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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76화 (76/200)

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 76화

“그게 무슨 소리야?”

“……예?”

난데없는 말에 아서와 티리온이 어처구니없다는 목소리를 냈다.

스칼렛은 거친 싸움에 난장판이 된 머리칼을 정리하며 말했다.

“저번에 에디 그 멍청이가 말했잖아. 벨제불의 화신이 기습을 했을 때, 기린의 화신과 이 드래곤이 도와줘서 살았다고.”

티리온이 답했다.

“그건 그렇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판단할 수 없으니 일단 적으로 판단하자고 프레데리카 교수님이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건 나도 알아. 하지만 노제 언니는 이제 책임을 져야 하는 입장이니까 그렇게 이야기한 거지. 직접 이놈을 만나 본 것도 아니고.”

스칼렛은 조금 웃는 낯으로 티리온을 돌아보았다.

“어른들 말만 들어서 일이 되겠어? 도련님?”

교수진의 문제아인 스칼렛이나 에디가 얌전한 막내인 티리온에게 농을 하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이었다.

티리온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들의 대화를 듣던 아서가 말했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그래서 뭘 어떻게 하자는 거야?”

“이제부터 생각해 봐야지.”

아무 생각 없는 답변에 강철 갑주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티리온이 첨언했다.

“시간을 주면 기린의 화신이 나타날지도 모릅니다.”

일리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건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스칼렛은 생각에 잠겼다.

농담처럼 말하긴 했지만 지금은 엄청나게 중요한 국면이었다.

이 기린의 권속은 인간과 말이 통했다. 몸을 던져서까지 김건을 지키려는 걸 보니 나름의 명분도 있는 듯싶었다.

즉, 협상 대상으로서의 조건이 성립한다.

세 마신이 서로 못 죽여서 안달인 사이라는 건 모두가 알고 있다.

적의 적은 아군이라, 어쩌면 티아마트를 상대하는 데에 도움이 될지도 몰랐다.

잠시 고민하던 스칼렛이 아서에게 말했다.

“구속구를 꺼내.”

그 의미를 깨달은 아서가 서브 모듈을 호출했다.

서브모듈이 배출한 금속 상자가 쿵- 소리를 내며 지면에 떨어졌다.

일시적으로 동력을 마력에서 전력으로 변환한 아서가 상자를 여니, 그 안에는 두꺼운 쇠사슬이 뱀처럼 또아리를 튼 채 놓여 있었다.

마력을 흡수하는 금속, 리빙메탈로 만들어진 구속구였다.

스칼렛은 그것을 가리키며 말했다.

“협상의 여지를 주지. 아까처럼 소형화해서 이걸 차. 그리고 투항해. 그럼 목숨은 살려 줄게. 나머지 이야기는 돌아가서 천천히 해 보자고.”

스칼렛의 결론은 단순했다.

약간의 위험은 감수한다. 대신 결정적인 판단은 보류하고 기회를 연장한다.

이대로 드래곤을 데리고 가서 더 높은 책임자들과 대면하게 하는 것이다.

아서가 말했다.

“발할라로는 못 가. 슬레이프니르로 가서 베이커 교수와 프레데리카 교수를 부르자고.”

“그 정도는 알고 있어.”

스칼렛은 고개를 끄덕이며 알리시아를 쳐다보았다.

알리시아는 물끄러미 눈앞에 놓인 구속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도 알 것이다. 소형화된 상태에서 저만한 양의 리빙메탈에 둘러싸이면 제대로 운신조차 할 수 없을 거라는 걸.

그건 한마디로 모든 신병을 인간에게 넘기는 것을 의미했다.

스칼렛이 손을 들었다.

“빨리 결정해. 5초 센다.”

“…….”

“5, 4, 3, 2…… 1.”

드래곤은 침묵했다. 스칼렛은 한숨을 쉬었다.

“아쉽네. 잘 가.”

짧은 유예가 끝났다.

아서는 바로 전면에 충격파를 막을 방벽을 생성하며 기폭 스위치를 눌렀다.

폭탄은 터지지 않았다.

대신 녹아내리듯이 금속 조각이 되어 흘러내렸다.

강철의 갑옷이 순간적으로 어깨를 움찔거렸다.

“무…….”

무슨, 이라고 놀랄 틈도 없었다.

웅, 하고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디선가 갑옷의 틈새로 흘러들어온 충격이 그의 머리를 때렸다.

암전.

순식간에 강철 갑옷의 전원이 꺼지며 침묵.

“위험해요!”

티리온이 훌쩍 뛰어오르며 보이지 않는 공격을 피했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반응이 느린 스칼렛은 아서와 똑같이 머릿속에서 터지는 충격을 정면으로 얻어맞아야 했다.

“크, 윽!”

아서와 똑같은 충격에 당했지만 스칼렛은 기절하지 않았다.

그녀의 뇌는 특수했고, 일반적인 인간보다 훨씬 뛰어난 내구성까지 갖고 있었다.

하지만 뇌진탕으로 균형을 잃는 것까진 어쩔 수 없었다.

다리에서 힘이 빠지며, 인간 함대라고까지 불리는 여자가 한순간에 무릎을 꿇었다.

그 모습을 본 알리시아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놀람에 이제 살았구나, 하는 기쁨은 없었다.

‘이 멍청이가……!’

검은 갑주로 전신을 가린 김건이 티리온의 앞에 서 있었다.

티리온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언젠가 그 기술을 접하고, 머릿속 한구석에 그것에 대한 경계심을 넣어 두었기에 겨우 피할 수 있었다.

그림자 갑옷으로 만들어진 투구 탓에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

“…….”

김건과 티리온의 시선이 부딪혔다.

티리온은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에겐 월터와 같은 초감각이 없었다. 그가 김건의 진동을 감지하는 건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

하지만 기척을 읽을 수는 있었다.

공격하는 순간의 호흡, 그리고 기색을 잃고 거리를 벌려 피한다. 그리고 반격한다.

김건 역시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함부로 공격을 하지 않고 기다렸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티리온이었다.

“이게 무슨 짓이지, 김건?”

“…….”

김건은 말이 없었다.

알리시아를 그대로 죽게 할 수는 없다고 판단해서 끼어든 것이 전부다.

뒤의 일을 생각할 여유 따윈 없었다.

제일 좋은 건 티리온까지 기절시키고 알리시아와 함께 조용히 이곳을 뜨는 거다.

하지만 그러긴 쉽지 않아 보였다.

상대는 당대 최강인 티리온 프레이저였다.

게다가 김건 역시 그동안 알게 모르게 정보를 많이 누출해 왔기에 특수성으로 인한 이점 역시 많이 퇴색된 상태였다.

그래도 정면으로 붙을 경우 승산은 이쪽이 더 높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겨우 몇 푼, 10퍼센트도 되지 않는 차이일 뿐이다.

그의 앞에 선 남자는 김건이라도 감히 무력화시킬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설령 어떻게 이긴다고 해도 문제다.

김건이 그들을 공격했다는 사실이 발할라의 귀에 들어가면 앞으로의 일이 굉장히 난감해질 것이다.

김건은 망설였다.

티리온은 주의를 기울였다.

두 맹수가 수풀에서 몸을 웅크리고 서로의 기척을 살폈다.

가까스로 몸을 추스른 스칼렛이 으르렁거렸다.

“뭐야, 이 새끼…… 미쳤어? 몬스터들한테 무슨 세뇌라도 당한 거냐?”

당황과 짜증으로 가득한 말.

그 말에 답하는 자가 있었다.

“그래, 세뇌당한 거야.”

끈적끈적한 유혹이 담긴 여자의 목소리.

그것은 이 자리에 있는 누구의 것도 아니었다.

허공에 난데없이 검은 폭풍이 몰아쳤다.

그 가운데에 박힌 흑점이 덩치를 불리더니, 한 여자와 그녀를 따르는 수십 명의 인원들이 튀어나왔다.

발할라의 별들과도 맞서 싸울 수 있는 마인들.

그 뒤에 선 수십 기의 데스나이트.

그리고 그 중앙에 선 것은.

“그 남자는 내 중요한 ‘손님’이거든. 그러니 건드리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검은 편익(片翼)을 펼친 여자, 클라우 베리스였다.

* * *

검은 눈을 번득이는 데스나이트들이 발할라의 세 별을 포위했다.

티리온은 그것을 차단하고 싶었지만 눈앞에 선 김건과 그들 사이에 끼어든 한 남자 때문에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검게 꿈틀거리는 괴물이 뱀처럼 목을 쳐들고 그를 노리고 있었다.

“영광인걸. 당대 최강을 눈앞에 두다니.”

아스타로트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남자.

실제로 본 것은 처음이지만 확실히 대단한 실력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질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하지만 쉽게 이길 거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티리온은 음, 하고 침중한 소리를 흘릴 수밖에 없었다.

비척비척 몸을 일으키며 스칼렛이 이를 갈았다.

“배신자 연놈들이 쌍으로 납시셨군.”

그녀의 눈은 전방에 선 클라우와 그의 뒤에 있는 프리드리히 하이데거에게로 향해 있었다.

그녀는 씹어뱉듯이 말했다.

“이 좆같은 씹새끼들아.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나타나? 뒈지고 싶어 환장했냐?”

프리드리히 하이데거, 일명 박사라 불리는 마인은 말이 없었다.

클라우는 킥 하고 웃었다.

“죽고 싶은 건 당신 같아 보이는데.”

그 말에 스칼렛은 깔깔 웃었다.

SS급 마력적성자이자 연산 능력에 있어서는 대마법사인 사이먼 베이커조차 따라갈 수 없다는 여자가 새빨간 눈을 치켜떴다.

“그래? 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여?”

스칼렛이 양손을 들어 올렸다.

한순간에 발현된 초고난이도의 마법진이 기하학적인 무늬를 그리며 짜였다.

쉭───!

그런 그녀를 향해 뻗어 나가는 검은 마기를 티리온이 튕겨 냈다.

기환마위로 기습을 노리던 마이는 근처에 접근하지도 못했다.

티리온이 허리춤에서 꺼내 던진 수리검이 손을 관통했기 때문이다.

아스타로트가 혀를 차며 물러났다. 마이가 신음을 내며 피를 철철 흘리는 손을 붙잡았다.

티리온의 비호를 받으며 스칼렛은 웃었다.

“화신이면 뭐 무적이라도 되는 줄 알아? 그래 봐야 잘 안 타는 장작일 뿐이야.”

궁지에 몰린 짐승의 분노가 빨간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움직이지 마. 이 개 같은 년아. 어디 한번 다시 주둥이를 털어 보시지. 너희들 전부 지옥불에 활활 타며 염라대왕 앞에서 탭댄스를 추게 될 거다.”

“웃기…….”

날 선 도발에 기가 찬 클라우가 뭐라 입을 열려는 찰나, 박사가 막았다.

그는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경고했다.

“농담이 아닙니다. 핵융합 폭발을 일으키는 마법이에요. 저게 터지면 못해도 반경 100미터 내의 물체는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겁니다.”

그것은 방향성을 가진 물건이 아니었다. 발동하는 즉시 사용자는 물론 범위 내의 아군과 적군을 구별 없이 모조리 쓸어버리는 자폭 공격.

스스로를 핵폭탄으로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다.

오로지 화력, 모든 것을 불태우는 파괴의 에너지에만 미쳐 인생을 바친 여자나 생각해 낼 법한 정신 나간 기술이었다.

“미친…….”

일반적인 틀을 벗어난 초광역 극대소멸공격이라, 제대로 된 화신이라면 무한에 가까운 재생 능력과 막대한 마기로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을 저버리지 못한 반푼이 화신인 클라우에게 그 정도의 능력은 없었다.

클라우가 인상을 쓰며 입을 다물다.

그녀 대신 박사가 앞으로 나서서 말했다.

“그만두지. 우리는 그저 김건을 확보하려 왔을 뿐이다. 너희들을 죽일 생각은 없어.”

“웃기지 마. 배신자 새끼야. 어디서 헛소릴 지껄여. 지금 저 꼬마 놈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데. 너희들한테 넘기느니, 차라리 여기서 다 죽여 버리겠어.”

“그랬다간 인류는 정말로 멸망한다. 그래도 좋은가?”

“어차피 내가 먼저 죽는데 무슨 상관이야. 뒷일은 산 새끼들이 알아서 하라 그래.”

완전히 눈이 돌아갔다.

말이 통하는 상태가 아니다.

한때 동료였던 자가 보이는 폭주에 박사는 쓰게 혀를 찼다.

스칼렛 역시 흥분해서 마구 말하고는 있지만 정말로 죽고 싶은 건 아니었다. 그저 어떻게든 탈출구를 찾기 위해 시간을 벌고 있을 뿐이다.

클라우 역시 김건을 확보하고 싶을 뿐 그들을 죽이고 싶은 게 아니었다.

양측 모두 행동이 멈췄다.

마치 딸깍, 지뢰를 밟는 소리를 들은 것 같은 긴장감이 주변에 넘쳐흘렀다.

그 경직된 공간에, 끼어드는 또 다른 존재가 있었다.

“이것들은 뭐야?”

차가운 목소리가 허공에서 울렸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하얀 면사포와 드레스를 뒤집어쓴 여자가 하늘을 날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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