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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56화 (56/200)

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 56화

“다녀올게. 나 없다고 다른 여자랑 놀러 다니지 말고.”

“그 여자의 미래가 불쌍해서 못해.”

한서리는 킥킥 웃더니 발꿈치를 들어 올려 김건의 볼에 키스를 했다.

그러곤 부쩍 얼굴을 자주 보이기 시작하는 부하 직원, 알리시아와 함께 게이트를 향해 걸어갔다.

최근에 한서리는 ‘파마의 번견‘이라 이름 붙인 헌터팀을 키우는 데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오늘도 인재를 스카우트하기 위해 전 세계를 누빈다고 한다.

한서리를 배웅한 김건은 그대로 발걸음을 돌려 그의 일상을 시작했다.

그가 발길을 향한 곳은 티리온 프레이저의 교수실이었다.

하지만 오늘도 교수실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어린 나이, 그리고 한창 실력이 좋은 현역이어서 그런지 티리온 프레이저는 굉장히 바빴다. 그는 쉴 새 없이 마계의 몬스터를 쫓아다녔으며 수많은 곳의 지원 요청을 받는다고 한다.

면담 신청을 한지 며칠이나 지났는데도 얼굴 한 번 못 봤을 정도.

김건은 한숨을 쉬며 건물을 빠져나왔다.

세라스도 수련을 더 하고 싶다며 에디를 쫓아 곤륜산에 틀어박혔고, 에드와 메리안도 최근에는 학업에 바빠 시간을 내지 못했다.

“오늘은 좀 쉴까.”

계획이 틀어졌지만 그는 딱히 아쉬워하지 않았다.

때는 기다리면 온다. 때로는 그렇게 비어 버린 시간을 여유롭게 즐길 줄도 알아야 한다.

돌이켜 보면 지금까지 너무 앞만 보고 달려왔다.

연구에 미쳐 밥 먹는 시간까지 아껴 가며 수련에 매달린 적도 있다. 긴 전쟁을 겪으며 닷새 가까이 한숨도 자지 않고 싸운 적도 있다.

김건은 이미 한계에 도달한 사람이었다. 스스로가 가진 재능, 가지고 있는 모든 능력과 자원을 극한으로 끌어다 쓰고 있다.

그런 그가 더 강해지기 위해 필요한 것은 몰입이 아니었다.

여유.

여유를 갖고, 시야를 넓혀 그동안 빼먹고 온 것이 있지 않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근래에 그는 교양 좀 쌓으라는 잔소리를 들어서 영화감상에 취미를 들였다.

아내와 같은 취미를 가졌더니 대화에도 더 활기가 돌아서 꽤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 곱게 돌아가 영화나 보면서 휴식을 갖자.

김건은 발걸음을 돌려 기숙사로 향했다.

풋풋하게 청춘을 불태우고 있는 아카데미의 생도들을 구경하며 평온한 마음으로 산책을 했다.

하지만 그 평온함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찰랑이는 검은 머리에 토끼 같은 눈을 깜박이며 다가오는 여생도 때문이었다.

“안녕.”

클라우 베리스가 눈앞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마주한 김건의 행동은 단순했다.

“안녕하십니까.”

가볍게 목례를 하며 살짝 비켜서서 관심 없다는 듯 갈 길을 간다.

이제 그녀가 누군지도 알고, 굳이 살갑게 대할 이유도 없으니 상대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김건은 적아 구분이 확실하고 아군에게는 친절하지만 적에게는 자비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클라우를 쳐다보지도 않고 앞길을 걸었다.

클라우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그의 옆에 따라붙었다.

“어? 그래도 돼? 나한테 이렇게 굴면 서리나 베이커 교수님이 곤란해질지도 모른다고?”

장난기 넘치는 목소리.

평소에 아내의 희롱에 시달리던 김건은 이런 것일수록 무반응이 좋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눈 하나 깜박이지 않는 김건을 본 클라우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렇게 나온단 말이지?”

잠시 후, 김건의 발걸음이 멎었다.

관리가 철저한 발할라 본섬에도 방치된 채 거리를 돌아다니는 고양이나 개가 있다.

주인에게 버려졌거나, 호기심에 밖으로 뛰쳐나와 야생의 삶을 사는 동물들.

그중 한 마리가 김건의 앞에 서 있었다.

“…….”

길고양이 한 마리.

김건이 멈춘 것은 그가 고양이를 좋아하거나 빼빼 말라서 지저분한 털을 늘어트리고 있는 고양이가 불쌍해서가 아니었다.

고양이는 피로 물들어 있었다.

전신을 가로지르는 찢어진 상처에서 흘러나온 핏줄기가 바닥을 적신다.

그 상처를 만든 것은 고양이 자기 자신이었다.

“캬아악! 키에에엑!”

고양이가 괴성을 질렀다.

녀석은 그러면서 한계까지 뽑아 낸 발톱으로 스스로의 몸을 할퀴었다.

어찌나 힘이 좋은지 한 번 몸을 할퀼 때마다 핏방울이 튀었다. 고통스러운 울음이 그 뒤를 따랐다.

꿈틀꿈틀,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자해를 이어 나간다.

불손한 마력의 흐름이 느껴진다.

김건이 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클라우 베리스를 쳐다보았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클라우는 스스럼 없이 순진한 미소를 지었다.

“아, 네 관심을 끌려고.”

정신 제어 마법으로 고양이를 자해시키면서 대답한다.

그 눈에는 한 점의 가책도 없었다.

김건의 눈매가 예리해졌다.

“장난이 너무 심한데.”

“그래도 시선을 끄는 데에는 성공했잖아? 자, 봐.”

그러면서 자신을 마주 보고 있는 김건을 가리켰다. 김건은 클라우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섬전.

번개 같은 주먹이 클라우의 턱을 치고 지나갔다.

예고도, 전조도 없었다.

그녀의 고개가 꺾였다.

“어?”

무릎이 흔들린다.

클라우는 풀썩 주저앉았다. 순간적인 뇌진탕으로 마법이 해제되었다.

김건은 자해를 멈추고 고통스러워하는 고양이의 앞에 앉았다.

상처를 확인한다. 수의사는 아니지만 전쟁터에서의 경험으로 부상을 판정한다.

출혈은 상당하지만 경상. 부상이 잦은 전위들은 항상 응급 처치 도구를 가지고 다닌다.

그는 허리춤에서 꺼낸 응급 키트를 고양이의 등에 붙였다.

영웅들이 몸에 새기는 각인처럼 진통과 지혈 효과를 지닌 마법이 작동했다.

정신을 차린 고양이는 비명을 지르며 골목을 달려 도망쳤다.

할 일을 마친 김건이 발을 옮긴다.

“그대로 가면 그 고양이는 죽어. 어쩌면 이 주변 고양이는 다 죽을지도?”

클라우가 비틀비틀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김건은 강철 같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지금 고양이 가지고 협박을 하는 거야?”

클라우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거야 내가 원하는 게 대단한 건 아니니까. 잠깐 말동무만 해 줘. 그럼 안 할게.”

“…….”

김건은 목석처럼 가만히 있었다.

아니, 가만히 있는 게 아니다.

클라우는 오싹함을 느꼈다.

탐색당하고 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어디가 약한지, 어디를 건드리면 죽을지.

무감정한 맹수의 눈이 조용히 움직였다. 지금 김건의 머릿속에서 그녀가 몇 번 죽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괜찮았다. 이대로 죽는 것도, 제법 재미있을 것 같으니까.

클라우는 웃었다. 침묵하는 김건에게 말했다.

“그럼 승낙한 걸로 알게.”

치마에 묻은 흙을 털어 내며 옆의 벤치에 앉았다. 그녀는 물끄러미 김건을 올려다보았다.

“좀 앉지?”

“……십 분만이다.”

김건은 클라우의 옆에 앉았다. 클라우는 빙글빙글 웃으면서 금강석 같은 남자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왜 그냥 가 버리지 않은 거야?”

“무슨 소리지?”

“사실 고양이 따위가 얼마나 죽든 알 바 아니잖아. 엄청 싫어하면서도 이야기에 어울려 준 이유가 뭐야?”

자기가 그것을 이용해 놓고 물어보다니, 김건은 대답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하는 꼴을 보아하니 입을 다물어 봐야 더 귀찮아지기만 할 뿐이다.

“네가 말했듯, 조금 어울려 주는 게 고양이 목숨보다 나으니까.”

“정 그러면 차라리 날 죽여 버리면 되잖아?”

사고를 따라갈 수가 없다.

“넌 나를 싫어하고, 네가 싫어하는 짓을 하는 게 나니까. 날 죽이면 되는 거 아니야? 너한테는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 텐데.”

궤변으로 가치관을 흔들고 있다.

기시감이 느껴졌다.

김건은 근래에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그의 표정이 매서워졌다.

“그걸 물어보는 이유를 모르겠는데? 답해 줄 이유도 없고.”

“별거 아니야. 그냥 난, 네 생각이 궁금할 뿐이야.”

어설프게 생각을 해서 대답하면 오히려 그것이 족쇄가 된다.

무가의 자손으로서, 그리고 화신을 상대하기 위해 정신을 단련해 온 김건은 이럴 때 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뭔지를 알았다.

그는 그냥 솔직하게 물었다.

“왜 내 생각이 궁금한데?”

“그거야, 네가 좋으니까.”

“왜 날 좋아하지? 우리는 만난 적도 없는데.”

“꼭 그런 건 아니지. TV속 연예인을 직접 만나 봐서 좋아하는 건 아니잖아?”

반짝거리는 붉은 눈이 김건을 향했다. 대화가 성립하기 시작하자 폭죽 같은 질문이 터져 나왔다.

“어떻게 그렇게 강해진 거야? F급 마력적성자가 그렇게 강한 건 완전히 반칙이잖아. 왜 그렇게 노력했어? 부모님을 죽인 몬스터에게 복수를 하고 싶어서? 서리랑은 무슨 사이야? 좋아해? 결혼했어?”

클라우는 정말로 TV속으로만 바라보던 우상을 발견한 소녀마냥 얼굴을 가까이 해 왔다.

어떨 때는 능구렁이 같다가도 어떨 때는 어린아이 같다. 지금의 행동이 진심인지 연기인지도 알 수 없다.

“…….”

정신계열 마법을 다루는 인간들은 이래서 피곤하다. 드물지만 전생에서는 몇 번 경험해 본 적이 있다.

김건은 한숨을 쉬었다.

“질문이 너무 많아. 하나씩 말해.”

“알았어.”

클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달아오른 뺨을 양손으로 치더니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어떻게 그렇게 강해졌어?”

“열심히 노력했어.”

“아카데미에 들어온 이유는 뭐야?”

“더 강해지고 싶어서.”

“강해지려는 이유가 뭔데?”

“지키고 싶은 걸 지키지 못했을 때 얼마나 좆같은 느낌이 드는지 아니까.”

“한서리와 함께 있는 이유는?”

“좋아하니까.”

“왜 좋아해?”

“말로는 설명 못해.”

“서리가 부탁하면 들어줘?”

“납득되는 부탁이라면.”

“서리가 죽으라면 죽을 거야?”

“아니.”

“납득해야만 부탁을 들어 준다면 남이랑 뭐가 달라?”

“정확히 집어서 말할 이해도가 없어.”

“그럼 나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

“좋아해.”

마지막 대답은 김건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김건은 물끄러미 클라우를 바라보았다.

손가락을 코 밑에 대고 킥킥 웃는 클라우가 보였다. 클라우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했다.

“어때? 잘하지? 복화술까지 할 수 있어.”

작게 벌어진 그녀의 입술 사이로 김건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잔재주가 많군.”

마법으로 정신을 흔들면서 복화술과 성대모사로 혼란까지 주면 어지간한 사람은 금세 당황해서 정신 방벽을 열어 줄 것이다.

하지만 김건에게는 먹히지 않았다. 고개를 흔들었다. 머리를 감싸고 있던 마력이 가볍게 흩어져 나갔다.

“소용없어. 나한테 어지간한 정신계열 마법은 안 통하니까.”

김건이 몸을 일으켰다. 클라우가 말했다.

“어디가? 아직 십 분 안 지났는데?”

“네가 약속을 어긴 거야. 난 대화를 해 주겠다고했지, 네 기술에 걸려 주겠다고 한 적 없어.”

그래도 최소한도의 신용은 유지할 생각은 있었는지, 클라우는 반박하지 않았다. 김건은 가기 전에 그녀를 돌아보았다.

“미리 경고해 두는데, 내 관심을 끌겠다고 또 이상한 짓을 하면…… “

“안 해.”

클라우는 웃었다.

그것은, 지금까지 그녀가 짓던 웃음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미소였다.

“더 이상, 너한테 미움받고 싶지 않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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