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 34화
제이미의 전신에서 피가 폭발하자 관중석에서 비명이 울려 퍼졌다.
경기라고는 하지만 전투는 전투다.
싸움 중에 흥분한 생도가 실수로 상대에게 과도한 공격을 가한 사고라고 생각한 것이다.
놀란 해설이 소리를 치고, 심판 겸 감시관으로 지켜보고 있던 에인헤야르들이 뛰어왔지만 한서리와 김건은 그것에 신경 쓰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화르륵!
전신의 근육 파열로 피투성이가 된 제이미의 등에서 돌연 검은색 날개가 솟구쳤다.
“자기야!”
한서리가 새된 비명을 지르며 손을 뻗었다.
지면에서 솟구친 얼음이 김건을 감싸고 바깥쪽으로 끌어당긴다.
그와 동시에, 제이미의 눈이 번쩍 뜨였다.
검은 벼락이 내리쳤다.
하늘이 반으로 갈라졌다.
쪼개진 하늘이 시커멓게 물든다.
그 틈새로 보이는 것은 암흑.
그것은 물결처럼 터져 나와 소나기가 되어 경기장 전체를 감싸며 떨어졌다.
중력이 뒤흔들렸다.
단단하게 디디고 있던 지면이 진흙처럼 흐물흐물 녹았고, 위에서 쏟아진 흑색 소나기가 탁한 시냇물이 되어 줄줄 흘렀다.
하얗던 빛이 사라지고, 그림자가 지워지며 주변이 흑백영화의 한 장면처럼 회백색으로 물들어 갔다.
꺄아아아아아악!
찢어지는 듯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여자의 울음소리 같기도, 갓난아기의 울음소리 같기도 한 그것은 고막을 때리며 귀에서 피가 흐를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것은, 세계가 부서지는 소리였다.
소나기가 멈췄다.
하늘 위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인지를 초월한 영역에 있지만, 모두가 그 존재감만큼은 느낄 수 있었다.
이곳에 자리한 모든 생명체가 검은 물줄기에 흠뻑 젖은 채 위를 바라보았다.
찢어진 하늘 사이의 어둠 속.
그 안에 들어찬 수천만 개의 눈이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으아아아아악!”
“아아, 아아아!”
인간들이 절규했다.
너무나 강한 빛은 눈을 멀게 하고, 너무나 큰 소리는 고막을 찢으며, 너무나 심한 냄새는 후각을 마비시킨다.
인간, 아니 이 세상 모든 존재는 일정 이상의 자극을 받아들이면 고장이 나도록 설계되어 있다.
신격이라는 초월적 존재의 등장은 장내에 있던 모든 사람의 정신에 막대한 충격을 주었다.
찢어진 하늘, 그리고 검은 비.
모든 것은 착란에서 불거져 나온 환상이다.
실제로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것’이 그저 이 자리에 나타났을 뿐이다.
그 등장만으로 대규모 패닉이 발생.
누군가는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기절했으며, 누군가는 미쳐 날뛰며 짐승처럼 옆의 사람을 물어뜯었다.
누군가는 광란에 빠져 달려 나가다 건물 밖으로 추락했다.
그 영향은 인간에게만 미친 것이 아니었다.
빛이 기이하게 굴절되어 사위가 어두워졌다. 하늘을 날던 새가 추락하고, 급격한 자기장의 변화에 영향을 받은 전자 기기들이 동작을 멈췄다.
그 영향권에서 벗어난 것은 단 두 사람뿐이었다.
강한 자극도 계속 경험하다 보면 무뎌지기 마련이다.
“젠장!”
욕지거리를 하며 김건은 부서진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눈앞의 참극을 만들어 낸 존재를 바라보았다.
“후후.”
찰랑이던 금발이 검게 물들어 갔다.
검은 날개와 검은 눈동자, 그리고 붉은 동공을 지닌 흑발의 남자가 웃었다.
제이미. 아니, 벨제불은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이쪽을 돌아보았다.
벨제불은 여성성이 강한 신이다. 그 미소의 아름다움은 보는 남자를 미쳐 버리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단순히 정신력의 강함으로 어쩔 수 있는 능력이 아니다. 김건은 일부러 눈의 초점을 흐트러트려 벨제불의 유혹을 피했다.
한서리는 떨리는 팔을 움켜쥐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이런 일 따위, 원래는 존재할 리가 없을 텐데.
타입 오메가.
인간의 몸을 매개체로 강림한 신격.
화신.
화신의 등장은 원래의 역사에는 전혀 없었던 일이다.
미래에서 돌아온 그녀는 확실히 움직였다.
자연스럽게 흐르고 있던 시간의 강물에 이물질을 던져 넣었다.
하지만 아주 작은 것일 뿐이었다.
검은 잉크 몇 방울. 강물에 휩쓸리면 순식간에 희석되어 버릴 변화를 주었을 뿐이다.
결코 강물의 색을 바꾸거나, 그 방향을 틀어 버릴 만큼의 행동이 아니었다.
그런데 강물이 급격하게 방향을 틀었다.
화신이 등장할 때마다 인류의 역사는 크게 뒤바뀌었다. 이제 더 이상 그녀가 알고 있는 미래 따윈 없었다.
대체 어떤 행동이 변수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제이미를 자극한 것? 마인의 테러를 막은 것? 그게 아니라면.
남편을 찾아간 것…… 일까.
김건은 기린을 죽이고 시간을 되돌리게 만들어 버린 주 원인이다.
그 말은 즉, 그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역사 개변의 시발점이라는 말이다.
결코 쉽게 건드려서는 안 될 요인 중 하나.
그에게 다가가는 것이 문제를 불러일으킬지도 모른다는 예상은 했었다.
하지만 무시했다.
그 결과가 이건가.
모르겠다.
모르겠어.
이번에도 참아야 했을까.
인류의 미래를 위해, 모든 것을 참고 혼자서 활동을 하는 것이 좋았던 걸까.
개인적인 감정을 버리고 모두를 위해 행동하는 기계가 되는 것이 옳았던 걸까.
몇 번이나 경험해 본 적 있다.
한서리는 화신의 강함을 잘 알았다.
지금 시점에서 화신을 퇴치하기 위해서는 발할라 아카데미 전력의 30퍼센트가 필요했다. 발할라 본섬이면 또 모를까, 지금 이 자리에서 화신을 퇴치하는 건 불가능했다.
끝났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는 죽는다.
이곳에 들이닥칠 후속 병력도 죽는다.
화신을 퇴치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이 필요할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어쩌면 이것이 인류 멸망의 스위치가 될지도 몰랐다.
이럴 거면 그냥 그 자리에서 죽어 버릴 걸 그랬다.
아무런 고통도 받지 않게 사라져 버릴 걸 그랬다.
시간을 되돌리는 짓 따위 하지 않았으면 좋았…….
“정신 차려.”
한서리의 귀에 묵직한 목소리가 박혔다.
그와 동시에 시야가 트였다.
커다란 등. 오랜 세월과 노력이 벼려낸 전사의 등이 눈앞에 있었다.
“그래 봐야 반쪽짜리 화신이야. 제대로 된 의식도 없이 나타난 걸 보니 뭔가 꼼수를 부린 거겠지. 강림의 매개체만 부수면 곧장 억지력에 의해 추방될 거야.”
김건은 그렇게 말하면서 손을 들어 싸울 자세를 취했다.
“당신과 내가 힘을 합치면 충분히 이겨 낼 수 있어.”
“아……!”
너무나 담담한 목소리에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들었다.
울컥하고 가슴에서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지만 한서리는 참았다.
대신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 기술은 쓰면 안 돼. 당신이 없는 세상 따위, 나한테는 아무 의미도 없으니까.”
“나도 딱히 죽고 싶은 생각은 없어. 쓸데없이 목숨을 버리려고 지금까지 노력해 온 게 아니야.”
“알았어. 그럼 한번 해 보자.”
고개를 끄덕인 한서리는 김건의 몸에 손을 댔다.
“출력을 줄일게. 힘들겠지만 버텨 줘.”
“걱정 마.”
김건의 몸을 강화하고 있던 마력의 일부를 회수한다.
전성기 시절이라면 괜찮았을 테지만, 지금의 그녀에게는 마력이 부족했다.
한서리는 극대소멸공격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제대로 된 공격형 후위에 비해서는 범위와 위력이 부족하지만, 그녀는 지원가로 인류의 정점에 올랐던 사람이다. 인간 하나분의 질량을 날릴 극대소멸공격은 할 수 있었다.
그동안 김건은 부서진 몸 상태를 점검하며 극대소멸공격이 준비될 때까지의 시간 벌이와 견제에 대해 생각했다.
그런 두 사람을 본 벨제불이 입을 열었다.
“재미난 아이들이로구나.”
분명 남자의 몸을 빌려 현신했을 텐데, 여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무서울 정도로 청아하고 고운 어조.
심령을 뒤흔드는 목소리에 김건이 인상을 찌푸렸다.
신격을 드러낸 화신은 행동 하나하나가 인간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런 화신에게 대적하기 위해 미래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치렀다.
그 희생이 있었기에, 김건은 흔들리지 않고 벨제불을 마주할 수 있었다.
거대한 존재감에 자신이 흐려지지 않도록 영혼의 끝자락에 못질을 가했다.
철학과 신학 등의 이해로 쌓은 이론 방어. 그리고 자기 세뇌를 통해 스스로를 지켰다.
그 노하우는 모두 죽은 자들이 물려준 것이다.
마신은 불사도, 불멸도 아니다.
열역학 제2법칙 안의 존재. 신에 수렴할지는 몰라도 결코 신은 아니다.
그렇기에 이렇게 존재를 인식하고 대화라는 행위를 나눌 수 있다.
인간의 손이 닿을 수 있다.
당연히, 죽이는 것도 가능하다.
그 힘의 일부를 담을 뿐인 화신이라면 더더욱 쉽게 가능하다.
김건은 잡념을 지웠다.
시간은 이쪽의 편이었다.
그러니 상대가 먼저 움직이기를 기다렸다.
벨제불은 그런 김건을 보며 웃었다.
“강한 아이구나. 마음에 들어.”
그리고 하얀 손을 들어 올렸다.
새빨간 그의 입술에 미소가 번졌다.
“그럼 어디 재롱 좀 구경할까.”
한쪽 날개가 펄럭이며 거대한 마기가 터져 나왔다.
김건은 벨제불이 손을 들어 올리는 사이에 공격을 시도했다.
지면을 타고 뻗어 나간 진동파가 적중. 그것은 순식간에 화신의 몸을 타고 올라가 머리 위로 들어 올린 손에서 터졌다.
벨제불의 손이 박살 났다. 피륙이 찢어지며 뼈가 보였다.
하지만 그 안에서 튀어나온 것은 새빨간 피가 아니라 검은색 진흙이었다.
진흙이 엉겨 붙으며 안으로 수축했다.
바깥으로 번져 나온 피륙이 시간을 되돌리듯 제자리로 돌아갔다.
벨제불의 화신은 이미 그 자체로 광마화된 마인과 동일한 능력을 지닌다.
전신이 마기로 이루어진 괴물을 일반적인 물리 공격으로 파괴하는 건 불가능.
김건은 그것을 알았기에 일부러 급소가 아니라 손을 노렸다.
다음에 날아올 공격을 늦추기 위해.
시간을 번 김건이 한서리를 끌어안고 몸을 날렸다.
그리고 벨제불이 손을 내리쳤다.
검은 그림자가 태양을 가렸다.
찰나에 떠오른 적막.
그리고 그다음 순간, 대지가 울부짖었다.
화산이 폭발한 것마냥 지진이 일고 폭음이 사방을 채웠다.
경기장을 중심으로 부채꼴 모양의 범위가 일소.
한순간에 경기장의 4분의 1이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