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 8화
그나마 예의를 차리고 있는 엘런은 저도 모르게 말을 밖으로 냈다가 얼른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였고, 한서리는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버트와 김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버트는 웃었다.
클클클클클-
쇳덩어리로 빚어 낸 황소머리의 주둥이에서 괴이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상체를 떨며 한참을 웃던 근육 덩어리가 투구의 틈새로 김건을 쳐다보았다.
“재미있군. 초일류의 제어력을 가진 F급 전위라. 지금까지 수많은 전사를 만났지만 너 같은 놈은 처음이다.”
그는 이내 주머니를 뒤지더니 무언가를 꺼냈다.
“요즘 대장장이라는 놈들은 무기라기보다는 마력 출력 장치를 만드는 놈들이 대부분이지. 마력적성 F급에게 어울리는 장비를 구하기는 쉽지 않을 거다. 앞으로 제대로 된 물건을 가지고 싶다면 나를 찾아와라.”
버트가 내민 것은 금속으로 만들어진 명함이었다.
빛깔을 보면 황금으로 만든 것 같은데, 특수한 처리를 했는지 금속답지 않게 종이처럼 부드럽게 휘어졌다.
각 모서리에 볼룬드를 상징하는 문양이 들어 있고 가운데에 버트 포스터라는 이름이 정교하게 음각되어 있다.
김건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이야기로 들은 적은 있다.
버트가 건넨 것은 볼룬드의 대장장이들이 가지는 특수한 명함, 속칭 ‘볼룬드 와일드카드’라 불리는 물건이었다.
이 사람의 전속 대장장이가 되겠다는 표식.
하지만 김건을 놀라게 한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버트의 카드에 새겨진 그의 닉네임이었다.
[다이달로스]
‘삼신기의 제작자?!’
삼신기는 지독하게 이어지는 마계와의 전쟁에서 수많은 사용자가 죽어 나가는 와중에도 파손되지 않고 마지막까지 남아 인류의 힘이 되어 주었던 세 가지 장비의 통칭이다.
그리고 김건은 삼신기의 세 주인 중 하나였다. 때문에 그것의 강력함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김건이 아는 바에 따르면 지금으로부터 5년 뒤. 다이달로스는 당대 최강의 전사 중 하나인 웨폰마스터 왕첸의 전속 대장장이가 되는 것으로 이름을 날린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김건의 전속 대장장이가 되었다.
볼룬드의 대장장이가 가질 수 있는 와일드카드는 한장이 전부.
김건이 죽거나, 스스로 카드를 반납하지 않는 이상 다이달로스가 다른 사람의 전속 대장장이가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김건이 한서리를 돌아봤다. 그의 아내는 배시시 웃으며 깜찍하게 윙크를 해 보였다.
모든 것은 그녀의 설계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하여튼 부지런하다니까.’
아무것도 하기 싫다더니 벌써부터 밑밥을 깔기 시작했었군.
김건은 쓴웃음을 지으며 받은 황금색 명함을 주머니에 넣었다.
엘런은 손수건을 꺼내어 땀을 닦았다. 그의 목소리에는 놀람이 가득했다.
“이거 원, 버트가 명함을 건넬 줄은 몰랐는데요. 김건 님, 볼룬드의 대장장이가 명함을 건네는 것의 의미를 아십니까?”
“대강은 압니다. 친구에게 들은 적 있어요.”
명함을 받은 사람은 곧바로 볼룬드의 VIP 고객이 된다. 언제든 볼룬드의 사업장 내의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으며 모든 이용 상품이 할인된다.
제일 중요한 것은, 전속 대장장이와의 거래에는 볼룬드가 일절 참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볼룬드에서 판매하는 장비 값에 포함되는 중개료며, 관리비, 원재료를 공수하는 데 든 유통비 등 모든 부대 비용이 제외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쉽게 말해 엄청나게 싼 값에 장비를 구매할 수 있다는 것.
엘런은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럼 별다른 설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축하드립니다. 김건 님. 앞으로도 항상 최선의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김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서리가 말했다.
“지금 보여 주신 이 무기, 바로 사고 싶은데요. 가격이 어떻게 되죠?”
엘런은 슬쩍 물러서서 버트를 바라보았다.
김건에게 명함을 건넨 이상, 장비를 얼마에 팔든 그건 온전히 대장장이의 마음이다.
버트가 말했다.
“10억.”
“10억?!”
김건은 숨이 막혔다.
최고의 아카데미에 입학해, 고연봉 직종인 영웅으로서 활동했음에도 불구하고 김건은 평생 동안 억 단위의 돈을 쥐어 본 적이 없었다.
어렸을 때는 장학금으로 충당하지 못한 학비를 대야 했고, 나이 든 이후에는 기술 연구를 계속하는 데에 돈을 썼다.
시간이 지나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만한 능력을 얻은 뒤에는 화폐라는 것이 의미가 없어진 뒤였다.
그의 금전 감각은 월세 낼 돈이 없어 친구들에게 돈을 빌리던 아카데미 학부생 시절에 멈춰 있었다.
김건이 당황스러워하자 엘런은 왜 그러냐는 듯이 말했다.
“10억이면 버트가 많이 양보한 겁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냥 최소 임금에 무기를 만드는 데 쓴 재료와 가공에 쓰인 장비 이용료만 포함된 것 같군요. 사실상 원가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 그러면 원래 가격은 얼마죠?”
엘런은 탁자의 패널을 조작해 검색을 해 보더니 말했다.
“음, 판정가는 25억이군요. 한서리 님이 VIP 고객이니 할인이 들어갈 테고…… 그런 걸 감안했을 때 정상 거래를 했다면 20억 정도가 되었을 것 같습니다.”
“이, 이십……!”
볼룬드의 장비들이 비싸다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김건은 기가 막힌다는 듯이 신음을 토했다.
그런 그의 귀를 누군가가 쭉 잡아당겼다.
“……!?”
한서리였다.
그녀는 왠지 모르게 화가 난 듯했다.
뭐가 그렇게 신경에 거슬렸는지 예쁜 눈썹이 하늘로 솟구쳐 있다.
한서리는 신경질적으로 품을 뒤지더니 카드 한 장을 내밀며 말했다.
“결제해 주세요. 일시불로.”
* * *
“그럼 안녕히 가십시오. 다음에 뵐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엘런의 배웅을 받으며 김건과 한서리는 볼룬드를 빠져나왔다.
들어갈 때와 다르게 김건의 허리에는 동그랗게 감긴 채찍이 매여 있었다.
한서리는 나오자마자 눈을 흘겼다.
“돈이든 마력이든 당신에게 부족한 건 뭐든 내가 채워 줄 수 있어. 그러니까 사람들 앞에서 바보 같은 모습 보이지 마.”
화난 것처럼 보였던 건 그것 때문인가.
김건은 머리를 긁적였다.
“당신이 부잣집 딸인 건 알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지.”
아무리 재벌이라고 해도 아직 생도인 그녀가 10억이라는 돈을 지불할 수 있을 거라고는 믿는 사람은 없지 않을까.
“그 많은 돈이 다 어디서 난 거야?”
“용돈이랑 아르바이트.”
도대체 용돈이랑 아르바이트로 어떻게 수십억을 모은단 말인가.
누구는 뼈 빠지게 일해도 오늘내일하는데 누구는 벌써부터 수억을 펑펑 써 재끼고 있다. 아무리 재벌가라지만 세상이 이래도 되는 건가.
김건은 머릿속이 이상해지는 걸 느꼈다.
“그게 말이 돼?”
“당연히 그것만 가지고는 안 되지. 돈은 원래 어떻게 굴리느냐에 따라…….”
설명을 하던 한서리의 말을 누군가가 끊었다.
김건은 아니었다.
“이게 누구야, 한서리 님 아니신가.”
언뜻 들어도 자신감이 철철 흐르는 목소리.
그것을 들은 한서리의 어깨가 딱딱하게 굳었다.
그녀는 얼음장 같은 표정으로 등 뒤를 돌아보았다.
한 남녀가 두 사람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황금빛 머리칼이 휘날렸다. 자연적인 금발이 아니다. 빛가루라도 뿌린 것마냥 황은색으로 반짝이고 있다.
천사가 내려온 듯한 외모의 남매였다.
하지만 두 사람이 걸친 것은 새하얀 천옷이 아니라 발할라 아카데미의 교복이었다.
“오랜만이군, 볼룬드에 장비를 사러 온 건가?”
살갑게 웃으며 다가오던 남자가 옆에 있는 김건을 발견했다.
“이놈은 뭐야? 누군데 한서리와 같이 있지?”
그러자 뒤에 서 있던 여자가 킥킥 웃으며 대답했다.
“나 알아. 저 두 사람, 서로 사귀는 사이래.”
남자의 얼굴이 험상궂게 일그러졌다.
“그게 무슨 개소리야.”
“아카데미 SNS 안 봐? 안에서는 벌써 소문 다 났는데.”
“하층민들이나 보고 즐기는 저급한 걸 왜 봐?”
“그게 대체 언제 적 대사야? 중세시대인 줄 알겠네.”
여자는 핀잔을 주더니 남자를 지나쳐 다가왔다.
그녀가 발걸음을 향한 곳은 한서리가 아니라 김건 쪽이었다.
“너, 김건이지? 나는 세라스 프레이저야! 네가 입학하기 전에 몬스터를 사냥하던 동영상을 봤어!”
황금색 단발이 애교 있게 들썩거렸다. 세라스는 눈을 반짝이면서 김건의 손을 틀어쥐었다.
“완전 멋있던데? 너, 뭔가 특이한 기술을 사용하는 거지? 대체 어떻게 외상 없이 오우거의 심장을 파괴한 거야? 무슨 침투경이나, 통배권이라도 쓴 거야? 혹시 무협소설 마니아?”
이 녀석은 어렸을 때도 여전하군.
김건은 난감하게 웃었다.
세라스는 그의 몇 없는 친구 중 한 명이었다.
부잣집 딸내미이면서도 호기심이 많고 사람이 좋아서 꽤 친하게 지냈었다.
전쟁이 격화되자 얼마 못 가 죽었지만 말이다.
“그걸 말하면 내 밑천이 드러나니까 안 알려 주지.”
김건은 그렇게 말하며 세라스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두 사람을 지켜보는 한서리와 금발 남자의 시선이 싸늘해졌다.
“그딴 놈한테 달라붙지 마.”
“…….”
차갑게 세라스에게 경고하는 남자.
한서리는 말없이 손가락으로 김건의 옆구리를 난도질했다.
세라스가 투덜거렸다.
“쳇, 좀 더 이야기해 보고 싶었는데. 쟨 진짜 물건이라니까? F급 마력적성으로 오우거를 때려잡았단 말이야!”
“F급?”
남자의 얼굴이 얼음장처럼 굳었다.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세라스가 아차 하며 입을 틀어막는다.
삽시간에 분위기가 살벌해졌다. 남자는 분기 넘치는 표정으로 한서리를 쏘아보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한서리? 너는 나랑 약혼한 거 아니었나?”
약혼?
그 단어를 들은 김건의 입술이 굳었다. 한서리는 짜증이 가득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약혼? 그건 취소야. 난 너랑 결혼할 생각 없어. 제이미 프레이저.”
제이미는 당혹스럽다는 듯이 파란 눈을 깜빡였다.
“이제 와서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냐? 나는 한씨 가문에게 아무 말도 못 들었는데.”
“가문이 아니야. 바로 내 결정이지.”
“웃기는군. 이게 너 혼자 정할 수 있는 일인 줄 아나?”
“내 인생인데 정하지 못할 게 뭐가 있지?”
한서리는 냉정하기 그지없는 눈으로 제이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제이미는 그 속에 담겨 있는 결의를 눈치챘다.
“가문을 버리겠다? 어처구니가 없군! 그것도 이딴 F급 때문에?”
빠득, 한서리의 입술에서 이빨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낮은 어조로 말했다.
“판단은 내가 해. 너 따위가 알 바 아니야.”
제이미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난 너를 높게 평가한다. 한서리. 하지만 이건 아니야. 진짜 아니야. 단순히 약혼을 깼기 때문에 하는 말이 아니다. 네가 고른 상대가 그럴듯한 놈이라면 그래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고작 F급 쓰레기 때문에 약혼을 깨?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 아니지, 이건 다이아몬드를 똥통에 처박는 꼴이라고.”
거침없이 말을 잇다가 문득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내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러나?”
말을 꺼낸 그는 이내 무언가에 납득했는지 안도하는 한숨을 쉬었다.
“그래, 집안에서 멋대로 정한 일이니 싫을 수도 있지. 허수하비 하나 잡아서 뭔가 해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뭐든지 자신에게 맞는 짝이 정해져 있는 법. 이 세상에 네게 어울릴 정도의 남자는 나밖에…….”
킥 하는 웃음소리가 제이미의 말을 끊었다.
“네가 그렇게 잘난 줄 알아?”
한서리의 말에 제이미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히 잘났다고만 할 순 없지. 너와 나 정도 수준의 재능을 지닌 자는 이 세상에서도 손에 꼽을 거다.”
“왕자병이 지나치시네.”
앞으로 나서는 한서리.
그녀는 턱을 치켜들며 비릿한 미소를 띠었다.
“까불지 마. 이 사람은 그깟 재능만 믿고 나대는 너 따위완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하니까.”
그 말을 듣는 순간, 제이미의 표정이 돌변했다.
“……그 말은 쉽게 넘길 수 없겠는데.”
굶주린 야수 같은 눈빛이 김건을 향했다.
김건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 그의 얼굴을 향해, 섬광이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