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 54화
얼마 전에 제이미가 당한 일도 있고, 같은 발할라 생도라고 방심할 수는 없다.
김건은 주의 깊게 여자를 관찰하며 대답했다.
“그냥, 최근에 하던 일이 끝나서. 생각 좀 했어.”
“무슨 생각?”
“어떻게 하면 더 실력을 키울까 하는 생각.”
“화신이랑 싸워서 살아남았잖아. 그런데도 더 실력을 키우려고?”
김건이 벨제불을 쓰러트린 것은 기밀이지만 화신과 싸웠다는 사실 자체는 적당히 현실적인 느낌으로 각색되어 외부에 공개되어 있었다.
그러고 보면 몇몇 생도들이 발키리가 된 김건에게 접근해 온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중 대부분은 호승심으로 불타오르는 천둥벌거숭이 남자 생도들이었다. 여자 생도들은 슬슬 눈치만 살필 뿐, 그에게 다가오려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오늘 예외 상황에 마주한 것 같았다.
다른 건 몰라도 김건은 적의를 느끼는 데에는 천부적인 감각을 갖고 있었다.
옆에 앉은 여생도에게서는 아무런 적의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호의, 그리고 순수한 호기심만이 크게 뜬 눈에 담겨 있었다.
그녀는 눈망울을 반짝이며 물었다.
“있잖아, 혹시 싸움 말고 잘하는 건 없어?”
“없어.”
여자는 쿡쿡 웃었다.
“재미없는 남자네.”
처음 보는 사이인데 스스럼없이도 말한다.
슬슬 정체가 궁금해진 김건이 이름을 물으려는 찰나였다.
여자의 입술에 여우 같은 미소가 담겼다.
“여자 친구 있어?”
“있어.”
김건은 칼같이 답했다. 하지만 여자는 오히려 그걸 기다렸다는 것처럼 입술을 땠다.
“그럼 혹시…….”
의미심장한 미소가 짙어져 가며 고양이 같은 눈매가 애교 있게 깜빡였다.
“바람 피워 볼 생각은 있어?”
“없는데.”
아무리 사람이 스스럼없어도 그렇지, 초면인 사람에게 들으면 거부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김건은 무슨 개소리를 하냐는 듯 여자를 쳐다보았다.
“철벽이네~.”
여자는 오히려 좋다는 듯 깔깔거리고 웃었다. 그녀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일어서서 말했다.
“나중에 혹시 생각나게 되면 연락해.”
그녀는 그러면서 손을 살랑살랑 흔들며 가 버렸다.
연락처는커녕 이름조차 모르는데 사람을 꼬시고 있다.
여왕님 같은 분위기를 하고서는 말괄량이 같은 짓을 하니 엄청난 이질감이 느껴졌다.
“미쳤나?”
김건은 물끄러미 그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엉덩이를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약속 장소에 도착하자 아내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시계를 보고 말했다.
“무슨 일 있었던 건 아니지?”
시간 약속에는 꽤 철저한 편인 김건이 늦자 걱정한 모양이다. 김건은 괜찮다는 듯 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갑자기 누가 말을 걸어서 좀 늦었어.”
“누군데?”
한서리는 눈살을 찌푸렸다. “혹시 여자는 아니지?”라며 무서운 기세를 풍긴다.
그 알지 못할 여자의 미래를 걱정한 김건은 뒷말을 무시하고 대답했다.
“몰라. 뭔가 이상한…… 하여튼 제정신은 아닌 것 같았어.”
“당신이 그렇게 말할 정도면 진짜 미친 건데.”
항상 최고라고 떠받들어 줘도 쓴웃음만 지을 정도로 겸허한 인간이 이상하다고 평할 정도면 말 다했다.
한서리는 그냥 착한 남편이 어디 바보 같은 사람이랑 어울려 준 것 정도로 생각하고 이야기를 넘겼다.
김건 역시 그 일에 대해 더 떠들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그는 한서리의 옆에 서 있는 한 사람을 바라보았다.
키가 크고 검은 정장을 입은 미인이었다.
스물 후반은 되었을까, 성숙함이 엿보이는 입술은 굳게 닫혀 있고 기다란 금발을 한데 묶어 말꼬리처럼 늘어트리고 있다.
김건의 시선을 눈치챈 한서리가 말했다.
“이번에 내 팀의 리더 역할을 해 줄 알리시아야. 알리시아, 이쪽은 내…… 남자 친구인 김건.”
“알리시아 비칸테르입니다. 이번에 부팀장으로 한서리 팀장님의 보좌를 맡게 되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알리시아는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김건이 에디와 어울리며 기술을 연마하는 동안, 한서리는 아카데미 밖으로 활동 범위를 넓혔다.
그녀는 재벌 2세로서의 특권을 이용해 그룹 내의 자회사에 직책과 예산을 받아 부서를 하나 꾸렸다.
영웅들처럼 지역 방어를 하는 것이 아니라 마계화된 지역, 혹은 마계에 직접 침투하여 몬스터를 사냥하고 그로부터 마정석등의 자원을 뜯어내는 헌터팀이었다.
그녀의 부모님은 헌터팀 같은 현장직보다 매니지먼트나 기술 개발, 물류 유통 등 조금 더 운영자로서의 면모가 돋보이는 사업을 맡아 주기를 바랐지만 한서리는 굳이 헌터팀을 만들었다.
이 세상에서 영웅 다음으로 꼽히는 무력 단체.
그들로 무엇을 하려는지는 한서리 본인만이 알 것이다.
보통 직장 부하에게 남자 친구를 소개하나 싶어서 김건은 조금 떨떠름하게 알리시아의 인사를 받았다.
“잘 부탁드립니다.”
알리시아는 물끄러미 김건을 바라보았다.
미묘한 적의가 보이지 않게 신경을 간질인다.
한서리의 앞이라 그런지 직접적으로 보이는 행동은 없었다. 하지만 그 시선을 받는 김건은 알리시아의 눈빛에 담긴 감정을 읽어 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서 더 이상 말을 걸지 않고 얌전히 아내의 말을 기다렸다.
“앞으로 자주 얼굴을 보게 될 것 같아서 미리 소개시켜 주는 거야.”
“우리 임무 할 때 같이 가려고?”
“응.”
대부분의 영웅이 헌터팀을 대동하는 이유는 일손이 부족해서다.
졸개의 처리, 마정석의 채취, 사냥 후의 뒷정리 등을 소수가 다 할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김건은 아내가 그런 자질구레한 일을 처리하기 위해 헌터팀을 꾸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전력 보강이다.
초월자에 달하는 전위인 김건과 세라스, 완전체 후위에 필요하면 화신의 힘까지 빌려올 수 있는 한서리. 거기에 완벽히 전투에 특화된 헌터팀이라.
아무래도 아내는 전쟁이라도 벌일 모양이었다.
한서리는 김건과 알리시아에게 필요한 정보를 몇 개 설명해 준 뒤 알리시아를 보냈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팀장님.”
자기보다 훨씬 어린 나이의 사람에게, 알리시아는 깍듯이 허리 숙여 인사하고 등을 돌렸다.
김건은 꼬리처럼 살랑살랑 흔들리는 그 뒷머리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눈빛이 무서워. 단순한 직원 같지는 않은데?”
“왜?”
“당신 언니처럼 나를 쳐다보더라고. 당신을 엄청 대단하게 생각하고 있는 거지.”
알리시아가 김건에게 보내는 적의에는 못마땅함이 묻어 있었다. 반면 한서리를 향해 예의를 갖출 때는 숨길 수 없는 경의가 뿜어져 나왔다.
그 행동은 어느 날 갑자기 한참 어린 상사를 모시게 된 부하 직원의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김건은 알리시아와 아내 사이에 무언가 일반적이지 않은 관계가 생겼음을 직감했다.
그의 말에 한서리는 시린 미소를 띠었다.
“그래? 아무래도 혼 좀 나야겠네.”
그것은 관계의 이상함을 은연중에 드러내서인가, 아니면 김건에게 불온한 시선을 했기 때문인가.
아무래도 쓸데없는 말을 해 버린 것 같다.
김건은 조용히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알리시아 씨, 미안합니다.
그때였다.
한서리의 휴대기가 진동했다. 한서리는 휴대기에 뜨는 이름을 확인하고 전화를 받았다.
“예, 교수님. 한서리입니다.”
수화기로부터 사이먼 베이커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갑자기 전화해서 미안하네. 서리 양, 지금 김건 군과 같이 있나?
“네, 같이 있습니다.”
-아카데미 밖인가?
“아뇨, 안에 있습니다.”
사이먼은 잠시 말을 멈췄다. 헛기침을 한번 한 그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럼 미안하네만, 같이 교수실로 좀 와 줄 수 있나?
“…….”
최근에 서로의 일을 하느라 바빴던 두 사람은 오랜만에 둘만의 데이트를 즐길 예정이었다.
한서리는 얼굴을 찌푸리며 남편을 바라보았다. 아내의 눈짓을 보고 대강의 상황을 눈치챈 김건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보이지 않는 한숨을 내쉬며, 한서리가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바로 가겠습니다.”
별거 아니긴 하지만 마음의 빚이란 이런 사소한 것부터 하나둘 쌓아 가는 것이다.
데이트는 다음에도 할 수 있지만, 사이먼 베이커에게 빚을 지울 수 있는 기회는 그리 많지 않았다.
갈 땐 가더라도 이거 하나는 알아야겠다.
한서리는 애써 퉁명스러움을 숨기며 물었다.
“그런데, 무슨 일입니까?”
사이먼의 대답은 간단했다.
-소개할 사람이 있어. 아무래도 발키리가 한 명 더 생길 것 같네.
* * *
사이먼 베이커의 교수실에 들어가는 순간, 김건은 오랜만에 놀라움을 느꼈다.
그 기색을 눈치챈 한서리가 조용히 물었다.
‘왜 그래?’
‘아까 본 여자가 있어.’
‘그, 제정신이 아니라던?’
‘그래.’
한서리의 눈이 가늘어졌다.
교수실에는 총 세 사람이 있었다.
발할라의 첫 번째 별인 사이먼 베이커 교수.
바로 그 뒤를 잇는다고 하는 두 번째 별. 프리드리히 하이데거.
마지막으로, 김건에게 알 수 없는 말을 하고 사라져 버린 검은 머리의 여생도였다.
김건과 한서리, 두 사람을 맞이한 사이먼은 짧은 인사를 나눈 뒤, 바로 두 사람을 프리드리히와 여생도의 맞은편에 앉혔다.
사이먼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인사하게. 이번에 새로이 발키리의 칭호를 부여받게 된 클라우 베리스 양일세.”
생길 것 같다, 라고 하더니 그새 상황이 변한 모양이다.
한서리는 날카로운 눈으로 맞은편에 앉은 클라우 베리스와 하이데거 교수를 살펴보았다.
“갑자기 발키리라니. 조금 당황스러운데요.”
프리드리히 하이데거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왜, 무슨 문제라도 있나? 자네가 잘 몰라서 그런 말을 하는가 본데, 클라우 양은 영웅협회로부터 특수감시대상으로까지 올라간 마법사야. 발키리가 되기에 모자람이 없지.”
너무 강력한 힘을 가져 통제를 벗어났을 때 대처가 불가능할 것으로 보이는 영웅에게 사회적 제약을 걸어 자물쇠를 채우는 것이 특수감시대상이라는 시스템이다.
이 자식은 위험할 정도로 강한 놈이다, 라는 의미의 각인.
하지만 한서리는 ‘그래서 어쩌라고?’ 라는 표정으로 프리드리히를 쳐다보았다.
보통 S급 상위에서 초월자 언저리의 전위나 후위가 되면 특감대로 지정이 된다.
어린 나이에 특감대가 되는 것은 물론 대단한 성과이지만 그 정도의 인물은 발할라에서 그렇게 드문 것도 아니었다.
현재의 발키리 파티는 말할 것도 없고, 노바 라디스티를 위시해 당장 C클래스의 최상위권이라 불리는 셉텐트리온의 멤버만 해도 그 정도의 힘은 가지고 있다.
발할라의 인물들이 영웅협회의 특수감시대상이 되지 않는 것은 발할라가 자체적으로 운용하는 특무대가 그들의 폭주를 제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김건과 한서리, 그리고 세라스를 발키리로 만들어 준 화신전 생존 경험. 그것과 비교하기에는 특감대라는 명함은 부족함이 많았다.
하지만 그것을 모를 사이먼 베이커가 아니다.
사이먼은 프리드리히의 말에 아무런 반론도 하지 않았다. 그저 차분한 기색으로 프리드리히와 클라우를 바라보았을 뿐이다.
클라우는 미소를 지었고, 프리드리히는 호전적인 눈으로 사이먼을 노려보았다.
발할라의 첫 번째 별과 두 번째 별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대충 그림이 나온다.
분위기를 파악한 한서리의 얼굴이 더욱 차갑게 물들었다.
김건은 대놓고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회귀하기 전에 있었던 기억이 두통을 일으킨다. 김건은 끄응 앓는 소리를 냈다.
높으신 분들의 자존심 싸움은 질색이다.
권력의 맛을 본 사람들은 서로 싸우지 않으면 죽을병에라도 걸리는 건지 인류의 존속이 위험한 상황에서도 서로 경쟁을 벌이며 밑의 사람들을 피곤하게 만들었다.
아무래도 지금의 발할라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최근 사이먼 베이커는 스스로의 특권을 이용해 세 명의 발키리를 들였다. 그리고 그 발키리들은 모두 사이먼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 나가고 있었다.
미래의 간부 후보 셋이 모두 한 사람을 지지하는 꼴이라, 그 한 사람의 자리를 노리는 입장에서는 아니꼽다고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프리드리히는 자신의 사람을 발키리의 자리에 앉혔다.
형평성을 들먹이며 압박을 넣으니 사이먼 역시 별수 없이 그 제안을 수락한 것이고.
김건은 슬쩍 아내의 눈치를 살폈다.
한서리는 이미 정쟁에 뛰어들어 사이먼의 등을 밀어 주고 있었다. 생각하는 바가 많을 것이다.
그나저나…….
‘발키리가 되다니. 그냥 이상한 애인 줄만 알았는데.’
전위는 아니다. 그랬으면 김건이 몰라봤을 리가 없으니까.
확실히 후위. 그것도 전투에는 직접적으로 끼어들지 않는 형태의 기술을 가졌을 가능성이 높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맞은편의 클라우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것을 눈치챈 클라우는 방긋 웃더니 김건을 향해 윙크를 했다. 웬만한 남자라면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을 수 없는 깜찍한 애교였다.
“…….”
교수님들 앞에서 추파를 던지다니.
‘진짜로 미쳤나?’
성실 그 자체인 남자의 얼굴이 굳었다.
그리고 옆에 있던 한서리의 눈이 단번에 흉악해지더니 살기를 띠기 시작했다.
클라우는 한서리를 보았다. 그리고 가볍게 웃었다.
마치, 너 따위는 별거 아니라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