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판멸망한 세계의 게이머-167화 (167/176)

# 167

거래 혹은 제안 (3)

‘차원 이동이라…….’

성현으로서는 한 번도 상상해 보지 못했던 생소하다 못해 터무니없는 소리로만 여겨지는 말이었다.

하지만, 놈의 존재자체가 그것이 가능하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어이가 없네.’

전 인류를 멸족시키려한 인류의 적이라 할 수 있는 놈에게 어쩌면 인류의 운명을 걸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상황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보다 많은 정보가 필요해. 그리고 작은 모순이라도 있다면 아쉽더라도 포기하는 게 맞다.’

신뢰라고는 단 1도 없는 놈의 말을 전적으로 믿을 수는 없는 노릇, 어쩌면 이 모두가 놈의 계략일수도 있었다.

산토스는 말끝마다 스스로를 존귀한 존재라 스스럼없이 말하고 있었다.

강한 프라이드를 가졌음이 분명했다.

헌데 놈은 성현에게 일관되게 저자세로 임하고 있었다.

‘고작 몇 대 맞은 걸로?’

너무도 순순히 모든 걸 털어 놓는 놈의 속내를 의심하는 건 당연한 처사였다.

“계속 말해봐.”

성현은 내색치 않고 산토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후로도 산토스의 설명은 한참이나 이어졌고, 성현은 놈의 말을 토씨 하나 빠트리지 않고 머릿속에 담아 그 내용을 복기했다.

그리고 많은 질문을 했고, 또 답을 들을 수 있었다.

“이거랑 네가 가지고 있는 파편이 달라?”

“같지만 용도에 따라 활용에 있어서는 큰 차이를 보입니다. 대상을 특정해 귀속된 파편은 오롯이 집중된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또 귀속된 자에게서 벗어나지 않는 특성을 가집니다. 지금 손에 쥐고 계신 파편은 귀속되지 않은 상태라 보다 능동적이면서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어찌되었든 네가 가진 파편으로도 너 혼자는 차원 이동을 할 수 있다는 거네?”

“충분히 가능합니다.”

“이번이 9백 년 만에 찾아온 기회라고 했지?”

“지구 시간으로 그 정도가 맞습니다.”

산토스의 말을 빌리자면 지금까지 차원 균열을 통해 타 차원을 넘나든 횟수는 도합 129번.

이번 지구 차원에 발생한 균열을 발견하기까지 상당히 긴 세월이 걸렸다고 했다.

그리고 놈이 129번에 해당하는 차원이동을 하면서 무슨 짓을 했는지 말하지 않았지만, 보지 않아도 눈에 선했다.

“근데 분명 자주 오지 않는 기회를 잡았다는 건데. 129번의 차원의 균열을 넘어 진입한 차원에서 네가 다른 차원으로 이동하지 않은 이유가 있나?”

“……”

“계속 그 유희를 이어가지 않은 특별한 사정이라도 있어? 왜 굳이 다시 마계로 돌아갔지?”

이는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분명 산토스는 균열을 통해 도착한 차원은 이미 그 경계가 유명무실한 탓에 다른 차원으로 통하는 포탈을 생성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고 말했다.

어렵사리 얻은 기회일 게 틀림없는데 쉬운 길을 놔두고 마계로 복귀하는 일을 계속해서 반복한다는 건 앞뒤가 맞지 않은 일이었다.

단 한 번도 놈은 유희를 계속 이어갔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오로지 마계로 복귀해 무료한 시간을 보내며 새로운 균열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고 했다.

틀림없는 모순이다.

“그것은…….”

이미 비슷한 오류를 발견해서 수차례 질문을 던졌고, 성현은 놈이 뭔가 감추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어딘지 모르게 어색한 대답들.

다만 수만 년을 살아온 연륜으로 인한 탓인지 지금까지는 충분히 그럴싸하다고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도 여기까지였다.

“됐다. 아무리 생각해도 네놈 말은 신뢰할 수가 없어. 머리 아프게 고민할 일이 아니었는데. 멍청하게.”

차원에 대한 일말의 기초 지식도 없던 성현은 그저 산토스의 말에 의존해야 했다.

속된말로 수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는 이는 ‘1 더하기 1은 5다’ 라는 수식을 알려주고, 이후에 ‘2 더하기 2는 4’다 라고 해도 무엇이 옳고 그른 지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내릴 수 없다.

성현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놈의 말에 귀를 기울였지만, 역시나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더는 시간낭비일 뿐이고 심력만 허비하는 꼴이었다. 놈의 세 치 혓바닥에 이 이상 휘둘려 봐야 좋은 결과를 얻을 가능성은 낮다고 봤다.

“자, 잠깐!”

성현이 뭔가 깨달은 듯한 얼굴로 말을 하자, 그제야 사태파악이 된 산토스가 급히 소리쳤다.

“애쓰지 마, 친구들 만나러 가야지.”

놈과의 타협은 처음부터 계산에 넣지도 않았다. 오직 필요한 정보만 획득하고 나면 처치할 생각이었다.

인간을 한낱 수확물로 여기는 이계의 존재에게는 지금도 많은 인내심을 보여주고 있었다.

더 이상의 자비는 있을 수 없었다.

“이 미개하고 하등한 필멸자 놈이 의심이 너무 많구나.”

산토스는 차원 포탈을 만들고, 어떻게든 기회를 봐서 그곳으로 성현을 보내려 했다.

전투가 있다면 필패라 생각하지만, 포탈만 생성한다면 틈을 봐서 그 안으로 밀어 넣는 것은 어떻게든 가능하리라는 생각이었다.

차원의 경계에 포탈을 생성해 차원의 미아로 만들던지, 차원의 방벽에 갇혀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신세로 만들 심산이었다.

하지만, 계획처럼 일은 풀리지 않았고, 시도조차 해볼 기회가 생기지 않았다.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헐-. 이 새끼 보소.”

성현은 고개를 모로 꼬고 산토스를 황당한 얼굴로 바라봤다.

꼬리 내린 개새끼 같이 기죽어 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살려달라고 애원해도 모자랄 판에 한껏 기세를 올리며 악다구니를 써댔다.

시쳇말로 태세전환이 우디르는 씹어 먹을 것만 같았다.

“네 녀석들과 하등한 인간들이 살 방법을 알려주겠다! 너희 인간들이 말하는 딜을 할 건지 안 할 건지만 선택해라.”

“밑장 빼다 걸리니까 딜? 그런 건 손모가지라도 하나 주고 말하는 거야, 새꺄.”

“흥! 속인 적은 없다. 몇 가지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을 뿐이다.”

“같이 있던 애들 그립지? 마계 가서 하등한 인간한테 개 털린 이야기나 하면서 오순도순 서로 상처에 소금이나 뿌려주도록 만들어줄게.”

성현은 어처구니가 없어 당장 손을 써서 없애 버리려던 생각도 잊고 잠시 말을 받아쳤다.

“후후, 너희 인간들은 죽음이 끝이고 두려울지 몰라도 고귀한 혈통을 가진 내게는 기껏해야 잊힐 또 한 번의 유희일 뿐이다. 한 가지 아쉽다면 기껏 모은 전리품을 본 차원으로 보내지 못한다는 것뿐이다.”

“아오! 이걸 그냥.”

산토스를 마계로 역소환 시키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다만, 못내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지금의 놈의 태도로 미루어 보아 정말 방법이 있는 것만 같았다.

“할건가?”

성현은 순간 놈을 수백 수천 등분해서 한줌의 가루로 만들어 버릴까도 생각했지만, 잠시 유보했다.

놈의 자신만만한 태도가 발목을 잡았다.

“원하는 게 뭐냐?”

“말보다 계약이 필요한 시점이겠지.”

산토스가 한쪽 손을 들어 원을 그리며 말했다. 성현은 혹시 모를 상황을 염두에 두고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검고 음산한 기운이 육망성을 그리며 허공에 모습을 드러냈고, 잠시 후 얇은 양피지 한 장이 그곳에서 툭하고 떨어져 나왔다.

“받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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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약의 신서]

-약속의 증명, 이행에 사용 된다

-신서의 효력은 상호간 약속이행에 대한 협의가 완료되면 즉시 발동된다.

-절대적인 효력을 가지며, 불이행에 따른 대가는 필멸(必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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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성현은 산토스가 던진 양피지를 받고 깜짝 놀랐다.

현실의 어떤 물건도 아이템과 같은 설명은 보이지 않았는데, 지금 눈앞의 양피지는 게임의 아이템과 같은 설명문이 그대로 보이고 있었다.

절대 평범한 양피지가 아니었다.

“계약서다. 내가 원하는 건 온전한 마계로의 귀환. 절대 내게 위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조건을 넣었다. 네놈이 원하는 바를 말하면 계약서에 작성된다.”

“너 이거 몇 장 더 있냐?”

“……필멸자 주제에 지금 그것이 무엇인지나 알고 묻는 거냐?”

“이거 맹약의 신서잖아.”

“어, 어떻게! 넌 인간이 아닌가? 어떻게 맹약의 신서를 알고 있는 거지?”

산토스도 어렵사리 몇 장 구해두기만 했지 사용은 단 한 번, 환계와의 천년전쟁을 마치고 종전 협상에 나섰을 때뿐이었다.

“됐고, 잠깐 기다려봐.”

성현은 산토스가 허둥대며 말했지만, 들은 체도 하지 않고 턱을 손으로 괴고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맹약의 신서’를 가만히 바라봤다.

어쩌면 놈을 죽이는 것보다 더 나은 결과를 얻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결심이 서자 성현은 ‘맹약의 신서’에 기록을 시작했다.

“다 됐다.”

성현은 산토스에게 양피지를 넘기며 히쭉하고 웃었다.

산토스는 받아든 양피지를 읽어 내리며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잠시 후.

“그, 그럼 나도 추가 사항을. 그리고 이건 들어줄 수 없다.”

“거기서 한 자라도 빼거나, 더 넣으면 난 그냥 다 엎어 버리고 안 해. 잘 생각해라. 내 조건이 정말 말도 되지 않는 건 아닐 텐데?”

성현은 단호하게 말했다.

산토스는 그런 성현을 노려보는지, 아니면 어딘가를 바라보는지 알 수 없는 시선을 들어 한참을 바라봤다.

“좋다. 계약 하도록 하겠다.”

짧지 않은 기다림이 끝나고 산토스가 입을 열었다.

결코 손해만 있는 계약은 아니었다. 어찌되었든 마계로 온전히 돌아가기만 하면 이득을 볼 수 있었다.

“나도 좋아.”

상호간에 합의가 되자 한순간에 양피지는 푸른 염화에 휩싸여 두 개의 불꽃으로 나뉘었고, 성현과 산토스에게로 각각 향했다.

[맹약의 신서가 발동 중입니다. 약속을 모두 이행하면 신서의 제약에서 해제됩니다.]

성현은 별다른 느낌이 없었지만, 왠지 모를 시선이 자신을 바라보고만 있는 것 같은 찝찝한 느낌을 받아야만 했다.

“뭐부터 할까?”

“네놈이 적시한 3항부터 이행하도록 하지.”

산토스는 말과 동시에 허공에 손짓해서 순식간에 마법진을 완성하고 몇 장의 양피지를 성현에게 건넸다.

“4장이 다야?”

“이 하등한 필멸자 놈아! 그 물건의 가치조차 헤아리지 못하면서 고작 4장이라니!”

“뭐 어차피 네가 가진 절반을 안주면 계약 불이행일 테니 맞게 줬겠지. 서로 시간 축낼 거 없이 바로 바로 하자. 너 빨리 마계 가고 싶지?”

*     *     *

“인간의 시간으로 수백 년은 지나야 다시 활성화가 가능하다. 그것도 차원계에 마나가 충만하다는 조건이 충족되어야만 돼. 인위적으로 파편을 재활성화 할 수는 있지만, 지구에는 그러한 자원이 없는 걸로 알고 있다.”

“좋아. 자, 그럼 어느 차원 어느 곳에 인간이 살 수 있는 곳이 있는지 모르는데, 어떻게 위치를 특정할 수 있지?”

“그 부분은 어렵지 않다. 각 차원의 행성에 대한 좌표는 모두 기억하고 있다. 인간과 유사한 종족들이 살고 있는 행성은 모두 23,449개. 그중 지구가 속한 차원과 가까운 차원에 18,942개가 밀집되어 있어 선택의 폭이 가장 넓다.”

“지구인과 유사한 이들이 있다는 각 행성들에 대해서도 말해봐, 그리고 1회용이라고 했지만, 차원의 파편을 충전 하는 방법도 있다면서. 활성화에 필요한 자원은 뭔데?”

“차원의 파편을 재활성화 하기 위해서는 지구에는 없는 자원이 필요하다. 들어도 모를 테지만 알려주지. 최상급의 마나석이나 그에 준하는 마정석이 지구의 단위로 약 200㎏정도가 필요하다. 또… 헉!”

성현은 산토스의 말을 듣다가 마정석이라는 말에 창고를 열고 최상급 마정석과 상급 마정석을 동시에 꺼냈다.

그리고 ‘혹시 이거?’ 라는 표정을 지으며 산토스의 눈앞에 들어올렸다.

*     *     *

어느덧 밤이 지나고 새벽 동이 터오는 시간.

캔자스와 오클라호마 경계의 황무지는 대형 트럭과 버스들로 주차장을 방불케 했다.

적게 잡아도 1천 대는 넘는 어마어마한 숫자였다.

외곽에는 다수의 장갑차와 전술차량들이 경계를 하며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별일 없으시겠죠?”

“유니온의 후속 부대가 우리의 뒤를 쫓지 않고 있다는 건, 최소한 우리를 쫓는 문제보다 더 긴박한 상황이 발생했다고 보면 될 겁니다.”

“제시카, 걱정 안 해도 된다. 내가 본 빛의 전사께서는 이미 인간의 경지를 넘어선 그런 분이셨다. 그분은…….”

제시카와 페일 그리고 콜트 중령이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다급한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

“오십니다! 빛의 전사께서 오십니다!”

누구 할 것 없이 모두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와 상공을 올려다봤다.

어느덧 동이 터오는 동쪽 하늘에서 거대한 빛의 날개와 위엄 가득한 왕관을 쓴 이가 하늘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모두가 벅찬 마음에 말조차 쉬이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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