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판멸망한 세계의 게이머-166화 (166/176)

# 166

거래 혹은 제안 (2)

“이 행성이 없어지기까지 그리 많은 시간이 남아있지 않다.”

“……그래서 네놈이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산토스는 현재 지구가 직면한 ‘별의 종막’에 대해 처음부터 설명하려 했지만, 성현이 보인 반응에서 그 사실을 이미 인지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었다.

“이미 알고 있었군.”

“어이, 본론만 말해. 서로 말 섞으면서 친목질 할 사이는 아니잖아.”

성현이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산토스에게 한 발 다가가며 말했다. 놈을 당장 죽이지 않는 것도 많은 인내심을 요구하는 일임이 분명했다.

“아, 알겠다. 알고 있다니 장황한 설명은 접도록 하지. 아무리 대단한 능력을 가졌다 해도 지금의 상황을 막을 수는 없다. 그건 나를 죽인다 해도 불변일 터. 하지만 내 제안에 응한다면 길을 열어줄 수 있다.”

성현은 산토스의 말을 조금 더 들어 보기로 했다. 어차피 놈을 해치우는 일은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막을 순 없지만 피할 방법은 있다.”

산토스는 자신과 같이 무한대에 가까운 삶이 보장된 존재들과는 달리 한정된 삶을 사는 종족들이 더욱 치열하게 삶을 갈구하고 있음을 익히 지켜봐왔다.

그만큼 생에 대한 집착이 강함을 잘 알고 있었다.

특히나 하등한 종족인 인간들은 고작 100년도 살지 못하면서도 삶에 대한 애착이 그 어떤 종족보다도 많음을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었다.

“…….”

성현은 이렇다 할 대답도 하지 않은 채 흰자위 없는 산토스의 심연과도 같은 검은 눈을 가만히 직시했다.

놈을 살려둘 수는 없지만, 놈이 하는 말의 진위여부를 알기 전에는 손을 쓸 수도 없었다.

그리고 만약 놈의 말이 사실이라면…….

“제안을 듣기 전에 어떤 방법인지부터 먼저 들어봐야겠다.”

정말 놈의 말이 진실이라면, 이 악마와의 거래에 성현은 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도 자신이지만 무엇보다 사랑하고 지켜야 할 이들이 너무 많았다. 그들을 끝까지 지켜주고 싶었다.

“모든 차원은 굳건한 상호 불가침의 영역을 구축하고 있다. 이는 누구도 인위적으로 간섭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말과 같다. 하지만, 희소한 확률로 전차원에 걸쳐 현재 지구가 직면한 현상과 비슷한 일들이 간헐적으로 발생한다. 이를 이용한다면 차원포탈을 생성하는 것도 결코 어려운 일은 아니다.”

산토스는 성현의 얼굴을 힐끗 쳐다보면서 말을 이었다.

“다만! 지구의 누구도 하지 못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오직 나만이, 내가 도와준다면 다른 차원으로 통하는 길을 열 수 있다.”

성현은 차원이니 어쩌니 하는 말에서 뭔가 대단한 발견을 한 것 같은 기분이 잠시지만 들었다.

묻고 싶은 게 많아 순간 입을 벙긋거렸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그런 사소한 부분에 얽매여 지적욕구를 충족할 상황은 아니었다.

지금은 놈의 의도를 파악하고, 진위여부를 판별하는 게 가장 중요했다.

“그런 게 가능하다해도 네놈이 말하는 게 사실인지를 어떻게 믿을 수 있지? 그리고 그 차원 포탈이라는 것이 향하는 위치가 인간이 살 수 있는 곳이라는 것은 또 어떻게 증명할거야?”

“믿고 안 믿고는 전적으로 네게 달려있다. 내가 한낱 인간에게 거짓말을 할 존재로 보이나?”

“흥! 그런 인간에게 목숨 줄이 잡혀서 구걸하고 있는 입장이란 건 잊고 있나?”

성현의 도발에 산토스는 잠시 대화를 단절했다.

밖으로 내색치 않았지만 산토스의 내면은 극심한 분노에 마기마저 들끓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도리가 있을 리 없었다. 어렵사리 화를 삭인 산토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본신의 힘의 1할만 가져와도 네놈 정도는 손가락 하나로 짓이길 수 있음이다. 아무리 초월자의 영역에 발을 디뎠다지만, 절대 극복하지 못할 격차가 존재함을 알아야 할게다.”

산토스는 화를 누그러뜨렸다지만, 기고만장한 표정의 인간에게 한마디 해주지 않을 수 없었다.

“훗.”

성현은 피식하고 웃어 넘겼다.

두고 보자는 놈치고 겁쟁이가 아닌 놈이 없었고, 집에 금송아지 100마리가 있다는 놈들은 모두 빈털터리였을 뿐이다.

“그래, 그렇다 치자. 근데 보다 확실한 증거를 보여주지 않으면 네놈의 제안은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것만 알아둬. 그럼 어떻게 될지 말 안 해도 잘 알겠지?”

성현은 괜한 말장난에 불과한 놈의 말에 계속해서 놀아날 의사가 없음을 알렸다.

명확한 무언가가 제시되지 않은 모호한 말은 거짓말과 같았다.

“아, 알겠다. 여러 방법이 있겠지만 가장 쉬운 방법은 인간 백만 명 정도를 희생시켜서 포탈을 여는 방법이다. 그러면 최소 1명은 포탈 너머로 보낼 수 있다.”

성현의 기세에 짓눌린 산토스가 한 발 뒤로 물러서며 빠르게 말했다.

순간 성현의 미간에 내 천(川) 자가 아로 새겨지며, 눈빛이 돌변했다.

“넌 아무래도 안 되겠다. 듣고 있던 내가 병신이네.”

성현은 창고에서 검을 꺼내 고쳐 잡고 속성력을 검에 부여했다.

백만 명을 희생해 단 한 명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이라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만약 된다 해도 자신을 포함해 가까운 이들을 살리기 위해서는 수천 수억에 달하는 사람들을 희생시켜야만 했다.

지구에 그만한 인구가 남아있을 리도 없겠지만, 그렇게까지 해서 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만약 그렇게 살아간다 한들 그 삶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다, 다른 방법도 있다. 차원의 파편이 있다면 가능하다!”

어둠을 몰아내는 휘황한 빛을 머금은 검을 보고 산토스는 화들짝 놀라며 다급히 말했다.

성현은 잠시 주춤했다.

놈의 사지를 끊어 내고 본격적인 형벌을 가할 생각이었는데 멈출 수밖에 없었다. 놈의 말을 더 들어 봐야 했다.

“차원의 파편은 또 뭐냐?”

“그, 그건 태초의 차원석에서 떨어져 나온 파편이다. 그리고 나를 이 차원에 존재할 수 있게 만드는 매개체다.”

“그럼 내놔봐.”

“……!”

“있으면 내놔보라고.”

“차원의 파편이 없으면 내가 존재할 수가 없다. 그것을 준다 해도 내가 없다면 이용할 방법이 없으니, 지금으로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성현은 또 다시 제자리걸음인 이야기에 슬슬 부아가 치밀기 시작했다.

“인간도 아닌 새끼가 약을 팔고 지랄이야. 일단 좀 맞으면서 좋은 방법 생각해봐.”

*     *     *

성현은 아주 잘게 다져진 산토스가 회복하기를 기다렸다.

놈의 회복력은 가히 아메바 수준이었고, 사지가 떨어져 나가도 수십 초면 다시 새로운 팔과 다리가 자라났다.

차츰 그 속도가 느려지고는 있었지만, 여전히 1~2분이면 모든 신체의 상처를 치유하고 원상태를 회복하고 있었다.

“잠깐, 그러고 보니…….”

성현은 놈이 회복되기를 기다렸다가 다시금 고문하려던 찰나, 문뜩 든 생각에 급히 창고를 열었다.

그리고는 창고 한 편에 반짝이며 자리하고 있는 어른 주먹만 한 물건에 시선을 고정했다.

[차원의 파편(하급)]

모두 2개가 들어있었다.

중국의 아리스를 잡았을 때는 얻지 못한 것이었는데, 미국에 와서 잡은 마계의 군주들에게서 드랍된 아이템이었다.

“어, 어떻게!”

다 죽어가던 산토스는 어느덧 회생해 성현의 손에 들린 큼지막한 수정체를 바라보며 놀라서 소리쳤다.

틀림없는 차원의 파편이었다.

마계에서도 소수의 군주들만이 소유하고 있는 희귀한 광물로써 얻고자 해도 쉽사리 얻을 수 있는 종류의 물건이 아니었다.

어쩌면 앞서간 군주들의 분신을 유지하던 파편일수도 있지만 그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스스로 내줬다? 이것 또한 말이 되지 않았다.

차원의 파편은 분신과 일체화가 되어 있었고, 마계로 역소환 되는 과정에서 반드시 이를 이용해 본래의 차원으로 유도하는 역할을 해야 했다.

그렇지 않다면 계약의 주체를 통한 현신이 아닌 분신한 이상, 사실상 역소환은 불가능했다.

그리된다면 마계에 있는 본체에도 큰 피해를 야기할 수 있고, 상당한 힘의 손실을 피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현재 마계는 비등한 힘과 세력으로 균형을 이루고 있지만, 언제든 약해진 틈을 타 여타의 군주들의 표적이 될 수도 있었다.

“주웠다.”

현재 성현이 게이머의 시스템을 이용하고는 있지만, 이는 아직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부분이었다.

그렇다 보니 이를 설명해줄 길이 없었다. 더욱이 게이머의 능력에서 기인한 아이템 드랍과 같은 부분을 놈에게 일일이 설명해줄 의무 따위도 없었다.

“그럴 리가…….”

“됐고! 이거 맞지?”

“그, 그렇긴 합니다만…….”

산토스의 말투가 달라졌다.

성현은 고분고분한 산토스를 바라봤다.

‘매에는 장사가 없지.’

성현의 생각과는 달랐지만 산토스가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건 사실이었다. 다만 성현의 매질과 칼질이 두렵다거나 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산토스는 분신이 가지고 있는 차원의 파편을 잃고 싶지 않았다.

성현이 들고 있는 차원의 파편은 앞서간 안토니오와 데니얼의 분신이 지니고 있던 것들이 분명했다.

어떠한 방법을 동원해 차원의 파편을 빼앗았는지 알지 못하는 이상, 지금은 눈앞에 있는 성현에게 협력해서 자신의 파편만은 지키고자 했다.

“재료는 이거면 된다고 했지? 이걸 어떻게 써야 되는 거야?”

“포탈을 열고자 하는 차원과 파편을 동조 시키는 일이 먼저입니다. 그러고 나서 정확한 좌표를 파편에 새겨 넣고 일정한 마력을 주입하면 활성화가 됩니다. 그럼 포탈을 열 수 있습니다. 단, 여기에는 많은 조건과 페널티가 부여됩니다.”

“조건과 페널티?”

“그렇습니다. 포탈을 열게 되는 차원에 따라 포탈의 유지 시간은 상당히 유동적입니다. 하위차원에서 상위차원으로 가는 것과 상위차원에서 하위차원으로 가는 포탈은 모두 그 유지 시간이 크게 줄어들게 됩니다.”

“얼마나 줄어드는데?”

“지구의 시간으로 수초에 불과할 수도 있습니다.”

“뭐! 수초? 시간, 분, 다음에 있는 그 초를 말하는 거냐?”

“네? 네, 그렇습니다.”

성현은 얼굴을 굳혔다.

포탈을 열게 되더라도 수초의 시간만을 유지한다면 그곳을 통과하는 사람들은 극소수의 이들로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는 살리고 누군가는 남겨야 한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싫은 일이었다.

“겨우 이따위… 것들로 내 시간을 뺏었겠다.”

차라리 듣지 않은 것만 못했다는 게 현재 성현의 심정이었다.

“잠, 잠시만 더 들어 주십시오. 여기서 말한 것은 어디까지나 동등한 차원이 아닌 차원 간 격차가 있는 곳으로 포탈을 열 경우입니다. 평행하면서도 상호간에 격의 차이가 없는 차원은 포탈의 유지 시간이 크게 늘어납니다.”

“지금부터는 말할 때 한 번에 모두 말해. 방금 상당히 위험했다.”

산토스는 한 뼘도 되지 않는 위치에서 거둬지는 광휘를 내뿜는 검을 보며 침음을 삼켰다.

“아, 알겠습니다. 차이는 있겠지만 격차가 없는 차원이라면 최소 72시간 이상은 유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산토스의 설명은 끊이질 않았다. 헌데 여기서도 문제는 있었다.

원래 있던 차원을 이탈하는 순간, 고유한 차원에서 얻은 힘은 대부분 잃게 된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니들도 힘을 제대로 못 쓰는 거고?”

“그, 그렇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일부나마 회복을 기대할 수는 있지만 대부분의 힘은 본래의 차원에 두고 가야만 했다.

다시, 본래의 차원으로 돌아간다면 모르지만 다른 차원에서 본신의 힘을 그대로 사용할 수는 없다고 했다.

이것만은 그 어떤 존재라 해도 피해갈 수 없었고, 이는 마계의 군주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아… 다른 건?”

성현은 어쩌면 현재 자신이 얻은 게이머의 능력이 사라질 수도 있다는 사실에 크게 놀랐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는 말에 일부나마 안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모든 건 살았을 때나 중요한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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