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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77화 (77/200)

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 77화

무지갯빛 마력이 허공에 흩날렸다.

드레스를 덮은 황금색 기운이 비늘처럼 반짝였다.

기린의 화신이 천천히 부유해 섬에 내려앉았다.

그녀가 손을 휘두르자 공간이 휘익- 휘며 순간적으로 일어난 중력의 폭발이 김건을 후려쳤다.

펑!

“컥!”

그림자의 갑옷이 해제된다.

힘없이 날아간 김건이 피투성이 드래곤의 옆에 떨어졌다.

한순간에 김건을 제압한 화신은 자연스레 그를 등지고 서서 김건과 나머지 세력의 사이를 갈라 놓았다.

기린의 화신이 다시금 김건을 확보했다.

함부로 움직일 수 없는 두 세력은 혀를 차며 은근슬쩍 들어온 고양이가 생선을 채 가는 모습을 구경할 수밖에 없었다.

기린의 통찰안은 한눈에 주변 상황을 꿰뚫어 보았다.

그녀는 스칼렛의 손안에서 꿈틀거리는 마법진을 가리켰다.

“그게 터져도, 이쪽은 안 죽어.”

기린의 특기는 마법의 극의라고도 불리는 시공간 제어 기술이다.

이전의 티아마트가 쏟아 낸 대량의 토사의 해일이면 또 모를까, 순간적인 폭발이라면 아무리 강력해도 공간왜곡을 이용해 간단히 막아 낼 수 있었다.

“빌어먹을.”

한 마디에 머리가 식었다.

스칼렛은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이미 김건 회수 작전은 실패했다. 이대로 마법을 발동시켜 봐야 기린의 화신에게 간이고 쓸개고 다 빼 주는 상황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마법을 취소하지는 않았다.

그것이 기린의 화신에게는 무의미할지 몰라도, 벨제불의 화신에게는 효과적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스칼렛의 이마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점점 마법진을 유지시키는 것도 힘겨워지고 있다.

당장이라도 손에서 핵융합으로 만들어 낸 불꽃의 괴물이 뛰쳐나올 것 같았다.

그녀는 속으로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아직 멀었어? 아서!’

그 말을 들은 것처럼, 침묵하고 있던 강철 갑주에 불이 들어왔다.

우우우웅!

마력의 엔진이 회전하며 수증기가 분출.

정신을 차린 아서 로보타는 이쪽을 바라보는 스칼렛의 시선을 마주하고 단번에 현황을 깨달았다.

겁을 상실했다고 평가받는 동료가 불안감을 보일 정도의 위기 상황.

정보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번쩍!

강철 갑주의 가슴 부근에서 빛의 폭발이 일어나며 새하얀 빛과 굉음이 주위를 휩쓸었다.

마법으로 만들어 낸 대형 섬광탄의 위력에 대낮의 섬이 새하얗게 물들고 터져 나온 소리가 작은 파도를 일으켰다.

화신들마저 몸을 움찔거릴 정도의 폭발.

그 충격 속에서 몸을 움직인 강철 갑주가 스칼렛과 티리온을 붙잡고 상승했다.

조용히 허공을 날던 서브 모듈이 순식간에 분해되어 그에게 날아들었다.

철컥철컥 소리를 내며 모습을 변형해 가는 입방체.

그것은 사방에서 날아들어 강철 갑주에 달라붙더니, 한순간에 뾰족한 비행체의 형상을 그려 냈다.

날개가 펼쳐졌다. 비행체의 표면에 솟구친 마법진이 빠르게 활주로를 대신할 지지대와 압력을 생성. 아랫부분에 솟아 나온 사출구가 푸른 불꽃을 내뿜었다.

콰앙!

폭음이 터지며 비행체가 푸른 하늘을 꿰뚫었다.

하얀 수증기의 포말을 이끌고 나아간 그것은 크게 선회하여 방향을 틀더니 쾅, 쾅, 쾅, 엄청난 충격파의 잔향을 남기며 초음속으로 가속해 상공을 벗어났다.

말은 길지만 발할라의 세 별이 초음속으로 가속하는 데 3초, 시야 밖으로 사라지는 데 10초도 채 걸리지 않았다.

무시무시할 정도의 도주 속도에 권속 및 추종자는 물론이요, 화신들마저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하나 감탄만 하고 있을 틈은 없었다.

기린의 화신이 외쳤다.

“변신해!”

발할라의 교수들이 무사히 도망쳤고 알리시아가 생존. 남편을 확보하는 데에도 성공했다.

예측한 상황은 아니지만 충분한 결과를 얻었다고 생각한 기린의 화신, 한서리는 바로 추격을 불허하는 공간이동 마법을 펼쳤다.

금빛 마력이 주변에 흘렀다.

한순간에 크기를 줄인 알리시아와 기절한 척 몸을 뉘이고 있던 김건과 함께 이곳을 벗어나려는 찰나,

믿을 수 없는 말을 듣고 동작을 멈췄다.

“미안한데,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

그 말은, 죽일 듯한 시선으로 남편을 빼앗겠다고 옥상에서 선언하던 여자의 입에서 나온 것이었다.

* * *

한서리와 클라우 베리스는 사람들이 득시글거리는 도시 한복판의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장소를 정한 것은 한서리였다.

그녀는 공간이동으로 김건과 알리시아를 안전한 곳에 데려다준 뒤 클라우와 함께 이곳에 왔다.

그녀가 도심을 대담 장소로 잡은 이유는 단순했다.

그게 그녀에게 더 유리했으니까.

만일의 상황이 발생했을 경우 그녀는 기린의 공간이동마법으로 쉽게 이탈이 가능하지만, 클라우는 달랐다.

기환마위를 사용해 순간이동 흉내를 낸다 해도, 한 번에 이동할 수 있는 거리는 고작 수십 미터.

1초에 한 번씩 쓴다고 가정해도 시속으로 치면 몇백 킬로미터 밖에 안 나온다.

그 정도 속도로 전 세계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발할라의 추적을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했다.

두 사람은 모습을 가린 채였다.

한서리는 긴 머리를 옷 안쪽으로 밀어 넣고 모자를 눌러썼으며 클라우는 마이의 도움을 받아 아예 마기로 만든 가면을 써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마력을 내뿜어 자리에 놓인 커피를 꼼꼼히 살펴본 한서리는 마실 것에 아무런 조작도 되어 있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그것을 입에 가져갔다.

씁쓰름한 차의 향을 들이마신다. 그리고 날카로운 눈으로 맞은편에 앉은 클라우를 바라보았다.

지금의 상황은 분명히 그녀에게 유리했다.

하지만 그것을 원한 것은 오히려 클라우였기 때문에 방심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밖으로 드러나지 않게 최대한 기린의 힘을 발휘해 사방에 마력의 촉각을 곤두세우며 싸늘하게 내뱉었다.

“그래서,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거지?”

클라우는 한서리를 마주 보았다.

얼굴은 바꿨지만 불길한 빛을 발하는 빨간 동공은 여전했다.

그녀는 조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동맹을 맺자. 티아마트를 물리칠 때까지.”

난데없는 소리에 한서리의 눈썹이 찌푸려진다.

“……갑자기, 왜?”

“난 죽고 싶지 않아. 그리고 그 사람을 죽게 하고 싶지도 않아. 그게 전부야.”

그 말에 핫- 하고 한서리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날 선 목소리가 이죽거렸다.

“그걸 아는 년이 그 개지랄을 놨나?”

“그때는 마음이 급했어. 상황이 이 정도로 악화될지도 몰랐고.”

“…….”

클라우는 순순히 사과했다.

짜증을 냈던 한서리마저 순간적으로 당황할 정도였다.

하지만 한서리는 봐주지 않았다. 말 한마디에 부드러워질 정도로 그녀는 자비롭지 않았으며, 클라우가 해 온 짓 역시 가볍지 않았다.

“미친년이라 그런가? 도저히 사고를 따라갈 수 없는데.”

“미안하군. 인간일 때는 정상적인 사회 생활을 못해 봤고, 벨제불을 받아들인 이후에는 할 필요가 없어져서. 제대로 된 상식을 쌓지 못했다는 건 인정하지.”

한서리는 그녀가 조사한 클라우의 이력을 떠올렸다.

고아 출신, 정확한 경로는 불명이지만 갓난아기일 때 이미 불법적 마법 실험을 시행하던 연구소에 팔려 가 그곳에서 자란 것으로 보인다.

그 정보는 사실일 가능성이 높았다.

정체를 숨기기 위해 조작한 것이라면 굳이 그렇게 특이한 이력을 쓸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클라우의 말에는 분명 진심이 담겨 있었다.

한서리는 마냥 짜증만 부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한숨을 내쉰 그녀는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뭔가 구체적인 제안은 있는 거야?”

클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김건은 우리가 숨겨 주지. 그동안 너는 발할라에서 그를 희생시키지 않는 방법으로 티아마트를 공격하도록 이끌어. 그리고 작전이 시행될 때,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 주면 나는 물론이고 마인협회 전체가 필요한 순간에 지원을 갈 수 있도록 하겠어.”

말대로 흘러가기만 하면 꽤 괜찮은 제안이었다.

말대로 흘러가기만 하면 말이다.

“미쳤군. 너 같은 미친년한테 남편의 안위를 맡기고, 이쪽의 정보까지 달라고? 내가 뭘 믿고 그런 위험한 짓을 해야 하지?”

한서리는 기가 차서 헛웃음을 흘렸다.

클라우의 눈이 조금 커졌다.

“……남편? 너희, 결혼까지 했나?”

“그딴 건 신경 끄고 대답이나 해.”

클라우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한참 동안이나 망설이다가 겨우 말했다.

“……계약을 맺어 주지.”

“뭐라고?”

믿을 수 없는 말을 들은 한서리가 되물었다.

클라우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박사에게 들었어. 기린에게는 계약의 힘이 있고, 그 계약은 상호 동의하에 이루어지기만 하면 거의 절대적인 위력을 발휘한다고 하더군. 신력으로도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야. 너도 기린의 화신이라면 계약을 맺는 것이 가능하겠지.”

“…….”

“계약 내용은 그쪽 마음대로 해. 티아마트를 쓰러트릴 때까지라면, 대부분의 조건은 수용해 주겠어.”

한서리는 숨을 삼켰다.

클라우의 말에 틀린 것은 없었다.

그녀의 말대로 한서리는 기린이 가진 계약의 권능을 사용하는 게 가능했다.

그 계약 조건을 잘만 설정하면 클라우와 마인협회를 부려 이번 사건을 해결하는 데 써먹는 것도 허황된 말이 아니었다.

조건이 너무 좋다.

한서리는 클라우의 진의를 읽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가볍게 한번 견제를 날려 보았다.

“좋아, 하지만 남편은 못 넘겨. 그이를 숨기는 건 내가 알아서 하겠어.”

“우리한테 맡기는 게 좋을걸. 발할라가 어떻게 그 사람을 찾았는지 모른다면 말이야. 네가 데리고 있어 봐야 또 습격이나 당할 거다.”

그 말에서 어느 정도의 진의를 읽은 한서리의 눈매가 예리해졌다.

“역시 그이가 목적이군.”

“……그래, 이건 양보 못해.”

고개를 끄덕이는 클라우를 보자 엄청난 거부감이 한서리를 감쌌다.

이성적으로 따지면 클라우의 제안을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계약의 조항을 섬세하게 조율하면 남편을 데려간 클라우가 그를 건드리지도, 발할라의 정보를 전달받은 마인협회가 배신하지도 못하게 할 수 있었다.

엄청나게 껄끄러운 적이 스스로 목에 폭탄 목걸이를 차고, 기폭 스위치를 건네주며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그 제안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사랑하는 사람을 연적의 손에 넘겨야 했다.

아니, 연적이라고 할 수도 없다. 이미 그이의 마음은 자신의 것이었으니까.

눈앞의 여자는 단지 그것을 훼방 놓고 싶어 하는 방해꾼에 불과했다.

한서리는 갈등했다.

이성의 손을 들어 줄 것인가, 아니면 감정을 따를 것인가.

인류의 미래가 걸려 있는 건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당연히 이성을 따르는 게 맞다.

하지만 남편은 그녀에게 이 세상보다도 중요했다. 아무리 목줄을 채우고 재갈을 물렸어도, 그녀가 가진 보물을 짐승의 품에 안겨 주고 싶지 않았다.

한서리는 그 거부감에 몸서리치며 클라우를 바라보았다.

“대체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지?”

빨간 눈망울이 파란 눈망울을 마주했다.

빨간 눈에, 상대를 씹어 죽일듯한 살기가 담겼다.

클라우는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싫어.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게 아니야.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이라도 널 갈기갈기 찢어서 던져 버리고 싶어. 화신만, 화신만 아니었으면 세뇌라도 했을 거야. 억지로 사고를 조작해서 스스로를 개라고 인식하게 만들었으면 좋겠어. 헥헥대고 기어 다니며, 널브러진 똥이라도 주워 먹는 걸 보면 기분이 좀 나을 테니까.”

여자가 보이는 순수한 분노에 한서리는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진 말을, 그녀는 마냥 비웃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그 사람은 더욱 나를 싫어하겠지.”

“…….”

“단지 그게 싫을 뿐이야. 그리고 만약, 혹시나 있을 이후의 기회를 티아마트에게 빼앗기고 싶지도 않아.”

“진짜 웃기네. 이후의 기회 따윈 없어. 네가 아무리 착하게 굴어 봤자, 쓰레기인 이상 그이의 마음을 흔들 수는 없거든.”

“닥쳐, 너 따위에게 그런 말 듣고 싶지 않아.”

한서리는 코웃음을 쳤다.

클라우는 이를 갈았다.

한서리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결론은 금방 나왔다.

그저 그 결론을 받아들일 준비가 필요했을 뿐이다.

속으로 이를 악물었다.

혐오감으로 전신에 소름이 돋고 내장이 싫다고 몸을 배배 꼬았지만 참았다.

이 정도 혐오감은 감내해야 할 만한 이득이 이번 건에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 생각 없던 멍청이마저 스스로의 욕망을 참아 낼만큼 심각한 상황이다.

그것보다 못한 꼴을 보이긴 싫었다.

한서리는 겨우 말을 토했다.

“좋아. 네 제안을 받아들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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