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 72화
“기침하셨습니까.”
찢어진 조각을 대충 던져 버리며 침대에서 내려오니, 문이 열리며 레이나 아레이드가 나타났다.
그녀는 마치 시종처럼 클라우의 시중을 들었다. 옷을 입히고, 머리칼을 정리하며 간단한 식사를 내 왔다.
클라우가 식사를 마치자 레이나는 조용히 주변에 흩어져 있는 쓰레기들을 주섬주섬 담아 모으더니 쟁반에 담아 물러나려고 했다.
그런 그녀를 클라우가 멈춰 세웠다.
“이리 내놔.”
다짜고짜 말하더니 불쑥 손을 뻗어 쟁반 위에 담긴 찢어진 조각을 뒤진다.
그녀는 금방 그 안에서 김건의 모습이 그려진 부분을 찾아냈다.
고의인지 우연인지, 그가 있는 부분은 상처 하나 없이 멀쩡했다.
레이나가 조금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버리시지요. 어차피 다른 사진도 많으니…… “
클라우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찾아 낸 사진 조각을 다시 화장대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싸늘한 눈으로 레이나를 바라보았다.
“나가.”
“…….”
레이나는 잠시 조용히 서 있다가 꾸벅 머리를 숙이곤 조심스럽게 물러났다.
잠시 후, 박사가 들어왔다.
더 이상은 정체를 숨길 필요가 없기에 두꺼운 후드를 벗고 얼굴을 드러낸 채였다.
“잘 주무셨습니까.”
“그래.”
발할라에서 봤을 때는 욕심으로 똘똘 뭉친 구두쇠처럼 보였는데, 지금은 무슨 속세에 초탈한 현자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하지만 클라우는 그것이 원래 그의 모습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프리드리히 하이데거는 가볍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레이나가 마음에 안 드십니까?”
클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까짓 게 뭐라고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 해.”
“아가씨께 건 기대가 커서 그렇습니다.”
“웃기는군. 광신자 주제에.”
프리드리히는 그 어조에서 클라우의 상태를 읽었다.
“기분이 안 좋으십니까?”
그 말에 클라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녀는 이를 악물며 가슴팍을 쥐어뜯었다.
“……가슴이 아파. 그날, 그 표정을 본 이후로.”
레이나라면 그녀의 우상이 보이는 빈틈에 얼굴을 굳혔을 것이다.
마이는 도망쳤을 것이고, 아스타로트는 짓궂은 농담이라도 건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박사는 달랐다. 오래전부터 클라우를 알았던 그는 그저 차분히 물었다.
“후회되십니까?”
“……아니, 어차피 평범하게 굴어서는 아무것도 안 될 거야. 할 수밖에 없었어.”
“그럼 됐습니다. 후회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그건 가치가 있는 선택이었던 겁니다.”
“…….”
그 말을 곱씹는 건지, 아니면 다른 생각을 하는 건지 클라우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래도 가슴의 통증은 멈췄는지 표정이 풀렸다. 그녀는 평소처럼의 모습으로 돌아와 물었다.
“김건의 위치는 찾았나? 한서리는 발할라로 복귀한 것 같던데. 그 사람을 대체 어디에 두고 온 거지?”
박사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못 찾았습니다. 이미 저희가 가진 정보망을 벗어났어요. 사람의 흔적이 있는 곳이 아닌 건 거의 확실합니다.”
실패를 보고하는 것치고는 침착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클라우는 그를 나무라지 않았다.
아직 그의 말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읽었기 때문이다.
“곧 찾을 겁니다. 발할라가 움직이기 시작할 테니까요.”
그렇게 단언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신뢰가 묻어 있었다.
* * *
김건은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투명 마법이 걸려 있는 장벽 너머로, 짙푸른 하늘이 넘실넘실 흐르고 있었다.
빛이 극도로 적다. 검은색과 푸른색이 뒤섞인 사위로 진녹색의 해초가 흐느적거리며 일렁이고, 형형색색의 산호초 사이로 은색으로 반짝이는 물고기 무리가 와르르 떼를 지어 움직였다.
김건은 바닷속에 있었다.
알리시아의 은신처는 놀랍게도 대서양 어딘가의 해저동굴이었다.
하늘을 날던 그녀는 위성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비구름이 잔뜩 낀 하늘 아래로 숨어든 뒤 곧바로 잠수. 수많은 보조 마법을 이용해 바닷속을 유영해 여기까지 흘러 들어왔다.
‘여길 찾아내는 건 발할라 본섬을 찾는 것만큼이나 어렵겠군.’
김건은 그렇게 생각하며 침대 옆의 구멍으로 들어갔다. 아래쪽으로 수 미터나 이어져 있는 긴 통로를 사다리를 타고 내려간다.
그리고 그가 착지한 곳에는 거대한 공동이 있었다.
높이 수십 미터, 넓이는 수백 평방미터가 될 법한 커다란 공간이었다.
그 한편에 몸을 웅크리고 잠들어 있는 거체가 있었다.
몸 전체를 덮는 막대한 날개. 몸을 들썩일 때마다 빨간 비늘이 물결치고 콧김을 뿜으니 후욱- 불꽃과 열풍이 같이 몰아쳤다.
레드 드래곤, 알리시아 비칸테르의 본체였다.
하지만 그 큰 몸집도 공동의 절반밖에 차지하지 못했다. 남은 절반의 부분은 놀랍게도 한 건물로 메워져 있었다.
동굴 벽을 한쪽 면 삼아 지어진 건물.
문을 열자 대리석으로 된 복도가 깔려 있었다. 천막과 장벽 등으로 방이 구분되어 있으며 군데군데 조명이 박혀 대낮처럼 불을 밝히고 있었다.
그 작업들을 다 누가 했는가 하니, 마침 지나가던 길에 딱딱한 돌바닥을 평탄하게 만드는 작업을 하는 이가 있었다.
인기척을 느낀 작업자가 고개를 돌렸다.
작업복을 걸친 금발의 여자.
짧게 쳐 내린 단발에 백치 같은 표정을 하고 있으나 그것은 분명 헌터 행세를 하던 알리시아의 모습을 그대로 빼닮아 있었다.
“…….”
그녀는 김건을 보더니 이내 관심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려 작업을 재개했다. 김건 역시 인사조차 건네지 않고 그녀를 지나쳤다.
그녀, 아니 ‘그것‘이 아무런 의식도 가지지 못한 인형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가는 동안 몇 번이나 알리시아를 닮은 사람들을 마주쳤지만 김건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복도를 지나쳐 커다란 홀의 문을 열어젖히며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그가 들어간 곳은 널찍한 거실이었다.
한편에는 마법의 불길을 담은 화로가 있고, 부드러운 카펫이 바닥에 깔려 있었다. 여러 가지 가구와 소품이 놓여 있어 전체적으로 귀족의 집이라는 분위기가 풍겼다.
그 가운데에 놓인 소파에, ‘진짜’ 알리시아 비칸테르가 누워 있었다.
“왔나.”
무언가를 보고 있던 알리시아는 흘끗 그를 눈짓하더니 다시 눈앞에 있는 전자식 터치 패널로 시선을 돌렸다.
인간의 것, 이 세상의 것임이 분명할 터치 패널의 화면은 문자로 빼곡했다.
거실의 한구석은 주방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곳의 냉장고에서 먹거리를 찾은 김건이 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며 물었다.
“오늘 보는 소설은 재미있으십니까?”
알리시아는 터치 패널에 고개를 고정한 채 말했다.
“재미있어. 확실히 인간들은 명이 짧아서 그런지 애정 관계가 상당히 난잡하고 과격하군. 꽤 흥미로워.”
김건은 요리를 시작했다. 메리안과 어울리는 아내를 지켜보다 보니 그도 어느새 요리가 많이 늘었다.
김건은 금세 밥을 볶고 지단을 부쳐 오므라이스 2인분을 뚝딱 만들었다.
알리시아의 맞은편에 앉으며 그녀의 앞에도 따뜻한 김이 올라오는 요리를 놓아 주었다.
김건은 고슬고슬한 밥알을 입안에 욱여넣으며 말했다.
“인간들의 소설은 대체 언제부터 보기 시작한 겁니까?”
분신도 영양분의 흡수는 가능하다. 알리시아는 식사를 하며 대답했다.
“처음 접한 건 3년 전이었던 것 같군.”
“3년 전이요? 이 세상으로 넘어온 건 언제인데요?”
금발벽안. 알리시아의 분신은 그림으로 그린 듯한 엘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마법으로 가리지 않은 귀가 길게 뻗어 있다. 파란 눈이 조금 찌푸려졌다.
알리시아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나한테 정보를 캐려는 건가? 소용없다.”
“그냥 궁금해서 그러는 겁니다. 정 그러시면 저라도 뭔가 정보를 풀어 볼까요? 알고 싶은 게 있으십니까?”
그 말은 진심이었다.
김건은 그의 아내처럼 겉과 속을 따로 구분해서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내심을 감추거나 기만책을 취하는 건 오로지 적을 눈앞에 두었을 때뿐이다.
같이 지내는 며칠간 몇 번이나 질문을 했지만 알리시아는 여전히 김건을 못마땅한 듯이 바라보며 대답을 피해 왔다.
오늘도 허탕인가 싶어서 그냥 밥이나 퍼먹는데, 갑자기 알리시아가 말했다.
“이 음식, 이름을 뭐라고 하지? 제법 입맛에 맞는군.”
“오므라이스라고 합니다. 흔한 음식인데, 아직 안 드셔 보셨습니까?”
“난 고기를 좋아해. 이런 소소한 요리는 굳이 찾아본 적 없어. 그래도 이건 맛있군. 실력이 꽤 괜찮은데.”
“최근에 아내한테 배웠습니다. 아내가 요즘 요리에 관심이 많거든요.”
한서리를 언급하는 순간 알리시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팀장님, 아니 기린 님은 대체 왜…… “
불쑥 튀어나오는 말을 애써 끊는 알리시아.
김건은 무슨 일 있냐는 듯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았다.
알리시아 역시 그를 마주 보았다.
그녀가 인정한 주인이 싸고 도는 한 인간을 꿰뚫어 본다.
별생각 없이 무던한 남자.
빼어난 외모도, 넘치는 재기도, 강렬한 카리스마도 없다.
제법 실력은 있다지만 그래 봐야 인간. 알리시아의 입장에서는 그저 먹기 까다로운 사냥감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녀는 벨제불의 화신에게 습격을 받았을 때 그가 보인 일순간의 무력을 기억하고 있었다.
믿기 힘들지만 이전에 나타난 벨제불의 화신을 소멸시킨 것 역시 그라고 했다.
김건에게는 ‘깊이’가 있었다.
그 크기는 작을지언정, 인간보다 명백히 상위 개체인 알리시아라도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었다.
같이 일상을 겪으면서 본 그의 평범한 모습이 오히려 그가 갖고 있는 보물을 더욱 상기하도록 만들었다.
‘이제 슬슬, 인정할 때도 되었나.’
낮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알리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맛있는 식사의 대가로 대답해 주지. 뭘 알고 싶나?”
“……?”
김건은 잠깐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왜 마음이 변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기회가 왔으니 일단 물었다.
“이 세상으로 넘어온 게 언제입니까?”
“이곳에 온 지는 5년쯤 되었다. 그리 긴 세월은 아니지.”
“왜 넘어왔죠?”
알리시아는 팔짱을 끼며 흠- 콧소리를 흘렸다.
“세 마신 중 기린의 권속이 다른 신들의 권속과 다른 점이 뭔지 아나?”
김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로지 마신의 명령과 욕구에만 따라 움직이는 다른 권속들과 달리 자기 의지를 갖고 있다는 거죠.”
“맞아. 우리는 기린 님의 권속이고, 그분의 세상에 속해 그분을 따르지만 그뿐이다. 기린 님은 기본적으로는 우리에게 무언가를 요구하지 않아. 그저 우리들이 사는 모습을 관찰하고 지켜볼 뿐이지.”
그 정도는 김건도 알고 있었다. 굳이 미래의 정보를 꺼낼 필요도 없이, 마계에 대해 깊게 공부를 한 사람이라면 대부분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좋은 것 아닙니까? 기린의 비호를 받아 다른 마신들로부터 보호받으며 당신들의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지 않습니까.”
“그래, 좋지. 하지만 기린 님이 책임져 주시는 건 오로지 그것뿐이야. 다른 마신의 개입을 제거하는 것. 그 외의 문제는 모두 우리의 몫이지. 자기 의지의 대가로 우리는 스스로 벌인 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자유에 따르는 책임.
그것은 인간에게도 익숙한 주제였기에, 김건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건…… 너무 당연한 것 아닙니까?”
알리시아는 쿡, 하고 웃었다.
“그래, 당연한 일이지. 나도 그렇게 쉽게 이야기하고 싶다.”
하지만 그 미소는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내 고향이 멸망의 위기에 처해 있는 것만 아니라면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