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 36화
태생부터 무인(武人)이었던 남자는 의지를 가진 무기에 가까웠다.
도구에게 중요한 것은 필요성이다.
상황은 중요하지 않다.
필요하다면, 그저 싸울 뿐이다.
전신 화상에 주요 관절과 인대와 근육이 너덜너덜해져 만신창이가 된 몸 상태.
김건은 개의치 않고 달려들었다. 그 의지에는 한 점의 망설임도 없었다.
“멋지구나.”
벨제불이 웃었다.
그가 손을 휘젓자 월터가 공격을 개시했다.
섬전처럼 날아간 은사가 공간을 찢어발기며 폭풍우처럼 몰아쳤다.
김건은 용감하게 그 안으로 뛰어들었다.
촤자자자작!
기다란 채찍이 몸 주위를 소용돌이치며 은사의 연타를 막아 냈다.
고개를 틀어 눈을 노리고 날아온 실을 피한다.
미처 막아 내지 못한 실이 피부를 저며 냈다.
온몸에서 피분수가 솟구쳤지만 돌파에 성공.
김건과 벨제불과의 거리가 한달음에 좁혀졌다.
“잘도 피하는구나. 그럼 이건 어떠냐?”
보기 드문 재롱을 피우는 고양이를 발견한 듯, 즐거운 탄성을 토하며 벨제불이 마기를 내뻗었다.
동시에 월터가 양손으로 은사의 실타래를 당겼다.
격자 형태로 겹쳐진 은사가 그물처럼 펼쳐졌다.
그리고 허공에 뿌려진 검은색 진흙이 천막처럼 퍼져 나가 그 위를 덮었다.
화신과 초월자급 전위의 힘이 합쳐진 검은색 장벽이 김건을 향해 쏘아졌다.
순식간에 침식된 주변 공간이 칠흑으로 물들어 간다.
그것은 마치 거대한 검은색 붓이 세상을 먹칠하며 다가오는 것처럼 보였다.
피할 공간이 없다.
김건이 가진 미약한 마력과 한서리가 걸어 준 버프의 방어력만으로는 막을 수도 없다.
닿는 순간 검은 잉크통에 떨어진 물방울마냥 순식간에 흡수되어 사라질 것이다.
양손에 진동을 모은 김건이 박수를 쳤다.
소리 역시 진동의 일종. 공기를 타고 전해지는 파동에 간섭한다.
그는 명동권을 통한 증폭으로 음파를 거대화시켜 전방으로 쏘아 냈다.
우우우우우우웅!
충격파에 가까운 위력이 된 음파가 검은 장벽을 일시적으로 멈춰 세웠다.
순식간에 침식되고 흡수되어 사라져 버렸지만, 장벽에 튕겨 나와 돌아온 소리는 있었다.
계속해서 진동을 짜내어 돌아오는 잔향을 감지.
마기로 이루어진 장벽의 질감과 강도를 분석했다.
시야가 새카맸다.
이미 검은 파도는 그를 집어삼키려 하고 있었다.
찬찬히 고민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인식한 정보를 확인하자마자 본능적으로 그에 맞춰 짜낸 진동을 눈앞의 장벽에 때려 박았다.
이 세상 모든 물질은 고유한 진동수를 가지며 같은 진동수의 외력이 지속적으로 작용하면 그 진폭이 커진다.
마기도, 오라로 짜낸 은사도, 그 법칙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파사사사사!
공명권에 의해, 거대한 검은 장벽이 바람에 날리는 먼지처럼 부서져 갔다.
그 잔해를 뚫고 튀어 나간 김건이 월터의 앞에 섰다. 월터가 손을 움직이자 채찍을 들어 방어.
월터는 오히려 그곳을 노렸다.
그의 단분자 칼날이 자를 수 없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을 가르는 오라의 검이 공간을 갈랐다.
두 동강난 채찍이 허공으로 날아가며 돌려차기가 월터의 옆구리에 박혔다.
회피 동작에서 단분자 칼날에 쓸린 이마와 팔에서 피가 솟구쳤다.
방어 동작으로 일부러 공격을 유도한 뒤에 카운터를 먹인 것이다.
으득-!
김건이 이를 깨물었다.
발끝을 타고 들어간 진동이 폭죽처럼 솟아올라 월터의 목 위에서 작렬했다.
머리가 터져 나간 월터가 쓰러진다.
김건은 한 호흡도 고르지 않고 이어서 벨제불에게 달려갔다.
피투성이의 모습으로, 호흡조차 하지 않으며 적을 죽이기 위해서만 움직인다.
그 모습은 그야말로 사람의 모습을 한 검.
벨제불의 입가에 희열이 감돌았다.
“축복을 타고나지 못한 몸으로 잘도 여기까지……! 정말 대단한 아이야!”
그러면서 마기로 부풀린 팔을 휘두른다.
하지만 그것은 김건의 코끝을 스치고 날아갔다.
제이미를 상대할 때 선보인 급변기동술.
김건이 미극공진동과 함께 수년에 걸쳐 닦아 낸 보법, 절화(絶火).
그것을 다시 한번 펼쳐 전방으로 향하던 몸을 급격히 후방으로 틀어 공격을 빗나가게 한 것이다.
그러나.
우드득!
과격한 변속 기동에 무릎이 부서졌다.
허리의 근육이 끊어졌다.
다만 아직 팔은 움직였다.
눈앞으로 흘려보낸 팔 위에 김건의 손이 닿았다.
그것을 타고 내달린 진동이 벨제불의 머리에 작렬했다.
퍽, 소리와 함께 벨제불의 양쪽 눈이 터지며 귓가에서도 혈액이 분출했다.
재생이 되지 않는다.
진동에 지속력도 부여할 수 있는 것인지 머리에 남아 있는 파동이 계속해서 회복되는 안구와 고막을 파괴하고 있었다.
아무리 화신이라 해도 인간의 몸으로 현신한 이상 외부의 정보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눈과 귀라는 기관이 필요하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소용없어.”
재미있는 재주이긴 하지만 무한히 지속되지는 않을 것이다.
벨제불은 걱정하지 않고 앞을 향해 손을 내뻗었다.
바로 앞에 있을 귀여운 장난감을 손에 얻기 위해서.
아무리 정신력이 강하고 정신무장이 잘 되어 있어도 상관없다.
인간인 이상, 직접적인 접촉을 통한 지배에는 오래 버티지 못하니까.
이건 이제 내 거야.
보지도 않고 뻗은 벨제불의 손이 김건의 머리에 닿으려 할 때였다.
그의 몸통 위에 하얀색 광선이 꽂혔다.
반응할 시간도 없었다.
한순간에 벨제불의 전신이 얼어붙었다.
모든 부분에 서리가 끼며 하얗게 물들더니, 바람이 불자 퍽 하고 반짝이는 입자가 되어 사라져 버렸다.
엡솔루트 제로.
극저온의 냉기를 쏘아 대상을 원자 분해시켜 버리는 극대소멸공격기다.
불이나 번개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그 위력만큼은 확실하다.
그것을 증명하듯 벨제불이 있던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먼지 한 조각 남기지 않고 완전히 소멸한 것이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참은 끝에 겨우 기회를 잡아낼 수 있었다.
“자기야!”
화신의 저격에 성공한 한서리가 울 것 같은 얼굴로 달려와 김건을 부둥켜안았다.
파란 눈이 그렁그렁했다.
싸우는 동안 남편이 죽을까 봐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모른다.
몇 번이고 싸움에 끼어들고 싶은 걸 참느라고 악물던 어금니가 부러졌다.
너무 꽉 눌러 쥔 탓에 손톱이 파고든 손바닥도 피범벅이었다.
아팠다.
돌아와서 겪은 일상의 행복이 가뭄처럼 말라 버린 마음을 무르게 만든 모양이다.
회귀를 겪은 뒤로 정신이 더 나약해진 것 같았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한서리는 김건을 안고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제이미부터 시작해서 월터와 벨제불의 화신까지 연달아 상대한 김건은 제대로 서지도 못했다.
두 번의 절화가 몸을 망가트린 데다 연속된 초고난이도의 진동 공격 덕에 과부화된 신경과 뇌가 타 버릴 것만 같았다.
그는 아내의 품에 얌전히 안겨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어떻게, 화신을 퇴치하는 데 성공했다.
“잘했어.”
김건은 피투성이 팔을 들어 아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는 한숨을 쉬었다. 가쁜 호흡을 정돈하기 위해 심호흡을 하는데…….
마비되었던 감각이 돌아오며 이상을 경고했다.
지울 수 없는 존재감이 여전히 이 장소를 지배하고 있었다.
큭큭큭.
숨죽인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 정도로 애를 먹을 줄이야. 보험을 들어 두길 잘했구나.”
옥구슬이 굴러가는 듯한 미성이 들렸다.
경악한 한서리의 시선이 소리의 근원지로 향했다.
월터의 시체가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윗부분이 날아가 아래턱만 덜렁이고 있는 흉한 시체.
그런 시체의 등 뒤로,
새카만 날개가 뿜어져 나왔다.
* * *
부서진 턱의 단면 위로 마기가 솟구쳐 올랐다.
월터의 머리가 순식간에 복구되었다.
벨제불은 손을 쥐었다 펴면서 읊조리듯 말했다.
“방금 전의 것만은 못하지만 꽤 쓸 만한 육체구나. 나쁘지 않아.”
그러곤, 팔을 들어 올렸다.
“그럼, 마무리를 해 볼까.”
무시무시한 양의 마기가 모여들었다.
막대한 힘에 세상이 짓이겨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검은 팔을 중심으로 푸른 플라즈마가 튀고, 순간적으로 발생한 중력이 한서리와 김건을 빨아들였다.
거대한 해일을 퍼 올려 팔의 형태로 응축시킨 다음, 그것을 내려치는 듯한 신의 행위.
벨제불이 팔을 휘둘렀다.
죽음이 형체화되어 날아왔다.
한서리는 김건을 끌어안은 채 발을 뗐지만, 막대한 양의 마기가 발하는 인력 때문에 공격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녀는 각오를 다졌다.
괜찮다.
죽는 것은 무섭지 않다.
두려운 것은 오로지 사랑하는 이와 떨어지는 것뿐이다.
한서리는 남편의 어깨를 꽉 끌어안았다.
하지만, 김건은 생각이 달랐다.
굳건한 손이 한서리의 팔을 잡아챘다.
무술의 고수인 그는 힘의 방향을 틀거나 그것의 성질을 바꾸는 데에는 이골이 난 이였다.
마지막으로 남은 허릿심을 짜낸다.
발끝으로 회전의 축을 세운 김건은 중력을 통해 가속하는 우주선과 같은 원리로, 끌려 들어가는 아내의 몸을 바깥으로 던져 버렸다.
“……!”
깜짝 놀란 한서리가 손을 뻗었지만, 이미 김건은 그녀의 손아귀를 빠져나간 뒤였다.
파란색 동공이 급격하게 확장되었다.
시간이 멈췄다.
죽음보다도 강렬한 공포에 영혼이 비명을 질렀다.
사고가 가속했다.
또다.
또다시, 남편은 그녀를 버려두고 가 버리려 하고 있었다.
끔찍한 기억이 열화처럼 타올랐다.
홀로 남은 자의 공허함, 사랑하는 이를 지키지 못했다는 무력함, 그리고 검은색 우주 공간 속에 홀로 버려진 듯한 외로움.
영혼의 반신을 잃은 첫 번째 충격으로 이미 한서리는 부서졌다.
그 남은 조각을 회귀라는 기적을 통해 가까스로 긁어모아 얼기설기 엮어 놓은 것이 지금의 그녀다.
두 번째의 충격.
그것은 ‘인간’ 한서리로서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다.
벽이 무너졌다.
한서리가 부르짖었다.
“안 돼!!”
공간이 일그러졌다.
벨제불과 김건의 사이에 놓인 공간이 괴이하게 꺾였다.
벨제불의 일격이 이상한 곳으로 빠져나갔다.
왜곡에 휘말린 김건의 육체 역시 물방울에 번진 빛줄기처럼 기이하게 휘었다.
꺾였던 공간이 일순 멈췄다. 그리고 찌그러뜨렸던 고무에서 손을 뗀 것마냥 튕기듯이 원상태로 돌아왔다.
되돌아온 여파가 파문처럼 번지더니…….
폭발이 일었다.
폭발의 중심지에 있던 벨제불과 김건이 튕겨져 날아갔다.
벨제불은 말 그대로 포탄처럼 날아가 관중석을 함몰시키며 그 속에 처박혔다.
김건은 고속으로 공중을 날아 관중석과 경기장을 가르는 장벽에 몸을 들이받았다.
후두부의 충격으로 기절한 것 같지만 죽지는 않았다.
한서리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육감으로 남편의 상태를 확인했다.
하지만 안도의 한숨을 쉴 여유는 없었다. 그녀는 떨리는 눈으로 자신의 손을 들여다보았다.
황금색 기운이 피부 위를 흐르고 있었다.
연기 같은 무형의 기운이 아니다. 육각형을 이룬 빛의 조각이 촘촘하게 피부 위에 박혀 빛을 뿌리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비늘처럼 보였다.
어깨 위로 흘러내린 머리칼이 보인다.
가을 하늘처럼 파랗게 빛나던 머리카락이 희게 탈색되어 있었다.
밋밋한 흰색이 아니라 보는 각도에 따라 무지개처럼 색이 바뀌는 영롱한 은빛.
한서리는 그 색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