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 42화
사이먼과의 대담 후, 각종 절차들을 처리하기 위해 김건을 포함한 세 사람은 지금껏 갇혀 지내 왔던 각자의 방에서 하룻밤을 더 머물렀다.
사이먼에 새로이 마련해 준 옷과 휴대기를 받아 밖으로 나오니 간만의 햇살이 그들을 맞이했다.
휴대기에 찍히는 날자는 6월. 화신을 조우한 지 한 달이 지나 있었다.
어쩌다 보니 발키리가 되었지만, 그것이 공식적으로 확정된 것은 아니었다.
동료로서 생사고락을 같이하는 것은 각자의 일을 처리한 이후, 발할라와 사이먼의 지령을 받아 다시 모이게 된 이후일 것이다.
헤어지기 전에 세라스는 김건에게 다가갔다. 진지한 얼굴로 그에게 말했다.
“고마워. 이미 많은 사람들이 죽었지만 네 덕분에 제이미가 조금이나마 죄를 덜 지을 수 있었다고 생각해.”
김건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제이미의 잘못이 아니야. 어디까지나 벨제불이 한 짓이지.”
“하지만 아무나 화신의 매개체가 될 수는 없다고 베이커 교수님께 들었어. 제이미는 이미 마인에 가까운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던 거야. 그건 제이미와…… 우리 집안, 그리고 제일 가까이 있었으면서도 녀석이 삐뚤어지는 걸 막지 못한 내 잘못이지.”
세라스는 고개를 숙이며 정중하게 감사를 표했다.
“다시 한번 말할게. 고마워. 다른 집안사람들은 어떻게 말할지 모르겠어. 하지만 나는 네가 우리의 은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그리고…… 넌 홀로 마신에게도 대적할 수 있는 유일한 인간이지. 태어나서 지금까지 그런 건 본 적이 없어.”
벨제불과 싸운 뒤, 반쯤 죽어 가는 와중에 보였던 빛이 아직도 어른거렸다.
새카맣게 일어나 세상을 집어삼키려 하는 형용할 수 없는 괴물조차 찢어발기는 찬연한 붉은빛.
설명은 들었지만 그 원리도, 현상도, 세라스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직감적으로 느꼈다. 지금까지 쌓아 온 전위로서의 인생이 전율했다.
저 멀리, 이곳으로부터 몇백 광년 떨어져 있는 신비의 편린을 들춰 본 감각이었다.
세라스는 깨달았다.
아, 이 사람이 바꾸겠구나.
온갖 괴물과 이형에게 위협받는 이 위태로운 세상을.
“전사로서도 존경해. 진심이야. 나 따위가 이런 말하면 우스울지 모르겠지만, 반드시 널 지킬게. 그 누구도 널 해치지 못하게 할 거야.”
진지한 맹세에 얼떨떨해진 김건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어…… 그래.”
세라스는 웃었다.
“그럼 다음에 만날 때부터는 동료네. 잘 있어. 몸조심하고.”
온몸에 붕대와 패드를 붙인 금발의 소녀는 그 말과 함께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김건은 가볍게 손을 들어 그 뒤를 배웅해 주었다.
조금 당황스럽기는 하지만 세라스가 왜 저러는지 고민하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김건은 고개를 돌렸다.
이제야 겨우, 이야기를 나눠 볼 수 있게 됐다.
발키리가 되든, 세라스가 동료가 되든 김건에게는 별 상관없는 일이다.
그에게 중요한 건 오직 하나뿐이었다.
그는 조용히 있는 아내를 돌아보았다.
한서리는 우울한 표정이었다.
파란 눈에는 아직도 망설이는 기색이 있다.
하지만 더 이상 어물거리고 있을 수 없다는 건 그녀 스스로도 알고 있다.
“……기린과 맺은 계약이 있어.”
얇은 입술이 지금까지 숨기고 있었던 사실을 고백했다.
* * *
인류 최후의 사투가 벌어졌던 그날.
사실 한서리를 제외한 사람은 모두 기린의 공간 왜곡에 휘말려 죽었다.
그들을 죽인 기린 역시 김건의 기술에 당해 소멸했다.
살아남은 것은 김건의 등 뒤에 있던 한서리, 그리고 가까스로 숨만 붙어 있는 김건뿐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괜찮았다.
만신창이가 된 남편의 숨이 옅어질수록 몸이 떨려 왔지만 상관없었다. 그녀 역시 금방 뒤따라갈 테니까.
하지만 기린은 완전히 죽지 않았다.
인지를 초월한 괴물은 모든 육체를 소실하고서도 그 존재를 잃지 않고 말을 걸었다.
- 나를 도와라. 그러면 너와 그 남자를 함께 과거로 돌려보내 주마.
이성적으로 생각한다면 절대 받아들여서는 안 될 제안이었다.
모두를 제물로 바쳐서라도 살아남겠다는 이기적인 욕망이 없다면 수락하지 않을 악마의 유혹.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평생을 바친 강철의 여제라면 결코 하지 않았을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때의 한서리는 더 이상 강철의 여제가 아니었다.
짧은 인생의 막바지에 사랑을 알고, 애정을 알아 가며 마음을 감싸던 갑옷을 잃어버린 그녀는 결국 물러 터진 선택을 하고야 말았다.
“……그래서 일이 이렇게 된 거라고.”
진실을 들은 김건은 신음 소리를 삼키며 죄인처럼 앉아 있는 아내를 바라보았다.
“그럼 화신이 된 건…… “
“기린을 도와 시간을 뛰어넘는 마법을 펼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어. 육체를 잃은 기린은 더 이상 시공간에 간섭할 수 없었으니까. 잔류 사념만으로도 내게 말을 걸 정도의 힘은 발휘할 수 있었지만 그 이상은 무리였던 거야. 일을 대행해 줄 매개체가 필요했지. 그렇기 때문에 홀로 살아남은 내게 그런 제안이 온 거고.”
“……그런데 그걸 왜 지금까지 숨겼던 거야?”
그 말에 원망은 없었다.
김건에게 한서리는 사랑하는 아내이자 무인으로서 지켜야 할 주군이다.
그만큼 아내에 대한 김건의 신뢰는 절대적이었다.
그는 그저 아내가 왜 그런 사실을 숨겼는지가 궁금했을 뿐이었다.
한서리는 한숨을 내뱉었다.
“내가 나 자신이라는 걸 확신할 수 없었어. 사실은 한서리라는 인격은 이미 사라졌고 스스로를 한서리라고 착각하고 있는 기린이 그 행세를 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도저히 말할 수 없었어.”
“그럼 지금은 괜찮아?”
“응. 아직 장담할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벨제불과 싸우던 와중 남편이 자신을 살리기 위해 몸을 집어던지는 그 순간, 그때 느꼈던 감정의 소용돌이가 한서리에게 확신을 주었다.
펄떡펄떡 뛰는 스스로의 심장을 직접 꺼내 눈앞에 들어 보인 것 같이 생생했던 절망과 슬픔, 그리고 분노는 결코 누군가에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뒤에 움직이기 시작한 기린의 힘이 그녀의 확신에 근거를 더했다.
“기린의 힘을 쓰면서 느꼈어. 그건, 결코 내 힘이 아니야. 내 의지 아래에 있긴 하지만 이질감이 너무 강해. 실제로 몸이 그걸 버티는 것 같지도 않았고.”
그녀와 벨제불의 화신이 가진 힘은 동등했다.
아니, 오히려 김건과 싸우며 타격을 입은 벨제불의 화신보다 그녀가 더 강했다.
그런데도 벨제불에게 제압당한 것은 한서리 몸이 이질적인 기운을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서리는 이를 깨물었다.
“애초에 내가 화신이 되어 주기로 한 건 과거로 돌아오기 전까지야. 회귀한 뒤에는 인간으로 돌아와야 하는 게 맞아. 그게 계약 내용이기도 했고.”
“기린과의 계약은 절대적이잖아? 그게 수행되지 않을 수가 있나?”
그건 한서리에게도 가장 큰 궁금증이었다.
돌아온 이래로 그녀는 계속해서 그것을 고민했지만 정답을 이끌어 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몇 가지 가설은 세워두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기린은 시간 역행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
절대적인 효력을 가진다고 하는 기린과의 계약이지만 그것을 보증하는 것은 결국 기린 자신이다.
계약의 이행을 보증하는 당사자에게 문제가 생겼다면 그것이 이행이 되지 않는 것도 설명할 수 있었다.
김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후유증?”
“정확히 말하자면 후폭풍을 얻어맞은 거지. 억지력에 의해서 말이야.”
억지력.
그것은 오로지 세 마신에게만 적용되는 법칙이다.
거대한 해양 생물은 지상으로 나올 시 스스로의 체중을 견디지 못하고 죽는다.
코끼리는 자신의 체중을 유지하기 위해 하루의 3분지2 이상을 먹는 데에만 소비한다. 거대한 존재는 그 힘의 크기에 비례한 제약을 가지기 마련이다.
마신 역시 마찬가지였다.
너무나 강대한 힘을 가진 마신은 무언가 행위를 할 때마다 그에 상응하는 저항을 받았다.
그러한 저항을 사람들은 억지력이라고 불렀다.
“움직이기만 해도 억지력에 의한 제약을 받는 존재가 시공간을 뛰어넘은 거야. 우리같이 미력한 존재가 넘어온 거랑은 차원이 달라. 그 반동이 얼마나 클지는 아무도 모르지.”
한서리는 이마를 톡톡 두들겼다.
“하지만 잔류한 기린의 힘으로 느껴지는 게 있어. 현재의 기린은 미래에서 날아온 역풍에 엄청난 타격을 입었어. 나와 맺은 계약을 수행하지 못할 정도로 말이야.”
“그 상태가 얼마나 갈지 짐작할 수 있어?”
“내 감각이 맞다면……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은 이 세계에 개입하지 못할 정도야.”
별개의 세계에서 오는 일종의 거부 반응인지, 지구에서는 마계에서보다 더 큰 억지력이 작용했다.
신의 일부를 담은 화신을 이 세계에 현신시키는 것만 해도 화신이 가진 능력의 몇 배에 달하는 힘을 소모해야 한다.
그런 제약이 있기에 마신들이 충분한 힘을 가졌음에도 이 세상을 쉽게 집어삼키지 못하는 것이다.
김건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언젠가 아내가 했었던 말을 떠올렸다.
“기린은 괜찮을 것 같다고 이야기한 게 그것 때문이었군.”
“정확한 건 아니야. 느낌상으로만 말하는 거라 장담은 못해.”
김건은 휘파람을 불었다.
“그래도 나름 좋은 소식인걸. 세 골칫덩이 중 하나가 빌빌 기는 상태라는 거잖아.”
“마냥 좋은 건 아니야. 기린의 힘이 약화된 결과로 이번에 벨제불이 억지를 부릴 수 있었던 거니까.”
화신을 강림시키기 위해서는 억지력을 최소화하기 위해 수많은 준비 과정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이번 사건에서 벨제불은 아무런 준비 없이 모든 억지력을 스스로 떠안으며 강림했다.
벨제불은 바보가 아니다.
그래도 되니까 한 것이다.
그녀는 이미 기린의 약화를 눈치챘다.
그리고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일부러 무리한 강림을 시행했다.
“세 마신이 유지하던 힘의 균형은 이미 무너졌어. 시간 역행으로 기린은 피폐해져 있고, 벨제불은 무리한 강림과 화신의 소멸에 상당한 타격을 입었으니까.”
“그럼 좋은 거 아니야?”
“상황만 보면 그래. 여기서 티아마트만 어떻게 하면 게이트의 완전 봉쇄가 가능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 덕에…… 우리는 가장 강력한 무기를 잃어버렸어.”
한서리는 김건을 돌아보았다.
“당신의 기술은 더 이상 벨제불에게 통하지 않을 거야. 화신의 능력을 다뤄 본 지금은 확신할 수 있어. 처음이야 몰라서 당했겠지만 두 번은 없어. 애초에 화신에게 쓰기엔 너무 아까운 힘이야.”
그녀는 씁쓸한 미소를 띠었다.
“어떻게든 그걸 본체에 처박았어야 했는데. 노바 선배를 섭외한 의미가 없어졌어.”
“별수 없어. 벨제불이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잖아.”
김건은 그렇게 말하며 가볍게 아내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하지만 한서리의 표정은 여전히 심각했다.
“내 잘못이야. 기린의 이상을 눈치챘다면 다른 마신들이 더 적극적으로 움직일 거라고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는데. 그것 때문에 가장 강력한 패를 잃어버렸어. 베이커 교수님께 당신의 기술까지 알려 줘 버렸고.”
외부에 김건이 가진 기술 이론을 알리는 것, 상황상 어쩔 수 없긴 했지만 그건 썩 좋은 결과가 아니었다.
김건은 혀를 찼다.
“교수님은…… 이번에도 실패하겠지?”
한서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진짜 신이 당신에게 준 축복이야. 기술로 구현이 불가능하다는 건 미래의 교수님이 밝혀냈어. 지금부터 그 연구에 들어갈 비용은 모두 낭비가 될 거야. 게다가…….”
그녀는 말끝을 늘이며 남편의 손을 쥐었다.
“정식으로 공개하진 않겠지만 이 결과를 안 이상 수많은 놈들이 당신을 뜯어먹으려 달려들 거야. 당신을 폭탄으로 써서 마신을 쓰러트리자는 놈들도 나오겠지.”
그건 당연한 추측이었다.
인류의 위기라는 대의 앞에 개인의 권리는 존중되지 않는다.
한서리는 이를 깨물었다.
“하지만 괜찮아. 당신 덕에 내가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었으니까. 그 누구도 당신을 희생양으로 삼지 못해.”
한서리는 마주잡은 남편의 감촉을 느꼈다.
그토록 강건하던 손이 아직도 부작용으로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김건의 손을 꽉 쥐었다.
결의에 찬 파란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더 이상 무른 판단을 내리지 않을 거야.”
이이를 건드리는 자가 있다면 그 누구라도 없애 버리고 말 것이다. 한서리는 그렇게 다짐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 모든 사태를 만들어 냈을 것으로 예상되는 한 단체의 이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