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 33화
* * *
제이미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세라스는 급변한 제이미의 모습에 위화감을 느꼈는지 찜찜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방이 열려 있는 경기장.
수많은 사람들이 환호를 지르고 스피커에서 해설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지만, 김건에게는 모두 쓸모없는 소음일 뿐이었다.
김건은 가늘게 호흡을 뱉었다.
언뜻, 아무 생각 없이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와 생사고락을 함께한 한서리는 남편이 이미 전투태세에 들어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서리가 앞으로 나섰다. 그녀는 싸늘한 비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기분이 좋아 보이네. 곧 피범벅이 되어서 병원에 실려 갈 텐데 말이야.”
“네 생각처럼 되지는 않을 거다. 한서리.”
가벼운 도발로 신경전을 시작한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시선 끌기였다.
김건은 이미 공격을 시도했다.
그가 사용하는 기술, 미극공진동은 육체를 근간으로 한 타격기가 아니다.
손으로 진동을 불어넣는 것은 그것이 제일 편하고 빨라서 그럴 뿐이지, 필수 요소가 아니었다.
김건의 발에서 빠져나온 진동은 이미 지면을 타고 제이미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당연히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박쥐 수준의 청각이 없다면 소리를 들을 수도 없다.
월터 바이스턴처럼 마력의 움직임을 시인할 수 있는 특별한 감각이 없다면 회피할 수 없다.
감지 불가능.
방어 불가능.
맞으면 반드시 급소가 파괴되어 죽는 공격.
그것은 기존의 전위들보다 한 차원 높은 단계에 올라가 있는 기술이었다.
남들이 칼과 방패를 들고 싸우고 있을 때 자기 혼자 저격총을 든 것이나 마찬가지다.
다른 사람들처럼 좋은 방패도, 칼도 없이 맨몸으로 선 김건이, 이 세상 모든 전위를 상대로 초전필승을 장담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그렇게 뻗어 나간 진동파가 제이미의 발에 닿으려는 순간이었다.
“어이쿠.”
가볍게 놀란 소리를 내며, 제이미가 발을 뗐다.
마력을 아끼기 위해 정확한 힘으로 계산되어 있던 진동은 바깥으로 뻗어 나가자마자 바로 소멸해 버렸다.
“대체 무슨 짓을 해서 콜로서스를 쓰러트렸나 했더니, 꽤 비겁한 수단을 사용하는군.”
큭큭큭- 하고 제이미가 웃었다.
대체 저놈이 왜 저러나 의아해진 세라스가 눈을 흘겼다.
그리고 맞은편에 선 두 사람은 각자의 방식으로 놀람을 표했다.
한서리는 이를 악물었고, 김건은 자세를 낮추며 허리춤의 채찍에 손을 가져갔다.
제이미는 손으로 눈을 가렸다 말았다 하며 입을 열었다.
“상태가 좋아. 평소에 보이지 않던 게 보이고, 들리지 않던 게 들려. 지금 상태에서는 그 누구랑 싸워도 질 것 같지가 않아.”
그러면서 그는 벨트의 버클을 쥐었다. 압축 마법이 풀리며 버클이 길쭉한 장검이 되어 손에 걸렸다.
세라스 역시 무기를 뽑았다.
김건은 채찍을 늘어트렸고, 한서리가 골렘을 소환했다.
경기 시작을 알리는 휘슬 소리보다 네 사람이 먼저 움직였다.
온몸에서 황금색 오라를 피워 내며 쌍둥이가 양쪽으로 갈라져 돌진해 왔다.
한 사람이 김건을 상대하고 나머지 한 사람이 후위인 한서리를 처리하겠다는 뻔한 노림수.
한서리가 손을 저었다.
버프로 강화되어 S급 영웅도 웃돌 만한 힘을 얻게 된 아이스 골렘이 괴성을 지르며 달려가 제이미의 앞을 막았다.
“꺼져.”
와르르릉!
한순간에 뿜어져 나온 금빛 괴수가 돌격했다.
천둥소리를 내며 달려간 괴물이 단숨에 골렘의 어깨를 물어뜯고, 양쪽으로 갈라 찢어발겼다. 부서진 얼음 조각이 사방에 비산했다.
제이미가 아이스 골렘을 지나치는 데에는 3초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 짧은 간격 속에서 세라스와 김건이 격돌했다.
선공권은 기다란 채찍을 쥔 김건이 가졌다.
버프로 강화된 근력으로 휘두른 채찍이 섬전이 되어 날아왔다.
피할 것인가, 쳐낼 것인가, 아니면 맞으면서 파고들 것인가.
찰나에 순간에 떠오르는 선택지는 세 가지.
그것을 상황에 마주쳐서야 고민하는 자는 죽어 사라지는 것이 전사의 세계다.
세라스는 김건이 콜로서스를 쓰러트리는 것을 봤다.
그 기술의 정체는 파악하지 못했으나 깊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김건은 제이미의 파산검으로도 죽이지 못한 괴물을 순살한 공격기를 가지고 있었다. 맞아선 안 되는 것은 당연.
세라스가 미리 골라 두었던 선택지는 첫 번째.
피한다.
그리고 공격한다.
뇌리로 상상하고 척수에 입력해 두었던 동작을 시행했다.
허리를 숙여 머리 위로 채찍을 흘려보내고 발을 박찼다.
허리를 구부린 채로 발을 박차니 몸이 앞으로 날아간다. 몸을 틀어 균형을 잡으면서 대검을 전방으로 비스듬히 찔렀다.
오라가 변형. 대검의 폭이 줄어들며 뾰족하게 앞으로 솟았다.
몸을 날림과 동시에 오라 조작으로 대검을 늘리자 삽시간에 공격이 코앞에 닥쳤다.
스스로의 반응 속도, 육체 능력, 오라 기술을 완벽히 파악하고 있는 자만이 가능한 매서운 일격.
하지만, 그것은 허망할 정도로 쉽게 허공을 갈랐다.
검 끝을 코앞에 둔 김건의 신형이 갈대처럼 휘더니 바람처럼 몰아쳐 세라스의 앞에 나타났다.
김건은 세라스가 첫 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그녀의 수를 읽고 있었다.
“미안.”
김건이 손을 날렸다.
세라스는 그 와중에도 팔을 들어 방어했으나, 물체를 투과해 들어오는 진동까지 막아 낼 수는 없었다.
웅, 하고 터진 파동이 뇌에 작렬.
한순간에 발생한 뇌진탕으로 정신이 아득해졌다.
“윽!”
세라스는 코피를 뿌리며 날아가 경기장 밖에 떨어졌다.
그리고 다시 움직이지 못했다.
한순간에 세라스를 처리한 김건은 순식간에 돌아와 아내를 노리는 제이미의 검을 가로막았다.
팽팽하게 당겨 낸 채찍으로 칼날을 튕겨 냈다.
“이놈!”
노호성을 지르며 제이미가 연속으로 칼을 휘둘렀다.
감각이 최고조로 발휘된 그의 검격은 평소보다 훨씬 더 빠르고 정밀했다.
기둥만 한 대검이 허공에 춤추며 사방을 금색으로 물들인다.
S급을 뛰어넘어, 초월자의 격에 달한 솜씨에 그것을 지켜보던 모두가 경탄을 토했다.
등 뒤에 선 한서리가 다시금 버프를 중첩해 걸었다. 최대 출력으로 펼쳐진 만년설식, 설화기사의 힘이 김건의 몸을 덮었다.
그녀가 발밑으로 뻗어 낸 얼음이 제이미의 발을 잡아채며 그의 움직임을 방해했다.
텅터더더텅!
묵직한 대검을 튕겨 내는 금속 채찍이 찢어질 듯이 늘어나며 북 치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긁힌 금속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며 연기를 피워 올린다.
김건은 무시무시한 실력으로 대검의 모든 위력을 지면과 허공으로 흘려보냈다.
빠져나간 힘에 의해 바닥이 폭발하고 굉음이 터졌다.
“미친……!”
제이미는 솔직히 감탄했다.
말 그대로 미쳤다고밖에 할 수 없는 흘리기였다.
아무리 한서리의 버프와 방해가 있었다고 해도 이 정도의 연타를 파훼하다니.
맨몸으로 쏟아지는 화살비를 쳐 내릴 정도의 실력이 없다면 방어는 불가능하다.
기계도 아니고 계속해서 초고도의 방어가 가능할 리 없다.
한 호흡 가다듬은 제이미가 대검을 내리쳤다. 그가 할 수 있는 최대치의 임시 질량을 검에 담는다.
가히 버스를 들어 내리친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참격이었다.
아무리 대단한 기술이라도 결국은 지렛대와 도르래에 적용되는 물리 법칙의 조합일 뿐이다.
그리고 그것으로 낼 수 있는 힘의 효율에는 엄밀한 한계치가 존재한다.
김건이 가진 자원으로 이것을 흘릴 수는 없었다.
검의 궤적에 한서리까지 포함되어 있으니, 회피 역시 불가능…….
“멍청이.”
한서리는 싸늘하게 웃었다.
탓-!
한서리는 김건과 똑같은 타이밍에 똑같은 동작으로 검격을 피했다.
두 사람이 지금까지 함께 사선을 넘어온 횟수는 두 손으로도 다 셀 수 없었다.
한서리가 둔해 빠진 후위라고 해도, 파트너가 미리 수를 읽고 타이밍을 가르쳐 준다면 얼마든지 전위의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큭!”
실책을 깨달은 제이미는 공격을 회수하려 했으나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무리하게 생성한 임시 질량이 오히려 독이 되었다.
그는 관성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검을 지면에 처박았다.
콰아아아앙!
내리쳐진 대검이 경기장 바닥을 가르고 깊숙이 틀어박혔다.
싸움을 시작한 이래로 제이미가 처음으로 보인 빈틈이었다.
“쉭──.”
짧게 호흡을 내뱉은 김건이 미끄러지는 듯한 발놀림으로 거리를 좁히며 제이미의 가슴팍을 노렸다.
“……!”
한 동작 한 동작마다 한 치의 군더더기가 없다. 이쯤 되면 ‘세련되다’는 표현이 걸맞는 수준.
그걸 바로 앞에 직면해서야 김건의 실력을 실감한 제이미는 이를 깨물며 몸속에서 오라를 끌어올렸다.
단순히 방벽을 세워 막는다는 일차원적인 생각이 아니었다.
김건이 무슨 공격을 쏘아 내든, 거기에 맞게 오라를 변형시켜 대응한다.
완전히 막지는 못하더라도 위력을 경감시키는 건 가능할 터.
한 번만 경험해 보면 된다.
두 번은 당하지 않는다.
김건의 싸움 실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할 수 있는 건 시간 끌기일 뿐.
그가 진짜로 제이미를 이길 수 있는 수단은 콜로서스를 쓰러트린 비밀의 한 수밖에 없다.
그것만 극복해 낸다면, 그 뒤에 남는 것은 일방적인 유린이다.
와라!
그다음엔 죽여 주마!
제이미는 속으로 부르짖으며 김건의 공격을 받았다.
감각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날카로워졌다.
지금의 제이미는 두 눈으로 마력의 움직임을 시인할 수 있었다.
묘하게 조작된 오라가 몸속으로 흘러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마찬가지로 오라를 생성해 대응하려는 순간.
이걸로는 막을 수 없어.
누군가 답안지의 내용을 속삭여 주는 것마냥 다음에 해야 할 일이 떠올랐다.
‘진동이다. 진동을 내서 막아야 해.’
그런 생각이 들자 자연스럽게 마력이 움직였다.
오라로 진동을 생성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배운 적도 없고, 그걸 해 봐야겠다는 생각조차 해 보지 못했다.
하지만 마력의 흐름이 보이고, 그 조작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섬세한 지금은 그저 김건이 쏘아 낸 진동의 형태를 보고 비슷하게 그것을 따라 할 수가 있었다.
제이미는 몸속에서 생성한 진동으로 김건의 공격을 막았다.
진동파를 쏘아서, 안쪽으로 흘러 들어오는 파형을 중화시킨 것이다.
“……!”
기술을 파해당한 김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사이 검을 뽑아 올린 제이미가 종으로 팔을 휘둘렀다.
김건은 백덤블링으로 공격을 피하며 거리를 벌렸다. 제이미는 곧바로 그 뒤를 쫓으려 했지만, 김건이 싸우는 사이 주문을 완성한 한서리가 손을 뻗었다.
버프에 특화된 지원가라 해도 엄연히 후위. 화력 지원이라는 본연의 역할을 잊지는 않았다.
쐐애애애액-!
대전차포와 비견될 위력을 지닌 얼음 포탄이 초고속으로 질주해 제이미를 들이받았다.
하나 제이미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검으로 막아 내곤 공중제비를 돌아 충격까지 해소해 버렸다.
“너…….”
김건이 놀란 표정으로 제이미를 바라보았다. 제이미는 의기양양한 미소를 띠었다.
“왜, 비장의 수가 이렇게 쉽게 막힐 줄은 몰랐나?”
기분이 너무 좋아서 참을 수가 없다.
온몸에서 힘이 넘쳤다.
모든 것이 다 보이고, 모든 것이 다 들렸다. 무엇이든지 해낼 수 있을 듯한 전능감이 그를 사로잡았다.
이제는 정말로 눈앞의 김건이 벌레로 보였다. 손가락만 까딱이면 그대로 짓눌러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토록 신경 쓰이던 한서리도 더 이상 그의 마음을 흔들지 못했다. 그저 자신을 엿 먹인 가증스러운 여자일 뿐이다.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김건은 여기서 죽이자.
어차피 수많은 살인 기술이 오가는 경기장이다. 여러 가지 안전장치가 있긴 하지만 지금의 그라면 별문제 없이 그것을 뚫을 수 있다.
일단 죽여 버리고, 실수인 척하면 되겠지.
한서리는 살려 둔다.
대신 반쯤 죽여 놓고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구경해야겠다.
눈앞에서 김건이 죽으면 충격을 받을지도 모른다.
얼음장 같던 얼굴이 공포와 경악으로 일그러질 모습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즐거워졌다.
그는 실실 웃으면서 김건을 바라보았다. 기술이 파해된 충격이 컸는지 김건은 딱딱하게 얼굴을 굳히고 있었다.
“네놈의 수는 파악했다. 더 이상 내가 너에게 질 요소는 없어.”
이제는 눈앞에서 앵앵대며 귀찮게 하던 벌레를 죽일 차례였다.
손아귀에 쥔 검에 힘을 불어넣으며 제이미가 발을 떼려는 참이었다.
김건이 손가락을 들어 제이미를 가리켰다.
“너…… 눈이 검어졌군.”
“무슨 소리냐?”
제이미의 표정이 의아함으로 물들었다.
프레이저 가문의 사람들은 대부분 금발과 금안을 타고난다.
그 역시 마찬가지다. 눈이 검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김건은 지금까지 없던 기수식을 취했다.
채찍의 손잡이를 쥔 손을 앞으로 내밀고 반대쪽 손은 채찍으로 돌돌 말아 언제든 내지를 수 있도록 허리춤으로 가져갔다.
“이미 늦었을 수도 있지만…… 이번에는 확실히 끝내 주마. 더 이상 네가 죄를 짓지 않게 말이야.”
“……?”
제이미는 김건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김건이 그를 죽일 생각으로 덤벼올 것이라는 건 알았다.
참으로 가소로운 생각이었다.
비웃어 줄 틈도 없이 김건이 발을 박찼다.
얼음의 갑주로 감싼 몸이 하얀 섬광이 되어 짓쳐들어온다.
하지만 제이미가 더 빨랐다. 그는 이미 사선으로 검을 내리치고 있었다.
일자로 질러 오던 하얀 신형이 거짓말처럼 휘었다.
관성과 관절, 근육의 가동 원리를 모조리 무시하는 움직임.
그 대가는 모두 몸이 치렀다.
우두두둑!
단박에 인대가 찢어지고 뼈에 금이 가며 근육이 파괴되어 갔다.
뒤가 없는 기동.
오로지 단 한 번, 단 한 번의 빈틈을 찌르기 위해 만들어진 변칙적인 주법이었다.
김건은 말도 안 되는 회피로 칼날을 스쳐 지나가며 제이미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채찍을 놓으며 손을 내뻗었다. 또다시 생성된 진동이 양손에 모이는 게 제이미의 눈에 보였다.
‘소용없어!’
제이미는 코웃음을 치며 몸으로 공격을 받았다.
이미 진동이라는 개념을 깨달은 그는 아까보다 훨씬 빠르고 정교하게 비슷한 진동을 짜내어 몸속에 퍼뜨렸다.
김건의 양손이 제이미의 옆구리에 박혔다.
물결 같은 진동이 흘러 들어간다. 그리고 제이미의 안쪽에서 태어난 진동과 맞부딪혔다.
같은 기술을 사용한다면 당연히 마력량의 절대치가 앞서는 제이미가 유리하다.
제이미가 뿜어낸 파동은 파도처럼 역류해 시냇물같이 흘러 들어오는 김건의 파동을 삼켜 버렸다.
제이미가 손을 뻗어 김건의 얼굴을 감쌌다.
무시무시한 악력이 얼음 갑옷을 바작바작 부스러트리며 머리통을 찌그러트려 갔다.
제대로 된 형태마저 갖추지 못하는 오라를 가진 놈의 두개골을 깨부수는 건 달걀을 쥐어 터트리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
끝났다.
제이미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려는 순간.
그의 손이 폭발했다.
“어!?”
손아귀뿐만이 아니다. 전신의 근육이 푹 끓인 토마토처럼 터져 나갔다.
찢어진 피부 사이로 폭죽처럼 핏방울이 번졌다.
뇌가 고통을 인지하지 못할 정도의 심대한 파괴.
제이미가 몸속에 퍼트린 진동은 확실히 김건이 쏘아낸 진동을 집어삼켰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착각일 뿐이었다.
김건은 오히려 제이미가 뿜어낸 진동을 이용했다.
진동을 뿜어내는 것에 따라 제이미의 육체는 일정한 고유 주파수를 갖게 되었고, 김건은 그에 맞춘 진동을 내쏘아 공명 현상을 일으켜 제이미의 전신을 파괴한 것이다.
경기 중에 이루어진 과격한 공격에 사방에서 비명이 울려 퍼졌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김건은 양손을 이용해 각각 다른 두 가지 종류의 진동을 심었다.
아직도 살아남아 몸을 웅크리고 있던 진동이 뱀처럼 머리를 치켜들어 부서진 몸을 파고들었다.
그 목표는 심장.
첫 번째 공격으로 방어를 무효화하며 전신을 파괴하고, 두 번째 공격으로 무력화된 상대의 숨통을 끊는다.
당하는 입장에서는 치를 떨 수밖에 없는 지독한 연계였다.
안쪽으로 파고든 작은 뱀이 제이미의 심장을 물어뜯었다.
인간의 구성품 중 가장 중요한 근육이 폭발.
혈액의 흐름이 끊기고 사고가 굳으며 의식이 사라져 갔다.
시야가 새빨갛다. 세상이 천천히 기울어져 갔다.
멈춘 것 같은 시간 속에서 한순간에 주마등이 스쳐 지나갔다.
제이미는 현실을 깨달았다.
‘당한 건가? 이딴 벌레 자식에게?’
믿을 수가 없다.
이 세상 그 누구도 발밑에서 기던 벌레에게 갑자기 물려 죽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을 것이다.
‘웃기지 마! 이 내가! 이 내가!!’
자랑스러운 프레이저 가문에서도 천재라 불리는 몸으로 태어나, 주제를 모르는 벌레를 짓밟고 멍청한 우민들 위에 군림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자신이 이렇게 허망하게 스러진다니.
믿을 수 없다.
인정할 수 없다.
그는 미친 듯이 발악했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그때였다.
매끄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다시 한번 기회를 얻고 싶나?’
귓가를 간질이는 목소리.
여자인지 남자인지도 알 수 없지만 그 목소리는 몹시도 매혹적이었다.
제이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한 번만, 한 번만 더 기회가 있다면 저따위 쓰레기들, 모두 죽여 버리겠어!’
‘네가 원하는 건 저들의 죽음인가?’
‘그냥 죽이는 게 아니야, 처참하고 끔찍한 고통 속에서 죽일 거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것이라도 바칠 각오가 있나?’
목소리는 쿡쿡 장난스러운 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그 정체가 뭔지, 무엇을 원하는지 제이미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어차피 죽음을 눈앞에 둔 마당이다. 눈이 뒤집힌 그는 발악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좋아. 그 소원, 내가 이루어 주도록 하지.’
네 대신 말이야.
‘뭐라고?’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낀 제이미가 되물었지만, 늦었다.
죽음을 마주하여 느려진 시간 속에서 피어오른 검은 열화가 손가락 끝을 삼켰다.
새까맣게 꿈틀거리는 불꽃이 손목을 넘어 팔뚝을 씹어 삼키며 타고 올라왔다.
진짜 불꽃이 아니다. 감각이 없다. 뜨겁지도 않고 고통스럽지도 않다.
하지만 계속해서 몸을 잠식하듯이 번져 온다. 마치 검은 불꽃이라는 짐승이 자신을 말단부터 조금씩 조금씩 깨물어 먹고 있는 것 같았다.
단순히 죽는 게 아니라, 나 자신. 제이미 프레이저라는 인격이 사라져 가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는 지금, 먹히고 있었다.
제이미라는 존재 그 자체를.
본능적인 공포가 치밀어 올랐다.
‘뭐야. 이건, 떨어져!’
‘싫은데.’
먹잇감을 가지고 노는 고양이처럼, 목소리의 정체로 추정되는 불꽃은 즐거운 듯 제이미를 삼켜 갔다.
의식이 흐려져 간다.
제이미는 문득 생각했다.
난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자신이 왜 이 자리에 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오늘 날짜가 언제인지도 모르겠다.
그는 곧 깨달았다.
몸이 먹힐 때마다 기억이 사라지고 있었다.
김건을 처음 봤을 때의 분노가 사라지고, 아카데미에 입학했을 때의 흥분도 사라졌다.
좋은 무기를 두고 세라스와 싸웠던 일, 벌레들의 탄원에 아버지가 고개를 숙였던 일, 어렸을 때 어머니가 불러 주었던 자장가의 노랫소리.
제이미를 제이미로서 만들고 있던 모든 순간들이 뇌리에서 휘발되어 갔다.
검은 불꽃은 어느새 그의 몸을 전부 먹어치우고 목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제이미는 더 이상 제이미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이름조차 잊었다. 거미줄에 걸린 채 식사가 되기를 기다리는 무력한 한 마리 벌레일 뿐이었다.
마지막으로 그의 눈앞에 그려진 것은 한 사람의 모습이었다.
수많은 어른들 사이, 구석에 앉아 푸른 머리칼을 찰랑이며 책을 보고 있는 여자아이.
창가에서 쬔 햇살에 푸른 머리가 물결처럼 반짝였다.
백옥처럼 하얀 얼굴은 시리게 빛나고, 그 사이에 박힌 사파이어색 눈동자는 얼음마냥 차가웠다.
그 눈동자가 이쪽을 바라보는 순간, 그는 푸른색의 요정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아.’
그 아름다움에 감탄을 토하는 순간.
무정한 흑염이 그의 전부를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