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53화 (53/200)

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 53화

날이 가고, 해가 떴다.

밤새입을 모아 떠들며 그간의 연구 성과를 정리한 에디와 김건은 잠깐 휴식을 취한 뒤 정오 즈음에 발할라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리고 눈을 뜬 세라스는 새벽부터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조금이나마 회복된 체력, 그리고 어젯밤에 김건이 해 준 마사지의 덕분에 몸 상태가 괜찮았다.

‘할 수 있어!’

오전까지는 시간이 있다.

그때까지 그녀는 어떻게 해서든 성과를 내보일 생각이었다.

그녀는 슬슬 에디가 그녀에게 무엇을 가르치려고 하는지 깨닫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절제’였다.

그녀는 지금까지 전위로서 부족함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마력은 말할 필요도 없고, 체력이면 체력, 반응 속도면 반응 속도. 모든 면에서 압도적인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낭비가 늘었다.

백억, 천억을 들고 있다 보니 백 원, 천 원 정도의 푼돈은 아무런 생각 없이 써 버리는 것이다.

그래도 괜찮았으니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남을 압도할 수 있었으니까.

에디가 그녀를 한계로 몰아붙였던 것은 그냥 그가 남의 고통을 즐기는 사이코여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한계 상황에 놓여서야 스스로가 가진 자원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된다.

가지고 있는 돈을 다 털어서, 주머니 속의 푼돈만 가지고 생활을 하려 하니 그제야 자신이 얼마나 많은 자원을 낭비하고 있는지 깨닫게 된 것이다.

에디가 그녀를 가리켜 코끼리처럼 둔하다고 했던 것도 이해가 되었다.

남들은 10의 힘을 들여 할 일을 100의 힘으로 하려 하니 당연히 동작이 굼떠 보일 수밖에 없다.

큰 힘을 쓰는 탓에 전조도 크고, 실질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속도도 미묘하게 늦게 된다.

프레이저 가문의 기본기인 참마검으로 허공에 떠 있는 나뭇잎을 베라고 한 것은 눈에 보이는 결과가 중요한 과제가 아니었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정확한 힘을, 정확히 통제해 정확하게 목표물을 타격한다.

그것이 오늘 오전까지 세라스가 내보여야 할 결과였다.

하지만 말처럼 쉽지는 않았다.

싸움에서 속도는 생명이다.

주머니 안에 위치한 손의 감각만으로 액수를 계산해서 꺼내야 하는 것이 전사의 계산 방식이다.

지갑을 꺼내어 돈을 세고 있을 여유 따윈 없었다.

평생 동안 주머니에서 대충 꺼낸 돈으로 거스름돈을 받지 않고 결제를 치르다가, 갑자기 정확하게 꺼낸 액수로 대금을 지불하려 하니 모든 것이 갑갑했다.

이해는 했다. 하지만 그것을 몸으로 실현하는 것은 별개의 이야기였다.

머리로 안다고 실천할 수 있다면 이 세상 누구도 고생을 하지 않는다.

세라스는 노력했다. 그녀는 스스로가 가진 모든 것을 투입해 과제에 매달렸지만 결국 별다른 성과를 보지 못한 채, 하늘 꼭대기에 뜬 햇살을 맞이하게 되었다.

에디와 김건은 금세 준비를 마치고 나왔다.

에디는 아직도 허공에 검을 휘두르고 있는 세라스를 발견하고는 말했다.

“야, 그만 가자! 그러다 날 새겠다.”

“빨리 가야 돼. 서리랑 식사를 같이 하기로 했어.”

빠드드득!

절로 이가 갈렸다.

누구는 진지하게 모든 것을 불태우고 있는데 저 두 놈은 태평하기 그지없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평생 나한테 빚이나 지게 될걸.’

어젯밤에 김건이 했던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그 재수 없는 미소를 떠올리자 꼭지가 돌았다.

빠직-!

이마에 핏줄이 곤두선다. 급격하게 감정이 요동친다. 전사라면 절대로 가만 둬서는 안 될 정신 상태.

하나 사람들 중에는 간혹 화가 날수록 냉정해지는 사람이 있다.

세라스가 바로 그랬다.

심장이 두방망이질 쳤지만, 머리는 차가웠다.

‘냉정해져. 무작정 들이받는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야. 자존심을 죽여. 네 능력을 정확하게 가늠해. 그리고 그걸로 할 수 있는 걸 판단해.’

세라스는 그 어느 때보다도 냉정한 상태로 현 상태를 재점검했다.

자신은 약했다. 초월자니, 뭐니 하지만 결국은 운 좋게 타고난 재능으로 여기까지 왔을 뿐이다.

스스로의 노력과 고행으로 여기까지 도달한 에디나 김건과는 비교할 대상조차 되지 못한다.

그들은 강했다.

세라스는 마음속 깊숙이 그 사실을 인정했다.

자존심을 버렸다.

그리고 철저히 하수의 입장이 되어 사고하기 시작했다.

하수가 고수가 되는 가장 빠른 지름길은 고수를 따라 하는 것이다.

요 며칠간 보았던 두 사람의 행동거지를 떠올렸다.

그동안의 싸움에서, 그리고 대련에서 보고 느꼈던 모든 것을 기억했다.

가벼운 발걸음. 낭비 없는 움직임.

자연스럽게 늘어트린 어깨. 깊고 풍부한 숨소리.

검을 멈춘 세라스는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후우…….”

똑같이 하는 게 아니다.

한 번에 그들의 움직임을 체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이미지한다. 최대한 그들의 모습을 상상하여 스스로의 몸에 덧씌워 낸다.

세라스는 숨소리부터 에디와 김건의 것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그것을 발견한 에디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김건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세라스의 눈이 뜨였다.

그 안에서 금색 기운이 번뜩였다.

다리가 춤췄다. 허리가 율동하며 어깨가 회전. 손에 쥔 황금의 대검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호선을 그렸다.

허공에 그려진 깔끔한 직선이 허공에 휘날리던 나뭇잎의 중심을 베었다.

분단된 이파리가 두 쪽으로 갈라지는 동시에,

쫘악────────

공기가 찢어지며 폭풍우가 몰아쳤다.

검끝의 범위에 걸친 나무 한 그루가 잘려 나간 단면을 따라 스스륵 미끄러져 내렸다.

“……!!”

별로 힘을 들인 것도 아니다. 그저 나뭇잎을 가르기 위해 최대한 가볍고 빠르게 휘둘렀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시무시할 정도로 깔끔한 일섬이었다.

직접 눈앞에 들이닥친다면 막을 엄두도 나지 않을 정도다.

하지만 손끝에 남아 있는 검의 무게가, 온몸을 데우고 있는 근육의 열기가 지금의 일격을 뿜어낸 것이 세라스 자신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

어디서 왔는지 모를 짜릿한 쾌감이 등골을 달렸다.

세라스는 펄쩍 뛰었다.

미칠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그녀는 아이처럼 흥분해서 공감해 줄 대상을 찾았다.

“봐, 봤어요? 지금? 지금 내가……!”

나뭇잎을 베었다고요!

그 뒷말은 나오지 않았다.

이쪽을 보지도 않고 걸어가고 있는 두 남자의 등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에디는 고개를 돌리며 나른하게 하품까지 했다.

세라스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야! 이 무정한 새끼들아!!”

울분이 터져 나왔다.

* * *

발할라는 간부나 교수의 직위를 얻은 사람이라도 몬스터와 같은 공기를 마셔 가며 싸워야 하는 현장에 내모는 것이 당연한 조직이다.

에디는 며칠간의 특급 게이트 처리 업무를 마치고 발할라 본섬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가 나가 있는 동안 그의 기술을 연구했던 김건은 에디의 앞에서 그 결과물을 시연해 보였다.

성과는 충분했다.

에디는 김건이 그 자신의 기술을 완벽히 흡수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받은 것이 있으면 주는 것도 있어야 하는 법.

김건은 다음 연구로 그의 미극공진동을 에디의 기술에 접목하는 방법을 구상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에디의 반응은 좋지 않았다.

“야, 꺼져! 내가 바보인 줄 아냐? 설마 동정하는 건 아니겠지?”

“아니, 그래도 받은 게 있는데…… 제가 조금 더 도와드리는 게…….”

“필요 없어. 교류라는 건 서로 주고받는 거지, 한쪽이 일방적으로 가르쳐 주는 게 아니야. 넌 이미 내 걸 다 가져갔어. 난 더 이상 줄게 없고, 그건 순전히 내가 못난 탓이지. 그러니까 연구회도 이걸로 끝이다.”

그렇게 말한 에디는 축객령을 내렸다.

김건은 쫓겨나듯이 그의 교수실을 빠져나왔다.

아무래도 자존심을 상하게 한 모양이다.

김건은 입맛을 다셨다.

에디는 김건이 그보다 훨씬 많은 경험을 거쳐 회귀한 자라는 것을 모르니 그럴 법도 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가 고작 며칠 만에 평생을 갈고닦은 기술을 다 흡수해 버렸는데, 화가 안 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하지만 김건은 딱히 걱정하지 않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같이 연구회와 세라스의 지도를 하며 에디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꽤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향상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아마 오늘 느꼈던 자괴감도 곧 스스로를 성장시킬 연료로 사용해 버리고 모든 것을 잊을 것이다.

에디의 교수실이 위치한 곳은 땀 냄새 나는 육체파 전위들이 득시글거리는 종합 체육 센터였다.

김건은 남정네들의 비명 같은 고함 소리를 들으며 건물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시간을 확인했다.

약속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었다.

잠깐 사이에 몸에 밴 듯한 땀내를 지울 겸, 길가의 벤치에 앉았다.

방금 에디의 앞에서 선보였던 기술이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기술을 시전했던 팔이 아려 왔다.

“이거 진짜로 쓰면 거의 죽겠는데.”

가벼운 시연에도 이 정도니 실전에서 사용하면 꽤 부담이 클 것이다.

하지만 그 덕에, 김건은 한 단계 앞서 나간 힘을 얻었다.

이번 것은 에디의 도움이 컸다.

그는 스스로의 기술에 완벽에 가까운 이해도를 가지고 있었고, 그렇기에 그리 어렵지 않게 F급 마력적성을 가진 김건이 자신의 기술을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떠올렸다.

그것은 기술 협조를 부탁받은 한서리마저 감탄할 정도로 신선한 발상이었다.

실력이 늘었다는 느낌은 아니다. 하지만 쓸 수 있는 패가 하나 더 늘었다.

매일 검 한 자루만 다루다가 쓸 만한 보조 무기를 하나 더 얻은 기분.

이제는 검이 부러지거나, 통하지 않거나 했을 때에도 쓸 무기가 있게 되었다.

보조 무기가 있기에 필요한 순간까지 주무기를 아낄 수 있는 것도 장점이다.

전투력의 고점은 별 차이 없지만, 저점이 엄청나게 올랐달까.

충분히 발상을 시험해 볼 수 있는 시간과 여유, 그리고 아내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기에 지금의 일이 가능했다.

하루하루 살아가기 바빴던 전생의 전쟁터에서는 얻을 수 없었던 힘이다.

그림자 갑옷까지 얻었겠다, 한 번의 무리수로 엄청나게 소모되긴 했지만 마력 제어를 담당하는 신경계도 쌩쌩하다.

아마 지금의 자신은 회귀하기 전의 자신보다 강할 것이다.

그리고 아직은 더 강해질 여지가 남아 있었다.

‘다음에는 누구를 찾아가 볼까.’

그간 김건과 에디의 접촉에서 무엇을 발견했는지, 한서리는 이미 배신자 색출 대상에서 에디를 제외한 상태였다.

그의 행동이 아내의 첩보 활동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슬슬 감시의 타깃을 바꿀 때가 되었다.

티리온 프레이저는 그 대상 중 하나였다.

프레이저 가문에서 태어나 높은 마력적성을 가졌지만, 마력을 뿜어내는 마력 회로의 크기가 극도로 작아 실제로 다룰 수 있는 마력의 양은 C급이나 B급밖에 되지 않는 남자.

프레이저 가문의 수치.

실제로 세라스는 저수지에 담아 둔 물을 수도꼭지로 뽑아 쓰는 꼴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티리온은 현역 최강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티리온 역시 에디와 함께 라그나로크에서 죽었다.

하지만 그는 에디와는 다르게 죽은 뒤에도 계속해서 사람들 사이에서 이름이 거론되었다.

티리온은 적은 마력적성을 가진 전위들의 꿈 같은 존재였다.

한때는 김건도 그를 롤 모델로 삼았던 적이 있을 정도다. F급 마력적성으로는 그것도 불가능해서 금방 포기했지만 말이다.

에디의 기술처럼 쉽게 그에게 적용할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설령 접목에 실패하더라도, 그 기술에 담긴 경험과 노력을 흡수하다 보면 새로운 길이 열릴 것이다.

생각도 어느 정도 정리되었고, 시간도 충분히 흘렀다. 김건이 움직이려 할 때였다.

곁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안녕.”

모르는 여자가 눈앞에 있었다.

김건은 딱히 놀라거나 하지 않았다. 회귀한 자신과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아이가 말을 걸었을 뿐이다.

그는 그녀가 아카데미 교복을 입고 있는 것을 보고는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안녕.”

여자는 웃었다.

새카만 머리칼. 피부는 새하얗다. 마력의 영향인지 눈동자가 루비처럼 붉다. 선명한 속눈썹이 깜빡였다.

그녀는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김건의 옆에 앉았다.

우아하고 품위 있는 동작. 메리안처럼 평범한 여자아이도, 세라스 같은 말괄량이도 아니다. 그녀에게서는 아내인 한서리와 비슷한 격조가 느껴졌다.

“여기서 뭐 해?”

나긋나긋한 목소리. 격조는 비슷하지만 그 결은 완전히 달랐다.

한서리가 차갑고 위엄 있는 여장군의 이미지에 가깝다면, 눈앞의 여자는 진짜 여왕.

일평생 더러운 것은 만져 본적 없는 것 같은 고아함과 여유가 느껴졌다.

척 봐도 보통 인물은 아니다.

하지만 김건은 이 여자를 몰랐다.

그 말인즉, 눈앞의 여자가 노바처럼 김건과 아내의 회귀에 영향을 받아 등장한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