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 43화
“마신의 빙의체가 될 자식을 낳다니. 프레이저의 이름도 땅에 떨어졌군.”
반듯한 정장.
셔츠의 단추를 답답할 정도로 끝까지 채운 중년 남자가 있다.
“이쪽에서는 고마운 일이 됐다. 과거의 판단을 수정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한씨 가문의 가장, 한유성은 그렇게 말하며 타이를 매만졌다.
사이먼 베이커를 위시한 발할라 이사진의 결정에 따라, 한서리를 포함한 화신전 생존자 세 명은 보호 조치 겸 안전장치로 여론이 잠잠해질 때까지 근신을 명 받았다.
당분간이겠지만 발할라를 벗어날 수 없는 몸이 된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한 그룹을 이끄는 회장인 한유성이 이곳에까지 나타나진 않았으리라.
한씨 가족은 모두 발할라 타워에 있는 한서리의 방에 모여 있었다.
자리의 중심이 된 것은 한서리와 한유성이었다.
두 부녀가 마주 보고 있고, 그들의 곁에 한서리의 어머니인 안서은, 그리고 언니인 한서연이 앉아 있었다.
김건은 조금 떨어져 앉아 어찌 보면 처가라고도 할 수 있는 가족들을 바라보았다.
한유성은 묵직한 목소리를 갖고 있었다.
“발키리가 된 건 잘한 일이다. 발키리는 발할라의 간부로 이어지는 좋은 자리지. 네가 발할라의 중심에 서게 된다면 우리 집안에 아주 큰 힘이 될 거다.”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위엄이 있다.
누구라도 그 앞에 서면 주눅이 들 것만 같은 기세를 지닌 남자다.
저런 사람이 전위가 되었다면 꽤 재미있는 전사가 되었을 것이다.
김건은 속으로 휘파람을 불었다. 하지만 그의 아내는 생각이 다른 것 같았다.
한서리는 지겨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김건 씨와의 교제는 허락해 주시는 건가요?”
던지듯이 내뱉은 말.
그 말에 한서연이 작게 혀를 찼다.
그걸 말이라고 하나 이 계집애는.
화신전에서 살아남은 덕에 겨우 아버지의 분노를 잠재웠는데 또다시 바보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
한편, 묵묵히 한서리를 바라보던 한유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하마. 약혼도 깨졌으니 다른 짝을 찾아보는 것도 좋겠지.”
“……??”
한서연은 입에서 튀어나오는 소리를 겨우 막고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아버지와 동생을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한서리는 가늘어진 눈으로 안서은을 쳐다보았다.
안서은은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한서리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저 주책맞은 어머니한테 힌트를 준 것이 잘못이다.
이미 한씨 가문은 화신을 쓰러트린 것이 남편일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 의도한 것이긴 하지만 벨제불의 등장 때문에 계산이 틀어졌다.
한서리는 속으로 혀를 찼다.
하지만 마냥 주지만은 않는다. 받아 낼 것은 받아 내야겠다.
“그럼 그 겸에 막혔던 카드랑 그룹 내 정보망 제한도 좀 풀어 줬으면 좋겠는데요.”
전에 안서은이 다녀간 이후, 그녀의 외도가 그룹 내에 알려지면서 그녀에게는 수많은 제약이 주어졌다.
그녀의 이름이 적힌 블랙 카드가 정지되었고, 한씨 일가의 특권으로 이용할 수 있었던 정보망도 쓸 수 없게 되었다.
사실상 재벌 2세라는 특권을 모두 상실한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제왕학과 업무에 대해 배우며 사업가형 영웅으로 키워졌던 한서리에게 그것은 상당히 큰 타격이었다.
개인적으로 쌓아둔 자금이 있었기에 표면화되지 않았을 뿐, 사실 그 손해는 막심한 것이었다.
집안에게 손을 벌린다니, 꽤 빈정 상하는 일이긴 하지만 감정보다는 실리가 중요하다.
한씨 가문의 힘은 그녀에게 필요한 장기말이었다.
발할라 간부 후보로 유력해졌으며 화신까지 물리쳤을지도 모르는 전사를 쥐고 있는 사람의 말이다.
한유성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네게 건 기대가 크니 그 정도는 당연한 지원이지. 필요하다면 말해라. 아직 나이도 어리고 사업상 실적이 없어 임원직을 바로 줄 수는 없으나 그 전에 달고 있을 만한 자리정도는 마련해 주마.”
“아니, 아버지. 도대체 왜…… “
지금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한서연이 입을 열었으나 그녀가 말을 맺기 전에 한유성의 눈이 그녀를 향했다.
실망이 담긴 듯한 차가운 눈빛.
거기에는 ‘내가 아무런 생각도 없이 이런 행동을 하는 것 같으냐?’ 라는 질책이 담겨 있었다.
한서연은 입을 다물고 눈치만 살필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저렇게까지 하는 것은 동생이 그만한 가치를 증명해 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것이 뭔지 그녀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저까짓 남자가 뭐라고.
그저 그렇게 생각하며 한서리와 김건을 번갈아 볼 뿐이다.
오랜만에 이루어진 가족 모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시계를 본 한유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가 진 것이 한창인데, 아무래도 지구 반대편에라도 용무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별다른 인사도 없이 곧바로 자리를 떴다.
안서은과 한서연 역시 그 뒤를 따랐다.
한서연은 묻고 싶은 게 많은 얼굴로 자리를 서성였으나 아버지의 일정을 방해할 수는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그 뒤를 따랐다.
한서리는 그들이 방을 나가자마자 인상을 팍팍 쓰며 탁자 위에 놓인 찻잔을 치웠다.
그들이 마시다 남긴 차를 쓰레기 버리듯이 싱크대에 쏟아붓고선, 빠른 걸음으로 돌아와 멀뚱히 앉아 있는 김건의 앞에 섰다.
잔뜩 성이 난 얼굴로 그의 허벅지 위에 엉덩이를 올리더니, 아무 말도 없이 아기 판다마냥 김건을 끌어안고 매달렸다.
여름철 매미가 들러붙은 나무줄기가 된 기분이었다.
김건이 말했다.
“더 이상 무른 판단은 하지 않겠다더니.”
“그건 대국적인 국면에서의 이야기지. 개인 생활에서의 이야기가 아니야.”
김건은 쯔쯔 혀를 차며 아내의 등을 슬슬 쓸어 주었다.
“확실히 가족들이 차갑긴 하네. 죽다 살아 돌아온 딸을 대하는 것 같지는 않아.”
“차가워? 저것들은 차갑다는 말조차 아까운 인간들이야.”
한서리는 진저리를 치면서 김건의 어깨에 턱을 묻었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전화벨이 울렸다.
한서리는 짜증스러운 기색으로 휴대기를 들었다. 발신인을 보곤 조금 당혹스러운 표정이 된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서리? 서리야? 몸은 좀 괜찮아?
가까이 붙어 있었던 덕에 통화 소리가 다 들렸다. 김건은 전화를 건 것이 메리안이라는 걸 알았다.
훈련 주기 이후로는 계속 김건을 통해서만 연락을 나눴는데, 그가 모르는 새에 한서리와 연락처를 교환한 모양이었다.
네드와 메리안 커플은 재능은 있는 편이었지만 출세욕이 없고 상급반치고는 성적도 낮아 토너먼트에 참가하지 않았다.
김건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 덕에 두 사람이 화를 면할 수 있었으니까.
한서리는 조금 당혹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 어, 괜찮아.”
-다행, 다행이다…… 흐윽…….
수화기 너머로 울음소리가 들렸다. 한서리는 당황해서 수화기를 손으로 감싸며 김건의 품에서 떨어졌다.
그녀는 멀찍이 떨어져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메리안과 한참이나 통화를 나누었다.
그 목소리는 김건에게 잘 들리지 않았지만, 무슨 내용으로 이야기를 나누는지는 짐작이 됐다.
한서리가 계속해서 고개를 끄덕이며 괜찮다는 소리밖에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통화를 마치고 돌아온 한서리는 피곤한 표정으로 휴대기를 소파 위에 던졌다. 하지만 기분이 나빠 보이진 않았다.
김건은 부드러운 미소를 띠었다.
“연락처는 언제 알려 준 거야? 공적인 일을 제외한 통화는 싫어한다고 하지 않았어?”
“그간 요리를 가르쳐 준 대가로 알려 준 거야. 받은 게 있으면 그만큼 주는 것도 있어야 하니까.”
새침하게 말하지만 부끄러운 듯 얼굴이 조금 붉었다. 김건은 웃으면서 아내의 머리칼을 쓸어 주었다.
그 손의 떨림을 알아챈 한서리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약은 다 챙겨 먹었어? 후유증을 가라앉히려면 하루에 다섯 번씩 복용해야 한다고 했잖아.”
“다 먹었어.”
“발작은 없었지?”
“응.”
한서리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남편을 바라보았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지만, 그녀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녀는 전쟁에 익숙했고 아군의 병과 부상도 많이 접했다.
그리고 그녀가 보기에, 김건의 상태는 꽤 심각했다.
신경계에 무리가 가서 간헐적으로 발작을 일으키는 데다 반마력 폭발의 중심지에 있었던 탓에 아직도 마력을 생성해 내지 못하고 있다.
사이먼 베이커가 천문학적인 돈과 인력을 들여 전폭적인 지원을 해 주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불안한 건 마찬가지다.
그녀는 남편의 손을 꼭 쥐었다.
그와 동시에, 벨이 울렸다.
이번에는 현관에서 울려 퍼지는 알림이었다.
“이번엔 또 뭐야?”
짜증이 난 한서리가 성큼성큼 현관으로 향했다.
문밖을 비춰 주는 모니터를 확인하자, 금색 단발의 소녀가 보였다.
“여어~!”
인기척을 느낀 모양이다. 세라스는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한서리는 인상을 쓰며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뭐야? 네가 여기에 왜 왔어?”
“왜, 우리 친구잖아! 친구 집에 놀러 오는 것도 안 돼?”
“친구는 무슨, 난 널 친구로 삼은 적 없어.”
“그럼 동료로 하지 뭐.”
한서리는 질색하는 표정이 되었다.
“질척거리지 말고 돌아가. 어쩌다 같은 파티가 되긴 했지만 나는 딱히 너랑 친하게 지내고 싶은 생각은 없…….”
“술 한잔하고 싶어서 그래. 너희 말고는 터놓고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
큭.
한서리는 들리지 않게 이를 깨물었다.
바로 거절했어야 했는데, 순간적으로 마음이 흔들렸다.
가족이 돌아간 직후의 그녀였다면 망설이지 않고 ‘싫어.’ 라고 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메리안과의 대화가, 남편과 나눈 온기가 무언가를 바꿨다.
한서리는 한숨을 쉬며 문을 열었다.
세라스는 양손을 들며 환호성을 질렀다.
“와우, 고마워! 역시 우리는 생사를 함께한 동료야!”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빨리 들어와.”
오기 전에 한잔했는지 세라스의 얼굴은 불그스름했다. 흐흐흐 웃으며 걸어 들어온 그녀는 소파에 앉더니 쾅- 하고 커다란 술병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반쯤 비어 있는 술병의 라벨을 확인한 한서리가 혀를 내둘렀다.
“이거 꽤 비싼 건데. 어디서 났어?”
호기심을 느낀 김건이 물었다.
“비싸다고? 얼만데?”
“글쎄, 요즘 시세는 잘 모르겠지만 2천만 원은 넘을 거야.”
“……!”
김건은 혼절할 듯한 표정을 지었다.
세라스는 킥킥 웃었다.
“아빠 컬렉션에서 훔쳐 왔지. 너희들도 마셔 봐. 맛있더라.”
한서리가 주방에서 얼음과 컵을 가져왔다.
그녀는 익숙한 솜씨로 투명한 글라스에 얼음을 몇 개 넣고 주황색 술을 따라 잔을 만들었다.
술잔을 건네받은 세라스가 물었다.
“방금 보니 너희 부모님이 왔다 간 거 같은데. 무슨 이야기했어?”
한서리는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불쾌함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쓸데없는 소리.”
단지 그 말뿐이었지만 세라스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피차 마찬가지구나.”
단번에 잔을 비운 세라스는 곧장 잔을 채우며 말했다.
“제 자식이 죽었는데도 아무렇지도 않더라. 오히려 녀석이 화신이었던 탓에 약혼도 깨지고 집안의 명예에 금이 갔다고 분해하더라고.”
“…….”
“엄마는 조금 슬퍼하는 것 같긴 했는데…… 티는 안냈고. 하긴, 엄마는 원래 제이미를 싫어했으니까. 그 자식, 제 아빠랑 똑 닮아서는.”
순식간에 또 잔이 비었다.
한서리와 김건은 말이 없었다.
저런 종류의 고민을 가진 사람에게는 무슨 말을 해도 사족밖에 되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세라스의 손이 술병으로 향했다.
그 끝이 닿기 전에, 한서리가 술병을 들어 올렸다.
그녀는 말없이 세라스의 잔에 술을 채워 주었다.
세라스는 히죽거리며 꽉 찬 잔을 들어 올렸다.
“그럼 우리 파티의 앞날을 기원하며, 건배!”
“쓸데없는 짓 말고 술이나 마셔.”
세 사람은 그렇게 처음으로 술자리를 가졌다.
흥이 오른 세라스가 배달로 술과 안주를 주문했다.
그녀는 미친 듯이 술을 들이켜다가 곯아떨어졌다.
한서리 역시 그동안 쌓인 것이 많았는지 끊임없이 잔을 비웠다.
그리고 김건은,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야! 김건! 이 개새꺄! 네가 내 남편이지, 내 고기 방패야? 뭐만 나면 혼자 뒤지질 못해서 안달이야. 그냥 같이 뒈지자고! 엉?”
“우웨에에엑!”
취해서 칭얼거리는 아내를 몇 시간이나 달래서 재웠다.
그 와중에 세라스가 게워 낸 토사물을 치우고, 엉망이 된 주정뱅이의 뒷바라지를 한다.
모든 일을 마친 뒤 그는 생각했다.
다시는 이 여자들이랑 같이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