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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52화 (52/200)

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 52화

순간적으로 사람을 잘못 본 줄 알았다.

반짝이던 금발은 봉두난발이 되었고 옷은 새까맣게 때가 타서 엉망진창이다.

찢어진 손아귀에서 흐른 피가 굳어서, 마치 빨간색 장갑을 낀 것처럼 보였다.

세라스는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손에 쥐어진 5미터짜리 오라 대검이 천둥소리를 내며 사납게 허공을 갈랐다.

보아하니 그냥 휘두르는 것 같지는 않다.

세라스의 검 끝은 분명히 공중에 흩날리고 있는 나뭇잎을 노리고 있었다.

김건은 입맛을 다셨다.

에디가 준 과제로 보이는데, 말은 단순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5미터짜리 검. 트럭만 한 칼을 휘둘러서 손바닥의 반도 안 되는 나뭇잎을 정확하게 양단한다.

그것은 장검을 내질러 좁쌀의 중앙을 관통하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대검을 유지하기 위한 오라 제어, 무거운 검에 휘둘리지 않도록 몸 쪽에 생성해야 하는 임시 질량까지 생각한다면 그 난이도는 더욱 올라간다.

세라스는 지쳐 있었다.

숨도 거칠고, 얼굴에 혈색이 없다.

하지만 검을 휘두르는 팔에는 힘이 있었다.

마치 목숨을 불태워 나온 열기를 담고 있는 듯하다. 끊어질듯 말듯 이어지는 검격에는 귀기가 서려 있었다.

김건은 에디의 거처로 향했다. 하지만 그 머릿속은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에디의 방식은 이해했다.

좋은 집안, 뛰어난 재능에 타고난 미모까지.

모자람 없이 자라 느슨하게 풀어진 인생에 독기라는 긴장을 추가해 팽팽하게 만든다.

확실히 실력은 늘 거라고 생각했다. 평탄한 성격을 지닌 세라스에게도 어울리는 교육 방법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김건은 세라스의 죽음을 봤었다.

절대로 나서서는 안 될 전장. 승산이라고는 존재하지 않는 곳에 있는 아군을 구하러 나가는 것이 그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세라스를 죽인 것은 마계의 몬스터도, 그녀의 무능력함도 아니었다.

스스로도 꺾지 못한 고집.

그것이 그녀를 죽였다.

언뜻 보기엔 그냥 사람 좋은 부잣집 아가씨로 밖에 안보이지만, 사실 세라스는 누구보다도 고지식한 사람이었다. 성정이 올곧고 바르기에 그것이 단점으로 보이지 않을 뿐이다.

이대로 강해져 봐야 그때와 똑같은 결말을 맞이할 것이다.

팽팽한 긴장을 주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고지식한 이에게 긴장을 주어 봐야 쉽게 끊어지기나 할 뿐이다.

김건은 친구가 똑같은 죽음을 다시 맞이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에디라면, 아내인 한서리라면 그의 방식을 무르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에겐 그만의 방식이 있었다.

지금까지 해 왔던 것처럼 그것을 관철할 뿐이다.

그는 그렇게 다짐하며 세라스를 뒤로했다.

그렇게 저녁이 되었다.

에디가 시간이 없다고 해서 그날은 김건도 발할라로 돌아가지 않고 통나무집에 머무르기로 했다.

김건은 연구회를 이어 나가다가 잠깐 짬을 내서 밖으로 나왔다.

수련용으로 다듬어 놓은 공터에서 세라스는 여전히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이젠 독기도 다 빠졌는지 온몸에 힘이 없어 보였다.

오라도 제대로 발현되지 않고, 아무런 기운도 서리지 않은 장검을 악으로 깡으로 내지르고 있을 뿐이다.

어설픈 검격에 맞은 나뭇잎이 퍽퍽 터져 나갔다. 깔끔한 양단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었다.

그녀에게 다가간 김건이 입을 열었다.

“세라스.”

파앗-

순식간에 칼날이 목전에 닥쳤다.

방금 전에 보았던 힘 없는 동작은 온데간데없이 예리한 움직임.

그 모습에 이전의 둔함은 남아 있지 않았다.

“뭐야.”

말라붙은 입술이 달싹였다.

김건은 귀기가 형형한 세라스의 눈을 마주 보며 말했다.

“좀 도와주려고.”

“필요 없어.”

세라스는 차갑게 고개를 돌렸다. 김건은 웃었다.

“이제 슬슬 팔이 잘 안 움직일 텐데.”

“…….”

“엔돌핀이 돌아서 잘 안 느껴지는 모양인데, 아무리 의지가 있어도 몸은 도구일 뿐이야. 무리하게 쓰면 부서질 뿐이지. 그래서는 수련이 되지 않아. 그냥 몸만 망가지는 거야.”

“그래서 어쩌라고?”

짜증 어린 시선이 이쪽을 향한다. 김건은 부드러운 미소로 옆에 있는 나뭇등걸을 가리켰다.

“이쪽에 앉아 봐.”

세라스는 김건을 노려보다가 이내 시키는 대로 앉았다.

대화를 나누자 점차 의식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온몸이 덜그럭거리며 부서질 듯이 아팠지만 꾹 참고 나무 밑동에 등을 기댔다.

김건은 그녀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양손으로 세라스의 팔을 쥐었다.

“힘 빼.”

그러면서 단단한 손으로 팔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세라스가 조금 당황한 목소리를 냈다.

“뭐…… 하는 거야?”

“마사지. 근육이 너무 지쳤어. 잘못하면 몸 다 버린다.”

그러면서 그는 경련이 오는 세라스의 팔다리를 주물렀다.

몸 안 쪽으로 진동까지 흘려보내 근육의 결 하나하나를 모두 만져 주었다.

처음에는 아팠지만 곧 사지에 시원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세라스는 물끄러미 김건을 쳐다보았다.

사실 이전부터 그에게는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지금까지는 잘 참아 왔으나 지금은 달랐다. 너무 지친 터라 인내심이 바닥난 모양이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말을 내뱉고 있었다.

“서리랑은…… 대체 무슨 사이인 거야? 단순히 사귀는 걸로만 보이지는 않아.”

김건은 마사지에 집중하며 담담하게 되물었다.

“그럼 뭐처럼 보이는데?”

“그게…… 신혼부부…… 아니, 그냥 결혼한 사람들처럼 보여.”

네가 모르는 미래에서 결혼했다고는 말 못한다. 김건은 대충 말을 받아넘겼다.

“뭐, 그런 거나 마찬가지이긴 하지.”

“그런데 이래도 괜찮아?”

“……무슨 소리야?”

의아한 표정이 이쪽을 향하자 세라스는 시선을 피했다.

갑작스레 자신이 오랫동안 씻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몸에서 풍겨 오는 악취에 죽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워졌다.

그녀는 발갛게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김건은 조금 시간이 지나서야 세라스가 무슨 소리를 했는지 깨달았다.

생각 같아선 조그만 게 별생각을 다 한다고 쥐어박고 싶다.

하지만 그는 지금 세라스와는 같은 나이인 생도일 뿐이다.

김건은 세라스로부터 시선을 떼며 말했다.

“어렸을 때부터 많이 했거든.”

“많이 했다니…… 뭘?”

“마사지. 아버지가 무술 연구가라 영웅들한테 무술을 가르치는 일을 했었어. 아무리 마력이 있어도 그걸 쓰는 주체는 몸이니까. 영웅들이 갖춰야 하는 몸을 만드는 방법 같은 걸 알려 주곤 했지. 그때 나도 마사지를 배웠어.”

그러면서 능숙한 손놀림으로 신발을 벗기고 세라스의 발바닥을 지압했다. 단단한 손가락이 발을 찌르자 화끈하면서도 시원한 감각이 등줄기를 타고 올랐다.

“이래 보여도 실력은 꽤 좋아. 형이나 누나들한테 용돈도 많이 받았지.”

그 말을 증명하듯 김건의 마사지는 특별했다.

단순히 손으로 누르는 것뿐만 아니라 뭔가 보이지 않는 기운이 보들보들하게 팔다리를 감싸는 것 같았다.

세라스 역시 훈련을 하며 종종 마사지를 받기는 했지만 이 정도로 기분 좋은 것은 받아 본 적 없었다.

“…….”

자기 혼자 이상한 말을 했다는 생각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세라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침묵이 이어지던 와중에 김건이 툭 말했다.

“어깨에 힘이 너무 들어갔어.”

마사지 중이라 처음에는 진짜로 어깨 이야기를 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세라스는 금세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제이미가 죽은 것도, 그때 많은 사람들이 죽은 것도, 그리고 내가 위험에 처했던 것도, 네 책임이 아니야. 넌 충분히 네 역할을 했어. 그저 운이 없었을 뿐이지.”

세라스는 이를 악물었다.

“……설령 그렇다 해도 내 능력이 더 뛰어났으면 조금이라도 나은 결과가 나왔을 거야.”

김건은 딱 잘라 말했다.

“아니, 넌 이미 상한에 달했어. 지금의 나이에, 지금의 상황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발휘하고 있다고.”

그말은 세라스에게 이렇게 들렸다.

넌 그것밖에 안 되는 인간이야.

화가 나지 않을 수 없었다.

“……네가 뭔데 내 한계를 정하는데?”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세라스는 씹어 먹을 듯한 표정으로 김건을 노려보았다.

하나 김건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으며 그런 세라스를 마주했다.

“같이 목숨을 걸고 싸울 동료.”

“……!”

예상치 못한 대답에 세라스가 숨을 들이켰다.

김건이 말을 이었다.

“싸움이 벌어지면 언제나 힘이 부족하지. 그러다 보면 결국 동료끼리 서로의 목숨을 기대어 싸워 나가게 돼. 그때는 아무도 의심하지 않아. 그러고 있을 여유가 없으니까. 그저 동료의 판단을 믿고 서로 일을 분담해서 처리하지.”

셀 수도 없이 죽음의 강에 발을 담갔다가 빠져나온 남자는 차가운 눈으로 소녀를 바라보았다.

“만약 그때, 네가 네 힘을 과신해서 무리한 일을 떠맡았다가 실패하면 우리는 죽어. 너 혼자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죽는다고.”

“그러면 뭘 어쩌라고? 그냥 나보고 가만히 있으라는 이야기야?”

“어. 가만히 있어.”

거기까지 가자 세라스의 눈에 적의가 담겼다.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며 마사지를 계속하던 김건의 손을 쳐내려는 찰나에, 김건의 한마디가 그녀를 멈췄다.

“모자란 부분은 내가 채울 테니까.”

“……대체 아까부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사람을 들었다 놨다, 정신을 못 차리겠다.

김건은 킥킥 웃었다.

“너보다 내가 강하니까, 내가 더 많은 부담을 떠안을 수밖에 없지.”

건방을 떠는 얼굴이 아니다.

김건은 그저 있는 사실을 그대로 말하고 있었다.

“그게 불만이면 노력해.”

“노력이라면 이미 하고 있…… “

“아니, 그런 노력 말고. 네 감정을, 네 욕구를 조절할 수 있도록 노력해. 냉정해져. 무작정 들이받는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야. 자존심을 죽여. 네 능력을 정확하게 가늠해. 그리고 그걸로 할 수 있는 걸 판단해. 그걸 하지 못한다면…… “

씨익, 장난스러운 미소가 김건의 얼굴에 떠올랐다.

“평생 나한테 빚이나 지게 될걸.”

순간적으로 그 잘난 척하는 면상에 주먹을 처박을 뻔했다. 김건이 자신보다 고수라는 확신이 없었다면 정말로 그렇게 했을 것이다.

세라스는 튀어 나가려는 주먹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오늘은 이만 자. 교수님도 일이 생기셔서 발할라로 돌아간다고 하니까. 훈련은 내일이 마지막일 거야. 내일이라도 성과를 보이려면 체력을 회복해 둬.”

김건은 이를 가는 세라스의 어깨를 두들기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대로 돌아가 버렸다.

세라스는 새파랗게 뜬 눈으로 그 등을 쫓았다.

“……개자식.”

저도 모르게 욕설이 흘러나왔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일어서서 검을 휘둘러 그간의 성과를 보이며 에디와 김건, 두 사람의 콧대를 눌러 주고 싶었다.

하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마사지로 이완된 근육은 이미 퍼질 대로 퍼져서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어쩔 수 없다. 김건이 말한 대로 잠이라도 자서 체력을 회복하는 수밖에.

세라스는 낑낑 소리를 내며 가까스로 몸을 굴려 수풀과 나뭇잎을 쌓아 만들어 둔 잠자리로 향했다.

산중의 밤은 의외로 시끄러웠다.

나뭇잎이 부딪치며 우수수 노래하고, 벌레들이 소리 높여 울었다.

수풀을 깔아 딱딱한 바닥, 그리고 덮은 것인지도 모르겠는 어설픈 이불.

평소의 잠자리와는 너무 다르다.

지금까지는 아무리 몸이 피곤해도 그 이질감 때문에 제대로 잠들지 못했다.

하지만 그날은 왠지 잠이 잘 왔다.

그녀는 스르륵 눈을 감으며 죽은 듯이 잠에 빠져들었다.

그날, 세라스는 꿈을 꾸었다.

꿈에 나온 것은 잘난 척 까불거리는 김건을 일검에 날려 버리는 자신과, 그런 그녀에게 한 수 가르쳐 달라며 애걸복걸하는 에디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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