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8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1)
‘맹약의 신서’라는 절대법칙으로 이루어진 계약을 통해 성현은 산토스를 살려 보낼 수밖에 없었다.
놈은 마계로 돌아갔다.
놈을 죽일까도 생각했지만, 그런 생각을 품는 순간 직감적으로 그리해서는 절대 안 된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맹약의 신서’로 행해진 계약을 위반하기에는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다행이라면 계약의 우위에 있던 성현이 보다 많은 것을 얻어 냈다는 점, 허나 뒷맛이 개운치 못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인류가 다른 차원으로 갈수 있는 차원포탈을 열 방법을 얻었고, 혹시나 하는 생각에 2개의 차원의 파편에 각기 다른 장소를 각인시켜 두었다.
산토스도 계약의 성립과 동시에 어떤 절대적인 법칙에 묶여 계약 조건에 해당하는 일들을 소홀히 하지 못했지만, 어찌되었든 시도해 보지 않고서는 모르는 일이었다.
어쨌든 시도해볼 가치는 충분하고도 남았다.
-주인! 주인의 명령대로 인간들을 꼼짝 못하게 하고 있었다.
성현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왔던 길을 되짚어 어느덧 수송부대가 있는 상공에 접어들고 있었다.
비행속도를 줄여 거의 정지비행을 하고 있을 때 성현이 불러들인 스컬 드래곤 한 마리가 다가와선 심상으로 말을 전했다.
잘했으니 칭찬이라도 받을 요량인지 성현의 허리 아래로 고개를 들이밀기까지 했지만.
콩!
-주인! 왜 때리는 것인가?
기대와 달리 칭찬은커녕 두개골이 흔들릴 정도의 충격을 받은 스컬 드래곤이었다.
‘얌마, 내가 언제 그런 명령을 내렸어!’
성현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스컬 드래곤을 바라봤다.
-주인이 분명 그리 말했다!
‘잘 지키고 있으라고 했지, 내가 언제!’
-지금 주인의 말 그대로다. 뭐가 다른 것인가?
스컬 드래곤은 성현의 말을 그대로 따랐을 뿐임을 다시 한 번 피력했다.
‘내가 앓느니 죽지. 지키는 것과 꼼짝 못하게 하는 건 달라, 인마! 지키는 건 보호하라는 말이고, 꼼짝 못하게 하는 건 도망치는 놈들이나 죄지은 사람을 붙잡아 둘 때나 하는 거다. 알았어?’
-주인은 난잡하다.
‘야! 이럴 때는 복잡하다고 하는 거야!’
성현은 스컬 드래곤과 심상으로 투덕거리며 천천히 고도를 낮췄다.
지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운집해 성현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모두 반응은 제각각이지만 대부분이 경외심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몰골들이 말이 아닌데.’
좀 부담 가는 시선이지만 그보다 신경 쓰이는 건 이들의 신색이었다.
앞서는 급히 떠나느라 일일이 살필 겨를이 없어 미처 간파하지 못했지만, 한눈에 봐도 모두 피골이 상접한 모습들이었다.
줄리 또래의 아이들이 힘없이 늘어져 있는가 하면, 나이 많은 이들은 간신히 지팡이에 의지해 서있는 모습이 위태롭기만 했다.
측은지심에 성현은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리고 자신을 지금 이곳에 이르게 만든 장본인을 찾았다.
“모두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한 모양이구나?”
제시카와 불과 10여 미터 거리를 두고 성현이 말했다. 제시카를 비롯한 모두에게 한 질문이었다.
제시카가 작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성현은 이들이 경황 중에 제대로 된 물자들을 구비하지 못했으리라 짐작했고, 이는 틀리지 않았다.
“배 좀 채우고 이야기하자꾸나.”
성현은 조금 널찍한 장소로 가서 식량과 각종 부식들로 가득한 대형 컨테이너 10개를 꺼내 놓았다.
난데없이 허공에서 대형 컨테이너들이 나타나 지상에 자리하자 이를 본 모두가 놀라 눈만 껌뻑였다.
성현 자신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일인지라, 컨테이너를 내려놓고 저만치 떨어져 있는 이들을 향해 손짓을 했다.
그나마 현역 군인이면서 눈치가 빠른 콜트 중령이 부관에게 눈짓했고, 부관은 서둘러 부대원들을 수습해 성현에게 다가갔다.
“지금 가진 식량은 이게 전부입니다. 모두에게 나눠주세요.”
현재 가진 비상식량의 전부였다.
수만 명에 가까운 이들이라 배불리 먹을 수는 없겠지만, 급한 대로 허기를 면할 정도는 되는 양이었다.
성현은 일정 분량의 식량을 항시 창고에 넣어 혹시 모를 때를 대비해왔고, 적절한 상황에 써먹을 수 있었다.
“네… 넵. 알겠습니다. 충성!”
눈으로 보지만 믿지 못할 이적을 행사하는 사람이 한 말이었다.
대위 계급장을 단 콜트 중령의 부관은 긴장된 목소리로 답하며, 자신도 모르게 경례를 했다.
거대한 빛의 날개를 아직 유지하고 있는 성현은 지상에서 1미터 가량 떠있었고, 이를 지켜보는 이들의 눈에 그는 마치 지상에 강림한 천사 내지는 그에 준하는 존재로 보일 따름이었다.
성현은 이들에게 일을 맡겨놓곤 제시카와 그 일행이 있는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늦었지만, 감사의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저희를 구하러 와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제시카가 성현 앞에 성큼 다가오더니 넙죽 엎드려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멀뚱멀뚱 서있던 이들이 하나둘 제시카를 따라 같은 행동을 했다.
미국식 감사의 인사로는 어울리지 않았지만, 모두가 절로 마음에서 우러나와 한 행동이었다.
“제시카라고 했지? 내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너무 늦었었다. 다만 더는 같은 일은 생기지 않도록 처리는 끝내 뒀으니 그걸로 위안을 삼길 바란다.”
성현이 가녀린 제시카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그리고 제시카를 일으켜 세우며, 애잔한 눈으로 바라봤다.
자신의 책임이 아니라 생각하지만, 이들에게는 작은 위로라도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 * *
태양이 완연한 모습을 드러내고 난 후 한참이 지나고 있었다. 어느새 해가 중천에 가까워 오는 시간.
성현은 제시카를 비롯해 수송대를 이끄는 이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현재 미국이 처한 상황을 모두 전해 들었고, 이들과 함께 이후의 대책까지 상당히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렇다면 정말 다행입니다.”
콜트 중령은 유니온 대의원 3인방을 성현이 직접 처리했다는 말에 한시름 덜 수 있었다.
최고 지도부의 부재로 인해 명령계통에 문제가 생겼을 것이고, 따라서 내부적으로 큰 혼란에 휩싸여 있을게 불을 보듯 뻔했다.
“하지만, 아직 유니온의 잔존 세력들이 작지 않습니다. 3인의 대의원들이 죽었다 해도, 그들의 직속 부대들이 좀비 사냥을 명목으로 미 전역에 남아있습니다. 더군다나 유니온에 복종하는 군이 어찌 나올지 알 수 없습니다. 어쩌면 또 다른 제2의 유니온이 탄생할지도 모릅니다.”
“콜트, 무슨 걱정을 하는 겐가? 여기 계신 빛의 전사……. 아, 이거 죄송합니다. 입에 밴 말이다 보니. 크흠, 사령관님이 도와주신다면 그깟 놈들 쯤이야 시간문제일 뿐이라고. 그렇지 않습니까, 사령관님?”
페일이 성현을 어려워하면서도 든든한 아군이 있음을 강조하며 말했다.
성현은 제시카를 비롯한 모두에게 낯 뜨거운 호칭 대신 사령관으로 불러줄 것을 요청했고, 자리한 이들은 성현의 뜻에 따라 이제는 사령관으로 호칭하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계속 미국에 머물며 여러분들을 돕는 건 어렵지 싶습니다.”
모두들 생각지도 않고 있었던 성현의 말에 깜짝 놀랐다. 미증유의 능력을 가진 성현이 아니라면 지금의 상황을 스스로 헤쳐 나가기란 어렵고도 지난한 일임이 분명했다.
오직 제시카만이 살짝 미소 띤 얼굴로 한결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네? 사, 사령관님.”
잠시 멍해있던 페일이 성현을 바라봤다.
성현이라고 이들을 돕고 싶지 않은 건 아니었다.
다만, 장시간 미국에 머물며 언제까지나 제주를 비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대신, 밖에 있는 저 녀석들을 맡겨두고 갈 테니 잘 활용하시면 됩니다. 녀석들 하나하나가 전투력 면에서 전폭기 수십 대를 압도할 수 있습니다. 다만 초장거리 공격에 조금 취약하지만, 그렇다 해도 절대 밀리지는 않을 겁니다.”
스컬 드래곤의 광선공격 사거리는 2킬로미터에 불과해 그 이상의 거리를 두고 공격해 온다면 적을 타격할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피해를 감수하고 적의 기지만 초토화 한다면 어찌되었든 지는 싸움은 아니었다.
“저… 하늘에서 날고 있는 것들을 말씀하신 겁니까?”
“이름은 스컬 드래곤이라고 합니다. 텔레파시와 같은 능력으로 대화가 가능하니 소통에는 문제가 없을 겁니다. 다만 한 가지, 인간과 달리 능동적이지 못한 부분이 많아서 명확하고 세세한 부분까지 살펴 지시를 내려야 제대로 수행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위험한 상황이 발생하면 제가 미국으로 건너 올 테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전장 46미터, 전폭 43미터, 체고 15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동체를 자랑하는 스컬 드래곤 무리가 지금 이곳 상공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도합 200여 마리에 이르는 숫자인 바, 성현은 이정도 숫자라면 만약 일이 틀어져도 자신이 미국에 올 때까지의 시간 정도는 벌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이와 별도로 기동 요새라 명명된 거대한 비행체도 빌려 드릴 테니, 기대해도 좋습니다.”
성현은 ‘2급 부유 요새’, 가칭 기동요새도 이들에게 빌려줄 생각이었다.
한반도의 수백 배에 달하는 미 전역을 탈환하려면 그만한 기동력은 필요하다 여겼다.
* * *
“제시카. 너는 지구가 어떻게 되리라는 걸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 내 생각이 맞니?”
성현은 회의를 마치고, 제시카와 별도의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네. 저도 처음에는 믿지 못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믿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제가 본 미래는 지금까지 틀린 적이 없었답니다.”
제시카는 머잖은 시일 안에 지구가 사라지게 됨을 예지하고 있었다.
설마하며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그녀는 스스로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예지한 일들은 단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고,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라는 것을.
“그 이후의 일도 혹시 알고 있어?”
“…실은 지구가 없어진 이후에는 선명하지가 않은 부분이 좀 많아요. 그렇지만 사령관님께서 전 인류를 구원하게 되리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에요.”
“내가?”
처음 제시카의 텔레파시로 이야기를 할 당시에도 인류의 구원자니 어쩌니 하는 말을 들었지만, 그때는 흘려들었던 성현이었다.
“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줄 수 있겠니? 가령 내가 어떻게 해서 모두를 구하게 된다던지 하는 걸 말이다.”
현재 성현에게는 그녀가 말하는 인류를 구원할 방법이 없었다.
제시카의 말을 들으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방향을 잡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과연 이 어린 소녀가 예지력으로 어디까지 내다보고 있는지, 또 그것이 모두 진실인지 너무도 궁금했다.
“저희는 이곳 지구가 아닌 다른 별에 있었습니다. 모든 걸 볼 수는 없었지만, 느낌으로 알 수 있었습니다. 지구에 살아남아있던 전 인류가 무사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다만, 사령관님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한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그래? 그렇다면 방법을 찾는다는 건데, 하하하. 근심 걱정이야 없는 게 이상하지 않겠니. 새로운 세상에 도착했다면, 하나부터 열까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되니 내 머리가 아픈 것이겠지.”
성현은 제시카의 말을 듣고 크게 웃으며 말했다. 모두가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어떤 일도 헤쳐 나갈 자신이 있었다.
“그런 건가요?”
“그래. 덕분에 내가 할 일이 좀 많아졌지만, 최선을 다해볼 생각이다. 우선 제주도에 복귀했다가 이곳에 식량부터 좀 가져다주마.”
성현은 당장 급한 식량문제부터 해결해 줄 생각이었다.
제주의 창고에는 나주에서 수확한 쌀과 곡물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더군다나 최근에 추가 수확도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어 창고의 수를 더 늘려야 할 지경이었다.
“그럼 다녀올게. 넉넉잡아 두어 시간이면 충분할거다.”
“네, 사령관님. 부디 조심히 다녀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