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판멸망한 세계의 게이머-157화 (157/176)

# 157

미국으로 (3)

“여, 여긴?”

“이제 정신이 좀 듭니까?”

“사령관님!”

아키꼬는 의식을 차리고 눈앞에 성현이 보이자 크게 안도했다. 그리고 안타까움에 눈물을 흘렸다.

“이, 이게 꿈은 아니죠. 사령관님 그 간악한 자들이······.”

성현은 다소 미안한 마음에 아키꼬가 진정되기를 기다렸다.

자신이 좀 더 신중하게 대처했다면, 전날 미 함대를 비롯해 방금 한 줌 재로 화한 뱀파이어들을 어쩌면 처치할 수 있었을 터였다.

“아키꼬 씨. 지금 일본을 수습할 사람은 당신뿐입니다.”

한참을 흐느껴 울던 아키꼬가 어느 정도 진정되자 성현이 말했다.

이 말에 의미를 모르지 않는 아키꼬는 크게 심호흡을 하며 이를 악물었다.

스스로를 다잡는 듯했다.

성현은 그런 모습을 보고 다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현재 일본의 처한 상황을 간략히 설명해 줬다.

“이제 안심해도 됩니다. 더는 해를 끼칠 놈들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주민들을 안정시키는 데 주력하세요.”

“하, 하지만, 그놈들이 또 나타나면 저희는······.”

아키꼬는 성현의 말을 듣고 모든 상황이 정리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조금 전에 겪었던 극심한 공포를 이겨내기엔 아직 힘든 상태였다.

성현은 불안에 떠는 그녀를 보고 못내 그냥 가기는 마음이 좋지 못했다.

자신이 청해 내각에 참여시켰던바, 일말의 책임감이 들었던 탓이다. 아키꼬에게 제주에서 데려온 스컬 드래곤 중 일부를 남겨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안전을 보장해주겠다는 약속을 하기에 이르렀다.

어차피 백여 마리 정도의 스컬 드래곤들을 일본에 남겨둔다 해서 문제가 될 건 없었다.

“이 녀석들을 통해 언제든 소식을 전할 수 있으니 급한 일은 그렇게 하시면 됩니다. 그럼 다음에 또 뵙도록 하죠.”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떠나는 성현의 뒤로 아키꼬는 연신 감사의 말을 전하며, 허리를 펴지 못했다.

성현은 아키꼬에게 있어 개인적으로 생명의 은인이고, 일본 전체로 보면 구국의 영웅이라 할 만했다.

“우리는 당신의 이름을 영원히 잊지 않을 겁니다.”

아키꼬는 일본이 존재하고 일본인이 단 한 명이라도 남는 순간까지 이를 전하고 영세토록 사령관의 이름을 길이 전하겠다는 사명감에 불타올랐다.

* * *

“이럴 수가!”

안토니오는 수확을 몇 시간 앞두고, 극심한 상실감에 화들짝 놀랐다.

최초의 계약자이자 제1 권속이 된 도노반이 영원한 안식에 들어갔음이었다.

원래라면 계약의 주체가 되어준 도노반이 없다면, 지구라는 행성에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수확을 통해 힘들게 모은 집약된 마기는 차츰 흩어져 종국에는 분신을 유지하기도 힘든 상태에 다다라 마계로 역소환 되어야 마땅했다.

하지만 안토니오와 다른 군주들은 앞서 아리스의 일을 교훈 삼아 수십만의 인간을 희생시켜 계약의 주체가 필요한 소환이 아닌 강림 의식을 시행해 이제는 계약자 없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다만 안토니오는 자신의 일부를 떼어다 만든 권속인 도노반을 잃은 탓에 상당한 상실감을 감내해야만 했다.

“무슨 일인가, 안토니오?”

중부의 산토스가 안토니오에게 어떤 문제가 생겼음을 짐작하고 물었다.

“도노반과의 연결이 끊어졌다.”

“동아시아에 보냈다고 한 권속을 말하는 것인가?”

“그렇다. 이제는 고위급 뱀파이어가 되어 제법 쓸 만해졌다 생각했는데.”

“고위 뱀파이어를 상대하려면 그만한 대사제급 능력자가 아니면 불가능했을 텐데. 설마 잔존한 초월자들의 의지인가?”

“그건 아니다. 이 별은 차원 결계가 유명무실해진 시점부터 초월자들의 간섭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아무래도······.”

“그렇다면 그자인가?”

안토니오와 산토스는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이때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며, 누군가 급히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충성! 긴급 보고입니다. 동아시아로 출진한 함대가 코드명 알파의 공격으로 전멸했습니다.”

충격적인 소식임이 분명했지만, 안토니오와 산토스의 반응은 담담하기까지 했다.

이미 도노반이 안식에 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함대 또한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했던 탓이다.

“일본 현지에 상륙한 해병대와의 통신도 모두 두절 된 상태입니다. 그리고 도노반 장관님의 행방도 현재 불투명한 상태입니다.”

“알겠다. 지금부터 알파의 추적에 전력을 다하도록 한다. 나가봐.”

안토니오는 보고한 군 지휘관에게 지시를 내렸다. 이후 알파의 행보가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 미국의 대응도 결정해야 했다.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군 지휘관이 신속히 장내를 벗어나자 안토니오는 산토스를 돌아봤다.

“시기가 좋지 않은데 수습할 수 있겠나?”

“괜찮은 수족 몇과 인간들의 전력을 일부 잃었다 해도 크게 변할 건 없다.”

산토스의 물음에 안토니오는 별스럽지 않게 답했다.

안토니오 휘하에는 아직 많은 권속들이 있었고, 어렵게 복구한 함대가 전멸했다지만 크게 아쉽지는 않았다.

별의 종막이 멀지 않은 지금 고작해야 인간들이 만든 쇠붙이와 수만 명 정도의 인간들이 없다 한들 대세에는 큰 영향을 줄 수 없었다.

“수확만 차질 없이 진행되면 그렇겠지. 문제가 생기면 책임을 져야 할 거다.”

산토스는 자신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긁어 부스럼을 만든 안토니오에게 못내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못했다.

“내가 선점한 영역이다. 충고는 고맙지만, 간섭은 사절이다.”

* * *

“일본에 상륙한 미군과 함대는 모두 처리했다. 그리고 내친김에 미국에 다녀올 예정이다.”

-지금 바로 가실 생각이십니까?

“좀 걸리는 일이 있다. 아무래도 지금 움직이는 게 좋을 거 같아.”

-네. 알겠습니다.

성현은 제주에 상황이 마무리되었음을 알리고, 미국으로 건너갈 생각임을 전했다.

이번 일을 계기로 미국의 상황을 직접 확인할 필요성이 있었다. 시간을 두고 지켜볼 사안이 되지 못했다.

마계에서 튀어나온 지구상에 없던 존재들로 말미암아 이후 어떠한 일이 발생할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주민 수송에 문제는 없나?”

-넵! 사령관님. 일부 혼란은 없지 않았지만,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금일 중으로 모두 마무리될 예정입니다.

“알겠다. 고생해.”

-아-! 사령관님.

성현은 무전을 마치려고 하던 차에 통신병이 재차 성현을 찾았다.

-현재 위성 통신은 태평양을 건너시면 일부 두절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 그 문제는 제주에 있는 일룡과 이룡을 통해 급한 연락은 취하면 된다. 다른 문제는 없나?”

-넵. 사령관님.

“그리고, 비서실장에게 내가 지시한 일은 어떻게 되고 있지? 상황변화가 있으면 언제든 보고하라고 전달해. 이상!”

-알겠습니다. 사령관님.

성현은 무전을 끝마치고 서서히 비행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도쿄 동쪽 나리타시를 지난 성현은 동쪽 해안에 위치한 조시시를 순식간에 지나쳐 어느새 해상으로 나오고 있었다.

“8천 킬로가 조금 넘나? 1시간 안이면 도착하겠네.”

정확한 비행 속도를 알지는 못했지만, 성현은 최소 마하 7이상 어쩌면 마하 9는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대략 마하 8로 잡아도 시속 9,800km에 가까운 속도인바, 미 서부까지 1시간이면 차고 넘칠 시간이었다.

“가자!”

성현이 구름을 뚫고 가공할 속도로 쏘아져 날아갔다. 솜사탕 같은 뭉게구름이 성현이 만들어낸 초강력 제트기류에 흩어지며, 거대한 구멍이 생겨났다.

* * *

미 중부 엘도라도, 이주 수송을 담당했던 부대들이 철수 준비에 한창이었다.

숙식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장소를 벗어나 원대 복귀한다는 소식은 모두 장병들에게 희소식이나 마찬가지였다.

다만, 동부에서 차출되어온 부대만이 다른 부대와 달리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이미 준비는 모두 마쳤습니다. 제 휘하에 있는 부대는 모두 뜻을 함께하기로 했고, 퇴출 방향에 대한 정찰도 완료했습니다. 한 가지 걸리는 것은 유니온의 특작부대가 외각 경비를 서고 있다는 건데······.”

콜트 중령은 자신을 따르는 일선 부대장들을 설득했고, 다행히 한 명의 열외 없이 주민들과 생사를 함께하기로 결의했다.

그리고 군 철수 시간에 맞추어, 주민들과 함께 이곳을 빠져나갈 계획을 세웠다.

다만, 유니온 직속의 특수부대가 걱정이었다.

아리조나의 학살자라 불리는 서부 안토니오 대의원의 친위 부대가 퇴출로 부근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들의 전투 수행 능력은 일반적인 전투 부대와는 괴를 달리하고 있었다.

고작 100여 명에 불과한 이들로 반 유니온의 기치를 내건 15만에 이르는 이들을 아리조나에서 학살한 전례가 있었다.

그 15만 모두가 전투에 가담할 수는 없었겠지만, 그렇다 해도 말도 되지 않는 전과라 할 수 있었다.

이들은 DARPA에서 만든 슈퍼병사라는 이야기도 있었고, 모두가 초능력을 가진 초인으로 이루어진 부대라는 소문도 돌고 있었다.

어찌 되었든 절대 간과할 수 없는 이들임이 분명했다.

“그 부분은 걱정 마시오. 우리가 그들을 막아 주겠소.”

콜트 중령은 이미 페일의 능력을 직접 보기도 했던 탓에 그의 자신만만해하는 말에 신뢰가 갔다.

하지만 이들에게만 어려운 일을 전담하게 하는 건 스스로가 용납할 수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군이 편한 일만 할 수는 없습니다. 저희 쪽에서도 힘을 보태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수송을 담당하는 부대와 호위 병력을 제외한 나머지 부대로 전투부대를 구성할 생각입니다.”

“함께 손발을 맞춰본 적도 없이 괜찮겠습니까? 이는 훈련 상황이 아님을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페일은 군과 함께 움직이는 게 혹 자신과 이능력자들의 발목을 붙들지나 않을지 조금 걱정되는 부분이었다.

페일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지 않은 콜트 중령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어째서인지 주객이 전도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걱정 마십시오. 모두 특수훈련을 받은 최정예들로 부대를 꾸릴 예정입니다. 전문 스나이퍼들과 후방교란을 위한 팀별로 움직일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짐이 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렇다면야. 우리가 앞에서고 군이 뒤를 쳐준다면 더할 나위 없겠군. 그렇게 합시다.”

페일이 두터운 손을 내밀자 콜트 중령은 그의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처음부터 묻고 싶었던 질문을 던졌다.

“헌데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당장이야 어떻게 해쳐 나간다지만, 유니온의 추적은 계속될 겁니다. 수만 명이 움직인다면 이미 위성을 보유하고 있는 유니온이 우리를 속속들이 들여다보지 않겠습니까? 추적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장기적인 대책이 혹시 있습니까?”

“콜트 중령님.”

지금껏 자신이 나설 자리가 아닌지라 지켜보고 있던 제시카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아, 네. 제시카양 .”

“걱정하지 마세요. 위성은 작전이 시작되면 뛰어난 해커가 교란을 시작할 겁니다. 모두의 안전이 확보될 때까지 위성은 장님이나 다름없게 된답니다. 또 내일의 태양이 뜨기 전에 빛의 전사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도착 하실 겁니다.”

“흐음. 앞서도 묻고 싶었습니다만, 그 빛의 전사가 도대체 뭔지 알 수 없습니까?”

처음 앞서 제시카가 한번 언급한 적이 있는 빛의 전사가 도무지 무엇을 지칭하는지 콜트는 짐작도 되지 않았다.

제시카는 콜트 중령의 질문에 화사하게 웃으며 답했다.

“그분은 말 그대로 빛의 전사십니다. 보시게 되면 콜트 중령님도 단번에 알게 되실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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