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 66화
충격이 모두를 휩쓸었다.
“말도 안 돼!”
누군가가 비명을 질렀다.
노바가 숨을 토하고, 세라스가 입을 막았다.
에디는 욕지거리를 했으며 김건마저도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리고 한서리는, 흉신악살처럼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클라우의 뒤에는 두 사람이 공손한 자세로 서 있었다. 한 사람은 검은 로브를 전신에 걸쳐 얼굴조차 보이지 않았고, 한 사람은 꽃처럼 청초한 금발의 미녀였다.
마인협회의 간부인 박사와 레이나 아레이드다.
박사가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씩씩 숨을 고르며 한서리 일행을 내려다보고 있던 본 드래곤이 고개를 숙여 턱을 지면에 갖다 댔다.
클라우와 두 마인은 가볍게 그 위에서 뛰어내려 땅에 발을 디뎠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남자와 여자, 아스타로트와 사쿠라 마이가 그 뒤에 도열했다.
한 소녀와 그 뒤에 나란히 선 네 명의 마인.
거기에 아수라를 상대하기 위해 데려간 병력들을 모조리 죽이고 되살린 모양인지, 스물이 넘는 데스나이트가 주변을 포위하고 있었다.
에디는 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본 것은 처음이지만 계속해서 발할라 내부의 첩보를 들었던 그는 클라우의 뒤에 서 있는 것이 마인협회의 간부들이라는 걸 알아보았다.
계속해서 그림자 속에 숨어 인류를 위협하던 마인협회의 총 전력이 눈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그것을 이끌고 있는 것은 신격까지 뿜어내고 있는 아카데미의 발키리였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서 이런 일이 생겼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하나는 확실했다.
‘좆됐군.’
화신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신격을 가진 오메가 몬스터에, 그 뒤편에 나란히 서 있는 네 명의 마인협회 간부.
그중 셋은 언뜻 보아도 발할라의 교수급의 실력을 가진 것처럼 보였다.
그 외에 본드래곤이나 데스나이트로 되살린 S급 전위들의 전력은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별다른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이 자리에 있는 모두는 죽을 것이다.
변수가 있다면 딱 하나.
갑자기 나타난 이 이상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은 유일한 인물이었다.
‘이 녀석…… 뭔가를 알고 있군.’
에디는 그렇게 생각하며 온몸으로 노기를 뿌리는 파란머리의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한서리는 무시무시한 눈으로 클라우를 쳐다보며 말했다.
“너, 진짜 미친년이구나?”
뒷일을 생각하니 뭐니 할 상황이 아니었다.
남편과의 여행 막바지에서 만난 벨제불의 화신.
그 정체가 클라우 베리스일 거라는 가정은 이전부터 있었다.
벨제불의 화신이 마인협회를 수족처럼 부리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니, 그에 대해서도 대비해야 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을 앎에도 한서리가 클라우를 가만히 내버려 뒀던 것은, 티아마트의 반신이 나타나려 하는 지금은 둘이서 싸우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가만히 내버려 두면 똥오줌도 못 가리는 생각 없는 년이 판을 그냥 뒤엎어 버렸다.
“티아마트가 나타나면 이 세계 사람들은 다 죽어. 거기에 너희들은 빠질 것 같아?”
그 말에 클라우 베리스는 씨익 웃었다.
“괜찮아. 내가 여기에 온건 너희들을 다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니까.”
정체를 드러낸 검은 머리의 여자는 우후훗, 매혹적인 미소를 흘렸다.
“그래도 나름대로 대비는 해 놨던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감시를 붙여 뒀더군. 내가 이럴 거라고 예상 정도는 했나 봐?”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한서리의 옆에서 전투태세를 갖추는 김건과 세라스를 바라보았다.
원래는 아무도 예상 못할 기습으로 우위를 틀어쥐려 했는데, 언제부터인가 근처에 잠복해 있던 김건과 세라스가 나타난 탓에 계산이 틀어져 버렸다.
한서리는 대답하지 않고 이를 깨물었다.
그것은 그저 보험이었다.
그녀는 모든 변수를 제 손에 놓고 통제하기를 원했고, 그 변수에는 아수라의 향방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만약 아수라가 클라우의 파티를 노려서 퇴치당한다면 앞으로의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
그녀는 몰래 김건과 세라스에게 지시해서 두 사람을 클라우의 파티에 붙였다.
미끼 역을 자처한 전위의 실력에 김건과 세라스, 두 전사의 투기까지 더해지자 아수라는 그 전력에 위협을 느꼈고, 자연스레 에디가 기다리고 있는 한서리의 파티를 습격 대상으로 정하게 된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혹시 모를 클라우의 돌발 행동을 감시하는 것도 있었던 것인데…….
그게 이런 결과로 다가올 줄은 몰랐다.
티아마트의 강림이라는 막대한 재앙을 코앞에 둔 상황.
원수고 나발이고 모두가 힘을 합쳐야 할 그 위기 속에서 클라우 베리스라는 이름의 병신이 미쳐 날뛰며 등을 찌른 것이다.
한서리 입장에서는 욕이 안 나올 수가 없었다.
클라우가 말했다.
“내가 원하는 건 하나뿐이야. 김건의 신병을 넘겨. 그러면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물러나 주지.”
“김건?”
뜬금없는 요구에 에디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새된 외침이 들렸다.
“그건 안 돼!”
하얗게 질린 세라스가 그렇게 외쳤다.
그녀가 왜 그렇게 소리쳤는지 눈치챈 노바의 얼굴 역시 심각한 빛으로 물들었다.
두 사람은 김건이 가진 진정한 가치를 알았다.
신을 멸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
그토록 중요한 존재가 정체 모를 적의 손에 넘어가게 된 다면 인류는 끝이다.
그들이 뭔가 알고 있음을 직감한 에디가 노바의 어깨를 잡았다.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하라는 눈빛.
정보를 숨기고 있을 때가 아니다.
이미 사이먼 등에게 그 정체가 알려져 버렸기에, 이전에 맺었던 기린의 계약은 해제된 상태였다.
노바는 한마디로 에디에게 상황을 납득시켰다.
“토너먼트에서 화신을 소멸시킨 건 김건이에요.”
“엉?”
이 상황에서 대체 무슨 헛소리를 하냐는 표정을 짓는 에디.
그러나 노바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다는 걸 깨닫고, 근래 들어 간부들 사이에서 흐르는 미묘한 분위기와 왠지 모르게 김건을 끼고 도는 사이먼의 태도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임을 알아챈 순간.
에디의 사고가 멈췄다.
전위의 기술로 화신을 소멸시켰다.
그 사실이 갖는 의미에, 일평생을 주먹에 살고 주먹에 죽었던 남자는 일생을 회고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평생 동안의 공부로 지구를 평평하다고 결론 내린 고대의 학자를 로켓에 태워 위성 궤도까지 쏘아 올린 뒤, 파랗게 빛나는 구체를 가리키며 ‘자, 저게 네가 평평하다고 말하던 지구야.’라고 말해 준 꼴이었다.
노바는 자랑스러워해도 될 것이었다.
말 한 마디로 이 세상 최강의 전사 중 하나를 십여 초동안 정신 놓게 만들었으니까.
“이런 미친 새ㄲ……!”
고함을 지르던 에디가 우악스러운 손으로 스스로의 턱을 움켜쥐었다.
충격을 받았든 뭐든 지금 그걸 따질 때가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일순간에 평정을 되찾지는 못했다. 그는 경악한 시선으로 김건과 클라우를 번갈아 보았다.
“흥.”
전혀 쓸데없는 말이 오가는 것 같지만 잡것들이 무슨 생각하는지는 알 바 아니다.
클라우는 코웃음을 치며 그저 한서리만을 바라보았다.
한서리는 이를 악물었다.
이건 그냥 어린애의 발악이다.
많은 걸 생각하며 움직이는 어른들과 달리, 어린애는 원하는 것이 있으면 앞뒤 가리지 않고 그것만을 보며 달려든다.
다만 이번의 경우에는 그 어린애가 가진 힘이 너무 크다는 게 문제였다.
아무 생각 없이 휘둘러지는 힘.
그것은 이미 재앙과 다를 바 없었다.
남편을 넘긴다는 선택지는 없다.
그것은 그녀의 가치 판단에 있는 절대적인 기준이다.
하지만 아무 생각 없이 말을 뱉어 버리면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이 죽는다. 그건 인류에게도 엄청난 피해가 될 것이었다.
클라우 베리스라는 인물을 너무 과대평가했다.
사고를 칠 거라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로 생각이 없을 줄은 몰랐다.
한서리는 흘끗 눈을 돌려 옆에 있는 알리시아를 바라보았다.
알리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입가에 침이 말랐다.
한서리는 그동안 많은 것들을 준비해 왔다. 지금 부족한 것은 오로지 시간뿐이었다.
조금이면 된다. 2분, 혹은 3분.
그 정도 시간이면 상황을 뒤집을 수 있었다.
클라우가 말했다.
“빨리 결정해. 큰 결정임을 감안해 30초 주지. 그때까지 결론을 내리지 못한다면 여기서 너희를 다 죽이고 김건을 데려가겠어.”
크윽- 하고 한서리가 입술을 깨물었다.
위기에 몰린 머리가 무서운 속도로 돌았다.
일단은 대화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 수 있는 것은 뭐라도 입으로 내뱉어서 혼동을 주는 것뿐이다.
그렇게 판단한 한서리가 뭐라도 말하려는 찰나였다.
침착한 목소리가 깔렸다.
“그렇게 고민할 필요 없어. 거절해.”
김건이 앞으로 나섰다.
클라우의 파티와 벌인 초전으로 상처투성이가 된 몸을 그림자의 갑옷이 감쌌다.
그의 등에 박힌 각인이 작동하며 하얀 서리가 검은 갑옷의 위에 아우라처럼 서렸다.
“와르르 몰려와서는 죽기 싫으면 원하는 걸 내놓으라니, 그런 짓거리를 못하게 하려고 기술을 연마하는 거지.”
말릴 틈도 없이 마인협회와 본 드래곤의 비호를 받는 클라우에게로 걸어가는 김건.
그의 앞으로 한 남자가 튀어나와 앞을 가로막았다.
트레이드마크처럼 입고 다니는 청바지에 가죽 재킷. 그리고 금속 재질 액세서리를 주렁주렁 단 쾌남, 아스타로트였다.
평범한 체격을 가진 김건과 달리 아스타로트의 키는 190센티를 넘었다. 갑옷 안쪽의 시선이 살짝 올라가며 김건이 물었다.
“그런 불합리를 깨부수기 위한 게 무(武)라고 생각하지 않나?”
아스타로트는 피식 웃었다.
“영감태기처럼 고리타분한 소리군. 난 그저 싸움이 좋을 뿐이야. 되도록 강한 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하지만 결국 나보다는 약한 놈이 좋지. 그런 놈의 자신감을 박살 내 주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기분이 좋아지거든.”
“짐승 수준의 사고방식이군. 고양이들이나 다 잡은 사냥감을 장난감 삼아 가지고 놀지.”
비웃는 어조가 갑옷의 틈새로 새어 나왔다.
“그러니까 마인이 되었는데도 실력이 그 정도인 거야.”
경박한 남자의 입가에 위험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럼 한 수 가르쳐 주시죠. 선생님.”
젊은 두 남자의 시선이 부딪혔다.
긴장감이 증폭. 극한에 달한 두 전사의 살기에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불꽃이 튀는 것 같았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양쪽의 선택권을 쥐고 있는 한서리와 클라우가 가만히 있었기 때문이다.
한서리는 김건의 실력에 절대적인 신뢰가 있었다.
그녀의 상상에 남편이 지는 모습은 없었다.
여기서 남편이 적의 기세를 꺾어 주면 상당한 시간을 벌 수 있으니 말릴 이유가 없었다.
클라우는 현재의 전력 차에 자신이 있었다.
여기서 아스타로트가 김건을 이기면 일은 훨씬 쉬워질 것이고, 설령 지더라도 지금의 우위가 꺾일 만한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한 양자의 합의하에, 서로의 선봉이 충돌했다.
선수를 친 것은, 아스타로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