허공에서 뭉치기 시작했다.
빛의 구체가 중력을 거슬러 올라 정한의 머리맡에 부유하더니 더욱 강한 빛을 발산했다.
츠츠츠팟!
일정한 간격을 두고 빛은 수축과 팽창을 반복하더니, 순간 분화하듯 무수히 많은 빛의 알갱이로 화해 정한의 몸 곳곳으로 스며들어 이내 사멸했다.
[ 특성 부여 완료 ]
[ 게이머 손정한의 능력을 공유받습니다 ]
[ ★게이머 박성현의 환경을 재설정 합니다 ]
[ 동기화 완료까지 2,399시 59분 59초 ]
“제기랄 역시나!”
앞서 최동원에게 특성을 부여하고 24시간, 이후 두식은 240시간, 이번에 친구 정한에게 특성을 부여하고 동기화까지는 무려 2,400시간, 100일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아니길 바랐지만, 기대는 여지없이 부서져 나갈 따름이었다.
* * *
성현은 정한에게 특성을 부여하고 의식을 잃은 정한을 편한 침실에 눕혔다. 친구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려주고 싶지만, 해야 할 일들이 산적해 있었다.
제수씨인 미경에게 연락해 정한을 돌봐달라는 말을 남기고, 성현은 서둘러 정한의 집을 나섰다.
그리고 그길로 빠르게 제주 청사로 향했다.
성현은 청사에 도착 즉시 긴급회의를 소집했고, 기다렸다는 듯이 10여 분 만에 모든 위원회 인사들이 모여들었다.
“이건 일종의 ‘징표’입니다. 징표 소지하지 않고서는 제주를 왕래할 수 없습니다. 개인의 소지품 정도는 상관없지만 큰 물건들은 이 징표를 부착하지 않으면, 통과할 수 없습니다. 우선 급한 대로 1천만 개를 만들어 배포할 예정이니 관련 부서에서 수령해가도록 하세요.”
성현이 손가락 두 마디 정도 크기의 ‘징표’를 손에 들고 말했다.
제주에 눈에 보이지 않는 ‘마법 결계’ 일종의 방어막을 설치했음을 알리고, 더는 이전과 같은 참사가 발생하지 않을 것임을 공표했다.
그리고 ‘징표’의 용도와 사용처에 대해서도 알려주어 사전에 이를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했다.
“마지막으로 오늘 회의를 소집한 가장 큰 이유를 알려 주겠습니다. 현재 흩어져 있는 외부 영지에 있는 주민들을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모두 제주로 불러들이기 위해서입니다.
성현의 말이 있은 직후 장내에 작은 소란이 일었다.
“사령관님. 당장 제주는 외부 영지의 모든 주민을 받아들일 여유가 없습니다. 만일 한다 해도 지금은 절대 무리입니다.”
“그것도 그렇지만 이제 겨우 정상화에 들어간 석유화학단지와 철강공업단지는 어떻게 하시려고 하십니까?”
대부분이 우려를 표명하며, 여러 이유를 들어 반대의 의견을 내고 있었다.
성현도 익히 잘 알고 있지만, 더 이상은 모두가 무용한 일일 뿐이었다.
식량은 수백만 명이 수년을 먹을 양식이 창고에 넘쳐나고 있었고, 산업발전이나 사회기반 시설 재건은 이제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모두의 시간이 불과 1년도 남지 않았다.
“지금 본인은 여러분들의 의견을 듣고자 해서 이런 지시를 하는 게 아닙니다.”
성현이 얼굴을 굳히고 회의장을 둘러보며 강한 어조로 말했다. 모두가 지금까지 성현의 모습과는 상반된 모습에 입을 다물고 경청했다.
“다시 말하지만 반론은 허용하지 않겠습니다. 현 시간부로 외부 영지의 주민들을 모두 제주로 이송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최장 6개월 정도는 모두 제주에서 떠날 수 없다는 점 유념하길 바랍니다.”
성현은 단호했다.
모두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알려, 더 큰 혼란을 초래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모두 맡은 바 자리에서 이후 발생할 혼란에 대비해 대책을 마련하고, 방법을 찾길 바랍니다. 이상 회의를 마칩니다.”
성현이 회의를 파하자 모두가 허둥대며 발등에 불이 떨어진 듯 서둘러 회의장을 떠나갔다.
“동원이 너는 기동 요새를 이용해 최단 시간 안에 주민들을 이송할 수 있도록 해라.”
모두가 떠난 회의장에 최동원과 극소수의 인원만이 남아 성현과 가까운 자리로 이동해 앉아있었다.
“넵! 사령관님.”
“모두 궁금하고, 묻고 싶은 게 많을 줄로 안다. 때가 되면 말해 줄 테니 지금은 참아주길 바란다.”
성현은 측근이랄 수 있는 군위원회의 주요 간부들에게도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지금은 절망적이라는 말밖에는 당장에 해줄 말이 없었다. 희망의 메시지를 함께 전해 줄 수 있는 시간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 * *
일본 센다이에 상륙한 미 해병대는 스텔스 무인기인 프레데터C 어벤져를 앞세우고 무력 정찰과 함께 전차와 장갑차에 나눠 타고, 후쿠시마를 거쳐 22시간여 만에 도쿄에 도달하고 있었다.
미 해병대는 시가전을 대비해 많은 준비를 했지만, 하등 쓸모가 없었다.
단 한발의 총탄도 날아오지 않았고, 외려 자신들을 안내하기 위해 일본 정부에서 사람을 보내오기까지 했다.
총사령관인 월시 제독의 명령으로 해병대는 동쪽 외곽에 위치한 일본 방위성에 전진 기지를 차리고 장기 주둔을 위한 채비에 들어갔다.
이어 도쿄 남서쪽 요코스카항에 마침내 미 함대가 입항했고, 도노반이 일본 땅에 발을 디뎠다.
도노반은 항구에 접안하자마자 일본 정부에서 보내온 이의 안내를 받아 도쿄 청사에서 일본내각각료들과 대면하고 있었다.
“당신이 일본의 총리인가?”
“······그렇습니다. 마사토 총리입니다.”
마사토 총리는 성현이 군을 철수하면서 미군에 저항치 말고 최대한 협조하라는 당부의 말을 잊지 않았다.
어쩌면 일본을 배려한 성현의 말이 고맙기까지 한 마사토 총리는 미 함대가 요코스카 항에 입항한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장관급 인사를 보내 이들을 마중하기까지 했다.
자국민들에게 작은 피해도 생기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고자 함이었다.
“우리가 생각하고 있던 자가 아니군.”
“이런 무례한!”
새로운 내각이 구성되고 외무대신으로 입각한 요시히로였다.
“일국의 총리를 대면하는 자리요! 언사에 신중을 기하시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마사토 총리의 얼굴엔 굴욕을 감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굳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요시히로는 미군과 함께 도착한 자가 정중하기는커녕, 무례하기 짝이 없는 언사로 자국의 총리를 대하는 것을 보고 분기를 참지 못해 나섰다.
영어로 이야기하지만 외교 관례에 따른 수식어는 고사하고 격식조차 차리지 않고 있었다.
한 눈에 봐도 안하무중이요 무시하고 있다는 걸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그런 요시히로를 도노반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바라봤다.
무심하면서도 섬뜩한 눈빛이었다.
“일국의 총리를 대면하는 자리임을 기억하시오! 당신이 누구인지 부터 커억!”
강단이 있는 요시히로는 도노반의 눈빛에 주눅 들지 않고 다시 한 번 강하게 이야기했지만, 끝내 말을 마치지 못했다.
“하찮은 놈이 감히 내 말을 끊어!”
도노반이 순간적으로 사라지는가 싶더니 요시히로의 앞에 나타나 그의 목을 잡고 번쩍하고 치켜들었다.
적지 않은 키에 살집도 제법 있는 요시히로가 가냘프기까지 한 도노반의 손에 의해 허공에 몸이 떠올랐다
까드득!
누가 말릴 새도 없이 요시히로의 목이 크게 꺾이며 모로 기울었다.
“꺄악!”
“저, 저런!”
너무도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놀란 각료들이 소리를 지르며, 자지러졌다.
총리와 내각각료들을 호위 중인 경호원들이 일제히 권총을 뽑아 들었다.
총구가 자신을 향하고 있지만, 도노반은 긴장한 기색 없이 여유롭기까지 했다.
그리고 비릿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총리하고 뒤에 있는 계집만 살려놔.”
붉은 눈의 도노반의 친위대가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