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 38화
그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대검을 손에 쥔 세라스 프레이저였다.
시간의 경과를 통한 이점이 꼭 벨제불에게만 있는 것는 아니다.
벨제불의 등장으로 가해진 정신 공격.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인간은 약해진다. 세라스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큰 타격을 입었다.
하지만 그녀의 정신력은 특출났다. 강철 같은 마음가짐을 가진 소녀는 약간의 시간이 주어지자 그것마저 이겨 내고 일어섰다.
“하아아앗!”
황금색 오라를 불태우며 세라스가 돌격했다.
한순간에 몸을 이어붙인 벨제불은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검지를 향했다.
“버릇없는 아이.”
또다시 납음부존지망을 방출.
모든것을 소멸시키는 검은색 광포가 세라스를 향해 날아갔다.
세라스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목숨의 위기를 깨달은 그녀의 잠재력이 모조리 터져 나왔다.
“크아아앗!!”
온몸에서 끓어오른 오라가 폭발하듯이 분출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거대한 장벽이 정면에 생성.
폭 2미터, 두께 6미터, 그 어떤 합금으로도 닿을 수 없는 강도를 가진 압도적인 오라의 방패가 마기의 결정체를 막았다.
가까스로 방어에 성공.
하지만 그 여파까지 모두 죽이진 못했다.
잔류한 마기의 후폭풍에 직격당한 세라스가 온몸을 검게 물들이며 뒤로 날아갔다.
건방진 아이에겐 벌을 내려 줘야 마땅하다.
벨제불이 세라스를 추격하려 할 때였다.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
뭐지?
아무런 속박도 없다.
물리적, 정신적, 그 어떤 장애도 벨제불에게 작용하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도 움직일 수 없다.
마기의 분출 역시 불가능.
주변의 마력이, 동결되고 있었다.
마기 역시 결국은 변형된 마력. 주변의 마력이 무언가에 의해 활동을 멈추고 있으니 전신을 마기로 변형한 벨제불이 몸을 움직일 수 없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벨제불이 언제부터 존재했는지는 그녀 자신조차 모른다. 최소한 생물과는 비교할 수 없다. 굳이 대조한다면 행성이라는 것에 빗대봐야 할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길어 봐야 수십 년을 사는 게 고작인 하등 생물에게 그 존재는 신처럼 보일 것이다.
억겁에 가까운 세월을 보내며 억겁에 가까운 존재를 지배하고 먹어치워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일어나고 있는 현상을 설명할 수 없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을 겪어 본 적이 없었다.
벨제불은 경악에 가득찬 눈으로 지금의 현상을 일으키고 있다고 추측되는 자를 바라보았다.
김건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에게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불처럼 타오르는 투기도, 세상을 제멋대로 뒤트는 정기도, 모든 것을 침식하는 마기도 없었다.
그냥 인간.
많은 물, 약간의 단백질과 지방, 조금의 질소와 칼슘등으로 구성된 유기 생명체.
벨제불의 입장에서는 벌레, 아니, 플랑크톤쯤은 될까 싶은 작은 존재.
그런 미력한 존재 앞에서 벨제불은 근 수만 년간 느끼지 못했던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좋은 걸 하나 알려 주지.”
망가진 몸으로 비틀비틀 다가온 김건이 벨제불의 앞에 섰다.
벨제불의 마력이 흩어진 덕에 구속에서 풀려난 한서리가 뒤에서 소리쳤다.
“자기야, 하지 마!!”
언젠가 들었던 말.
또다시 듣고 싶지는 않았던 말.
돌아보지 않아도 울먹이고 있는 아내의 모습이 그려졌다.
마음이 아팠다.
어쩌면 벨제불의 정신 공격을 당할 때보다도 더 아플지도 모른다.
하지만 김건은 스스로의 선택을 바꾸지 않았다.
“지금까지 내 앞에서, 내 아내를 위협하고 살아남은 놈은 없어.”
남자의 주먹이 앞으로 나아간다.
“그게 신이든, 뭐든 말이야.”
톡.
피에 젖은 주먹이 화신의 가슴에 닿았다.
기술이 발동했다.
* * *
반응 면적이 큰 물질의 원자핵에 에너지가 낮은 열중성자를 충돌시키면 무거운 원자핵이 그보다 훨씬 가벼운 바륨과 크립톤, 그리고 몇 개의 중성자로 쪼개지며 질량결손이 발생한다.
에너지 보존 법칙에 의해 손실된 질량은 에너지로 방출된다.
쪼개진 원자핵에서 튀어나온 중성자가 다른 원자핵을 쪼개고, 거기서 방출한 중성자가 원자핵을 쪼개는 연쇄 반응이 일어나 막대한 에너지가 발생한다.
그것이 핵분열의 원리.
인간이 발현해 낸 가장 강력한 세상의 힘 중 하나.
그 원리는 어디까지나 이 세상의 것을 기준으로 세워진 것이었으나, 놀랍게도 마계라 불리는 이세계에도 비슷한 원리로 동작하는 물질이 있었다.
바로 마력이었다.
김건이 그것을 발견한 건 단순한 우연이었다.
진동으로 파괴할 수 없는 물질은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연구에 매진하던 시절.
진동의 주파수를 조정하던 와중에 그는 우연히 주변의 마력이 분해되어 가는 현상을 관측했다.
마력으로 만들어진 대상을 분해한 게 아니라 마력 그 자체, 그것이 갖고 있던 무언가의 연결 고리를 부순 것이다.
그다음에 일어난 후폭풍으로 죽음에 가까운 부상을 입었지만 살아남았고, 그 결과로 인해 그는 많은 사실을 알게되었다.
진동을 이용해 마력의 최소 단위를 분해할 수 있으며, 분해된 마력은 쪼개진 원자핵과 비슷한 연쇄 반응 현상을 일으킨다는 사실.
그리고 마력을 분해 할 수 있는 진동의 주파수를 알았다.
그 주파수는 당시의 인간이 가지고 있던 마학 기술로는 구현이 불가능했다.
그것은 오로지 김건만이 발현 가능한 고유한 능력이었다.
거기에 덧붙여진 또 하나의 사실이 김건에게 사명을 부여했다.
핵분열 현상을 극도로 농축된 원자핵의 덩어리에 일으키면 연쇄 반응이 중첩되어 한순간에 대량의 에너지를 방출하는 것으로 대폭발을 일으킨다는 것.
마력 분열 현상 역시 마찬가지다. 마력 분열을 통한 연쇄 반응으로 대폭발을 일으키기 위해선 극도로 농축된 마력의 덩어리가 필요했다.
그토록 농밀한 마력을 지니고 있는 것은 전 세계를 아울러 단 셋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김건이 자아낸 진동이 화신의 마력을 점화시켰다.
분해된 마력이 힘을 방출하며 허무의 빛이 뿜어져 나왔다.
화신이 비명을 질렀다.
검은 마기가 조각조각 무로 환원되어 사방으로 분출됐다.
마력이라는 물질이 쪼개지며 뿜어내는 것은, 열로 대표되는 이 세상의 에너지가 아니라 반마력이라 이름 붙은 파마의 힘이 대부분이다.
폭발한 반마력의 열파가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근방 모든 인간의 마력이 소실되며 마계의 물질로 이루어진 아이템이 가루가 되어 흩어진다.
벨제불이 뿜어낸 마기에 물들어 마계화가 된 영역은 아예 통째로 붕괴, 푸른 불꽃을 휘날리며 먼지로 화했다.
그러고도 남은 힘은 이제 물리적 형태를 갖고 열과 빛으로 전환되었다.
폭발로 터져 나온 빛줄기가 하늘을 꿰뚫었다.
위력의 대부분이 반마력으로 뿜어졌는데도 그 폭발은 굉음마저 집어삼키며 공간을 비틀었다.
한 남자의 주먹 앞에 신위가 부스러지고 사라져 간다.
열기의 폭풍우가 몰아친 뒤, 높게 피어오른 버섯구름을 젖히고 나타난 하늘은 반으로 쪼개져 있었다.
갈라진 구름 사이로 내비치는 태양은 그야말로 신화의 한 장면과도 같았다.
폭발의 충격파에 나가 떨어진 한서리는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주변의 마력이 증발해 그녀의 머리칼은 이제 검은색으로 보였다.
아무런 이능도 없다. 그저 사지가 부서진 나약한 여자에 불과했다.
갈라진 입술에서 가느다란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결국은, 결국은 이렇게 되어 버리고 말았구나.
한서리는 부서졌다.
눈물이 흘러나왔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억, 억, 숨막히는 소리를 토해 내는 것이 전부였다.
사랑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부부라는 것은 무엇인가, 평생을 함께 할 관계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상대에 맞춰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가 아니라 둘로서 온전한 존재가 되도록 서로를 맞추어 가는 것이다.
한서리는 너무 많은 부분을 김건에게 맞추어 버렸다.
기대어 주는 짝이 없다면 홀로는 인간으로서 기능할 수 없을 정도로 스스로를 바꿔 버렸다.
“아, 아.”
짝을 잃어버린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벌레처럼 지면을 기어 다니는 것뿐이었다.
지면에 고개를 처박고, 죽을 때까지 울부짖는 것이 그녀에게 남은 인생이었다.
“바보같긴.”
그런 한서리의 머리 위에 누군가의 손이 얹어졌다.
익숙한 손길, 익숙한 목소리다.
놀란 한서리가 고개를 치켜든다.
김건이 앞에 있었다.
남자의 모습은 처참했다.
극심한 화상이 전신을 익혀 버렸고, 깊은 자상에서 흘러나온 피가 바닥을 적셨다.
한쪽 주먹은 산산조각이 나서 원래의 모습을 떠올릴 수가 없다.
인간인지, 걸어다니는 고깃덩어리인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의 몰골.
하지만 살아 있었다.
분명히.
“어떻게…….”
눈물에 젖은 눈이 깜빡였다. 눈앞에 펼쳐진 사실을 믿을 수가 없어서, 저도 모르게 바보 같은 소리를 흘린다.
김건은 웃었다.
“본체가 아닌 화신이라 그런지 마력의 농축도가 낮았어. 두 번째로 사용한 기술인 데다 그때보다 몸 상태가 좋아서 연쇄 반응도 어느 정도 조절할 수 있었고. 운이 좋았지.”
“…….”
“그래도, 아마 다음번은 없을 거야. 반마력을 너무 세게 쏘여서, 마력을 감지하는 신경계가 다 닳아 버렸…… “
김건은 말을 잇지 못했다. 아내가 울부짖으며 그를 끌어안았기 때문이다.
따뜻한 온기가 마음을 데웠다. 심장의 박동이 한서리의 삶을 뛰게 만들었다.
김건은 아이처럼 우는 아내를 마주 안아 주었다.
“하여튼, 이럴 때는 완전히 애라니까. 내가 정신이 있었으니 망정이지, 기절했으면 어쩌려고 했어?”
강철의 여제라고도 불렸던 사람이 언제 이렇게 어리광쟁이가 되었을까.
그 이유가 자신이라고 생각하니 조금 기쁘기도 하고, 조금 씁쓸하기도 했다.
하지만 괜찮다.
그는 누구보다도 더 아내의 강인함을 잘 알았다.
지금은 자신에게 기대고 있지만 언젠가는 일어서서 곁에 나란히 서서 달려 나갈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때까지는 얼마든지 어리광을 받아 주겠다. 무엇이든 다 해 주고야 말겠다.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더 이상 어리광을 받아 줄 수 없을 것 같았다.
김건은 팔을 뻗어 거머리처럼 엉겨 붙어 오는 아내를 떼어 냈다. 하는 꼴을 보아하니 말은 해 봐야 먹힐 것 같지도 않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아내의 따귀를 올려붙였다.
짜악!
경쾌한 소리와 함께 한서리의 고개가 돌아갔다.
어안이 벙벙해서는 토끼처럼 동그래진 눈으로 이쪽을 돌아본다.
그 모습이 웃음을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귀여웠지만 농담 따먹기를 하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의사 좀 불러 줘. 이대로는 일 분 이내에 죽…….”
눈앞이 노래졌다.
혀가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한계였다.
하지만 마음을 놓을 순 없었다.
순간적으로 완전히 울보가 되어 버린 아내가 못미덥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중에건 뭐건, 지금은 그냥 애잖아.
아무리 사랑해도 아닌 건 아닌 거다. 지금의 아내는 전장의 전우로 삼기에는 상당히 부족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 생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가녀린 손이 쓰러지는 그의 몸을 떠받쳤다.
“……미안해. 정신을 놔 버렸네.”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언제나처럼 그의 등 뒤를 지키던 여왕의 말소리였다.
이젠 괜찮겠지.
김건은 가까스로 붙잡고 있던 정신줄을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