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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37화 (37/200)

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 37화

쿡쿡, 웃음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다가왔는지 숨죽여 웃고 있는 벨제불의 모습이 보였다.

“기린 녀석, 요즘 조용하다 싶더니 엉큼한 짓을 했군.”

“…….”

월터의 모습을 한 벨제불은 저 멀리에 떨어져 있는 김건을 턱끝으로 가리켰다.

“꽤 사이가 좋아 보이던데, 저 아이가 알고 있나?”

매혹적인 붉은 입술에 미소가 번졌다.

“네가 소위 ‘몬스터’라 불리는 존재인 걸.”

한서리의 눈썹이 떨렸다.

그녀는 이를 악물며 눈앞에 어른거리는 은발을 치웠다.

“입 닥쳐. 난 인간이야.”

“아직 각성은 하지 못했나. 하지만 그래 봐야 인간. 잠깐 접촉하는 수준이면 몰라도 한 육체를 공유하는 이상 오래 버틸 순 없다. 곧 자아를 잃고 잡아먹히겠지. 그러면 인간으로서의 인생은 끝이다. 기린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꼭두각시가 될 뿐이지. 지금까지 쌓아 온 인격도, 기억도 부정당한 채 이용당할 거다. 네 주변인들…… 이를테면, 그래.”

화신의 얼굴이 흥미로 가득 찼다.

벨제불은 즐거워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저 아이도,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며 이용하게 될 거다. 오히려 네 스스로가 그것을 즐기게 되겠지.”

아름다운 목소리로 전해지는 그 말은 아무렇지도 않게 한서리의 마음속을 파고들었다.

벨제불은 타인을 현혹하고 그들의 고통을 즐기는 마신이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마음의 빈틈을 열어젖혀 파고 든 뒤 한순간에 그것을 집어삼켜 자신의 것으로 삼는 탐욕스러운 괴물.

거짓말은 놈의 습성이며, 놈이 지껄이는 말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하지만, 그것을 앎에도.

흔들렸다.

한순간이었지만 그 말을 완전히 부정할 수 없었다.

방향을 알 수 없는 분노가 터져 나왔다.

“닥치라고!!”

감정에 호응한 마력이 몸을 일으켰다.

형형색색으로 반짝이는 보석 같은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이 세상에서 제일 순수한 마력, 정기.

마법 그 자체라고도 할 수 있으며 사용자의 의지에 따라 만물을 움직이는 삼라만상의 힘.

지면에서 솟구친 뾰족한 얼음의 송곳이 파도처럼 벨제불을 향해 몰아쳐 갔다.

벨제불이 손을 휘두르자 검게 물들어 흩어져 버린다.

한서리가 손을 내밀었다.

마력을 모으는 행위도, 술식도 없이 절대영도의 광선을 쏘아 낸다.

벨제불은 기환마위를 이용한 고속 이동으로 광선을 피해 내곤, 하늘로 날아올라 한서리를 가리켰다.

검은 마기가 집중.

너무 검다 못해 주변의 빛을 빨아들여 일그러진 블랙홀처럼 보이는 에너지를 발산했다.

한서리의 온몸에 새겨진 황금색 비늘이 진동했다.

공간과 중력이 변하며 주변의 시간이 다르게 흐르기 시작했다.

가속된 시간 속에서 한서리는 기환마위에 버금가는 움직임으로 벨제불의 일격을 흘려보냈다.

빗나간 벨제불의 공격이 적중한 지면이 한순간 검게 변했다가 소멸하고, 커다란 크레이터만이 남았다.

급격한 침식과 변질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고 구성물질이 모두 엔트로피로 환원된 것이다.

그 역시 극대소멸공격의 일종.

납음부존지망(納陰腐存之亡).

마기의 극한에 다다른 마인들이 붙인 그 기술의 이름이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극대소멸공격과 순간이동이 오고가는 초월적인 전투가 벌어졌다.

벨제불과 한서리가 뿜어내는 마기와 얼음이 주변을 모조리 소멸시켜 갔다.

경기장은 더 이상 그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커다랗게 패인 구멍만이 있고 그 안에서는 검은빛과 은빛이 교차하며 파괴만이 이어질 뿐.

하지만 전투는 계속 이어지지 않았다.

“큭…….”

한서리가 신음을 삼켰다.

무한에 가까운 마력을 손에 쥐고 있지만, 그것을 실현시키는 것은 결국 육체다.

육체를 완전히 마기화하는 것으로 한계를 넘은 벨제불과 달리, 그녀는 여전히 인간의 몸을 가지고 있었다.

프레이저가의 쌍둥이가 그랬던 것처럼, 마력의 출력을 견디지 못한 몸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지독한 고통이 머리를 뒤흔들었다. 과도한 출력을 감당하지 못한 육체가 부서지며 제어가 흐트러졌다.

한서리의 움직임이 멈췄다.

벨제불이 다시 한번 블랙홀을 연상시키는 극대소멸공격을 내쏘았다.

그대로 한서리의 몸에 직격…… 하는 듯했으나 마지막에 비틀린 공간의 휘어짐이 공격을 다른 방향으로 흘려보냈다.

“윽……!”

시공간을 비트느라 막대한 힘을 소비한 한서리가 비틀거리는 사이, 기환마위가 펼쳐지고 그녀의 앞에 벨제불이 당도했다.

마기가 담긴 주먹이 날아왔다.

반사적으로 세운 얼음의 장벽이 부서지고 얼굴을 얻어맞은 한서리가 피와 치아를 토하며 땅을 나뒹굴었다.

월터의 몸을 한 벨제불이 손목의 팔찌를 잡아당겼다.

오라 대신 마기로 생성된 검은 실이 손끝에 딸려 나왔다.

사방에서 뻗어 나간 실이 넘어진 한서리의 사지를 낚아챘다.

벨제불이 손을 내리자 사지가 묶인 한서리가 죄인처럼 공중에 매달렸다.

“발악도 이걸로 끝인 것 같구나.”

벨제불이 손가락을 튕겼다.

크레이터의 측면에 고정된 은사가 근육처럼 율동하며 한서리의 팔다리를 잡아당겼다.

우드드득-!

한순간에 손목과 발목의 관절이 빠졌다.

한서리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벨제불은 후후 웃으며 매달려 있는 한서리에게 다가갔다.

그는 부드러운 손길로 한서리의 부어오른 뺨을 쓰다듬었다.

“고집 피우지 말고 기린을 부르렴.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구나.”

고통을 눌러 참던 한서리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벨제불을 쏘아보았다.

이내 그녀의 입에서 비웃음이 흘러나왔다.

“이것 참, 미안한데. 나는 기린의 수족이 아니야. 그러니까 놈을 부를 수단 같은 건 없어.”

“이렇게나 녀석의 힘을 끌어 쓰고 하는 말이라고는 믿을 수 없구나.”

하얀 손이 피로 물든 은색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벨제불은 분노로 일그러져 있는 한서리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불쌍한 아이. 그렇게 버틴다고 네가 인간이 될 것 같니?”

“난 인간이야. 네가 뭐라 하든. 그러니까 기린을 찾을 거면 다른 데 가서 알아 봐.”

“안타깝구나, 안타까워.”

말과는 달리 검은 악마의 미소는 점점 더 짙어지고 있었다.

놀리는 듯한 목소리가 그 뒤를 따랐다.

“어떻게 하면 말을 들을까…… “

고민을 하는 척 손가락으로 톡톡 이마를 두들긴다.

놈의 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가느다란 실이 한서리의 피부를 찢고 안으로 파고들었다.

거기에 마기의 독기까지 침범해 팔다리가 달군 화덕에 들어간 것 같았다.

지글지글 피부가 녹고 지방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

한서리는 이를 악물고 비명을 삼켰다.

눈물이 터지고 잇몸에서 피가 났지만 신음 하나 흘리지 않았다.

벨제불이 좋은 생각이 난 것처럼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고 보니 그 귀여운 아이가 있었군. 어디 보자…… 이름이…….”

쿡!

벨제불이 자신의 이마를 찔렀다.

장난감 상자를 헤집듯 그의 손가락이 월터의 뇌를 뒤져 정보를 뽑아냈다.

“김건?”

그 이름을 듣는 순간 한서리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벨제불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래, 그 아이를 대신 가지고 놀아 볼까.”

“아, 안ㄷ……!”

실수를 깨달은 한서리는 얼른 혀를 깨물었지만 때는 늦은 뒤였다.

멍청한 년.

지독한 자괴감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아무리 마음을 다잡아도 남편과 관련된 일에서는 바보가 되어 버린다.

그녀는 두려움에 찬 눈으로 벨제불을 쳐다보았다.

이미 벨제불은 그녀에게 관심이 없었다. 시선이 다른 곳으로 가 있었다.

턱이 떨려 왔다.

동요할수록 상황이 더욱 악화될 것이라는 것을 아는데도 진정이 되지 않았다.

무서웠다.

반대쪽으로 돌아가는 고개를 붙잡기 위해 뭐라도 말을 꺼내려는 찰나였다.

“나를 찾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언제 정신을 차린 건지 만신창이가 된 김건이 크레이터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안도감이 찾아왔다.

그러나 그것은 한순간이었을 뿐, 곧 더 큰 공포로 돌아왔다.

“도망쳐! 이쪽으로 오면 안…… 읍!”

뱀처럼 뻗어 온 검은색 실이 턱과 입을 묶어 버렸다.

한서리는 눈물을 흘리며 몸을 뒤틀었다.

벨제불은 김건을 돌아보았다.

동요 한 점 없는 눈동자를 발견하곤 흥미진진한 표정이 되었다.

“저 아이가 기린의 화신이라는 걸 알고 있었니?”

은색으로 빛나는 한서리를 가리키며 말한다.

잴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유대를 쌓아 왔던 아내가 인간이 아닌 존재라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김건은 흔들리지 않았다.

눈살을 찌푸리긴 했으나 그것은 벨제불이 말한 사실 때문이 아니라 힘겨워하는 아내의 모습을 불편해 하는 것처럼 보였다.

벨제불은 계속해서 뱀처럼 속삭였다.

“저 아이는 널 속였을 거란다. 지금까지, 줄곧.”

“그건 나와 아내의 문제야.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지.”

하하하하, 벨제불이 웃었다.

검은 안개가 사위를 감쌌다. 마기에 물든 지면이 늪처럼 푹푹 퍼졌다.

강림을 하고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났다. 어느새 이 일대가 전부 벨제불의 영역이 되어 있었다.

검은 먹구름이 하늘을 가리고 사방에 깔린 시체가 몸을 일으켰다.

기괴하게 피어난 시체꽃이 덩굴처럼 발을 휘감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김건이 눈을 깜빡였다.

벨제불의 모습이 사라졌다.

하얀 손이 어깨를 짚었다.

그것은 더 이상 월터라는 남자의 단련된 손이 아니었다.

가느다란 손가락, 얼룩 한 점 없는 하얀 피부.

아름다운 섬섬옥수가 부드럽게 어깨를 감싸 쥐었다.

귓가에 따뜻한 입김이 닿았다.

녹아내릴 듯한 목소리가 고막을 간지럽혔다.

“넌 저 아이를 지킬 수 없단다. 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접촉을 통해 과거의 기억을 읽혔다.

점점 전능에 가까워지고 있다.

활짝 펼쳐진 검은 날개가 이불처럼 김건을 덮었다.

“딱 하나 남은 방법이 있지.”

완전히 여성의 형상이 된 벨제불이 뒤에서 김건을 그러안았다.

유혹적인 몸짓과 목소리가 낙인처럼 뇌리에 박혔다.

“내 종이 되렴. 그러면 저 아이를 살려 주마.”

검은 머리칼이 폭포수처럼 어깨 뒤에서 쏟아졌다.

“별거 아니야.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면 돼. 네 소유주가 내가 될 뿐, 인격도 그대로고 육체도 남아 있을 거야.”

기분 좋은 향기가 코를 간질였다.

따뜻한 온기가 등 뒤에 닿았다.

“나는 네가 아주 마음에 들었단다. 내게 오렴. 후회하지는 않을 거야.”

너무나도 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

그것은 성녀의 목소리였다.

마치 천사의 날개에 안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둥실둥실 몸이 뜨고 편안한 공기가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제안을 수락하고 그대로 잠들어 버리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김건은 말했다.

“거절하지.”

극한으로 단련된 감각이 위화감을 감지했다. 오감이 조종당하고 정신이 뒤흔들린다.

그러자 벨제불은 그의 안쪽으로 더욱 깊숙이 파고 들어왔다.

“왜지? 너도 네 아비처럼, 아무것도 지키지 못하는 부러진 검이 되고 싶은 건가?”

보이지 않는 손이 김건의 안쪽에 단단히 봉인되어 있는 금기의 상자를 열었다.

절망과 증오, 고통과 분노가 기억과 함께 줄기줄기 새어 나왔다.

누구보다도 강하다고 생각했던 아버지가 괴물의 손짓 한 번에 쓰러진다.

어머니의 비명.

찢겨나가는 사지와 흐드러지는 핏방울.

가지고 태어나지 못한 재능.

수백, 수천 년을 쌓아 왔던 기술의 무의미함.

비웃음, 모멸, 그리고 동정의 시선들.

망각이라는 전가의 보도가 있기에 인간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것이 없다면 상처는 아물지 않고, 끝없이 피를 흘리며 고통스러워하다 스러져 갈 뿐이다.

벨제불은 기억의 상자를 열어 잊혔던 모든 고통을 끄집어냈다.

아문 상처를 비집어 찢어 놓고 되돌아갔던 내장을 파헤쳐 눈앞에 들이밀었다.

단련된 인간일수록, 강한 인간일수록 망각으로 잊힌 기억들이 크게 돌아온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인간들은 고통을 축적함으로서 강해지기 때문이다.

고통의 역류에 김건의 눈앞이 하얗게 물들었다.

잊고 있었던 부상의 아픔이 몸통을 짜개고 그동안 넘어왔던 절망의 산 하나하나가 거대한 산맥이 되어 머리를 후려쳤다.

금강석 같던 정신에 금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에 영향을 받은 육체가 부서졌다.

쿨럭!

김건의 입에서 붉은 토사물이 쏟아졌다. 그뿐만 아니라 온몸의 구멍에서 피가 쏟아졌다.

피눈물이 볼을 적시고 귀에서는 빨간 거품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다리를 타고 흘러나온 핏줄기가 바닥을 적신다.

그는 무릎을 꿇었다.

정신 방벽이 무너졌다.

김건은 더 이상 벨제불의 지배에 거역할 수 없었다.

벨제불은 손아귀에 쥔 아기 고양이를 달래듯이 말했다.

“아직도 생각이 바뀌지 않았니?”

김건이 고개를 들었다.

그 얼굴에 여유는 없었다. 빨간 피와 질척한 적의로 물든 남자는 으르렁거리듯 내뱉었다.

“꺼져.”

“고집부리긴. 네가 지금까지 쌓아 온 번뇌가 이렇게 크게 느껴지는데 말이야.”

벨제불이 손을 뻗었다.

“괜찮아. 내 아이가 되면 번뇌도, 고통도 없어질 테니까. 너는 옆에 두고 내 친히 귀여워해 주마.”

하얀 손가락이 천천히 다가왔다.

저것에 닿으면 끝이다.

묶여 있던 한서리가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다시 한번 정기를 끌어올려 보려 했지만 침식을 마친 마기가 그것을 용서치 않았다.

벨제불의 정신 공격으로 너무 큰 타격을 받은 김건 역시 손쓸 방도가 없었다.

벨제불의 손끝이 김건의 이마에 닿으려는 순간이었다.

문득, 김건이 웃었다.

“역시 별거 아니군.”

“……?”

알 수 없는 말 한마디.

하지만 질문은 지배를 마친 뒤에 해도 늦지 않았다. 벨제불은 그대로 손가락을 찔러 넣었다.

하나, 그 손끝은 김건에게 닿지 못했다.

푸욱!

황금색 빛이 벨제불의 가슴을 뚫고 튀어나왔다.

찢어진 날개가 떨어지고 빛에 관통당한 화신의 육체가 공중에 매달렸다.

“뭣……!”

놀라 뒤를 돌아보는 벨제불.

그것보다 더 빠르게 가슴에 박힌 황금색 칼끝이 요동쳤다.

김건이 웃었다.

“인간의 몸을 빌려 나타났다고 해도 이렇게 쉽게 빈틈을 보이면 안 되지. 신이라면 말이야.”

십자로 종횡하는 금색 대검.

벨제불의 육체가 찢어져 사방으로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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