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 15화
“어이, 어이, 어이!”
루키킬러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바닥에 장님 검사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당황한 눈동자가 정신없이 움직이며 사위를 살피다가 다시 한번 쓰러진 남자의 육체로 향했다.
심장 박동은커녕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바닥에 둥글게 퍼지기 시작하는 핏자국.
진짜로 죽었다.
“말도 안 돼! 진짜로 죽었다고!?”
머리를 감싸 쥐며 비명을 지르는 루키킬러.
장님 검사는 몇 명이나 S급 영웅을 묻어 버린 전적이 있는 델타급 마인이면서도, 벨제불의 대행자인 아스타로트가 간부 후보로 심혈을 기울여 키우던 이들 중 하나가 아니던가.
그런 놈이 뭐에 당했는지도 모르게 죽었다.
그녀는 혼란과 두려움이 섞인 눈으로 김건을 바라보았다.
아직 풋풋한 나이일 것이다.
뜨거운 피와 활기를 가진 육체.
하지만 그 얼굴에 박힌 눈은 무기질에 가까울 정도로 고요했다.
전투의 흥분도, 적을 쓰러트린 것에 대한 기쁨도 없다.
그저 당연한 걸 했다는 느낌.
푸줏간의 도축업자가 고기를 해체하듯, 과수원의 일꾼이 과실을 따듯, 아무렇지도 않게 S급의 실력자를 해치웠다.
놈은 바로 다음 작업물에게 관심을 주었다.
“다음은 네 차례다.”
기다란 채찍을 팡팡 당기며 걸어오기 시작한다.
그 모습을 본 루키킬러의 온몸에 오한이 내달렸다.
그녀는 약자를 괴롭히는 걸 좋아하지, 대등한 결투에서 오는 희열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성장 가능성이 있는 생도들만을 골라 죽이는 것도 그것 때문이다.
너무 못난 놈들은 포기도 빨라서 괴롭히는 재미가 없다.
재능이 있는 놈, 하지만 아직 재능을 꽃피우지 못한 녀석들을 죽이는 게 좋다.
약한 주제에 일말의 가능성을 버리지 못하고 발버둥 치는 것을 밟아 죽일 때만큼 기분 좋은 것은 없다.
강한 놈을 상대하는 건 질색이다.
아쉽지만 여기서 물러나자.
잠깐이었지만 방금 전의 격투로 놈의 속도가 어느 정도인지는 확인했다.
빠르긴 하지만 도망가지 못할 수준의 속도는 아니다.
아스타로트에게 말해서, 다음에 더 강한 마인을 데려와야지.
그러면 분풀이는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마음을 정한 그녀가 도망치기 위해 발꿈치를 들어 올리는 순간이었다.
주시하고 있던 김건의 팔이 일순 사라졌다.
“어?”
순식간에 날아온 채찍이 타격과 동시에 그녀의 발목을 잡아챘다.
발이 잘려 나간 듯한 격통이 치밀고, 살짝 떠올랐던 몸이 순식간에 아래로 꺼졌다.
“그렇게 그냥 가 버리면 섭섭하지.”
김건이 채찍을 잡아당기자, 넘어진 루키킬러가 쓰레기 포대처럼 질질 끌려갔다.
“으아악!”
명백히, 명백히 방금 전에 싸웠을 때 보여 줬던 것보다 빠르게 채찍이 움직였다.
루키킬러는 김건이 장님과 싸우기 전부터 그녀를 잡기 위한 안배를 해 두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지독한 꼬마에게는 확신이 있었다.
자신이 이길 것이라는 것과 루키킬러가 도망칠 것이라는 확신.
그렇기에 장님과의 전투에서 전력을 다하지 않고 일부러 한 템포 느린 속도를 보여 준 것이다.
승부가 결정되자마자 도망갈 루키킬러를 확실히 잡기 위해서.
“이, 이 빌어먹을 꼬마가……!”
하지만 아직은 괜찮다.
루키킬러는 이를 악물며 마기를 운용했다.
그녀의 특기인 고속 이동술, 기환마위(己換魔位)는 신체를 마기로 바꾸어 이동한 뒤, 다시 몸을 재구축하는 것으로 순간이동에 가까운 기동성을 발휘하는 기술이다.
몸을 형체가 없는 마기로 바꾸면 당연히 채찍 따위의 구속은 쉽게 벗어날 수 있다.
그녀는 서둘러 기술을 사용했다.
하지만.
‘안 되잖아!?’
몸을 마기로 변환시킬 수가 없다.
발목을 붙잡고 있는 채찍이 마기의 제어를 흐트러트리고 있었다.
“기환마위로 도망칠 생각은 버려. 이 채찍은 리빙메탈이다. 마기라 해도 본질은 마력. 마력을 빨리는 상태에서 몸을 변환시키는 건 어려울 거다.”
덫에 걸려 발버둥 치는 사냥감의 목줄기에 단검을 꽂으며 하는 듯한 말.
루키킬러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상대는 그토록 강한 아스타로트의 제자도 순살한 괴물이다.
도망치지 못한다면 남은 결과는 한가지뿐이었다.
미래를 직감한 루키킬러의 입에서 새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싫어어어!!”
손가락으로 땅을 긁으며 여자가 발악을 시작했다.
순식간에 손톱이 부러지고 찢어진 손끝에서 핏방울이 흘렀다. 엉엉 울며 뒤집힌 벌레마냥 팔다리를 버둥거린다.
“아악!! 싫어! 죽기 싫어! 살려 줘!”
지금까지 수십, 어쩌면 수백의 무고한 목숨을 빼앗았을 쓰레기가 보이는 추태에 김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는 발치까지 끌려온 루키킬러를 향해 손을 들어 올렸다.
“시끄럽군.”
“도와주세요! 벨제불 님! 벨제불 님!!”
살인자의 간절한 외침.
하나, 우습게도 그것에 대답하는 신이 있었다.
측면에 살기.
김건이 손을 멈추고 도약해 공격을 피했다.
섬전 같은 칼날이 그가 있던 자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흠.”
거리를 벌려 착지한 김건이 채찍을 회수하며 혀를 찼다.
그가 바라본 곳에는 어떻게 된 일인지 심장이 멈춰 죽었을 터인 장님 검사가 피투성이 모습으로 서 있었다.
혈색이 없는 새하얀 얼굴은 살아 있는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호흡은 남아 있는지 쿨럭쿨럭 기침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입에서 튀어나온 것은 숨도, 피도 아니라 검은색 안개였다.
장님은 검은 기운을 뱉어 내면서 김건을 노려보았다.
“네놈, 끄륵…… 보통, 보통 놈이 아니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계통의 기술이야. 오라인가? 아니면 마법? 도대체 뭐가 내 심장을 파괴한 건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그는 발치에 쓰러져 울고 있는 루키킬러를 발로 툭 치며 말했다.
“그러고 있지 말고 빨리 도망쳐라. 이놈은 진짜다. 방금 전에 상대했던 여자와는 비교도 안 돼. 놈의 존재를 스승님에게 알려야 한다.”
“아, 아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벨제불 님!”
그제야 자기가 목숨을 부지했다는 걸 알아챈 루키킬러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바로 기환마위를 사용해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장님은 계속 기침을 했다. 더 이상 그의 입에서는 검은 안개가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 대신 그의 심장 부위에서 검은 물결이 터져 나와 바닥으로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검은 물질에서는 물에 불은 시체가 썩어 들어가는 냄새가 났다.
악취에 코끝을 일그러트리며 물러나는 김건. 그는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검은 물질에 뒤덮여가는 장님을 바라보았다.
“그만둬. 쓸데없는 시간 낭비야.”
장님은 끈덕하게 몸을 감싸는 검은 물질을 손가락 사이로 흘려보내며 김건을 향해 웃어 보였다.
“이게 뭔지 아나?”
“마기를 폭주시켜 봐야 네가 이룰 수 있는 건 없어. 아까운 네 영혼만 벨제불의 뱃속에서 고통받을 뿐이지. 그냥 곱게 죽어.”
“기환마위라는 이름을 아는 것도 그렇고, 마인에 대해 아주 잘 아는군.”
장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넌 위험한 놈이야. 벨제불 님의 강림에 크나큰 위협을 가할 수 있는 존재라고 판단했다.”
번쩍, 고개를 쳐드는 장님.
시커멓게 비어 있던 그의 눈구멍에 들어찬 검은 물질이 마치 눈동자처럼 깜빡였다.
“그러니, 여기서 죽어라.”
남자의 얼굴이 그대로 검은 물질에 삼켜졌다.
마인을 뒤덮은 검은색 덩어리가 부풀어 올랐다.
징그러울 정도로 꿈틀거리는 물질이 크고 둥그런 근육을 형성. 3미터에 가깝게 자라난 근육질의 몸뚱이 위로 솟구친 대가리의 주둥이가 찢어지며 끔찍할 정도로 날카로운 이빨들이 드러났다.
광마화(狂魔化).
전신을 마기로 바꾸어 죽지도, 지치지도 않는 육체를 일시적으로 얻는다.
목숨을 연료 삼아 의지를 가진 기운 덩어리가 되어 존재가 사라질 때까지 싸우는 금술(禁術).
“크와악────!!”
장님, 아니 이제 광마가 된 남자가 울부짖었다.
광마화를 시전하면 뇌 역시 마기화가 진행되기 때문에 사고기능이 극도로 떨어지게 된다.
그는 그저 눈앞의 목표를 죽이기 위해서 태어난 짐승이 되어 김건에게 달려들었다.
“젠장.”
소용없는 짓이라 말은 했지만 광마는 김건에게 상대하기 껄끄러운 존재였다. 상성으로 따지면, 가히 최악이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다. 김건은 욕지거리를 하며 채찍을 잡아당겼다.
“크왓!”
방금 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력한 일격이 뿜어졌다.
덩치가 커진 탓에 이제 단검처럼 보이는 일본도가 목을 노리고 날아왔다. 속도 역시 한층 빨라졌지만 김건은 대응했다.
채찍으로 칼날을 방어. 힘을 줘서 공격을 튕겨 내는 것이 아니라 부드러운 채찍으로 공격을 휘감아 그 위력을 이용해 그대로 광마를 바깥쪽으로 던져 버렸다.
검은 몸이 옆의 관리소 건물을 부수며 처박혔다.
“음…….”
공격을 받아 낸 팔이 후들거리고 던지기의 중심축이 된 허리와 무릎이 격통을 호소했다.
김건의 등목에 치솟은 고드름의 크기가 많이 줄어들었다. 몸을 감싸고 있는 서리 역시 옅어졌다.
‘버프의 효력이 점점 떨어지고 있다.’
마력이 적은 그는 영웅으로서의 육체 능력 대부분을 아내의 버프에 의지하고 있었다.
한서리의 버프가 상승시켜 주는 능력에는 몸 전체의 내구력과 반응 속도 역시 포함되어 있다.
아무리 기술이 뛰어나도 미숙한 몸으로 헤비급 격투가의 신체 능력을 따라갈 순 없다.
아마 조금 뒤면, 지금처럼 시간 벌이도 못하는 처지가 될 것이다.
그때였다.
“하아아앗!!”
김건이 싸우는 동안 한쪽 눈을 잃은 충격에서 벗어난 노바가 그의 뒤에서 고함을 질렀다.
그녀의 몸을 중심으로 빛의 마력이 방사됐다.
파도처럼 퍼져 나간 마력이 광마가 떨어진 건물을 포위. 그와 동시에 마력이 불타며 빛으로 이루어진 감옥이 눈앞에 출현했다.
라디언트 챔버가 다시금 발동되었다.
콰콰콰콰쾅!!
사방에서 조사된 죽음의 빛줄기가 건물을 박살 내고 주변을 불바다로 만들었다. 그 위력은 가히 폭격에 비할 만했으나, 안타깝게도 상대가 좋지 않았다.
“크아아아아!”
부서진 잔해를 떨치고 검은색 덩어리가 뛰쳐나왔다. 총알 세례를 받은 종잇장마냥 몸이 너덜너덜해졌는데도 그 움직임에는 조금의 주저도 없었다.
저것은 이제 뼈와 관절, 피와 내장의 조합으로 구동되는 유기 생명체가 아니다.
오히려 의지를 가진 불에 가까운 존재.
불꽃은 태울 연료를 모조리 소진하기 전까지는 꺼지지 않는다.
“뭐야? 저 괴물은…….”
처음 광마를 마주한 노바의 얼굴이 아연해졌다. 희번득거리는 광마의 빨간 눈이 그녀를 포착했다.
괴물의 허벅지가 부풀어 오르고, 잔해가 폭발했다.
“빠르……!”
반응하지 못하는 노바의 허리를 붙잡고 김건이 몸을 날리자마자, 광폭한 손이 노바의 머리가 있던 공간을 헤집고 지나갔다.
김건이 채찍을 휘둘렀다. 가로등을 붙잡고 힘을 폭발적으로 짜낸다. 채찍에 감긴 가로등이 사정없이 꺾이며 반동으로 두 사람이 포탄처럼 하늘로 쏘아져 날아갔다.
“으에엑!?”
갑작스러운 고속 이동에 당황한 노바가 괴성을 질렀다. 김건이 연속으로 채찍을 뻗었다. 사방에 깔린 구조물을 이용해 무시무시한 속도로 공중 기동을 펼쳤다.
쭉 뻗은 채찍이 회전목마의 중심축을 붙잡았다. 노바를 끌어안은 김건이 타원을 그리며 바깥쪽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그 뒤를 쫓아 달려온 광마가 회전목마를 들이받았다.
중심 프레임이 휜 놀이기구의 뚜껑이 날아가고, 산산조각난 목마의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드롭 타워, 공중 열차, 바이킹의 순으로 건너뛴다.
그가 지나가는 곳마다 검은색 그림자가 뒤를 쫓으며 파괴의 폭풍우가 몰아쳤다. 높게 선 드롭타워가 무너지고 공중 열차가 말 그대로 공중을 날았다. 두 조각난 바이킹의 선체는 지면에 격돌하며 굉음을 뿌렸다.
“우오오오오오!!”
광마는 속도는 빠르지만 이지를 상실한 탓에 행동이 직선적이고 단순하다.
김건은 지그재그를 그리며 다각적으로 움직여 계속해서 광마에게서 도망쳤다.
이러다간 놀이공원을 모조리 박살 내게 생겼다.
지금보다 피해가 확산되면 제대로 피난하지 못한 일반인이 휘말릴지도 모른다.
김건은 이를 깨물었다.
슬슬 한계가 오고 있었다.
주변의 장애물도 거의 안 남았고 아내가 준 버프의 위력도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사라져 줄 광마이지만, 놈이 사라지는 것보다 이쪽의 소모가 더 빨랐다.
김건은 승부를 볼 때라고 판단하고 품속의 노바에게 말을 걸었다.
“혹시 극대소멸공격이 가능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