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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55화 (55/200)

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 55화

“…….”

살짝, 공기가 얼어붙었다.

분위기 변화를 눈치챈 사람들이 두 사람을 돌아봤다.

빨간 눈동자와 파란 눈동자가 맞부딪혔다.

한서리는 낮은 음색으로 말을 꺼냈다.

“클라우 베리스라. 특감대가 될 정도의 영웅인데 처음 듣는 이름이군요. 대체 어느 시골구석에서 오신 건가요?”

그 말을 들은 프리드리히가 이맛살을 구겼다. 그가 입술을 꿈틀거리고, 사이먼이 한서리에게 주의를 주기 전에 클라우가 먼저 말했다.

“아무래도 휴양지로 쓰이는 곳에서 살다 보니 그런 것 같습니다. 시끄러운 것은 좋아하지 않아서요.”

그렇게 말하며 살짝 입술을 쓸어내린다.

도톰한 붉은 입술. 가느다란 손가락부터 낭창낭창 휘는 팔은 적당히 살점이 붙어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동그란 어깨까지 이어졌다.

나뭇가지처럼 앙상한 한서리와는 상당히 대조적인 모습이다.

한서리는 이를 갈았다.

“시끄러운 걸 좋아하지 않는 분이 어째서 발할라까지 오셨는지 모르겠군요. 이곳이야말로 어떤 면에서는 세상에서 제일 시끄러운 곳인데요.”

한서리의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전 세계에서 벌어지는 온갖 사건사고를 떠맡아야 하고, 초인적인 힘을 가진 하룻강아지들이 부대껴 사는 곳이다.

건물이 무너지거나, 폭발 등으로 일대의 지형이 바뀌는 일은 사건으로 치지도 않는 것이 발할라라는 장소다.

클라우는 미소 지었다.

“개인적인 취향은 접어 둘 만한 소식이 들려왔으니까요.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더군요.”

“그게 무슨 소식이죠?”

“저와 같은 또래의 이가 벨제불과의 전투에서 살아남았다는 소식이요.”

붉은 시선이 핥는 듯이 한서리와 김건을 스치고 지나간다.

한서리는 짜증스럽게 되물었다.

“그 소식이 클라우 씨와 무슨 연관이 있는지 모르겠군요.”

“저는, 정신계 마법을 주특기로 사용하거든요.”

한서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클라우는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정신에 영향을 주는 마법을 다루는 자에게 벨제불은 그야말로 이상에 가까운 존재죠.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 이지를 무너트리고 인간을 지배하는 자니까요.”

날카로운 손톱이 톡톡톡- 탁자를 두드린다.

일정한 박자로 울리는 소리. 그 속에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런 자와 싸우고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별다른 부작용도 없어 보이는 사람이라니. 흥미가 가지 않을 수 없죠.”

프리드리히가 단순한 이유로 억지를 쓴 건 아닌 모양이다.

저쪽에는 발키리의 자리를 요구할 만한 명분이 있었다.

한서리의 시선이 이쪽을 향하자 사이먼은 한숨 쉬듯 말했다.

“안 그래도 그 건에 대해서는 자네들에게 미리 말하려고 했네. 클라우 양은 단순히 발키리일 뿐만 아니라 자네들이 어떻게 화신과 싸울 수 있었는지를 연구하고 조사하는 역할이 될 걸세. 그 이유를 밝혀내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면 큰 힘이 될 테니까 말이야.”

“그런 거라면 다른 사람들도 많지 않나요? 굳이 우리와 같은 또래의 인물을 발키리로 삼아 가면서까지 채용할 필요는 없다고 보는데요.”

잠자코 듣고 있던 프리드리히가 피식 웃었다.

“아무것도 모르는군. 현존하는 정신계 마법사 중에 클라우 양보다 뛰어난 자는 없어.”

사이먼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일세. 대외적인 활동을 하지 않아서 다들 잘 모르지만 정신계열 마법을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서는 꽤 유명해. 클라우 양은…… 훨씬 어렸을 때부터 사람을 완벽히 세뇌할 수 있을 정도의 마법을 다룰 수 있었다고 하더군. 그래서 영웅협회로부터 특수감시대상으로 지정된 것이고.”

“완전 세뇌가 가능하다고요? 어떻게?”

“재능…… 이라고 하더군. 이론보다는 감각에 기반한 마법을 사용하는 모양이야.”

한서리는 놀람을 숨기지 못했다.

일반적으로 정신계 마법을 사용해서 사람을 완벽히 세뇌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알려져 있었다.

미성숙한 정신체계를 지닌 어린아이 때부터 공을 들여 천천히 사람을 변화시켜 가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다.

일반적으로 정신계열 마법은 일순간에 작용해 사람의 정신에 영향을 주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즉발성이 없으면 기존의 최면 요법이나 기타 훈련 방법과 크게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클라우는 손가락을 튕겨 그 자리에서 한 사람을 자신의 노예로 만들 수 있는 인간이라는 것이다.

한서리가 놀란 것은 단순히 클라우의 능력 때문이 아니었다.

회귀를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클라우 같은 능력자의 존재를 몰랐다는 것.

그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인간을 세뇌할 수 있을 정도의 정신 제어 능력.

지능이 없는 티아마트의 권속이나, 완전히 지배당해 개인 의지가 존재하지 않는 벨제불의 권속에게는 통하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기린의 권속에게는 꽤 효과가 있었다.

굳이 세뇌가 아니라도 좋다. 정신 제어를 아군에게 사용해 공포를 잊게 만들거나, 감정을 고조시켜 몸에 걸린 리미터를 해제하는 등 버퍼로서의 역할만 해도 충분히 강력한 효력을 볼 수 있다.

이런 인재를 몰랐을 리가 없는데.

당연하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한서리가 높은 자리에 올라 강력한 정보력을 지니게 된 것은 꽤 훗날의 일이고, 설령 정보력이 있다 하더라도 모든 것을 다 알고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한서리는 이를 깨물었다.

불쾌했다.

자신이 그리던 계획에 생각도 하지 않았던 오물이 끼어들었으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금방 마음을 다스렸다.

“그 정도 능력이라면…… 발키리가 될 만한 합리성은 있군요.”

위기는 곧 기회.

예상외의 상황일수록 잘만 이용하면 큰 도움이 된 다는 것을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학습했기 때문이다.

줄 건 주고, 다음에 되로 돌려받으면 된다. 그녀는 빠르게 실언을 인정했다.

어디서 굴러 들어온 계집이 남편에게 이상한 짓을 하는 바람에 조금 흥분했다.

그 탓에 조금 불리한 위치에서 기 싸움을 시작하게 되었지만 상관없었다.

이 정도는 얼마든지 뒤집을 수 있는 자신이 있으니까.

그러나 그녀의 평정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클라우는 깍지 낀 손을 탁자 위에 올리며 앞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래서 말인데, 김건 님에게 정식적으로 연구 지원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뭐요?”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뾰족해졌다. 한서리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는 듯이 클라우를 쳐다보았다.

“화신전에서의 정신 상태와 관련된 연구 지원이라면 저도 할 수 있습니다. 저희 파티원인 세라스도 가능하고요.”

“아뇨, 제가 원하는 건 김건 님 한 명뿐입니다.”

“왜죠?”

“그가 제일 제 연구에 걸맞은 사람이니까요.”

클라우는 김건을 바라보았다.

“벨제불의 마기를 통한 지배는 방식만 다를 뿐, 마력을 이용해 인간의 정신에 직접적으로 간섭한다는 점에서는 일반적인 정신 제어 마법과 같아요. 그런데 마력을 지닌 인간은 본능적으로 외부에서 들어오는 마력을 차단하기 때문에 일반인보다 정신을 제어하기 힘들죠. 마력적성이 높을수록 그 힘도 강해져요.”

반짝이는 붉은 눈.

그곳에는 숨길 수 없는 선망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김건 님은 F급 마력적성자의 몸으로 벨제불의 정신 제어에 저항했어요. 그건 말 그대로 순수한 정신력의 힘이라고 할 수 있죠. SS급 마력적성자인 한서리 님이나 세라스 프레이저 님과는 이야기가 달라요. 저는 그 강함의 이유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이건 좀…… 힘들겠는데?’

김건은 그렇게 생각했다.

클라우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반론의 여지가 없는 순수한 정론.

거기에 이번에 사이먼은 정치적으로 다소 불리한 위치에 처해 있으니 나서서 일을 무마시켜 주지도 못할 것이다.

한서리는 말이 없었다. 아무래도 사이먼의 처지까지 생각해야 하니 머리가 복잡할 것이다.

클라우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는 선택지는 없다.

회귀, 그리고 기린과 관계된 아내의 비밀, 그 기술의 정체 등 김건의 머리에는 위험한 정보가 너무 많이 들어 있었다.

기억은 정신을 구성하는 아주 중요한 재료 중 하나다. 정신에 대해 분석하다 보면 기억 속의 정보들이 밖으로 흘러 나갈지도 모를 일이었다.

여기서는 어쩔 수 없다.

김건 자신이 직접 말할 수밖에.

개인적인 이유를 들먹이며 거절한다면 욕이야 조금 먹겠지만 요구 자체는 차단할 수 있을 거다.

마음을 정한 김건이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한서리가 그의 어깨를 잡았다.

안타까움이 담긴 미소와 함께 매끄러운 이야기가 입에서 흘러나왔다.

“무슨 말씀이신지는 잘 알겠습니다만…… 저희도 사정이 있어서, 그냥 지원을 해 드리긴 힘들 것 같습니다.”

클라우는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무슨 사정이요?”

“최근에 김건 님의 지원을 받아 저희 한씨 가문의 최신 버프 마법을 실험하고 있거든요.”

그러고 보니 최근에 에디의 기술을 접목하는 데에 아내의 버프 마법에 변형이 필요해서 한씨 가문의 연구실에 몇 번 들락거리긴 했었다.

김건은 아내의 임기응변에 감탄했다.

한서리는 미소를 지었다.

“클라우 님이 말한 대로 이 사람은 조금 특별하니까요.”

“…….”

그녀는 그간의 사실을 빌미삼아 만들어 낸 거짓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늘어놓았다.

“그런데 그 술식에 정신계열 마법도 조금 섞여 있어요. 아직 연구 중인 기술이라 밖에 노출하고 싶지 않습니다.”

클라우는 그 속을 떠보려는 것인지 유심히 한서리를 바라보았다.

한서리는 살갑게 웃으며 말했다.

“정 연구를 하고 싶으시다면 연구실에 언제 방문해 주시죠. 저희 기술부 참관하에서라면 연구를 진행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뭔가를 하려면 내 눈앞에서 해라. 그냥은 허락 못한다.

사파이어 같은 차가운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클라우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까지 폐를 끼칠 생각은 없습니다. 사정은 알았으니 일단은 아카데미에서 관찰하는 것으로만 연구를 진행하도록 하죠.”

드잡이질을 할 생각은 없었는지, 그녀는 깔끔하게 물러났다.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김건 님의 의향을 들어 봐야 하겠지만…… 파티장으로서 언젠가, 꼭 자리를 마련해 드리도록 하죠.”

진심이었다.

그 언젠가를 우주가 멸망하는 그날로 정해 놓긴 했지만 말이다.

그것으로 한서리와 클라우 베리스의 전초전은 막을 내렸다.

그들의 대화를 흥미롭게 지켜보던 사이먼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는 이후에 있을 클라우의 처우와 그녀가 발키리가 됨으로써 바뀐 몇 가지 사항들에 대해 설명을 해 주었고, 프리드리히와의 합의를 마친 뒤 미팅을 마쳤다.

밖으로 나온 김건은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물었다.

“대체 누구야? 혹시 당신은 알아?”

한서리는 고개를 저었다.

“몰라. 처음 보는 사람이야.”

김건은 입맛을 다셨다.

“결국에는 우리가 전혀 모르는 사람까지 나타났군.”

“사고가 많이 벌어지긴 했으니까.”

한서리는 그렇게 말하면서 휴대기를 꺼내들곤 어딘가로 문자를 날렸다.

오늘 밤에는 클라우 베리스라는 인물에 대해 대략적인 것을 모두 파악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한 것이다.

새로이 등장한 변수 때문에 당분간 머리가 아파질 것 같았다. 한서리는 한숨을 쉬며 휴대기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녀는 세상살이에 관심이 없는 남편을 위해 짧게 근황을 설명했다.

“계속 추이를 지켜보고 있는데, 확실히 기린과 벨제불은 타격을 입은 것 같아. 선계와 명계로부터의 게이트 발생 건수가 상당히 많이 줄었어.”

“좋은 현상이네.”

“그 대신, 투계(鬪界)의 게이트가 그 숫자를 메우기 시작했지.”

“티아마트가 움직이기 시작하나.”

김건은 아쉽다는 듯이 읊조렸다.

현재 한서리와 그의 목표는 마계의 침공을 완벽히 차단하는 것이 아니라 침공의 기세를 죽이고, 그것을 지키는 벽을 굳건히 해 느슨한 전쟁을 계속해서 이어 나가는 것이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미봉책이지만 그것도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다.

기린과 벨제불의 기세를 죽여 놨더니 이제는 티아마트가 날뛴다.

게이트 발생의 총량이 그대로라면 상황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고 보는 게 좋았다.

한서리가 이어 말했다.

“그리고 당신을 납치하려 한 이후, 마인협회의 활동이 완전히 멈췄어. 사방에 퍼져 있던 마교도들도 하나둘 붙잡히고 있고. 듣자 하니 교주가 갑자기 사라졌다는 것 같아.”

한씨 가문의 그룹 내 정보망을 손에 넣고 발할라의 정보부에도 발을 걸쳐서인지 정보 파악이 빠르다.

김건은 한서리의 위치를 재확인했다.

재벌가 딸에 세계 최고 군사 조직의 간부 후보라. 확실히 대단한 구성이긴 하다.

돈도, 인맥도 없어서 현역 때도 부족한 정보로 주먹구구 일을 해결해 오던 김건은 하늘 꼭대기에서 모든 것을 내려다보고 있는 아내의 시선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당신이 뭘 한 건 아니지?”

한서리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안 했어. 아직은 나도 준비가 덜 됐으니까. 그런데도 뭔가 변화가 생겼다는 건…… “

사파이어 같은 눈에서 빛이 번뜩였다.

“뭔가 꾸미고 있는 거야. 확실해.”

그렇게 말하는 한서리의 말에는 긴장이 서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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