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1화 (1/200)

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 1화

그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3대 마신 중 하나.

금기의 마신이자 황금의 악마라 불리는 존재, 기린이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용의 머리에 사슴의 몸.

황금빛 비늘을 반짝이는 괴이가 움직일 때마다 공간이 비틀리며 천지가 뒤집혔다.

물방울이 하늘로 솟구치고, 벼랑이 바닥에 몸을 뉘이며 소용돌이치는 구름이 태양을 빨아들인다.

한 번만 더 저 공간왜곡에 정면으로 말려들면 모든 것이 끝난다.

터벅-

김건은 앞으로 나섰다.

기린이 펼친 왜곡의 여파가 그가 서 있는 곳도 뒤죽박죽으로 만들었다.

왼쪽에서 터진 폭발의 소리가 오른쪽에서 들리고, 중력은 상하좌우 할 것 없이 중구난방이었으며, 대지에 억지로 박아 넣은 발의 감촉이 가슴에서 느껴졌다.

그 엉망진창의 공간 속에서 찢어지는 듯한 외침이 들렸다.

“자기야, 하지 마!”

하지 말라고 해도, 사랑하는 사람을 살리고 모두를 구할 방법은 이것뿐이었다.

김건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 말라고, 김건 이 자식아!!!”

“미안.”

주먹을 들어 올리는 것과 동시에 모든 것을 잊었다.

오로지 기술을 발현시키기 위해서 모든 오감을 사용한다.

일생에 오로지 한번만 사용할 수 있는 기술. 실패는 고려 대상이 아니다.

뇌리를 쥐어짠다. 지금까지 쌓아 온 모든 노력, 모든 경험, 모든 인생을 담아 주먹에 담았다.

기술의 발동에 성공.

김건은 그대로 다가오는 기린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빛이 폭발했다.

십자 형태로 터져 나온 광선이 지평선을 가로지르고 성층권을 꿰뚫었다.

폭음이 고막을 찢고 고열이 피부와 지방을 태우며 몸을 갈가리 찢어 버렸다.

손끝부터 발끝까지 세포 단위로 분해되는 듯한 통증이 가신 뒤.

김건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산산이 분쇄되어 가는 기린의 동체, 그리고 어둠과 함께 찾아온 죽음이었다.

* * *

정신을 차려 보니 채찍 한 자루가 눈앞에 있었다.

‘뭐지?’

정확히는 똬리를 튼 뱀처럼 돌돌 말린 채찍이 김건의 손아귀에 쥐어져 있었다.

“정말 그걸로 할 건가?”

뒤에서 의문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짧은 갈색 머리에 두꺼운 몸이 꽉 차는 타이트한 셔츠. 풀어헤친 칼라에 걷어 올린 소매를 통해 단단한 근육이 엿보인다.

S급 영웅이자 전투 교관인 톨 로드였다.

‘……오 년도 전에 죽은 사람이잖아.’

죽은 사람이 멀쩡히 살아서 눈앞에 서 있다.

동시에 강렬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주변을 돌아보자, 자신을 향해 곁눈질하며 말을 주고받는 생도들의 모습이 보였다.

“저 사람, 채찍을 고른 거야?”

“사내자식이 무슨 채찍이야.”

“쟤가 걔지? 교수 눈에 들어서 낙하산으로 들어왔다는…….”

“아, 그 마력적성 F급이라는 무능력자?”

어린 시절부터 질리도록 들었던 말들이 계속 들려온다.

김건은 본능적으로 손을 쥐어 채찍을 이루고 있는 매끈한 가죽의 촉감을 되새겼다.

채찍은 좋은 무기다.

사거리가 길고, 응용의 여지가 많으며, 사용자가 적기 때문에 역으로 대인전에서 이점을 가져갈 수 있다.

특히 정상인을 겨우 벗어날 정도의 마력밖에 타고나지 못한 그에게는 더더욱 효율적인 장비였다.

인류 최고의 영웅 교육 시설, 발할라 아카데미에서는 입학한 생도에게 학교에 다니는 동안 사용할 고급 장비가 지급된다.

하나하나가 자동차 값에 맞먹는 고가의 무구들.

그때 고른 아이템이 이 채찍이었다.

그리고 김건은 이때의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다시 한번 주변을 둘러봤다.

돔 형태의 공간. 수십 미터에 달하는 천장에 원형으로 둘러쳐진 관람석 하며 운동장처럼 넓게 펼쳐진 건물의 내부는 영락없는 발할라의 체육관 겸 연무실이었다.

기억에 있는 순간, 기억에 있는 공간, 그리고 기억에 있는 사람들.

현실에서는 이미 오래전에 모두 사라져 버린 것들.

하지만 지금은 그 기억이 현실이 되어 있었다.

김건은 얼른 정신을 차리고 손목에 찬 스마트 워치를 켰다.

마지막에 보았던 것보다 무려 13년이나 당겨진 시간이 액정에 박혀 반짝이고 있었다.

마계의 침공으로부터 인류를 지키기 위해 끝까지 싸워 왔던 영웅.

최하위의 마력적성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악몽 같은 괴물들을 상대로 혁혁한 전공을 세우며 끝까지 살아남아 ‘불멸의 다윗’이라고도 불렸던 인물, 김건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햇병아리 생도 시절로 돌아와 있었다.

* * *

“영문을 모르겠군.”

장비 지급 이후 폭풍 같은 오리엔테이션과 수업이 지나간 뒤에야 겨우 교문을 빠져나온 김건이 꺼낸 첫마디였다.

그는 인류 멸망을 앞두고 최대의 적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런 전조도 없이 갑자기 과거로 날아오다니.

아무리 경험 많은 베테랑이라고 해도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다.

‘기린이 펼친 환영 마법인가…… 아니면 최면?’

하나 그런 정신 간섭계 마법은 어둠의 마신인 벨제불의 특기다.

같은 마계의 존재라 해도 마신들끼리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옆집 불구경에 좋다고 박수를 쳤으면 쳤지, 벨제불이 기린을 돕기 위해 싸움에 끼어들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고민을 거듭하는 사이, 어느새 그는 기숙사의 방문 앞에 도착해 있었다.

자연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가 침대에 몸을 던진 김건은 두 손을 머리에 인 채 사고를 계속했다.

떠올려 보면 기린은 마법으로 공간을 뒤틀고 잠깐이지만 시간을 되돌리기도 하는 힘을 보여 주었다.

유쾌하지 않은 가정이 떠올랐다.

“설마…….”

기억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그는 분명히 기린에게 치명상을 입혔다.

하지만 기린에게, 그 모든 진실을 지워 버릴 수 있는 힘이 있었다면?

“죽기 전에 시간을 되돌리기라도 한 건가?”

말도 안 되는 가정이지만, 가능성이 없다고 할 수는 없었다.

천지를 뒤흔들 정도로 강력한 권능을 자랑했던 마신이라면, 최후의 발악으로 한 번 정도는 세계의 법칙을 뛰어넘는 기적을 일으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미래에 벌어질 일을 알고 돌아온 마신이라.’

김건은 침을 꿀꺽 삼켰다.

안 그래도 절대적인 힘을 지닌 놈이 과거로 돌아왔다면 무슨 짓을 벌일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아직 수수께끼는 남아 있었다.

‘놈은 그렇다 쳐도, 나는 어떻게 과거로 돌아온 거지?’

시간을 되돌린 주체가 기린이라면, 그 기린을 죽인 김건은 과거로 돌아올 수가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는 돌아와서는 안 됐다.

왜냐하면 기린에게 이만큼 위협적인 존재는 없기 때문이다.

‘그럼 시간을 되돌린 게 기린이 아닌가?’

머리가 복잡해졌다.

김건은 한참이나 고민했지만 좋은 답안을 끌어내지 못했다.

그는 허리를 튕겨 벌떡 침대에서 일어났다.

“머릴 좀 식혀야겠어.”

생사의 기로에서 줄타기를 하는 것이 일상인 전위.

평생을 전장에서 살아온 그에게, 머릿속을 비우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 * *

세계는 마계와의 전쟁 중에 있다.

어느 날, 최초의 게이트가 열린 이후로 이 세상 곳곳에서는 차원의 문이 열리며 마계의 괴물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마력이라 불리는 힘을 가진 괴물들에게 대부분의 병기는 통용되지 않았고, 인류는 순식간에 궁지에 몰렸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게이트가 열리면서 사람들 사이에서도 마력을 다룰 수 있는 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인류는 마계에 대적할 힘을 얻었다.

그렇게 괴물들과 맞서 싸우는 사람들을 영웅이라 부르며 칭송하기를 수십 년.

몬스터와 게이트의 존재는 일상이 되었고 그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있었다.

몬스터와 싸울 인재를 육성하는 기관.

아카데미.

그리고 김건이 있는 이곳은 세계 제일의 영웅 후보자들만이 입학할 수 있다는 아카데미, ‘발할라’였다.

자격이 없는 자는 입학하지도, 졸업하지도 못한다고 하는 최고이자 최악의 환경을 자랑하는 장소.

각지에서 천재 소리를 듣던 이들이 몰려들지만, 태반이 현실을 깨닫고 울며 귀향한다 하는 무한 경쟁의 장이 바로 이곳이었다.

“사람 많네.”

상시 있는 테스트에 통과하지 못하면 퇴학 처리당하는 곳이다 보니, 개학 초기인데도 공동 연무장은 생도들로 바글거렸다.

중력실에서 고중력으로 공중제비를 넘으며 뛰어다니는 사람, 1톤에 가까운 장비를 들고 스쿼트를 하는 사람 등 인류의 한계를 뛰어넘은 자들이 각자의 괴력을 뽐내며 수련을 하고 있었다.

그러한 초인들 사이에서 김건은 연무장 구석에 처박혀 조용히 운동을 시작했다.

그에게 필요한 도구는 눈앞에 있는 거울뿐이었다.

오로지 맨몸 운동. 단순한 윗몸 일으키기부터 시작해서 팔 굽혀 펴기, 물구나무서기, 점점 난이도를 높여 플란체와 L자 앉기까지 넘어간다.

“후우.”

전투로 피폐해진 몸이 아니라 그런지 근육과 관절의 상태가 굉장히 좋았다.

정신과 몸이 빠릿빠릿하게 이어져 있는 느낌.

아무런 이능의 사용 없이 정밀하게 동작을 반복하고 있자니 자연스레 혼란스럽던 머릿속도 정리되었다.

어차피 돌아온 이유는 알 수 없다.

중요한 건 왜 돌아왔냐가 아니다.

앞으로 어떤 것을 해 나갈 것이냐지.

그때였다.

그렇게 생각을 마칠 즈음, 김건의 귓가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야, 쟤가 걔지? F급?”

“맞아. 채찍 고른 놈.”

그러더니 한 생도가 김건에게로 다가왔다.

190이 넘는 키에 드럼통 같은 몸을 가진 거구.

툭 튀어나온 광대에 넙데데한 얼굴은 몽골 출신처럼 보였다.

녀석은 김건을 깔아 보며 피식 웃었다.

“아까부터 뭐 하냐? 달밤에 체조?”

김건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정말 옛날 생각나네.’

과거에는 이런 종류의 시비에 무관심으로 대응했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의 그에게는 여유가 있었다.

“체조하는 거 맞다.”

그는 몸을 지탱하고 있던 팔을 튕겨 용수철 같은 몸놀림으로 공중을 회전하며 제자리에 섰다.

화려한 몸놀림에 덩치가 살짝 어깨를 굳혔다.

“체조는 좋아. 근력뿐만 아니라 유연함과 균형 감각까지 키울 수 있거든.”

몽골 덩치는 코웃음을 쳤다.

“그런 게 왜 필요하냐? 오라로 강화하면 그런 동작은 아무것도 아닌데.”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옆에 굴러다니고 있던 100kg짜리 아령을 집었다.

사람 몸통만 한 금속 덩어리를 공깃돌처럼 들어 올리더니, 손목을 툭툭 튕겨 던지며 가지고 놀았다.

마력을 응축시킨 힘.

오라.

그것을 다룰 수 있으면 갓난아기도 바위를 집어던지고 식칼을 천하의 명검으로 바꿀 수 있다.

몽골 덩치의 말처럼 오라를 다룰 수 있다면 체조 동작 따위는 균형 감각 없이 근력만으로도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느물느물하게 웃으며 김건을 훑어보던 몽골 덩치는 공놀이 하듯이 김건에게로 아령을 던졌다.

“어이쿠, 위험해라.”

김건은 짐짓 호들갑을 떨면서 아령을 피했다.

쇳덩어리가 바닥에 처박히며 묵직한 울림이 연무장에 퍼져 나갔다. 덩치의 비웃음이 짖어졌다.

“강체술도 못 쓰는 거냐? 너 전위라며?”

오라를 이용해 몸을 강화시키는 기술.

쓸 줄은 안다. 효율이 좋지 않아 되도록 사용하지 않을 뿐이지.

마력적성 F급인 김건은 그 누구보다도 마력을 아껴 써야 하는 몸이었다.

주변 생도들이 낄낄대며 웃었다.

“킥킥, 완전히 병신이네.”

“발할라에는 대체 어떻게 들어온 거야?”

“나 아까 들었어. 교수 추천이라던데?”

“교수? 누구?”

“제라드 샌델.”

그 말을 들은 몽골 덩치는 핫! 하고 웃었다.

“그 괴짜 교수? 독신이라고 들었는데. 너, 그 괴짜의 숨겨 둔 자식이라도 되는 거냐?”

“…….”

김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카데미에 추천장을 써 주고, 계속해서 그의 기술연구를 도왔던 제라드 교수는 김건에게 있어 은인이나 마찬가지인 사람이다.

그리고 은인이 모욕을 받는 것은 아무리 나이가 먹었어도 쉬이 넘길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하지만 점잖게 그러지 말라고 이야기해 봐야, 눈앞의 혈기 넘치는 꼬맹이에게 먹힐 것 같지는 않았다.

김건은 턱을 쓰다듬으며 몽골 덩치를 유심히 보았다.

‘어딘가 눈에 익다 했더니.’

풀 네임은 기억나지 않지만 모두가 ‘나이단’이라고 불렀던 것 같다.

꽤 예의가 없고 기고만장한 놈이라 어렸을 때 몇 번이나 부딪혔었다.

그는 곧 나이단의 최후까지 떠올렸다.

‘분명, 자기 힘만 믿고 앞으로 치고 나갔다가 죽었지?’

꽤 인상적인 죽음이었던 터라 아직도 기억이 생생했다.

기다리라고 후방에서 그토록 경고를 했는데 참지 못하고 뛰쳐나갔다가 베히모스라는 거대 괴물의 이빨에 갈가리 찢긴 뒤 삼켜졌다.

평생을 정진해 온 수련도 1초면 없었던 것이 되는 게 실전이라는 걸 되새길 수 있게 해 준 장면이었다.

그리고 이곳에 있는 모두는 나중에 소중한 전력이 될 녀석들이었다.

‘인성이 안 된 놈이라고 버리고 갈 수는 없지.’

김건은 나이단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그의 기를 죽여 놓기로 했다.

그는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럼 어디 한번 대련이라도 해 볼래?”

F급의 겁 없는 도발에 주변 생도들은 환호했다.

“어쭈. 병신 같은 게 깡은 있네.”

“싸워라, 싸워!”

휘파람 소리와 야유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나이단의 표정이 험상궂게 일그러졌다.

“이 새끼가 뒤질라고. 내가 그렇게 우습게 보이냐?”

김건은 흥분한 나이단을 바라보았다.

“만화 같은 걸 보면 말이야…… 무능력자 주인공이 능력자들이 싸우는 내용이 많거든?”

씨익, 장난기 넘치는 미소가 떠올랐다.

“거기서 보면 꼭 너 같은 놈들이 당하는 역할로 많이 나오더라고.”

까무잡잡하던 피부가 새빨갛게 달아오른다. 나이단은 씹어뱉듯이 분노를 토해 냈다.

“당장 대련실로 따라와. 죽여 버린다.”

두 사람은 대련실로 발길을 향했다.

“싸움이다! 싸운다!”

바람잡이들이 소리치자 난데없는 싸움 구경 소식에 남자 생도들이 우르르 몰려갔다.

한편 여생도들은 한심하다는 듯한 눈을 하면서도 슬금슬금 무리의 뒤편에 끼어들었다.

* * *

연무장의 구석에는 커다란 사각형의 공간으로 이루어진 대련실이 있었다.

김건과 나이단은 각자 충격을 흡수해 주는 마법이 걸린 보호구를 착용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김건은 주머니에서 블록 형태의 덩어리를 꺼냈다.

살짝 마력을 주입하자 네모난 그것은 빛을 뿌리더니 흐느적 휘어져 기다란 채찍이 되었다.

나이단 역시 김건과 마찬가지로 무기를 꺼냈다.

그의 것은 길이가 2미터는 되어 보이는 대검이었다.

김건은 가볍게 채찍을 휘둘렀다. 채찍 끝이 바닥을 때리자 촤악 하고 경쾌한 소리가 났다.

“어때? 먼저 공격할래?”

“입 닥쳐!”

나이단이 곧장 성난 황소처럼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가 앞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 김건은 이미 팔을 휘두르고 있었다.

좌에서 우를 그리는 팔의 궤적. 나이단은 반사적으로 칼을 들어 좌측을 막았다.

눈앞이 번쩍이며 나이단의 머리가 뒤로 날아갔다.

“……큭?!”

옆에서 날아오는 듯하던 채찍 끝이 순식간에 사라지더니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안면을 가격하고 지나간 것이다.

나이단은 신음 소리를 내며 뒤로 물러나 자세를 다잡았다.

김건은 회수한 채찍을 팽팽하게 손으로 당기며 말했다.

“채찍 끝은 순간적으로 음속을 넘는다고, 반동을 주는 타이밍만 바꾸면 타점을 수정하기도 쉽고. 몬스터들 중에는 채찍이나 촉수를 쓰는 녀석들도 있으니까 잘 알아 두는 게 좋을걸?”

주르륵-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나이단의 새빨갛게 부어오른 코에서 피가 쏟아졌다.

대련장 내에 살포된 마력이 충격을 경감시켜 줬으니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으면 코뼈가 부러졌을 것이다.

자신보다 열등한 상대에게 얻은 상처.

그리고 놀리는 건지 애 취급을 하는 건지 모를 같잖은 조언.

그 두 가지가 나이단의 자존심에 불을 당겼다.

“이 개새끼가!”

분노와 함께 그의 온몸에서 푸른 불꽃이 솟구쳤다.

다시 한번, 무시무시한 기세로 돌격을 감행한다. 무기의 특성상 월등한 사거리를 가진 김건이 채찍을 휘둘렀지만 그의 공격은 나이단의 온몸에서 피어오르는 기운에 막혀 속절없이 튕겨져 나갔다.

재빨리 채찍을 회수하고 팽팽히 당겨 방어 자세를 취하지만 소용없다. 나이단의 대검에선 오라의 불꽃이 격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오라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놈 따위, 무기 째로 조각내 버릴 수 있다.

대련장에 걸린 마법과 보호구가 있으니 죽지야 않겠지만 못해도 몇 주는 병실에 처박아 줄 생각이었다.

광폭한 일격이 당겨진 채찍을 밀어낸 나이단의 대검이 김건의 몸을 향해 이빨을 드러냈다.

하지만 김건은 그것이 닿기 전에 물 흐르는 듯한 움직임으로 나이단의 옆구리를 빠져나갔다.

나이단은 재빨리 허리를 틀며 그 뒤를 쫓았다.

“요 쥐새끼, 몸놀림은 제법 빠르…….”

“그냥 빠르기만 한 건 아니지.”

김건이 채찍의 손잡이를 당겼다. 그와 동시에 나이단은 거창한 소리를 내지르며 바닥에 얼굴을 처박았다.

“이건 또 뭐야!?”

어느새 보니 그의 몸은 다리부터 시작해서 팔까지 채찍으로 꽁꽁 휘감겨 있었다.

김건은 짧게 휘파람을 불었다.

“별거 아닌 잡기술이야. 미리 만들어 둔 매듭으로 공격을 유도한 다음, 상대의 힘을 이용해 회피와 동시에 묶어 버리는 거지.”

나이단은 모든 오라를 끌어올려 채찍을 끊어 내려 발버둥 쳤지만 소용없었다.

“크아앗! 이런 씹……!”

단순한 채찍이 아니라 수 미터, 혹은 수십 미터를 넘는 몬스터들과 싸우기 위해 만들어진 마법 무구다. 마력이 담겨 있지 않았어도 힘만 가지고 당겨서 끊어 내는 건 불가능하다.

“그래도 매듭이 풀릴 수는 있으니까…… 일단 좀 자라.”

얼마 없는 마력을 오라로 변환한 김건은 나이단의 머리를 향해 주먹을 내리꽂았다.

그리고, 주먹이 멈췄다.

“……!”

일부러 멈춘 게 아니다. 누군가에 의해 멈춰진 것이다.

온몸의 근육이 얼어붙듯 마비됐다. 김건은 가까스로 눈동자를 굴려 주변을 확인했다.

몰려 있는 구경꾼들 사이로, 살짝 손을 내민 채 주변 사람들과 귀엣말을 하고 있는 이가 보였다.

아까부터 나이단과 말을 주고받던 놈이었다.

김건은 혀를 찼다.

별것도 아닌 속박 마법이지만 풀 수가 없다.

마력만 충분하다면 오라를 이용하든, 다른 마법을 쓰든 얼마든지 파해할 수 있지만, 김건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했다.

‘꼬맹이들이 벌써부터 가지가지 하는구나.’

애초에 진심이었으면 일격에 끝냈다.

아니, 준비가 갖춰져 있지 않는 이상 아예 싸움을 걸지도 않았을 거다.

풋내기들 상대, 거기에 대련이라는 상황이라 방심했다.

그사이 포박을 풀어낸 나이단이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어지간히 화가 났는지 김건이 속박에 걸렸다는 건 눈치도 못 챈 것 같았다.

“넌 이제 죽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대검을 치켜들었다.

다시금 오라가 불타오르며 나이단의 팔에서 근육이 용솟음쳤다.

입이라도 움직이면 농담이라도 한마디 하겠는데 입술조차 움직이지 않았다.

‘아프겠는데.’

대련장에 펼쳐진 마법이 공격을 막아 주겠지만 저걸 생으로 맞았다간 그냥 아야 하는 수준으로는 안 끝난다.

골절은 확정이고 내장에까지 데미지가 들어올 수 있다. 그 정도 중상이라면 아카데미의 의료 시설로 치료받아도 족히 일주일은 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것이다.

“끝났네.”

“개 아프겠다.”

“크크크…… 그러게 왜 까불어? 멍청한 놈.”

누군가가 수작을 부렸다는 걸 모두들 눈치챘지만 거기에 일일이 따지고 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카데미에서의 레이스는 이미 시작되었으니까.

F급이니 낙하산이니 해도 경쟁자는 경쟁자.

알아서 떨어져 나가겠다는데 말릴 이유가 없는 것이다.

암묵적인 공개 처형.

당하는 게 병신, 이럴 때 도와줄 인맥이나 연줄조차 없다는 게 김건의 패인이었다.

“뒤져!”

고함과 함께 검이 내리쳐지는 순간이었다.

“그 사람에게 손대지 마.”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이단의 발밑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부풀어 올랐다.

콰쾅!

폭음과 함께 부서진 얼음 조각이 사방에 튀었다.

갑자기 나타나 나이단의 공격을 막아 낸 것은 근육 거인의 모습을 한 얼음덩어리. 한 기의 아이스 골렘이었다.

공격을 막은 아이스 골렘이 곧장 주먹을 휘둘러 온다. 나이단은 팔을 들어 공격을 막았지만 거인의 괴력을 견디지 못하고 사정없이 날아갔다.

“으아악!”

거구가 몰려 있는 구경꾼들에게 처박히며 소란이 일었다.

“아이 씨! 뭐야!?”

“저 골렘, 어떤 놈 거야?”

하지만 그 소란은 한 인물의 등장으로 순식간에 잠잠해졌다.

또각- 또각-

구둣발 소리를 울리며 대련실로 들어오는 한 여인이 있었다.

S급 이상의 마력적성을 가진 자만이 가질 수 있다는 천연색 머리.

푸른색 머리칼에 차갑게 날이 선 미모는 전설 속의 요정을 연상시킨다.

단정한 옷차림과 정확한 걸음걸이, 그리고 엄숙한 표정에서는 기묘한 카리스마까지 느껴졌다.

“한서리……!”

“킹메이커가 왜 여기에?”

“저 여자, 상급반이잖아…… 상급반은 개인 연무장에서 수련해야 하는 거 아니야?”

의문에 찬 웅성거림을 해치고 여인은 똑바로 걸어서 김건의 앞에 섰다.

“…….”

잠깐 사이 속박 마법은 풀렸다. 하지만 김건은 마법에 걸린 것마냥 움직이지를 못했다.

그리고.

뺨이 날아갔다.

짜악!

짝!

짜악!

가차 없는 따귀였다.

단번에 입안이 터지고 입술이 찢어져 피가 흘렀다. 그렇지만 신음 소리 하나 흘릴 수 없었다.

“내가 분명 하지 말라고 했지, 이 개자식아.”

감정 어린 목소리. 그렁그렁한 눈망울.

그것은 김건이 한 번도 접하지 못했던 아내의 아카데미 시절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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