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 32화
‘저놈이군.’
마이는 연회장을 빠져나가는 제이미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발할라 생도들을 포섭하기 위한 스카우터로 변장해 이곳 경기장에 잠입해 있었다.
마인협회의 간부는 총 네 명.
박사가 머리, 아스타로트가 무력, 그리고 레이나가 자금을 담당한다고 하면 그녀가 담당하는 것은 협회의 눈이었다.
루키킬러로서 활동했던 것은 그저 여흥이자 취미 생활이었을 뿐이다.
마이는 본디 아무도 알지 못하는 암흑 속에서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검사기로 측정이 불가능할 정도로 마기를 숨기는 기술에 능숙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렇게 포장한 마기를 이용한 변신 기술까지 가지고 있었다.
그것을 나타내듯 그녀는 예쁘장한 여자의 모습이 아니라 풍채 좋고 업무에 지친 30대 남성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마기로 만들어진 껍데기를 뒤집어쓴 그녀는 매서운 눈으로 제이미의 뒤를 쫓았다.
박사가 말했던 것처럼 제이미의 정신은 꽤 나약해진 상태처럼 보였다.
가진 마력량과 단련된 육체로 보아 소체로서의 적성도 뛰어나다. 박사가 제시한 작전을 수행하기에는 충분한 조건이 갖춰진 것처럼 보였다.
‘문제는 이걸 어떻게 집어넣느냐인데…….’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가슴 언저리를 만지작거렸다.
가진 기운이 너무나 흉악해서 최고의 은폐 기술을 가진 마이가 아니라면 가지고 나올 수도 없는 물건이 그녀의 품 안에 있었다.
이걸 제이미의 육체와 동기화시켜야 한다.
제일 좋은 건 직접 혈관에 주입하는 것이지만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은신술이 아무리 뛰어나도 초월자에 근접한 실력의 전위에게 접근해 주사 따위를 찔러 넣을 수는 없으니까.
그러면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다.
마이는 자연스럽게 바에 다가가 바텐더에게 물었다.
“이봐요, 방금 여기 앞에 있다가 나간 사람이 제이미 프레이저 아닙니까?”
“맞습니다.”
“허 참, 정말 탐나는 인재이긴 한데. 안 될 건 알지만 말이라도 한번 걸어 볼걸 그랬군.”
“별 소용없을 겁니다. 이전에도 몇몇 스카우터분들이 시도했지만 이야기 한 번 제대로 나눈 사람을 못 봤습니다.”
“많이 본 것처럼 말씀하시는군. 여기 자주 옵니까?”
“토너먼트가 시작한 뒤로 거의 매일같이 오십니다.”
“술을 좋아하는가 보군요.”
“그런 것 같습니다. 그것도 꽤 고급으로만 고르십니다.”
“그럼 그 친구가 마시던 걸로 나도 한 잔 부탁하죠.”
“알겠습니다.”
마이는 진짜로 30대 회사원이 된 것처럼 거창하게 한숨을 쉬곤 어깨를 주무르며 카운터에 몸을 기댔다.
“아이고, 정말 사는 게 힘들구만. 한 잔 마시고 좀 쉬어야겠어.”
“고생하십니다.”
바텐더는 그렇게 웃으면서 술잔을 내밀었다.
의심의 기색은 전혀 없었다. 평생을 큰 굴곡 없이 평탄하게 살아온 안일한 인간의 냄새가 났다.
껍데기 안에 숨겨진 마이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토너먼트가 끝날 때까지 시간은 충분했다. 천천히 지켜보다 보면 분명히 기회가 올 것이다.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여유롭게 술잔을 기울였다.
* * *
김건과 한서리는 평온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회귀를 거친 그들에게 대회의 결과는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세워 둔 미래 계획 역시 대회가 끝나야 진행이 가능하게 되어 있다.
따라서, 할 것이 없었다.
두 사람은 영화를 보거나 네드 커플을 불러 놀거나 노바에게 연구 결과를 보고받거나 하면서 시간을 때웠다.
결승전 바로 전날, 그날도 하릴없이 빈둥거리며 하루를 보낸 두 사람은 숙소로 돌아와 같이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거 어떻게 썰면 돼?”
“깍둑썰기. 그리고 이건 채칼로 썰어서 준비해 줘.”
“설탕은 얼마나 넣어?”
“잠깐, 아무 생각 없이 넣지 말고 정확히 계량해서 부어.”
“걱정하지 마. 내 손이 저울보다 더 정확하니까.”
메리안이 한서리에게 요리를 가르쳐 주고, 한서리가 김건에게 요리를 가르쳤다. 똑같은 앞치마를 걸친 두 사람은 나란히 주방에 서서 요리를 만들었다.
준비를 마친 재료를 오븐에 넣거나 냄비를 끓이거나 하다 보니 시간이 남아서 식탁에 앉아 차를 끓였다.
차를 한 모금 마신 한서리는 따뜻한 컵을 만지작거리면서 식탁 위에 엎드렸다. 그러곤 생글생글 웃으며 김건을 쳐다보았다.
“뭐가 그렇게 좋아?”
“아니, 당신이랑 이렇게 있는 게 너무 행복해서.”
“그냥 있기만 해도 된다니, 참 얻기 쉬운 행복이네.”
“무슨 소리야. 기적이 일어나서 겨우 얻은 행복인데.”
피식 웃어 준 김건은 요리가 완성될 때까지의 짬을 이용해서 수련에 들어갔다.
거창할 것도 없었다. 목석처럼 앉아서 언제나 하듯이 몸속의 마력을 극도로 세밀하게 조절하는 연습을 할 뿐이었다.
그러자 한서리도 시선을 돌렸다. 나른하게 식탁에 누운 채로 휴대기를 꺼내어 만지작거린다.
‘점점 나아지고 있어.’
수련을 이어 가던 김건은 잠깐 시선을 돌려 아내의 모습을 확인한 후에 생각했다.
훈련 주기에서의 사건이 끝난 뒤 꽤 불안한 모습을 보였던 아내였지만 근래에는 꽤 안정을 찾은 모습을 보여 주었다.
지금의 모습이 그 증거다.
맨 처음 회귀를 했을 때 아내는 김건으로부터 눈을 떼는 것을 싫어했다. 한사코 그의 옆에 붙어 있으려 하고, 김건이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면 갑자기 짜증을 내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이젠 남들 앞에서 과도한 애정 표현을 요구하는 빈도도 점차 줄고 있다.
김건은 그것이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에 나온 결과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결핍이 심할수록 집착은 강해진다.
바꿔 말해, 집착이 약해졌다는 건 그만큼 결핍이 채워졌다는 의미가 된다.
이걸로 아내의 정신이 완전히 건강해졌다고는 생각하지는 않았다.
마음에 새겨진 상처라는 것은 그리 쉽게 아무는 것이 아니니까. 지금 보이는 안정감은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모래성이었다.
그러니 그 모래성을 단단히 다져야 한다.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도 견딜 수 있도록.
“부탁이 하나 있어.”
“뭔데?”
한서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김건은 씩 웃었다.
“이번 대회가 끝나면 여행이라도 좀 시켜 줘.”
“여행?”
“그래. 이러니저러니 해도 아직은 시간이 있잖아? 전생에서는 한 번도 여행을 해 본 적이 없거든. 돈도 없고, 시간도 없어서. 그러니까 바빠지기 전에 한번 다녀오고 싶어.”
한서리의 눈매가 장난스럽게 휘었다.
“그럼 돈은 누가 내고?”
“당신이 내야지. 나보고 세계 최강의 전위라며. 그걸 부려 먹는데 그 정도는 내줘야지 않겠어?”
“어쭈, 자기주장이 늘었는걸. 자신감이 좀 붙었나 봐?”
“원래부터 자신감은 있었어. 단지 자만하지 않을 뿐.”
“성실도 하셔라. 당신이 그렇게 예의가 바르니까 제이미 같은 놈이 주제를 모르고 까부는 거야.”
상대가 오판하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다.
김건은 어깨를 으쓱였고, 한서리는 훗 하고 웃었다.
“좋아. 기대하고 있어. 이번 일이 끝나면 서민은 구경도 못할 정도로 화려한 여행이 뭔지 보여 줄 테니까.”
* * *
토너먼트 결승전 당일이 되었지만 제이미는 여전히 김건의 술수를 간파하지 못했다.
몇 번이고 녹화된 자료를 돌려보았지만 김건이 숨겨진 기술을 쓰고 있는 모습은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
“너무 신경 쓰지 마! 여기서 진다고 뭐 큰일 나는 것도 아니고. 애초에 같은 아카데미 동료잖아? 필요 이상으로 경쟁할 필요 없어. 우리의 적은 몬스터지 사람이 아니라고. 슬슬 그 애를 인정해! 바보처럼 고집부리지마.”
태평한 동생의 잔소리는 이제 이골이 났다. 제이미는 충혈된 눈으로 세라스를 노려보았다.
“멍청한 소리 하지 말고 꺼져.”
“뭐? 이…….”
세라스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녀는 욱하며 뭐라 토해 내려 했지만 가까스로 발휘된 인내심이 분노를 억눌렀다.
“하…… 그래. 마음대로 해. 먼저 갈 테니까, 이따 경기시간에 늦지나 마.”
한숨을 쉬며 방을 빠져나간다.
제이미는 그 등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홀로 남은 제이미는 계속해서 김건이 싸우는 모습을 영상을 바라보았다.
돌려 보고, 돌려 보고, 돌려 보다가 결국에는 영상을 송출하는 디스플레이를 손으로 쥐어 박살 내 버렸다.
잠시 후면 곧 결승인데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다.
그는 거친 한숨을 토해 내며 방을 빠져나갔다. 그의 발은 습관적으로 연회장을 향했다.
“똑같은 걸로.”
카운터 앞의 의자에 앉으며 말하자 바텐더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조금 뒤에 경기가 있으신걸로 아는데…… 괜찮으십니까?”
“네놈이 신경 쓸 일이 아니야.”
순간적으로 짜증이 치밀어 살기를 내뿜어 버리고 말았다.
순식간에 주변의 공기가 싸해지며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제이미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하며 살기를 억누르자, 파랗게 질린 주변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알겠습니다.”
다만 바텐더는 크게 겁먹은 것 같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금세 술을 만들어 내 왔다.
제이미는 술잔의 향을 음미할 틈도 없이 그대로 그것을 들이켰다.
뜨거운 알콜이 평소처럼 목을 적시는 순간, 무언가 지금까지와는 다르다는 걸 눈치챘다.
순간적으로 등골에 번개가 내리친 것 같았다. 눈앞이 깜깜해지고 전신의 피부에 소름이 돋았다.
뭔가 건드려선 안 되는 것을 건드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사라졌다.
날아갔던 정신이 돌아왔다.
놀라긴 했지만 당혹스럽진 않았다.
화가 나지도 않았다.
믿기 어렵지만 굉장히 기분이 좋았다.
지옥의 밑바닥에서 빌빌거리며 기다가 위에서 내려온 동아줄을 발견한 느낌이다.
그는 눈을 깜빡이며 바텐더를 돌아보았다.
“전에 거랑은 뭔가 다른데.”
“술의 배합을 조금 바꿔 봤습니다. 마음에 안 드신다면 전의 조합대로…….”
손님에게 말도 없이 배합을 바꾸다니.
순간적으로 괘씸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기분이 좋아졌기에 뭐라 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제이미는 고개를 저었다.
“아냐, 이게 훨씬 나아. 방금 전과 똑같은 걸로 한 잔 더.”
“알겠습니다.”
바텐더가 다시 술잔을 내밀었다.
여유가 생긴 제이미는 이번에는 잔을 들고 충분히 향을 음미한 뒤에 잔을 홀짝였다.
실망스럽지만 방금 전과 같은 느낌은 받지 못했다.
그래도 맛은 있었는지, 제이미는 이전과 달리 천천히 술을 음미했다.
“경기가 코앞인데 술을 마시냐?”
이제는 익숙해진 목소리가 옆에서 들렸다.
돌아보니 한심하다는 표정을 한 김건이 있었다.
김건은 멋대로 제이미의 옆에 앉더니 바텐더에게 주문했다.
“꿀 탄 우유 주세요.”
“예, 예!?”
웬일인지 바텐더는 조금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제이미가 살기를 뿜었을 때는 딱히 아무렇지도 않더니, 지금은 뭔가가 두려운 듯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의아해진 김건이 다시 주문했다.
“따뜻하게 덥힌 우유에 꿀 좀 넣어서 주세요. 그런 주문은 안 되나요?”
“아, 아뇨, 되, 됩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바텐더는 고개를 젓더니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우유를 담은 주전자를 버너 위에 올렸다. 기묘한 반응에 김건은 유심히 바텐더를 쳐다보았다.
“초등학생 같은 취향이로군.”
제이미가 말했다. 김건의 고개가 돌아갔다.
“맛있는데. 싸우기 전에 몸을 덥히기에도 좋고.”
제이미는 김건을 쳐다보았다.
그에게서는 포악한 투기도, 날카로운 예기도 없었다. 수수해 빠진 남자. 하지만 눈에는 보이지 않는 위압감이 있다.
정체불명의 무언가가 똬리를 품고 있는 듯한 느낌. 그 안을 들여다보고 싶지만 시커먼 무저갱밖에 보이지 않는다.
건드리면 위험하다는 확신이 들었다. 피부가 찌릿찌릿했다. 속이 메스껍고 토할 것 같이 울렁거렸다.
‘역시 기분 나쁜 놈이야.’
제이미는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금 술잔을 들이켰다. 비어 버린 유리잔을 거칠게 내려놓았다.
“네놈이 벌레 치고는 대단한 놈이라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결국 그렇게 할 수 있는 건 한서리의 버프가 있기 때문이지.”
“뭐, 틀린 말은 아니야.”
김건은 여상스럽게 대꾸하며 우유를 마셨다. 제이미가 이죽거렸다.
“저급한 능력을 버프로 메우는 것에는 한계가 있지. 마력적성이라는 것이 어째서 영웅의 강함을 판별하는 기준이 되었는지를 똑똑히 가르쳐 주마.”
선언을 마친 제이미는 던지듯이 돈을 내려놓고는 훌쩍 자리를 떠났다.
김건은 그 뒷모습을 지켜보면서 생각했다.
‘아직은 괜찮은 것 같군.’
정신적으로 약해진 영웅은 벨제불의 유혹에 넘어가기 쉽다.
그리고 김건이 아는 미래에 제이미는 벨제불의 유혹에 넘어가 마인이 된 전적이 있었다.
아내는 말했다. 마인들은 김건을 노리고 접근해 올 거라고. 그리고 그가 최근에 만난 인연 중에서 제일 마인의 유혹 대상이 되기 쉬운 건 역시 제이미였다.
세라스에게 듣기로는 멘탈이 완전히 나갔다고 하던데…….
큰소리치는 모습을 보니 아직은 여유가 있어 보였다.
“마인이라…….”
사실 김건은 마인을 그리 많이 상대해 보지 못했다. 그가 전성기를 맞았을 때 지구의 대부분은 이미 마계화가 이루어져 있었고 벨제불은 마인이라는 귀찮은 수단을 쓸 필요가 없어진 상태였다.
물론 남아 있던 마인들이 있었기에 그들과 싸워 본 적은 많았다. 하지만 인두겁을 뒤집어쓴 놈들이 평범한 인간 사회에 숨어들어 어떻게 암약하는지는 잘 몰랐다.
‘이번에는 그것에 대해서도 공부를 해 두는 게 좋겠어.’
어쩌면 이 연회장 안에도 인간인 척하며 숨어 들어온 마인이 있을지도 모른다.
김건은 조금 날카로워진 눈으로 주변을 훑었다.
식은땀을 흘리며 김건의 눈치를 보고 있는 바텐더가 보였다.
그러고 보면 처음 봤을 때부터 왠지 수상했다.
김건은 그를 처음 보는데, 그는 마치 김건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이봐…….”
의심을 품은 김건이 바텐더를 부르려 할 때였다.
“여기서 뭐 해? 조금 있으면 결승 시작인데.”
한서리가 똘망똘망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나타나자마자 김건의 팔을 끌었다.
“가자. 빨리 끝내고 쉬고 싶어.”
“마시던 건 좀 다 마시고 가면 안 될까?”
“그럼 한 번에 쭉 마셔.”
“무슨 소리야, 이런 바에서는 천천히 맛을 음미하면서 마셔야지.”
“그건 술이고. 우유를 누가 음미하면서 먹어?”
한서리는 새침한 얼굴로 딴죽을 걸었다.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남편을 바라보던 한서리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
눈썹을 찡그리며 코끝을 움켜쥐더니 무언가를 찾듯이 주변을 훑었다.
“왜 그래?”
“……벨제불의 기운이 느껴져.”
그 말을 듣는 순간 번개같이 김건의 고개가 돌아갔다. 바로 앞에 있던 카운터의 안쪽을 바라본다. 하지만 이미 그 자리에 바텐더의 존재는 없었다.
“도망쳤군.”
방심한 상태이긴 했어도 김건이 눈치채지 못하게 도망치다니, 보통 실력이 아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위장술이 뛰어났다. 아내가 어떻게 그 기운을 눈치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쉽게 됐다.
김건은 혀를 찼다.
그런데, 아내의 상태가 이상했다.
하얗게 표정이 질려서는, 부들부들 어깨를 떨고 있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김건의 표정이 날카로워졌다.
“무슨 일이야? 괜찮아?”
넋이 나간 듯 허공을 바라보던 한서리는 화들짝 놀라서 김건을 쳐다보았다.
“아냐! 아, 아무것도 아니야!”
손사래를 치면서 얼버무린다.
하지만 반응이 너무 과했다. 누가 봐도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었다.
“…….”
그것을 자각한 한서리는 이를 악물면서 고개를 떨궜다.
고통스러운 듯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주먹을 꽉 쥔다.
그녀는 흘끗 김건을 바라보았다.
김건은 차분한 기색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얼굴을 보자 욱하고 무언가가 마음속에서 흘러나왔다. 목구멍으로부터 기어나와 입속에 맴도는 것이 있다. 입술을 벙긋거려 보지만, 그것이 말이 되어 밖으로 나오진 않았다.
김건은 재촉하지 않았다. 그저 아내가 안정을 되찾는 것을 차분히 기다릴 뿐이었다.
하지만 한서리는 한참이 지나도 뒤흔들리는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했다.
그녀는 결국, 남편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묵묵히 기다리던 김건이 시간을 확인했다.
“그만 가자, 이러다 결승전 시간에 늦겠어.”
* * *
왜 이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걸까.
이 정도로 뭔가 이상한 행동을 했으면 뭐라도 물어보는 게 보통일 텐데.
경기장으로 향하는 통로에는 아무도 없었다. 적은 조명이 어스름하게 복도를 밝혔다.
앞에 열린 출구 쪽에서 와아아- 하는 소리가 가느다랗게 들리고, 발을 옮길 때마다 타박타박 소리가 울려 퍼졌다.
침묵이 고통스러웠다.
약간 뒤에서 떨어져 걷던 한서리는 겁먹은 눈으로 김건의 옆얼굴을 훔쳐보았다.
그 시선을 눈치챈 김건은 피식 웃었다.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생각 중이었어. 다른 것 때문이 아니야.”
“…….”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으나 별 소용은 없는 것 같았다.
언제나 당당하고 오만하게 상대를 깔아 보던 푸르른 눈망울이 아래를 향해 있다.
어깨는 축 늘어져 있고, 하얀 고사리 손은 의미를 알 수 없게 얽혀서 어쩔 줄을 모르고 꾸물거리고 있었다.
말을 고르고 있을 때가 아니다.
김건은 생각을 포기하고 아무렇게나 말을 내뱉었다.
“난 엄청나게 강해. 겉으로 겸손한 척은 해도, 내심은 내가 현 인류 중 최강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난데없는 최강 선언에 한서리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
“알고 있어. 당신이 이 세상 최고의 전사라는 것 정도는…….”
김건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냥 싸움만 잘한다는 의미가 아니야. 난 정신적으로도 강해. 눈앞에서 엄마가 죽고, 아버지는 고깃덩어리가 되어서 돌아왔었지. 하루아침에 고아가 되어서, 어쩌다 아카데미에는 들어왔지만 날 사람 취급해 주는 놈은 거의 없었어. 파티원들에게는 쓰레기 짐짝이었고 교수들에게는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었지.”
그건 한서리도 처음 듣는 말이었다. 아카데미 생활을 할 때의 이야기를 들은 적은 있지만, 김건은 언제나 사실 그대로 있었던 일만을 말하거나 농담거리로 쓰일 가벼운 사건만을 이야기했을 뿐이었다.
한서리가 김건의 존재를 인식하기 전의 이야기.
역사상 존재하지 않았던 지고의 기술을 완성시켜 나가는 과정.
아마도 김건이라는 인간의 인생 속에서 가장 고통스러웠을 그 시간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그 심정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내가 하려고 하는 걸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그랬지. 사실은 나 스스로도 불가능이라고 생각했었어. 몇 년이고 연구와 수련을 거듭해도 실력이 오르기는커녕 오히려 떨어지더라. 무한정 허공에 삽질만 하는 기분이었지. 뭐가 문제인지 가르쳐 줄 사람도, 참고할 자료도 없으니까.”
“…….”
“그짓을 10년 가까이 하니까 나중에는 진짜 미칠 것 같더라고. 죽는 게 차라리 낫겠다는 생각을 몇 번 했는지 몰라.”
“……응.”
“그래도 잘 참아서 어떻게 그건 잘 해결이 됐지. 그렇게 이젠 좀 사람답게 살아 보려 하니까 염병할, 바로 발할라가 망하고 전쟁이 시작됐지. 그 뒤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거야.”
인류의 명운을 건 전쟁.
그 속에서 개인의 의사나 행복 따위는 가치 판단의 저울에 올라가지 못한다.
각각의 인간은 그저 인류 존속이라는 거대한 대의를 이루어 내기 위한 소모품으로서 사용되고 버려질 뿐이다.
김건은 말했다.
“참 좆같은 인생을 살았지.”
그리고 그는 씨익 웃었다.
“하지만 그동안 눈물 한 번 흘려 본 적 없어. 죽는 그 순간까지도.”
그러고 보면 그랬다.
그와 결혼을 한 한서리도 때때로 ‘이 자식이 진짜 사람인가?’ 라고 생각하곤 한다.
두 사람이 연을 맺게 되었던 그 사건에서도 그랬다.
아무리 봐도 답이 없는데.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는데, 그때도 김건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괜찮다, 할 수 있다 따위의 말을 했었다.
“난 강해. 그 어떤 충격적인 사실이나 현상에도 흔들리지 않아. 신격을 마주했을 때도…….”
한서리는 손가락을 들어 올려 남편의 입술을 막았다.
“그만 말해도 돼. 당신을 못 믿어서 불안한 게 아니야.”
그녀는 웃었다.
하지만 그것은 보는 사람의 가슴을 아리게 하는 처연한 미소였다.
“……지금 내가 믿을 수 없는 건 오히려 나 자신이야.”
그것이 무슨 의미인가.
알 수 없다.
어설픈 추측은 오해를 낳고 오해는 의심을 낳는다.
김건은 말을 아꼈다.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도 않았다. 그는 오로지 아내를 믿고 옆에서 기다렸다.
한서리가 호흡을 가다듬었다.
깊게 들이쉬고, 내쉬고, 심호흡을 이어 갈 때마다 부서진 거울 같던 얼굴이 점점 돌아오며 차가운 냉기를 띠기 시작했다.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온 여왕이 입술을 땠다.
“설명을 하자면 길어. 일단은 시키는 대로 해.”
“알았어.”
이젠 정말로 시간이 없다.
이미 입장 시기는 지났다. 멀찍이서 스태프가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일단 싸움이 시작되면, 최대한 빠르게 제이미를 죽여.”
“…….”
김건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한서리는 그의 속마음을 읽고 말했다.
“무고한 사람을 죽이라는 게 아니야. 당신이 실패하면 오늘 이 경기장에 있는 사람들은 다 죽어.”
“……마인협회와 연관된 일인가?”
“아마도, 어쩌면 그것보다 더 위험한 존재와 관련되었을지도 몰라.”
김건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졌다.
완전히 전사의 얼굴이 된 그가 물었다.
“세라스는?”
“세라스는 괜찮을 거야. 하지만 그 애까지 납득시킬 여유는 없어. 일단은 놔두되, 방해가 되면 기절시켜.”
“알았어.”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스태프가 두 사람의 앞에 도착했다. 숨을 헐떡이며 스태프가 말했다.
“대체 여기서 뭘…… 혹시 뭔가 문제가 생기셨나요?”
“아뇨, 괜찮습니다. 바로 나가죠.”
두 사람은 그렇게 스태프의 안내를 받아 경기장으로 나갔다.
그들이 나간 통로에는 출구로부터 들어오는 하얀빛과 정적만이 남았다.
잠시 후, 바깥으로부터 들어오는 빛이 사라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경기장이 붕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