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판멸망한 세계의 게이머-165화 (165/176)

# 165

거래 혹은 제안 (1)

상상을 초월하는 거력을 담은 속성공격이었다. 분신의 육체가 일순간에 가루가 되는 것만 같은 무지막지한 공격이었다.

아득해 지는 정신을 수습한 산토스는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머리는 어느 때보다 빠르게 회전했다

“놈은 진정 종의 태생적 한계를 넘어선 건가?”

지구가 있는 차원은 72차원계 중에서도 하위 차원에 불과했다.

간혹 하위차원에서도 이레귤러의 상징과도 같은 드래곤으로 축약해서 이르는 비상식적인 고등 생명체들이 존재하기도 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알파는 틀림없는 인간종이었다.

그렇다고 한다면 태생적 한계로 인한 제약이 있어야만했다.

무수히 많은 차원이 존재하지만, 각 차원에 존재하는 종들은 크게 틀린 바가 없었다.

그중 인간들은 하위차원에 종속된 일반적인 개체들로, 아무리 뛰어난 인간이라 해도 그 한계는 명확했다.

결코 지금의 알파와 같은 능력을 가질 수는 없었다.

“초월자라. 이번 유희는 최악이군.”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알파는 이미 초월자의 영역에 들어선 인간이었다.

모든 종들에게는 이른 바 종의 한계가 존재했고, 이는 마계의 존귀한 군주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수십만 년에 하나, 혹은 전혀 불가능한 확률로 전 우주를 통틀어 그러한 존재가 나타났고, 이를 초월자라 불렀다.

산토스는 이런 존재를 직접 본적은 없지만, 군주들에게 전승되어 전설처럼 회자되는 존재들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모처럼 좋은 기회였건만…….”

산토스는 수백 년 만에 차원의 균열이 발생해 이곳에 현신 했을 당시가 떠올랐다.

생소한 부분이 많은 행성, 과학이라는 독창적인 문명을 일구어낸 특이한 곳이었다.

하지만 행성을 지배하고 있는 인간들은 지금까지 보아온 여타의 인간 종족과 다를 것이 없었다.

하위 차원에 걸맞은 격(格) 떨어진 종족이었다.

인간 변이체들이 조금 성가시긴 했지만, 나약하고 하잘 것 없는 것들임이 분명했다.

차원 간 균열이 상당 시간 지속됨에 따라 다수의 군주들이 이 세계에 현신해 서로에 대한 경계와 견제만이 조금 우려될 뿐, 다른 것들은 문제될게 없었다.

시간문제일 뿐, 인간들에게 남은 건 멸망밖에 없었다.

“아직은 기회가 있다. 놈이 완전체가 아닌 지금이라면 가능해.”

당장은 힘의 격차가 너무나도 뚜렷했다.

하지만, 알파가 완전한 초월자로 보이지는 않았다. 전해지는 전설 속 초월자의 능력에는 아직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산토스는 생각과 동시에 안토니오와 알파가 대결하는 틈을 타 현장을 벗어나고자 했다.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장거리 워프가 되지 않았고, 뜻대로 원하는 곳으로 이동할 수가 없는 상태였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단거리 순간이동으로 전장에서 최대한 벗어나던 중 난관에 봉착하고 말았다.

“마법 결계라니!”

견고하면서도 거대한 방벽이 산토스의 앞을 가로 막고 있었다. 상당히 고차원적인 에너지로 이루어진 마법 결계였다.

그제야 장거리 워프가 막힌 이유를 알게 되었지만, 안다 해도 이것을 뚫지 못한다면 벗어날 방법이 없었다.

마계의 본신이라면 손짓 한 번에 부셔버릴 수 있었겠지만, 지금의 자신은 미력하기 그지없는 분신에 불과했다.

“실도론의 군주인 내가 이런 지경에 이르다니.”

실도론의 군주, 냉혈의 마왕 칼이안. 이것이 산토스의 진명이었다.

147차 신마대전에서 패색이 짙던 마계를 대승으로 이끈 전승군주.

지구라는 행성보다 넓은 영토를 아우르며 수억에 달하는 군대를 지휘하고, 수백만의 친위대를 거느린 산토스는 마계의 대군주였다.

그런 그가 적에게 등을 보이고 있었다.

“벌써!”

결계를 파괴하기 위해 힘쓰던 산토스가 놀라 소리쳤다.

강맹하던 안토니오의 마기가 삽시간에 줄어들더니 찰나의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져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시간이 없다.”

안토니오가 당했음이 분명한 지금, 알파는 곧 자신을 찾아 올 것이 분명했다.

어떻게 해서든 지금의 상황을 벗어나야만 후일을 기약할 작은 기회라도 있을 터였다.

이대로 알파와 대면했다간 앞서간 데니얼이나 안토니오와 같은 처지가 될 것은 자명했다.

“오라!”

산토스의 그림자가 일순간 수백 배로 확대되더니 어둠의 하수인들이 그곳에서 튀어나왔다.

우오오오! 크롸롸롸!

다크나이트들이 괴성을 지르며 군주의 부름에 호응했고, 암흑룡이라 불리는 탈 것들이 포효를 내질렀다.

“고작 일천 남짓인가?”

마계였다면 수십만이 넘는 대군을 한 번에 소환하는 게 가능했겠지만, 분신의 능력으로는 고작 일천을 소환하는 데 그치고 있었다.

“가라! 가서 막아라!”

산토스의 손짓에 어둠의 갑옷으로 무장한 다크나이트들이 일제히 고개를 조아렸고, 그는 암흑룡의 등에 올라탔다.

그리고 곧 당도할 적을 맞이할 채비를 갖추고 떠나갔다.

차캉!

일천이 넘는 다크나이트들의 손에 흑색 일색인 거대한 대검이 뽑혀 나왔고, 드높이 들어 올려졌다.

암흑룡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울어댔고, 거대한 피막으로 이루어진 날개를 퍼덕여 서서히 상공으로 떠올랐다.

“한심하군.”

전율이 느껴질 정도의 무시무시한 광경임이 분명했지만, 산토스가 보기에는 보잘것없는 전력일 뿐이었다.

*     *     *

“이것 봐라?”

성현은 ‘앱솔루트 베리어’의 내구력이라 할 수 있는 방어력이 절반가량까지 떨어지자 서둘러 복구해 냈다.

“저쪽이다.”

그리고 미니맵에 나타난 파손되는 결계의 위치를 확인하고 이동을 시작했다.

잠시 후, 10킬로미터 정도를 비행한 성현의 앞에 듣도 보도 못한 괴이한 놈들이 앞을 가로막으며 나타났다.

“이것들은 또 어디서 나타난 거야?”

[블랙 와이번 Lv57]

[블랙 와이번 Lv59]

[다크 나이트 Lv71]

[다크 나이트 Lv68]

스컬 드래곤의 절반 정도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동체를 가진 ‘블랙 와이번’들과 그 등에 올라탄 ‘다크 나이트’들은 그 수가 일천을 헤아리고 있었다.

“제법 렙 빨은 있는 놈들인데. 어디…….”

성현은 가볍게 탐색이라도 할 요량으로 레일건의 방아쇠를 당겼다.

푸슈슈슝!

레일건에서 발사된 탄환들은 스스로 빛을 발하며 가공할 속도로 공간을 가로질러 갔다.

순수한 물리력은 광속성으로 변환되어 어두운 밤하늘에 온통 환한 빛줄기를 만들어 냈다.

퍼펑! 콰쾅!

블랙와이번의 머리를 타격한 빛줄기가 탑승해 있던 다크나이트까지 그대로 관통해 버렸다.

손가락 두께보다 얇은 레일건의 탄환은 빛 속성으로 변환되어 어른 팔뚝만한 궤적을 그려내며 큰 흔적들을 남기고 있었다.

끼에에엑!

몸통을 관통당한 블랙와이번들이 괴성을 질러댔고, 뻥 뚫린 공간에서부터 시작된 불길이 전신으로 옮겨 붙으면서 한순간에 산화되고 있었다.

수십 발의 레일건 사격에 상공을 가득 메우고 있던 놈들의 한축이 뻥 뚫리다시피 하면서 일백에 가까운 블랙와이번과 다크나이트들이 한줌 연기로 화해버렸다.

“이것들도 경험치는 장난 아니게 주는데?”

성현은 연신 레일건의 방아쇠를 당기며 차오르는 경험치에 혀를 내둘렀다.

마계의 군주라는 놈들에 비하면 아주 적은 양에 불과 했지만 좀비나 구울들에 비교한다면 그야말로 엄청난 경험치였다.

거기에 늘어나는 골드는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를 지경이었다.

레일건의 총구가 향하는 방향에 있던 놈들은 지우개로 지워지듯 사라졌고, 일천을 헤아리던 블랙와이번과 다크나이트들을 모두 잡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아쉽네.”

성현은 더 이상 남은 블랙와이번과 다크나이트가 없자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 미간을 좁히고 먼 곳을 바라봤다.

“거기 있었냐?”

결계의 끝자락 부근에서 연신 큰 소음이 발생하고 있었고, 도주한 놈이 그곳에 있음을 알게 했다.

성현의 등 뒤로 10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빛의 날개가 휘황찬란한 빛을 토해내자, 성현의 신형은 한줄기 빛이 되어 날아갔다.

소환된 군세가 제법 시간을 끌어줄 것이라 생각한 산토스는 연신 결계를 부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창졸지간에 자신의 군대를 쓸어버리고 알파가 짓쳐들어오고 있었다.

“자, 잠깐!”

어차피 더는 수가 없음이었다.

그렇다 해도 이대로 포기하고, 다른 군주들의 전철을 밟을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알파와 대화를 해볼 심산이었다. 어쩌면 거래를 통해 서로 주고받을 만한 것이 있을 수도 있다 생각했다.

허나.

“잠깐 같은 소리하고 있네.”

콰쾅!

성현은 날아가던 속도를 늦추지 않고, 그대로 놈의 턱에 강력한 일권을 선사했다.

그리고 놈이 높이 떠오르던 속도보다 빠르게 움직여 머리를 사정없이 찍어 찼다.

산토스에게 있어서 다행이라면 치명적인 속성공격이 아닌 물리공격이어서 단숨에 죽지 않았다는 정도.

“크아아악!”

“절대 쉽게는 안 죽인다.”

성현은 몰랐지만 산토스는 물리력에도 피해를 입는 터라 상성에서 우위를 점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주먹과 발길질에 담긴 거력은 속성공격이 아니라 해도 산토스의 분신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강력한 공격이었다.

성현은 떨어지는 놈의 배를 밟고 가속해 지상까지 함께 떨어져 내려갔다.

쿠콰쾅!

마하 10에 다다른 가속력이 붙어 지상에 도달한 순간, 지축을 뒤흔드는 굉음이 터져 나왔다.

산토스의 신형은 지표면을 뚫고 거의 200여 미터 이상을 파고들어갔고, 분신을 유지하던 육체는 걸레짝이 되어 짙은 검은 체액들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케액!”

성현은 자신의 발밑에 깔린 산토스의 목 부분을 움켜쥐고 서서히 지상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아직 죽지 마. 겨우 이정도로 끝내면 안 돼.”

놈에게 너무 쉬운 죽음을 선사해서는 안 되었다.

이놈들은 이곳에서 죽는다고 해도 인간의 죽음과 동일한 죽음은 아니었다. 고작 분신에 불과했고,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 아니었다.

어떻게 하면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고 천천히 죽일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만 했다.

놈들의 손에 희생된 이들은 당장 성현의 눈앞에서만 백만에 이르렀고, 그 외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비명에 갔을지는 알 수 없었다.

어떤 대의를 가지고 시작한 일은 아니었지만, 놈들이 행한 짓에 대한 최소한의 죗값은 받아내야 할 의무가 인류의 한사람으로써 성현에게 있었다.

“크억! 거, 거래를 하, 하자.”

“무슨 개수작이냐?”

“지, 지구의 며, 멸망이 머지않았다. 이곳을 벗어날 방법이 있다.”

거무죽죽한 덩어리를 입으로 토해낸 산토스의 말에 성현은 얼굴을 잔뜩 일그러트렸다.

지구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성현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친구 정한의 능력을 각성시켰고, 그 특성을 공유 받아 어떻게든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 중이었다.

그래서 아직 희망은 있었다. 절망적이지만 포기할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명확한 해결책이 아직은 없었다. 안심하기도 힘든 노릇인바, 마계 군주라는 놈의 말을 그냥 흘려듣기는 힘들었다.

“이, 이것 좀 놓고 이야기 하는 게 어떤가?”

성현은 어차피 놈이 빠져나갈 길은 없다 생각했다.

마음만 먹는다면 지금이라도 단숨에 죽일 자신이 있었다.

움켜진 놈의 목을 놓아줌과 동시에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허튼소리를 지껄인다면 그만한 벌을 받게 될 거다.”

어차피 살려둘 생각은 없었지만, 작은 기대라도 한다면 놈이 좀 더 많은 것을 풀어놓지 않을까하는 생각에서 한 말이었다.

“내 이름은 산토스, 아니 실도론의 군주 칼이안이 내 진명이다. 나와 거래한다면 너와 네가 원하는 이들은 살 수 있다.”

산토스는 자신의 진명을 밝히며, 흐트러진 신형을 바로하고 말했다.

산토스는 절대 거부하지 못할 제안에 성현이 반드시 응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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