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5
멸망한 세계의 게이머 (2)
2시간 전.
성현이 차원 포탈을 통해 넘어간 이름 모를 세상은 지구와 상당히 유사한 환경을 가지고 있었다.
좀 더 면밀한 조사가 병행되어야 하겠지만, 환경 자체는 더 없이 좋다 할 수 있었다.
푸르른 창공과 함께 따사로운 햇살이 만연했고, 대기환경조사를 위해 가져간 기기는 인체에 유해한 물질이 없음을 알려줬다.
그리고 성현의 상태 이상 저항 시 나타나는 문구가 조용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이는 기기의 인지범위를 벗어난 영역까지도 문제가 없음을 알게 했다.
더군다나 중력조차도 지구와 비교해 만분의 1의 오차도 없었다.
성현의 우려와는 달리 저 너머의 세상은 인류가 정착하기 더없이 좋은 요건을 간직하고 있었다.
“안전제일 아니겠어.”
차원 너머의 세상에 성현의 발자취가 크게 새겨졌다. 드넓은 대지는 성현의 영지가 되어 광대한 영역에 왕국이 만들어졌다.
왕국 외곽에 거대한 성벽이 찰나의 순간 세워졌고, 국왕이 되면서 보다 강력해진 수성병기들이 성벽과 왕국 곳곳에 우뚝 솟아났다.
그리고 왕국 전체를 아우르는 방어막을 펼치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다시 차원을 넘어 제주로 돌아온 성현은 그 즉시 주민 이동을 결정했고, 지시에 따라 모두가 신속히 움직였다.
그리고 극적일 정도로 기온이 영상을 회복한 덕에 V-2 대피소에 있던 주민들의 이동 또한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어차피 기동요새를 이용해 수송에는 부담이 없기도 했지만, 전 지구적인 추위는 이후 성현이 할 일에 큰 난항을 예고하고 있었다.
성현으로서는 걱정거리 하나를 덜게 되었음이다.
일이 착착 진행되고 있자, 성현은 지인을 비롯한 주요 인사들과 짧은작별을 고하고 제주를 떠나려 했다.
하지만, 그때 성현도 짐작하지 못한 문제를 확인한 해미가 달려와 성현의 앞을 가로막았다.
“오빠! 안돼요. 지금 같이 가야해요. 여기선 저리로 긴급귀환이 안 돼! 안된단 말이에요!”
성현은 긴급귀환 포인트만 차원 포탈 넘어 저쪽 세상에 해뒀었다. 시험을 해보지는 않았지만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만약 해미가 테스트 하지 않았다면 짐작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다.
성현에게는 ‘절대무적’ 스킬이 있었고, 절체절명의 순간이 온다 해도 죽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그때에는 긴급귀환으로 돌아가면 되리라 여겨 크게 개의치 않고 있었다.
하지만, 그 길이 막히고 말았다.
모두가 놀라고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가장 놀란 것은 당사자인 성현이었을 터였다.
‘모두 다시 만날 때까지 무사해라. 내가 반드시 찾아가마.’
성현은 거짓말로 또 다른 ‘차원의 파편’을 보여주었고, 다시 한 번 차원포탈을 열 수 있다는 말로 모두를 안심시켰다.
그리고 지금 일본을 거쳐 중국, 유럽을 넘어 다시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향하고 있었다.
성현은 자신의 가슴을 한 번 쓸어 내렸다.
품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던 줄리의 온기가 아직 남아있었고, 해미의 심장 뛰는 소리가 가슴에 맺혀 있었다.
‘반드시 돌아가마.’
* * *
크고 작은 두 개의 태양이 하늘 높이 떠 대지를 비추고 있었다. 뜨겁지 않은 온기가 세상을 안락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티 없이 맑은 공기는 더할 나위 없이 상쾌했으며, 풀잎에 스치는 바람소리가 시름조차 날려버릴 만큼 싱그러웠다.
하지만, 동화 속에서나 볼법한 아름다운 여인은 주위와 동화되지 못하고 굳은 얼굴로 먼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마미~!”
“줄리야.”
저만치에서 이제 제법 소녀티가 나는 줄리가 해미를 부르며 뛰어오고 있었다.
차원 포탈을 넘어 해미가 이 세계에 온 지도 벌써 6년이라는 세월이 흐르고 있었다.
“마미, 또 파파 생각하고 있었어?”
이제는 어느덧 키가 커서 해미의 가슴어림에 닿을 만큼 큰 줄리였다.
해미는 자신을 걱정하는 줄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애잔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모두가 밝은 줄리를 보며 다행이다 생각하고 있었지만, 해미만큼이나 줄리도 성현에 대한 그리움에 사무쳐 밤잠을 설치고 있었다.
밖으로 내색하지 않아 다른 이들은 모르고 지나칠 수도 있었지만, 해미는 그런 줄리의 속 깊은 마음을 잘 헤아리고 있었다.
하루걸러 하루마다 잠꼬대를 하며 파파를 찾는데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잉, 파파 나빠.”
어느덧 초등학교 4학년이 된 줄리였다. 조숙한 아이답게 투정 한 번 하지 않던 줄리가 불현듯 울음을 터트렸다.
그동안 애써 참아왔던 기다림의 무게가 힘겨웠으리라.
한 번 무너져 내린 둑은 쉽사리 막을 수 없었고, 줄리는 한동안 해미의 품에 안겨 눈물을 흘려야만 했다.
“줄리야, 파파는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우릴 찾아 오고계시는 중이란다.”
해미는 성현이 지구에서 무사히 벗어나 지금 이 시간에도 아주 격렬하게 활동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서로 소식을 주고받는 연락은 하지 못했지만, 늘어나는 경험치와 천문학적인 숫자로 매일같이 불어나는 골드로 인해 성현이 어떤 식으로든 스스로의 살아있음을 매일 같이 증명하고 있다 여겼다.
“마미, 정말? 정말 파파가 우릴 잊은 게 아니고 찾아오고 있어?”
“그럼~ 마미는 알 수 있단다. 저기 먼 곳에서부터 얼마나 우릴 찾아 혼신의 힘을 다하고 계신지.”
해미의 말에 줄리는 저도 모르게 하늘 한편으로 시선을 놓고 바라봤다.
그리고!
“파파! 파파!!”
“으응?”
“마미, 파파야! 파파가 와!”
“줄리야, 그러니까 오빠 아니 파파는… 휴우, 아니다.”
해미는 줄리가 방방 뛰며 하는 행동이 그저 자신의 말에 조금 격하게 반응하는 것으로만 여겼다.
그리고 무심코 줄리가 바라보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 어머! 오, 오빠!”
거대하다 못해 온 하늘을 뒤덮을 정도로 눈부신 빛의 날개를 펼친 이가 날아오고 있었다.
오직 성현이기에 가능했던 빛의 날개였다.
머리에 있는 휘황찬란한 오색의 왕관이 예전보다 더욱 크고 화려해 보였다. 성현의 계급이 또 한 번 성장했음을 짐작케 했다.
“줄리야! 해미야!”
가공할 속도로 다가오던 성현은 혹여나 줄리를 다치게 하지는 않을까 걱정되어 크게 속도를 줄이며 지상에 내려섰다.
마음 같아서는 그대로 격하게 안아들고 마음껏 보듬어 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이미 눈물과 콧물이 뒤범벅인 줄리와 해미를 보자 성현은 감회가 새로웠다.
자신이 없는 사이 부쩍 커버린, 가슴으로 낳은 딸이 달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꿈에도 그리던 해미는 어엿한 성인이 되어 성숙미가 넘쳤고, 그 아름다움이 활짝 꽃핀 어엿한 여인이 되어 있었다.
와락!
함께 있은 시간보다 더욱 긴 이별의 시간이 이들을 갈라놓았지만, 서먹함이나 어색함은 있지 않았다.
“파파! 우아아앙! 왜 이렇게 늦게 온 거야. 내가 매일 밤마다 파파 보고 싶다고 얼마나 기도했는데. 왜 이제 온 거냐고, 줄리 보고 싶지 않았던 거야?”
평소 같지 않게 줄리가 투정어린 말들을 쏟아냈다.
나이에 비해 조숙하게 보인 것은 누군가 곁에 없어 그래 보였을 뿐이었다. 곁에 없어 하지 못했던 어리광을 이제는 할 수 있게 되자 아이다운 모습이 나오는 것이었다.
“미안, 내가 많이 늦었지.”
부쩍 컸다고는 하지만 아직 어린 줄리를 품안에 안은 성현은, 닭똥 같은 눈물만 흘리며 자신을 바라보는 해미에게 말했다.
“어디… 외박하고 하루, 흐흑, 안 들어온 사람처럼 말하시네요.”
목멘 소리로 겨우 말을 이어 나가는 해미였다.
예상했던 말이 아닌지라 성현은 잠시 움찔대기까지 했다.
“그, 그게 그러니까.”
“또 그럴 거예요? 또 그러실 거면 다시…….”
해미가 북받치는 가슴을 두드리며 말하다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이내 다가온 성현이 해미의 얼굴에 손을 뻗어 눈물을 닦아줬다.
그리고 부드럽게 자신의 품으로 끌어 당겼다.
“약속할게. 다신 떨어지지 말자.”
해미는 성현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가 고개를 들어 올려다봤다. 묘한 갈망이 담긴 해미의 눈이 성현을 향했다.
성현은 달콤한 향이 해미의 숨결을 타고 올라오자 순간 아찔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저도 모르게 해미의 숨결을 따라 고개를 숙여 가까이 다가갔다.
예전에는 어른이 되지못해 그 경계에 머물러 있던 해미를 두고 차마 자신의 감정을 숨길 수밖에 없었던 성현이었지만, 지금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해미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이미 성인이 되어 있었고, 스스로의 감정과 행동에 책임질 수 있는 어른이었다.
“답답해. 파파, 나 숨 못 쉬겠어. 푸하.”
줄리가 크게 몸을 뒤척이며 성현의 품에서 떨어져 나와 크게 숨을 내뱉었다.
성현은 곁에 줄리가 있다는 사실을 잠시 망각했다는 게 민망했던지 줄리를 내려주고 딴청을 하기에 바빴다.
해미도 어색해 했지만, 그것도 잠시.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용기를 내어 성현에게 한걸음 다가섰다.
그리고 성현의 목에 양팔을 두르고 성현의 입술에 자신의 입을 맞추었다.
“사령관님-!”
“성현아!”
진한 여운을 남긴 둘의 첫 키스는 방해꾼들로 인해 급히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 * *
성현은 제주에 있던 이들이 모두 차원의 포탈로 무사히 이동했음을 제주에 남겨둔 사룡을 통해 이미 전해 들었었다.
거리낄 게 없어진 성현은 자신의 할 일에 더욱 집중할 수 있었다.
일본, 중국, 유럽을 거치며 미국에 이르기까지 채 3시간이 넘지 않은 시간만이 소요되었다.
생존한 이들 모두가 탑승할 만큼의 기동요새를 생성해 조치를 했고, 다행이 늦지 않게 모두의 안전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상공에서 바라본 지구는 말 그대로 종말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거대한 해일이 대지를 집어 삼켰고, 직경 수백 미터가 넘나드는 회오리바람이 기둥처럼 하늘을 꿰뚫을 기세로 나타났다.
천둥과 번개가 끊임없이 들이치고, 송곳 같은 얼음의 비가 하늘을 메우고 떨어져 내렸다.
당장이라도 지구가 폭발할 것 같은 하루가 지나고 해왕성에서 출발한 수송선단이 드디어 지구에 도착했다.
예상보다 빠른 시간에 지구에 도착한 수송선에 모든 생존자들을 탑승시켰지만, 고작 21개의 수송선만이 필요할 뿐이었다.
도합 2천 1백만에 달하는 숫자였다.
그리고 남은 수송선에는.
-주인, 여기는 너무 비좁다. 사룡은 자유로이 날고 싶다.
‘너 자꾸 그러면 저기 달에 버려두고 간다.’
7천에 달하는 스컬 드래곤들이었다.
수송선이 크다고는 하지만 그 덩치가 덩치인지라 상당히 협소한 공간에 옹기종기 모여 탈 수밖에는 없었다.
-마스터, 지구 대기권을 벗어난 항로를 지정해주시기 바랍니다.
“우선 해왕성까지 간다. 이후 항로는 거기서 다시 정하도록 하자.”
-알겠습니다. 항로 지정. 제1개척행성 해왕성으로 향합니다. 대기권을 벗어난 직후 광속비행에 따른 대비를 하시기 바랍니다.
지구 대기권을 벗어나 바라본 지구는 회백색과 시뻘건 색이 적도 부근에서 띠를 두른 것이, 그야말로 죽음의 별로 여겨질 정도였다.
“미안하고, 고맙다.”
성현은 지구의 마지막을 눈에 담지는 못했지만, 지금까지 버텨준 데 대한 고마움을 표했다.
-광속 비행 5초전 4, 3, 2, 1.
우주선들이 한줄기 빛이 되어 하나둘 사라졌고, 이내 텅 빈 공간만이 남아있었다.
쿠쿠쿠쿵! 콰콰쾅!
지구라는 행성은 자신의 역할을 모두 마쳤다는 듯이 성현의 수송선단이 사라진 직후 얼마 지나지 않아 대폭발을 발했다.
인류의 고향이자 태양계 유일하게 살아 숨 쉬던 행성은 한줌의 먼지가 되어 태초의 형상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