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 39화
2112년 5월 12일, 16시 24분.
호주 멜버른의 멜버른 스타디움 경기장에서 발할라 토너먼트 진행 중 타입 오메가, 벨제불의 화신이 등장했다.
화신 강림의 충격으로 일대에 전파 및 통신 이상이 발생.
약 한 시간 동안 도시의 인프라가 정지.
자동 주행 차량 이상 및 의료 시설 정지 등 2차 피해로 145명의 사망자와 수천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그날 경기장의 입장자는 85,672명이었으며 사망자 23,541명, 행방불명자 12,673명이 발생.
행방불명자의 대부분은 화신의 공격에 소멸한 것으로 추측됐다.
나머지 생존자들 역시 대부분이 화신 강림등의 정신적 충격으로 인한 각종 질환을 호소하는 와중이다.
화신의 대응에는 경기장에 있던 영웅들이 나섰다.
발할라의 에인헤야르와 생도들이 화신과 전투를 벌였고 출현 후 10분 뒤, 화신을 소멸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전투 도중 월터 바이스턴을 포함한 그의 파티 구성원 4명이 사망, 생도 측에서는 제이미 프레이저의 사망이 확인되었다.
그 외 전투 중 상해자에 대해서는 불명.
발할라 측에서는 정보를 밝히지 않고 있으며 월터 바이스턴의 파티가 희생하여 화신을 소멸시켰다는 조사결과가 나왔다는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화신의 소멸 직전에 있었던 거대한 폭발에 대한 의문이 줄을 잇고 있다.
그 폭발의 관측값이 지금까지 발견된 그 어떤 극대소멸공격과도 일치하지 않는다는 분석 결과가 나왔으며 화신 소멸 이후, 경기장을 중심으로 발생한 원인 불명의 마력 소멸 현상이 발생했다.
때문에 현재 호주 정부 및 언론에서는 발할라 측에서 화신을 소멸시키기 위해 규약으로 금지된 비밀 병기를 사용한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했으나, 발할라에서는 그것을 사실무근으로 취급하고 있어 화신의 등장과 소멸까지의 인과 관계가 매우 불투명한 상태다.
이에 대해 각 언론과 단체에서는 발할라의 폐쇄 정책에 대해 강한 불만을 나타냈다.
혹자들은 신무기의 테스트를 위해 발할라가 일부러 화신을 등장시킨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까지 나오는 와중…….
“잘도 떠드는군. 비밀 병기든 뭐든 이 정도 피해로 화신을 막은 건 기적이나 마찬가지인데 말이야.”
아스타로트는 그렇게 말하며 방금 전까지 보고 있던 휴대기 화면의 기사를 가리켰다.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던 거야? 생각보다 너무 쉽게 막혔는데?”
박사는 침중하게 말했다.
“그럴 리가 있겠나. 내 목표는 발할라 C, D 클래스의 전멸과 발할라의 주력 30퍼센트의 소모였다. 민간인 피해는 따로 계산하지는 않았지만 전투가 일어난 도시가 소멸할 거라고 생각했지.”
“저 바보가 실수라도 한 거 아니야? 강림의 매개체로 적합하지 않은 놈한테 파편을 심었다든가…… “
“개소리 하지 마. 시킨 대로 확실하게 제이미 프레이저에게 씨앗을 심었으니까.”
마이가 새파랗게 눈을 치켜뜨며 쏘아붙인다. 아스타로트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면 대체 뭘 어떻게 해서 화신을 쓰러트린 거야?”
“그건 오히려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박사는 두건으로 가려진 얼굴 부분을 아스타로트에게 향했다.
“무슨 방법으로 화신을 쓰러트렸는지 짐작 가는 게 있나?”
아스타로트는 자신을 가리켰다.
“그거, 혹시 나한테 물어보는 거야?”
“그래.”
박사는 대마법사라는 칭호가 어울릴 정도로 마법에 능통한 자였다. 그런 그가 아스타로트에게 물을 만한 건 하나밖에 없었다.
즉, 오라 기술로 화신을 쓰러트린 게 아니냐는 말이었다.
아스타로트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이 되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원시인 타령을 할 때는 언제고.”
“그 말은 됐다. 질문에나 답해라.”
“나 참, 내 입으로 말하기는 자존심 상하지만, 그건 칼을 휘둘러서 산을 날려 버릴 수 있냐고 물어보는 거랑 똑같은 말이야. 네 표현을 빌리자면 원시인의 기술로 핵폭탄을 만들어 내는 수준의 이야기라고.”
“원시인의 기술로 시한폭탄을 만들어 내는 자가 있지 않았나.”
그 말을 들은 아스타로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마이는 치를 떨며 두통이 오는 것처럼 이마를 짚었다.
멍하니 박사를 바라보던 아스타로트가 물었다.
“……이번 일에도 김건이 관련되어 있어?”
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외부에 공개되지는 않았지만 발할라에서 조사한 결과 벨제불 님과 전투를 벌인 뒤 살아남은 것은 셋뿐이다. 김건, 한서리, 그리고 세라스 프레이저.”
“…….”
아스타로트는 침묵했다. 그 얼굴에 더 이상의 경박함은 없었다.
잠시 후, 굳게 닫혀 있던 입술이 열렸다.
“……불가능해. 내가 아는 그 어떤 이론을 대입해 봐도, 그 결과로 화신을 쓰러트릴 수 있다는 계산은 나오지 않아. 그런 길이 보였다면 내가 마인이 될 일은 없었을 거야.”
눈앞의 남자가 무엇을 위해 마인이 되었는지를 아는 박사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군.”
그는 깍지 낀 손위에 턱을 얹으며 중얼거렸다.
“네가 그렇게 말할 정도라면 일단 김건이 화신을 물리치는 건 불가능하다고 가정해도 좋겠지. 세라스 프레이저는 당연히 아닐 테고…… 남는 건 역시 한서리뿐인가.”
“역시라고? 그 계집애가 뭔가를 했어?”
김건의 이름에 진저리를 치던 마이가 되물었다. 박사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실, 나는 한서리가 화신을 물리쳤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하? 갑자기 이게 어떻게 그렇게 되는데? 나름 이름값이 있긴 하지만 결국 아무것도 모르는 꼬맹이잖아. 그…… 뭐시기처럼 말도 안 되는 능력을 가진 것도 아니고. 나는 차라리 그 뭐시기가 화신을 쓰러트렸을 거라고 보는데, 전위라고 꼭 오라 기술만 사용한다는 법칙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
마이의 항변에 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김건…… 그 자가 근래에 있었던 모든 사건의 중심에 있었다는 것은 맞다. 경계해야 할 존재라는 건 확실하지. 하지만.”
“하지만?”
“결국 그 김건을 움직인 건 모두 한서리였다.”
“…….”
“김건이 본래 능력을 숨기고 있었다고 쳐도, 정상적인 아카데미 생활을 한다면 이렇게 빨리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다. 집단이라는 것에는 언제나 절차라는 것이 존재하니까. 그리고 이전까지 김건은 약간의 소문을 제외하곤 실체가 전혀 알려지지 않은 무명의 생도였다.”
두건 안에 감춰진 눈에서 빛이 번득인 듯한 착각이 일었다.
박사의 말이 조금 빨라졌다.
“그런 김건을 먼저 찾아낸 것이 한서리다. 놀이공원으로 김건을 이끈 것도 한서리고, 김건이 빠르게 상위 클래스의 반으로 올라갈 수 있었던 것도, 이번 토너먼트에 참가할 자격을 얻을 수 있었던 것도 모두 한서리의 공이지. 대국적인 관점에서 보면 김건은 결국 장기말에 불과해.”
“……그 말은 즉, 한서리가 이 모든 상황을 조작하고 있다는 말이야? 김건의 뒤에 숨어서?”
“단정 지을 순 없다. 하지만 그런 가정을 떠올려 볼만한 재료는 충분히 모였어.”
“그럼 한서리는 뭐지? 네 가정이 사실이라면, 쉽게 넘어갈 이야기가 아니야. 조금 재능이 있다곤 치더라도 아직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부잣집 딸내미가 벌일 만한 일이 아니라고.”
표정이 굳은 아스타로트의 말에 박사는 턱을 쓰다듬었다.
잠시 뜸을 들이던 그가 문득 말을 꺼냈다.
“전에 있었던 회의에서…… 벨제불 님이 레이나에게 내린 말씀 중에 이런 것이 있었지. ‘기린의 동태가 수상하다. 기린의 추종자를 찾아라.’ 라고.”
“기린이…… 이번 일과 관계가 있다는 말인가?”
“아마도.”
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곧이어 그는 무시무시한 가정을 내놓았다.
“어쩌면 한서리는 기린의 화신일지도 모른다.”
“……!”
“뭐?”
아스타로트와 마이, 두 사람 모두 눈을 치켜떴다.
박사의 말이 계속되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일이 설명이 돼. 기린은 세 마신 중 제일 생각이 많은 신이다. 그 지혜와 지식에는 끝이 없다고 하지. 기린의 시선이 있다면 김건의 진가를 알아보거나 우리의 행동을 읽는 건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닐 거다. 벨제불 님의 화신을 추방시키는 것도 가능해. 같은 화신이니까.”
“결국은 추측이라는 거 아니야? 한서리가 화신이라는 증거는?”
“물증은 없다. 심증과 추론뿐이지. 하지만 화신이라는 게, 물증으로 밝힐 수 있는 종류의 것인가?”
“그건…… 아니지. 직접 봤다간 죽을 게 확실하고.”
마이가 고개를 저었다.
“일단은 가능성일 뿐이다. 하지만 확률은 높아.”
어둠으로 가득찬 집회 장소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벨제불을 이 세상에 현신시킨다.
각자의 방식과 생각은 다르지만, 마인으로 존재하는 이상 그것은 그들이 가진 가장 커다란 사명이었다.
그 사명을 위협하는 강대한 존재의 등장 가능성에 그들은 모두 각자의 생각에 잠길 수밖에 없었다.
이 자리에서 고민이 가장 클 사람은 박사일 것이다. 그는 깍지 낀 손위에 괸 턱을 움직일 생각이 없는지 석상처럼 굳어 있었다.
아스타로트 역시 무슨 생각을 하는지 계속해서 손아귀에 뽑아낸 마기를 주물럭거리고 있었다.
어쨌든 간에 그들이 해야 할 일은 달라지지 않는다.
벨제불 님을 현신시키기 위해 노력하되, 나머지 인생은 인간이라는 틀에 구속받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사는 것.
그것이 마인의 인생이다.
마이는 금방 고민을 그만뒀다. 그리고 이 자리에 끼지 않은 한 사람을 찾았다.
“레이나는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오늘이 집회 날이라는 걸 잊은 건 아니겠지?”
박사가 대답했다.
“무리하게 현신시킨 화신이 추방당했다. 벨제불 님이라도 이번에는 상당한 타격을 입었을 거다. 신탁을 내려받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할 거야? 지금 당장 우리끼리 떠들어 봐야 쓸만한 내용이 오갈 것 같진 않은데.”
아스타로트가 어깨를 으쓱인다. 박사는 조금 고민하더니 말했다.
“이런 시기에 신탁이라는 정답을 쉽게 포기할 순 없지. 레이나가 있는 장소는 알고 있으니, 직접 가서 상황을 보는 게 좋겠군.”
말을 맺은 박사가 손가락을 튕겼다.
다음 순간, 주변 풍경이 바뀌었다.
어둠뿐이던 집회실은 전혀 다른 공간에 있었다.
그들이 이동한 곳은 커다란 동굴의 안쪽이었다.
조명은 거의 없고 드문드문 서 있는 촛대만이 미약하게 붉은빛을 발하고 있었다.
동굴에 나타나자마자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바닥에 쓰레기처럼 널브러져 있는 수많은 시체였다.
빼빼 말라 미라가 되어 버린 시체가 사방에 굴러다니고, 동굴의 바닥은 온통 피로 범벅이었다.
시체의 냄새를 맡고 몰려든 벌레들이 어둠 속에서 꿈지럭거렸다.
그야말로 지옥도라는 말이 어울리는 광경.
“웩, 썩은 내 하곤. 청소 좀 하지.”
마이는 인상을 찡그리며 코를 막았다. 그리고 발밑을 굴러다니는 시체를 걷어찼다. 그러자 시체가 퍽 하는 소리를 내며 부어오른 종기처럼 터졌다.
발을 더럽힌 마이가 똥을 밟은 소녀마냥 펄펄 뛰었다.
박사가 말했다.
“마력이 모두 빨려 나간 시체는 터지기 직전의 풍선이나 마찬가지다. 몸을 더럽히기 싫다면 건드리지 마라.”
그러더니 부웅 날아올라 시체를 건너 뛰어 나아가기 시작하는 박사. 묵묵히 있던 아스타로트 역시 가볍게 오라를 발휘해 훌쩍 뛰어 시체의 산을 건넜다.
“이런, 씨발. 더러워 죽겠네.”
구시렁거리던 마이는 기환마위를 이용한 순간이동으로 두 사람의 뒤를 쫓았다.
세 마인이 내려앉은 곳은 동굴의 중앙에 마련되어 있는 거대한 제단이었다.
이미 차원의 문을 열었다 닫았는지 제단은 마계에서 흘러나온 마기에 심하게 침식된 모양새였다.
단단한 돌바닥은 진흙처럼 변했고 주변에는 검은 시체꽃이 섬뜩한 모습으로 피어 있었다.
그 가운데에, 쓰러져 있는 레이나가 있었다.
“레이나!”
깜짝 놀란 마이가 달려가 그녀를 부축했다.
그녀의 모습은 처참했다. 새하얗던 얼굴에 먼지가 얼룩덜룩하고, 뭘 했는지 손발에는 굳은 피가 달라붙어 새빨갰다.
정신을 잃었는지 레이나는 시체처럼 축 늘어졌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레이나가 벨제불과 교신을 하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다. 한 종교의 교주인 그녀는 벨제불의 마력을 흘려 가며 신도들을 모았고, 그 마력에 홀린 신도를 제물로 바쳐 가며 억지로 차원의 틈을 비집어 열고 벨제불로부터의 전언을 내려받았다.
지난 십여 년간 계속 있었던 일이었지만, 레이나가 이렇게 쓰러진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마이는 어디 한번 말해 보라는 듯 박사가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아는 게 많은 박사라면 지금 일어난 일도 설명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서였다.
하지만, 박사의 시선은 그녀에게 향해 있지 않았다.
안쪽이 보이지 않는 두건은 어쩐지 시커먼 동굴의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
어쩐지 말이 많은 아스타로트마저 묵묵히 천장을 보고 있었다.
“……뭐야? 위에 뭐가 있어?”
의아해진 마이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발견했다.
천장을 거쳐, 거대한 동굴의 벽면을 빼곡하게 메운 선혈의 문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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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아이처럼 순수한 욕망의 발현.
주어와 목적어가 빠진, 되다 만 말의 나열이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 있는 마인들 모두가 본능적으로 알았다.
누가, 무엇을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인지.
오늘, 이 장소에서 그들에게는 새로운 사명이 주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