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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47화 (47/200)

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 47화

황금색과 은빛의 조화. 머리칼을 휘날리는 이색의 여자는 이 세상의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진짜 화신이 있었군. 기린의 화신이라니, 벨제불 님이 당할 만도 해.”

한탄하는 아스타로트의 눈에 차갑게 굳은 한서리의 얼굴이 비쳤다.

그녀의 품에는 기절한 세라스가 안겨 있었다. 전신 외상에 마기에 중독되어 숨이 옅어져 가고 있었다.

마지막에 한서리가 끼어들지 않았으면 그대로 죽었을 것이다.

‘그렇게 될 때까지 기다린 거긴 하지만.’

한서리는 조심스럽게 세라스를 바닥에 눕혔다.

황금빛이 일렁이는 손을 대자 검게 몸을 좀먹던 마기가 씻은 듯이 사라지고, 피부에 얇게 낀 얼음이 상처 부위를 막았다.

몸을 일으킨 한서리가 아스타로트를 마주했다.

마인의 특징인 흑주안을 발견한 그녀의 입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왜 마인협회가 김건을 노리지?”

암살이라면 이해할 수 있다. 지금까지 외부에 누출된 정보만 해도 김건은 마인협회에서 충분히 경계해야 할 대상이었으니까. 그것에 대해서는 충분히 대비도 해 놨다.

하지만 납치를 시도하는 건 이야기가 달랐다.

아스타로트는 미소를 지었다.

“나도 몰라. 그저 시킨 대로 일만 하는 졸개일 뿐이거든.”

“거짓말하지 마. 너한테는 벨제불의 냄새가 진하게 나. 분명히 간부거나, 높은 자리에 있는 놈일 테지.”

한서리의 눈이 번뜩였다.

“벨제불이 지시라도 내렸나? 김건을 데려오라고.”

아스타로트는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그러는 너야말로 뭔가 이상한데. 신격치고는 꽤 반응이 인간적이잖아. 위압감도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약하고. 너, 진짜 화신이 맞아?”

“질문은 내가 해. 넌 답하기만 하면 돼.”

“싫은걸.”

아스타로트의 신형이 흔들렸다. 그의 손에서 뻗어 나온 검은 오라가 빛살 같은 속도로 한서리의 목을 노렸다.

어지간한 사람은 반응조차 하지 못했을 테지만 한서리는 달랐다.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생성한 얼음으로 아스타로트의 공격을 막았다.

반응 속도, 고제련 오라를 막아 내는 마법의 얼음.

괜히 영웅이 후위와 전위로 나뉘는 게 아니다.

후위의 마법으로는 이렇게 빠른 대응이 거의 불가능하다. 역시 화신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의 능력이지만, 아스타로트의 머리는 다른 쪽으로 굴러가고 있었다.

‘이건, 제대로 된 화신이 아니야.’

공격을 막아 낼 때 보인 한서리의 호흡 변화와 심장 박동으로 확신했다.

애초에 화신은 육체의 한계를 초월해 대부분의 물리 공격에 면역이다.

공격을 막았다는 것은 그게 그만큼 위협적이었다는 소리다.

‘이거, 해볼 만하겠는데?’

화신 같지만 화신은 아닌 존재.

그 정체는 잘 모르겠지만 기린의 힘을 쓰고 있으니 죽여 버리면 마인인 그로서는 무조건 이득이다.

아스타로트의 눈빛이 바뀌었다.

그의 앞에 모인 부정형의 덩어리가 악마처럼 이빨을 벌렸다.

그 무엇도 아니기에 그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아스타로트는 그가 갈고닦은 기술에 무형기(無形技)라는 이름을 붙였다.

무형기가 울부짖었다.

아스타로트의 의지에 호응해 살인에 최적화된 형태로 몸을 변화시켰다.

그리고 그것은 곧 수십 갈래의 촉수로 이루어진 검은색 괴물이 되었다.

아스타로트가 괴물을 해방했다.

구불구불 꿈틀거리는 괴수가 바닥을 기고 허공을 난다.

그 모습은 마치 내장이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그로테스크했다.

엉겨 있는 실장어처럼 요동치는 촉수의 표면에서 강철보다 단단한 가시가 돋아나고, 그 끝에는 마기라 불리는 치명적인 독까지 발라졌다.

끼에에에엑-!!

칼과 방패, 아니 탱크와 전투기가 있더라도 이것 앞에서는 장난감처럼 보일 것이다.

보는 사람의 전의를 상실하게 만드는 끔찍한 괴이가 한서리를 덮쳤다.

하아.

한서리가 한숨을 토했다.

그것은 눈앞의 괴물에 실망해서도, 아스타로트를 동정해서도 나온 것도 아니었다.

적에게 우습게 보인 스스로가 한심해서 나온 한숨이다.

“싫어도 말하게 될 거야.”

정기가 끓어올랐다. 한서리의 가슴 앞에서 하얀 얼음 결정이 반짝였다.

“죽은 뇌에서 정보를 꺼내는 술식 정도는 알고 있으니까.”

백색이 부풀었다.

아스타로트의 눈앞을 흰색이 가득 채웠다.

괴성을 지르는 검은 괴수의 목덜미를 하얀 손이 낚아챘다.

두터운 근육이 가시를 튕겨 낸다.

아스타로트의 무형기를 막아 낸 것은 거대한 아이스 골렘이었다.

키는 5미터쯤 될까, 아까 세라스가 뿜어낸 대검에 비해서는 작지만 인체 구조를 무시하는 비율이 그 점을 잊게 만들었다.

키가 5미터인데 어깨 넓이가 3미터는 되어 보인다.

다리는 뭉툭하지만 팔은 땅에 닿을 정도로 길다. 정사각형에 가까운 비율. 공간이 좁다는 착각이 일 정도로 비대한 어깨와 두꺼운 몸통이 보는 사람의 숨통을 막히게 한다.

우오오오오오-!!

골렘은 그 장벽과도 같은 몸집으로 아스타로트의 공격을 막았다. 온몸으로 공격을 버텨 내며 뱀처럼 꿈틀거리는 무형기를 집어던졌다.

공격에 실패한 아스타로트가 날아가는 오라를 회수했다.

“흠, 그렇게 나온단 말이지.”

꽤 거창한 물건을 불러냈지만 별로 위협적이진 않았다. 아무리 덩치가 커다래도 360도 전방위를 막을 수는 없으니까.

그 어떤 상황에도 대처할 수 있는 것이 무형기의 진짜 능력이었다.

“오오오오!”

아이스골렘이 괴성을 지르며 발을 박찼다.

아스타로트는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공격하려고? 그런 둔해터진 몸뚱아리로…… “

그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왜냐 하면 이미 트럭만한 주먹이 코앞에 닥쳐 있었기 때문이다.

“……!”

아스타로트는 가까스로 그 공격을 피했다.

골렘의 고개가 회전한다. 골렘은 순식간에 허리를 틀어 옆으로 빠져나가는 아스타로트를 후려쳤다.

검은빛이 번뜩이며 주먹이 세로로 갈라져 나뉘었다.

시리리리릿!

단분자 칼날이 공기를 자르며 묘한 소리를 냈다.

무형기는 검의 형태가 되어 있었다. 무려 2미터에 육박하는 절대 절단의 칼날이 마인의 손에서 춤췄다.

촤자자작!

사지가 잘려 나간 골렘이 뒤로 나가떨어졌다.

그러다 그 와중에 다시 자라난 팔다리로 지면을 걷어차며 돌격해 왔다.

거체가 바람을 가를 때마다 폭발 같은 소리가 터져 나왔다.

상상을 초월하는 스피드와 파워. 그리고 재생 능력.

S급이니 초월자니, 인간 따위는 견줄 대상조차 되지 않는다.

비교를 한다면 몬스터, 그것도 화신의 바로 아래인 앱실론급에 달하는 괴물이었다.

“아니, 왜 이렇게 세!”

당황한 아스타로트가 소리쳤다. 그는 그 와중에도 최대한 제어력을 올려 무형기를 짜냈다.

둥글게 퍼진 오라.

그것에 강도 대신 탄성을 부여.

그것으로 골렘의 주먹을 막아 내며 끊어질 듯이 늘어난 오라의 탄성이 돌아가는 순간에 힘의 방향을 가볍게 틀었다.

제 힘을 그대로 돌려받은 골렘이 옆으로 날아간다.

공간이 뚫렸다. 아스타로트는 그 너머에 있는 한서리를 향해 일직선으로 달려 들어갔다.

아무리 소환물이 강력해도 그것을 조종하는 술자를 죽이면 그만이다.

하지만 그것은 함정이었다.

한서리의 한계를 간파한 그의 눈썰미는 정확했다.

그의 실수는 단 하나. 회귀를 거치며 쌓아 온 한서리의 전투 경험까지 예측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가까이 가는 순간, 발밑에서 솟구쳐 오른 얼음이 발을 잡아챘다. 순간적으로 몸이 정지. 그와 동시에 도망갈 구멍도 없이 주변 공간이 모두 기이하게 휘었다.

“이런 제길.”

오판을 깨달은 아스타로트가 쓴웃음을 지었다.

콰콰콰쾅!!

몇 개나 중첩된 공간 왜곡의 폭발이 철퇴가 되어 그를 내리찍었다.

무형기로 몸을 감싼 아스타로트가 지면에 처박혔다.

그런 그의 몸 위로 집채만 한 얼음이 떨어졌다.

“……!!”

아이스 골렘의 주먹에 직격당한 아스타로트가 입을 벌렸다.

전신이 부서졌다. 비명을 지를 수조차 없다.

평범한 인간이었으면 다진 고기 조각이 되었을 것이다. 그는 골렘의 손에 깔린 채 피를 토했다.

그런 그의 앞에 작은 발이 내려앉았다.

샌들 끈에 감사인 오밀조밀한 예쁜 발.

고개를 들자 쭉 뻗은 다리와 바람결에 휘날리는 치마폭이 보였다.

한서리가 그곳에 있었다.

달빛을 받은 은빛 머리칼이 은하수처럼 빛났다.

새하얀 한기를 뿌리는 얼음의 여왕이 낭군을 위협한 쓰레기를 내려다보았다.

“선택지를 주지. 죽어서 말할래, 아니면 살아서 말할래?”

뭉툭하게 솟은 샌들굽이 남자의 뒤통수를 깔아 뭉갰다. 빠작빠작 자라난 얼음이 가시처럼 머리를 파고들었다.

“살아서 말한다면 귀찮음을 덜어 준 대가로 고통 없이 죽여 줄게.”

“그것 참, 고마워서 몸 둘 바를 모르겠네.”

샌들에 힘이 들어갔다. 버프를 건 것인지 아니면 화신의 힘인지, 근육하나 없는 소녀의 체중으로는 있을 수 없는 무게가 실렸다.

프레스 같은 압력이 두개골을 짜개기 시작했다.

아스타로트가 신음을 흘렸다. 하지만 그 입은 전혀 한서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웬 놈팡이한테, 실력으로, 밀려서 죽는 것보다는…… 여자애한테 밟혀, 죽는, 게…… 훨씬, 나아.”

지면에 얼굴을 처박은 상태로도 주둥이를 놀린다.

시체가 되어도 입은 살아서 둥둥 뜰 인종.

한서리는 설득을 포기했다.

“그럼 그냥 죽어.”

샌들에서 분출한 냉기가 아스타로트의 귀를 파고들었다. 정말로 정보를 추출할 생각인지, 뇌를 냉동시켜서 죽일 셈이었다.

젠장.

포기한 아스타로트가 한숨을 토하는 순간이었다.

싸움을 지켜보던 김건이 소리를 치고, 주변의 시공이 뒤흔들렸다.

──────!

검은색 광포가 공간을 꿰뚫었다.

납음부존지망.

과도한 침식의 반작용으로 모든것을 파괴해 버리는 파멸의 마기가 한서리를 덮쳤다.

골렘이 그 앞을 가로막았다. 충직한 소환수가 주인을 대신해 소멸. 그사이 버프와 가속 마법으로 이동한 한서리가 몸을 피했다.

날듯이 지면에 착지한 한서리가 눈을 크게 떴다.

그녀가 놀란 것은 갑자기 날아온 기습도, 다 잡았다고 생각한 아스타로트가 기환마위로 빠져나간 것 때문도 아니었다.

눈앞에 선 한 사람 때문이었다.

상황상 납음부존지망을 방출한 자이리라.

체형을 보아 여자. 검은 면사포에 검은 드레스를 걸쳤다.

옷…… 은 아니다. 마기를 옷의 형태로 다듬어 몸에 두른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런 잔재주는 아무래도 좋았다. 한서리가 놀란 이유는 따로 있었다.

암흑 속에 녹아들어 있는 그 여자에게서는, 숨길 수 없는 신격이 뿜어지고 있었다.

“흐응…… 기린의 화신이 진짜로 있잖아?”

가녀린 음성이 흘러나왔다.

이런 분석이 의미가 있을까 싶지만 젊은 여자의 목소리였다.

“넌 누구지?”

딱딱한 표정의 한서리가 물었다.

그녀가 지닌 기린의 감각은 눈앞에 선 검은 여자가 화신, 그것도 벨제불의 화신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무언가가 다르다.

이전에 만난 벨제불의 화신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여자는 한서리를 바라보다가 금방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한서리에게는 별다른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검은 면사포가 휘날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무언가를 찾는 듯한 시선이 사방을 뒤지고, 어느 한곳에 고정된 순간.

검은 연기를 남기며 여자가 사라졌다.

화신만이 가능한 초속의 기환마위.

한서리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녀는 기린의 시간 가속과 공간 압축 마법으로 그 뒤를 따라잡았다.

그리고 검은 드레스에서 빠져나온 하얀 손을 가로막았다.

“…….”

그런 그녀의 뒤에는 김건이 있었다.

김건은 그저 가만히 있었다. 여자의 몸짓에서 아무런 적의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서리는 결사적으로 그 손을 막았다.

여자는 김건을 향해 뻗던 손을 거두었다.

“건드리지도 못하게 하네. 너, 소유욕이 대단하구나?”

평탄한 목소리.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한서리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만 그녀는 아스타로트를 상대하며 상당한 소모를 했다.

정체를 불문하고 힘을 쓸 수 없는 남편까지 있는 이상, 되도록이면 눈앞의 여자와 전투를 벌이고 싶지는 않았다.

‘여차하면 도망친다.’

한서리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여자는 물끄러미 김건을 바라보았다.

신기한 동물을 바라보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남자를 꼼꼼히 살펴보더니 말했다.

“생각보다 잘생기진 않았네.”

뭐라는 거야? 이 자식은?

한서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김건이 의아한 표정이 됐다. 그러나 두 사람의 의문을 해결해 줄 사람은 없었다.

알 수 없는 말만 남긴 채, 여자는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정말로 갔다.

신격이 사라지자 공간을 조이던 압박감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경계를 하던 한서리는 한숨을 토하며 기린의 힘을 거두었다.

긴장이 풀리자마자 몸에 맞지 않는 힘을 쓴 후유증이 덮쳐 왔다. 현기증에 흔들리는 그녀의 몸을 김건이 부축했다.

“괜찮아?”

“괜찮아. 조금 쉬면 나을 거야.”

한서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표정은 심각했다. 몸의 이상을 신경 쓰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김건은 아내의 고민을 알아챘다.

“상황이 또 웃기게 됐는데. 방금 그 여자는 뭐지? 진짜 화신인가?”

“모르겠어. 이전의 삶에서도 저런 식으로 말하는 화신은 본 적이 없어.”

행동뿐만 아니라 분위기까지 다르다.

지금까지 만난 화신은 아무리 인간처럼 굴어도 한 번 신격을 드러내고 나면 결국 인간이 아니라는 이질감이 있었다.

……아니.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지만 한서리는 그것을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아직은, 아직은 단순한 추측에 불과하다. 쓸데없는 말을 떠들어서 불안감을 키우고 싶지 않았다.

아직은 아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그 추측을 확인해야 할 날이 오리라.

화신이지만 화신 같지 않은 자.

화신의 힘을 지녔음에도 인간성을 보이는 자.

한서리는 그런 존재를 본 적이 있었다.

그건 바로 한서리 그녀 자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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