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 44화
길고도 길었던 근신 기간이 끝났다.
하나 아직 김건의 상태가 회복되지 않았기 때문에 바로 발할라에 복귀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한서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여행을 가자. 전에 가고 싶다고 했잖아.”
김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리고 다음 날, 그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건 좀 아닌 것 같은데.”
그런 그의 앞에는 빌린 요트를 뒤로하고 의기양양한 표정을 하고 있는 한서리가 있었다.
요트뿐만이 아니다.
간단한 잡무를 도맡아 할 골렘을 위시한 크루 수십 명이 나란히 서 있었다.
각각 요리사, 마사지사, 음악가, 가수부터 시작해서 빨래하는 사람, 씻겨 주는 사람, 심지어는 귀 파주는 사람까지 있다.
수십 명을 앞에 두고 왕처럼 서 있는 한서리와 김건을 보고 항구의 사람들이 흘끔흘끔 시선을 보냈다.
김건은 금방이라도 체할 것만 같은 표정을 지었다.
“좀 급수를 낮추는 게 좋겠어.”
한서리는 불만스럽게 말했다.
“왜? 또 언제 갈지 모르는 여행인데 조금 호화롭게 즐겨도 되잖아?”
“너무 부담스러워.”
“부담가지지 마. 숨 쉬는 것처럼 당연한 거라고 생각해.”
“그게 안 되니까 문제지. 갑자기 허들이 너무 높아. 체할 것 같다고.”
한서리는 혀를 찼다.
그의 남편은 너무 검소한 게 문제였다. 그 옛날 수행을 하던 사제마냥 청렴결백하기 그지없다.
“그럼 어떤 걸 원하는데?”
“그냥 평범하게. 다른 동네 가서 평범하게 관광지 좀 보고, 그 동네 식당에서 밥도 먹고, 사람들이랑 이야기도 하고. 평범하게 가자고.”
“흠, 좋아.”
한서리는 그 의견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여행을 시작했다.
여행의 계획, 그리고 비용은 모두 한서리가 부담했다. 두 사람에게는 돈보다 시간이 중요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이동은 게이트를 이용한 순간이동으로 했다.
한 달 계획의 세계 여행.
두 사람은 아시아부터 시작해, 대륙과 대륙을 넘나들며 최대한 많은 곳에서 관광을 즐겼다.
하지만 그들의 평범한 여행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보름이 지났을 때였다.
화창한 날씨. 유럽의 한 마을의 식당에 자리 잡은 한서리와 김건은 바깥에 마련된 테라스에서 길가를 구경하며 식사를 하고 있었다.
“…….”
김건은 아주 신중한 손놀림으로 나이프로 하얀 크림을 떴다.
듬뿍 덜어 낸 크림을 넉넉히 빵에 바른 뒤, 장인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입에 가져갔다.
하지만 그 같은 고수가 아무리 집중력을 발휘해도, 피폐해진 신경계가 일으키는 갑작스러운 발작에는 어쩔 수 없었다.
빵을 쥔 손이 펄떡 뛰었다.
조준이 흐트러지며 빵위에 얹어진 크림이 입가부터 볼을 가로지르며 길게 흔적을 남겼다.
“……!”
그는 얼른 그것을 훔치려 했지만, 먹잇감을 포착한 매의 눈은 그 실책을 놓치지 않았다.
맞은편에 앉은 한서리가 말했다.
“이미 봤거든?”
“크윽…….”
김건은 이를 악물었다.
그는 슬픈 얼굴로 손에 든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그런 모습이 너무나 즐거운 듯, 한서리는 히죽히죽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김건의 옆에 앉았다.
하얀 섬섬옥수를 들어 나긋나긋한 손가락으로 남편의 볼에 묻은 크림을 닦아 낸다.
쿡쿡 웃으며 그것을 핥고는, 김건이 내려놓은 나이프를 들어 능숙한 손놀림으로 빵에 크림을 바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싫어? 아내가 시중을 들어 주는 게.”
“말했잖아, 나는…….”
“보호받는 역할이 아니라 보호하는 역할이라는 거잖아. 벌써 백 번은 넘게 들었어.”
“…….”
김건은 보기 드물게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 귀여워.
지금껏 경험해 보지 못한 남편의 모습에 한서리는 희열을 느꼈다.
그 속내를 대놓고 드러내면 남편은 아마 기겁을 할 것이다.
그녀는 치켜 올라가는 입꼬리를 최대한 눌러 참으며 빵을 김건의 입가에 가져갔다.
“자, 아앙~.”
식사를 하는 동안 한 번이라도 실수를 하면 그 다음부터는 곱게 시중을 받겠다고 약속을 했었다.
김건은 곱게 한서리가 건넨 빵을 베어 물었다.
한서리는 행복해 죽겠다는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보며 남편의 이빨 자국이 남은 빵 조각에 크림을 덧칠해 입에 넣었다.
그렇게 부부는 나란히 앉은 채 음식을 나눠 먹었다.
흘끔, 흘끔, 사람들의 시선이 꽂힌다.
얼굴이 붉어지지는 않았지만 표정이 굳어 가는 게 보인다.
한서리는 남편이 지금 상황을 부끄러워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녀는 팔을 뻗어 식탁에 올려진 채 고장 난 기계처럼 떨리고 있는 김건의 손을 붙잡았다.
“그렇게 부끄러워하지 마. 나를 지키다가 이렇게 된 거잖아. 당신이 대우를 받는 건 당연한 거야.”
“음…….”
“이 정도도 못해 주면 내가 너무 미안해지잖아. 그러니까 가슴 펴고, 당당히 당신의 권리를 받아들여.”
부드러운 목소리로 살살 달래자 표정이 풀어졌다.
그것을 본 한서리는 기쁜 마음으로 수저를 들어 수프를 남편의 입에 흘려 넣어주었다.
방금 한 말이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다.
김건은 보다 편안한 분위기에서 식사를 즐기는 것 같았다.
“옳지, 예뻐라.”
그것이 너무 기뻐서 한서리는 참지 못하고 남편의 볼에 키스를 했다.
가볍게 얼굴을 붉히는 김건. 한서리는 그 모습을 보고 까르륵 웃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식사가 마무리되어 갈 즈음, 여유를 되찾은 김건이 아까부터 신경 쓰이던 것을 말했다.
“저거, 저렇게 내버려 둬도 돼? 어제도 그렇고 계속 쫒아오려는 것 같은데.”
테라스 아래쪽을 눈짓했다. 그곳에는 모자를 눌러쓴 채 혼자 포크를 놀리고 있는 세라스가 있었다.
한서리는 얼음장처럼 말했다.
“내버려 둬. 우리가 부른 것도 아닌데.”
그러면서 ‘쟤는 왜 자꾸 달라붙는 거야?’ 라고 투덜거린다.
“이야기 정도는 해 보는 게 좋을 거 같은데. 아무 생각 없이 따라왔을 거 같지는 않아.”
장난기가 있고 붙임성이 좋아 쉽게 달라붙는 것처럼 보이지만, 김건이 아는 세라스는 아무 이유 없이 남의 개인사에 끼어들 위인이 아니었다.
한서리는 한숨을 쉬었다. 그러곤 테라스 아래쪽을 향해 손을 휘저었다.
감각이 예민한 전위답게 세라스는 금방 한서리의 손짓을 눈치채고 테라스로 올라왔다.
미행이 들킨 게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우물쭈물 인사를 했다.
“어, 우, 우연이네~. 여, 여행은 어때? 잘 지내고 있지?”
한서리는 불퉁한 얼굴로 세라스를 바라보았다.
“시치미 떼지 말고. 왜 따라왔어?”
세라스는 조금 망설이다가 말했다.
“……교수님께 부탁을 받았어.”
“베이커 교수님?”
“응. 아직 김건의 몸이 다 낫지 않았으니까. 원래 내가 맡아야 할 역할을 해 주시길 바란 거지.”
그녀는 양손을 들어 보이며 사과했다.
“두 사람의 여행을 방해할 생각은 없었어. 미안해. 난 그냥 보디가드일 뿐이니까. 신경 쓰지 말고 하던 대로 하면 돼.”
한서리는 앓는 소리를 내며 이마를 감쌌다.
사이먼 베이커는 이제부터 그들의 뒷배가 되어 줄 사람이었다. 그의 호의를 저버리는 건 그리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남편과 함께하는 둘만의 여행을 방해받은 건 불쾌했지만 한서리는 좋게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호위는 있는 게 낫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서라도 보험 하나쯤은 들어 둬서 나쁠 게 없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되뇌며 고개를 들어 올리는데, 식탁 위에 놓인 감자튀김을 손으로 주워 먹는 세라스가 보였다.
“……뭐 해?”
“아, 미안. 먹던 걸 남기고 온 거라. 배가 고파서 그만.”
정말 가지가지 하는구나.
한서리는 한숨과 같이 말했다.
“……그냥 앉아서 같이 먹어. 바보같이 그러고 있지 말고.”
세 사람은 그렇게 같이 식사를 했다.
후식으로는 다과가 나왔다. 한서리는 뜨거운 찻잔을 들어 올리며 세라스에게 선언했다.
“따라오는 건 좋아. 대신 너무 가까이 오지는 마. 행선지는 미리 알려 줄 테니까, 되도록 보이지 않는 곳에서 따라와.”
세라스는 불만스럽게 입술을 삐죽였다.
“그래가지고 호위를 어떻게 해? 중간에 너희들의 위치를 놓칠 수도 있잖아.”
“휴대기 줘 봐.”
세라스의 휴대기를 건네받은 한서리는 자신의 휴대기로부터 한 앱을 세라스의 휴대기에 넣어 주었다.
보안 코드를 입력해 앱을 설치한 한서리는 그것을 돌려주며 말했다.
“우리 집안 보디가드들이 사용하는 호위용 앱이야. 설정은 다 해 놨으니까 그냥 쓰기만 하면 돼.”
휴대기를 돌려받은 세라스가 앱을 실행시키자 내비게이션이 표시되었다. 그 안에 호위 대상으로 등록된 한서리와 김건의 위치가 보였다.
“이거면 됐지?”
“……그래.”
“하여튼, 여행이 끝날 때까지는 내 눈에 띄지 마. 네가 할 수 있는 최대한.”
그리고 한서리는 손짓했다. 꺼지라는 신호였다.
세라스는 입술을 삐죽이더니 뜨거운 차를 단번에 들이켜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난 아이처럼 쿵쿵거리며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던 김건이 말했다.
“좀 잘해 줘. 본인이 원해서 온 것도 아니고, 이제부터 같이 할 동료인데.”
“동료건 뭐건, 지금은 우리 둘의 추억을 망가트리는 방해꾼일 뿐이야.”
차가운 아내의 말에 김건은 쓴웃음을 지으며 빨대로 음료수를 빨아 마셨다.
그러다가 입에 머금었던 액체를 토해 냈다.
쿨럭쿨럭 격렬하게 기침을 한다. 깜짝 놀란 한서리가 그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괜찮아?”
등을 두들기며 물어보지만 딱히 괜찮아 보이진 않는다.
김건은 기침을 계속했고 한서리는 하얗게 질려서는 남편을 이끌고 식당을 빠져나왔다.
그녀는 김건과 함께 가게 밖에 주차해 두었던 대여 차량에 올라탔다. 거칠게 문을 닫으며 운전석에 앉아 있는 골렘에게 지시했다.
“출발해.”
시동이 걸렸다. 주차되어 있던 차량이 길가를 벗어나 도로로 빠져나갔다.
한서리는 손수건을 들어 음료수로 범벅이 된 김건의 입가를 닦아주었다.
“내가 할게.”
언제 아파했냐는 듯, 멀쩡히 돌아온 김건은 아무렇지도 않게 손수건을 건네받아 입을 문질렀다.
냉정한 전사의 눈이 창문 밖을 훑었다.
“방금 봤어?”
한서리는 고개를 저었다.
“눈으로는 못 봤어. 하지만 기척은 느꼈어.”
김건은 차량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건물들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맞은편 건물에 있었어. 3층. 왼쪽 외벽 기준으로 두 번째 창문에.”
“얼굴은?”
“후드 같은 걸 뒤집어쓰고 있어서 제대로는 못 봤어.”
“…….”
“누구지? 벌써부터 베이커 교수님이 외부에 정보를 흘렸을 것 같지는 않은데.”
그때였다. 김건이 팔을 뻗어 한서리를 밀어내며 허리를 젖혔다.
퍽!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이 창문을 뚫고 김건의 얼굴 앞으로 튀어나왔다.
몸체가 전부 금속으로 이루어진 화살.
하지만 상해를 가할 목적으로 날아온 것은 아니었다. 살기도 없었고, 화살의 끝에는 날카로운 촉 대신 질긴 종이가 돌돌 말려 있었다.
“이건 뭐야? 무슨 중세 시대도 아니고.”
김건은 투덜거리며 창문으로부터 뽑아낸 화살을 아내에게 건넸다.
마력을 다룰 수 없는 김건 대신 한서리가 화살에 걸려 있을지도 모르는 함정, 혹은 저주를 탐지했다.
아무런 위험 요소가 없다는 걸 확인한 후 끄트머리에 말려 있는 종이를 풀어낸 김건이 의아한 목소리를 냈다.
“이게, 어느 나라 문자야?”
그 안에는 읽을 수 없는 문자가 나열되어 있었다.
그것은 현재 인류가 사용하고 있는 공용어도, 과거에 있었던 다른 국가의 문자도 아니었다. 김건이 알고 있는 지구상의 그 어떤 문자도 이것과 일치하지 않는다.
한서리는 그 문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종이에 적힌 문자 하나를 뇌리에 새기듯이 집중해서 읽고 있자니 어느 순간, 종이는 파란 불꽃에 휩싸여 사라져 버렸다.
김건이 중얼거렸다.
“보안장치까지 걸어 놨군. 장난치는 건 아닌가 본데.”
한서리의 입에서 흠, 하는 콧소리가 나왔다. 그녀는 한참이나 생각을 거듭하더니 갑자기 말했다.
“……미리 말해 둘게. 당분간, 나는 당신을 속일 거야. 그러니 알고만 있어.”
장난기 넘치는 눈동자가 김건을 향해 웃음을 지었다.
“당신, 연기에는 영 재능이 없으니까.”
그 영악해 보이는 얼굴 안쪽에 무슨 생각이 들어 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김건은 피식 웃었다.
“알았어. 하지만 위험해지면 바로…… “
“당연히 말할 거야.”
한서리는 그렇게 말하며 남편의 손등 위에 스스로의 손을 포갰다.
“당신은 내 최후의 보루야. 당신이 무너지지 않는 이상, 나는 무너지지 않아. 그러니 걱정하지 마.”
미소를 지으며 남편을 안심시킨 그녀는 고개를 앞으로 향했다. 김건은 그런 아내를 바라보았다.
무서울 정도로 가라앉은 파란 눈과 얼음덩이처럼 굳어 있는 옆얼굴이 보였다.
등줄기가 오싹오싹했다.
그의 앞에서 한서리를 위협하고 살아남은 자가 존재하지 않듯이, 저런 표정이 된 한서리를 적으로 두고 멀쩡히 돌아간 자는 없었다.
그게 누군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 누군가는 곧 무시무시한 것을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