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 78화
“음…….”
김건은 불편한 얼굴로 의자에 앉아 팔짱을 꼈다.
사방이 검은 괴이한 공간 속, 수십 기의 데스나이트와 간부급 마인들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데스나이트들이야 인형처럼 가만히 서 있기만 하니 괜찮다.
다만 주변 마인으로부터의 시선이 따가웠다.
아스타로트는 호승심 어린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고, 두건을 걸치고 있는 프리드리히 하이데거 역시 그를 신기한 동물 보듯 이리저리 관찰하고 있었다.
회복 능력을 지닌 이름 모를 여자의 시선에는 살기까지 담겨 있었다.
그리고 클라우 베리스 역시,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씁쓸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 있는 인원들 전부 그의 아내와 계약을 맺었기에 위험할 일은 없다.
다만 그들의 관심어린 시선이 그저 부담스러울 뿐이었다.
김건은 애써 그것을 무시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보이는 풍경은 없다.
오로지 암흑, 빛이라고는 한 점도 없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그 안에 있는 물체들은 똑똑히 보였다.
이곳은 박사, 프리드리히 하이데거가 만들어 낸 아공간이었다.
마기로 침식한 시체를 조종하듯, 공간 자체를 직접적으로 침식하여 자기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세상으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바깥세상에서는 그저 점으로만 존재한다. 하지만 그것을 잘만 쓰면 그 안에 많은 것을 담거나 점인 채로 이동해 적은 마력으로도 초고속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공간 침식은 그 난이도가 너무 높아 화신도 잘 시도하지 않는 기술이다.
마기라는 불온한 힘을 사용해야 하지만, 잘만 하면 세계의 패러다임을 바꿀 수도 있는 마법.
적아를 떠나, 그 기술에 담긴 심오함에 김건은 혀를 내둘렀다.
그 감상은 옆에 있는 사람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대단하군. 팀장님도 아직은 아공간을 다루지 못하시는데 벨제불의 추종자 따위가 이만한 기술을 갖고 있다니.”
인간의 형태를 취한 알리시아가 김건의 곁에 앉아 있었다.
상처투성이 몸을 마법 붕대로 둘둘 말아 놓긴 했지만, 본체를 변화시킨 그 모습은 알리시아가 평소에 부리던 인형과 흡사했다.
다른 것이 있다면 길쭉하게 뻗어 있는 귀와, 전신을 가로지르는 화려한 문신뿐.
김건은 물끄러미 그 모습을 바라보다 물었다.
“그 정도면 인간이랑 별다를 바가 없는데 왜 굳이 인형까지 써 가며 생활하시는 겁니까?”
알리시아는 눈썹을 좁히며 주변의 마인들을 노려보았다.
그러고는 말 대신 텔레파시를 통해 대답했다.
<<위험하니까.>>
그 의도를 깨달은 김건이 입을 다물었다. 그는 말소리를 담은 진동을 알리시아의 고막에 불어넣었다.
<<뭐가 위험한데요?>>
신묘한 기술에 알리시아가 살짝 놀란다.
그녀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기습에 약하지. 본체일 때처럼 튼튼하지 않단 말이다. 이 모습으로 다니다가 독을 먹거나 눈먼 칼에라도 맞으면 그냥 죽는다. 용의 형상을 취하고 있을 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
과연, 그런 이유라면 인형을 다루면서까지 거대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이해가 된다.
대체재가 있는데 굳이 위험 부담을 키울 필요가 없으니까.
알리시아가 고개를 돌렸다.
김건의 옆에 있는 손은 손가락이 절반 이상 잘려 나가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녀는 억지로 몸을 틀어 반대쪽 주먹으로 툭 김건의 어깨를 쳤다.
“아까는 고마웠다. 네가 나서지 않았다면 거기서 죽었을 거야.”
김건은 피식 웃었다.
“같은 편이니까요.”
“하지만 고마운 것과는 별개로 경솔한 행동이었다. 팀장님의 말씀을 생각해. 이번은 마인협회 핑계를 대며 넘어갈 수 있겠지만 다음에는 어떻게 될지 몰라. 네가 발할라를 적으로 돌리면 정말 골치 아픈 일이 벌어질 수도 있어.”
“알고 있습니다.”
김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음 말을 진동으로 자아내 알리시아에게로 보냈다.
<<하지만 제가 아내 말을 잘 들었다면 아마 이곳까지 오지 못했을 겁니다.>>
나에겐 나만의 기준이 있다.
김건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김건과 한서리. 두 사람이 서로를 누구보다도 신뢰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시아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두 사람의 판단이 언제나 일치할 것이라고 보증하는 것은 아니었다.
주인의 명을 받드는 것도, 목숨의 은혜를 갚는 것도 중요하다.
그리고 만약 그 두 가지 가치가 충돌하는 경우가 발생했을 때, 과연 무엇을 따라야 할까.
알리시아는 몹시 난감한 상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 골치 아픈 상황에 휘말리게 될 거 같군.’
나직하게 한숨을 쉬는데 주변 풍경이 바뀌었다.
검은 장막이 해제되고 새로운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아공간이 해제되고 바깥으로 빠져나온 것이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한 연구실이었다.
사방에 책과 문서가 가득하고 벽면에는 실험용 도구가, 그리고 넓게 펼쳐져 있는 칠판에는 빼곡한 메모 조각이 클립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사람 없이 방치한 지 오래됐는지 수북이 먼지가 쌓인 연구실의 모습에 심한 부상을 입어 몸이 약해진 알리시아가 쿨럭쿨럭 기침을 했다.
나머지 인원은 모두 아공간에 둔 채로 나온 모양이다. 연구실의 바닥을 딛고 서 있는 이는 오로지 김건과 알리시아, 그리고 박사뿐이었다.
동맹을 맺기는 했으나 마인들은 누구 하나 할 것없이 수많은 사람들을 죽게 만든 쓰레기들이다.
김건은 딱히 예의범절을 지킬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는 얼마 전까지 상사나 마찬가지였던 프리드리히 하이데거, 일명 박사라 불리는 마인에게 물었다.
“여기가 몸을 숨길 은신처인가?”
교수일 적의 프리드리히는 심술궂은 꼰대라는 느낌이 강했는데, 그건 그저 위장이었던 모양이다.
박사는 표정하나 바꾸지 않고 무덤덤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곳은 내가 비밀리에 마기에 대해 연구하던 비밀 연구소다.”
“여기엔 왜 왔지?”
“발할라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서다. 네 몸에 있는 발신기를 제거해야 해. 안 그러면 또다시 습격이 올 거다.”
“발신기?”
김건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오라를 통해 몸 전체를 점검했을 땐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소형 발신기를 붙인 것도, 몸 어딘가에 칩을 장착한 것도 아니다.
박사는 김건의 행동을 눈치채고 말했다.
“살펴봐야 소용없다. 나노 머신이야. 피에 섞여 네 몸속을 순환하며 흐르고 있지.”
“나노 머신?”
알리시아가 그게 뭐냐는 듯 눈을 치켜떴다.
김건이 대답했다.
“매우 작은, 세포나 분자 크기의 기계를 말합니다. 저도 자세한 건 잘 몰라요.”
“그렇게 들으니 어디서 비슷한 걸 본 것 같군. 소설 속 내용이긴 하지만.”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게 실제로 존재한다는 말은 들은 적 없어요.”
박사가 말을 이어받았다.
“지금은 22세기다. 마계의 침략 때문에 급격히 둔화되었을 뿐, 보이지 않는 곳에서 기술은 계속 발전하고 있어.”
“대체 그걸 언제 집어넣은 거지? 벨제불과 싸우고 난 뒤인가?”
“아마도 그때일 거다. 위장하고 있는 화신을 탐색하기 위한 수단으로 나노 머신을 사용해 보자는 논의가 과거에 있었으니까.”
설명을 마친 박사가 주변으로 손을 뻗어 쓰레기처럼 쌓여 있는 문서와 책들을 들추기 시작했다.
“뭘 하는 거지?”
“인증키를 찾는 거다.”
박사의 손에 의해 뒤집힌 상자가 와르르 물건을 쏟아 냈다.
박사는 아공간에서 꺼낸 데스나이트들에게 지시를 내리며 말했다.
“나노 머신은 극도로 작아서 육안은 물론이고 마법으로도 감별해 내기가 쉽지 않지. 하지만 이곳에는 나노머신을 제어할 수 있는 장치가 있다.”
즉, 이곳에 있는 기계로 나노 머신을 제거할 수 있고 지금은 그것을 작동시킬 열쇠를 찾고 있다는 것이다.
박사와 데스나이트들이 연구소를 뒤집어 놓는 것을 바라보던 김건이 문득 한숨을 쉬었다.
“찾을 필요 없어.”
“무슨 말이지? 네가 그것을 몸 안에 품고 있는 한 발할라는 언제든 너를 찾아올 거다. 우리가 널 찾은 것도 그 덕이지. 발할라의 움직임을 주시하면 될 뿐이니까.”
“그 정도는 나도 알아. 그러니까 입 다물고 조용히 좀 해.”
김건은 그렇게 말하며 눈을 감았다.
그 모습에서 무언가를 느꼈는지 박사가 동작을 멈추고 데스나이트들을 멈춰 세웠다.
난장판이 된 연구소가 정적에 빠져든다.
블라인드 사이로 새어 들어온 빛이 피어오르는 먼지를 비추고, 희미하게 깜빡이는 비상등이 찍찍 쥐가 우는 듯한 소릴 냈다.
그 속에서 김건은 정신을 집중했다.
피아를 잊고 그가 가진 감각을 전부 이끌어 냈다.
삐죽삐죽 온몸에 혈관이 치솟고 몸에서 열이 난다.
극도로 예민해진 신경망이 인간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정보를 모으고, 그것을 분석하고 처리해야 하는 뇌가 과부하의 비명을 지르며 불타올랐다.
모세혈관이 터졌다.
감은 눈에서 피눈물이 흐르고 코에서 피가 펑펑 흘러나왔다.
저걸 내버려 둬도 되는 건가.
걱정이 된 알리시아가 입을 열려고 하는 것을 박사가 손을 들어 막았다.
박사는 그저 가만히 있으라는 듯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굳이 적의 말을 들을 필요는 없었지만 지금의 상황은 김건이 스스로 자초한 것이다.
알리시아는 침을 삼키며 사방에 번진 혈관과 붉게 달아오른 피부 때문에 마치 괴물처럼 보이는 김건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그렇게 일 분쯤 지났을까.
마침내 김건이 눈을 떴다.
솟아오른 혈관과 달아오른 피부가 빠르게 원상태로 돌아왔다.
김건은 크게 코를 풀어 안쪽에 뭉쳐 있던 핏덩어리를 뱉어 낸 뒤 가쁜 숨을 내쉬었다.
“괜찮나?”
알리시아가 흔들리는 그의 어깨를 잡았다. 김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박사가 물었다.
“처리했나?”
알리시아가 책상에 굴러다니던 티슈 통을 던져 주었다.
김건은 그곳에서 꺼낸 휴지로 얼굴을 문지르며 대답했다.
“그래. 정말로 나노 머신이라는 게 있더군.”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지만 그 말에 내포된 사실을 깨달은 박사는 그저 감탄을 토할 수밖에 없었다.
“……나노 머신까지 인지해서 진동으로 분해해 버린 건가. 인간의 기술이 아니야. 마력을 통한 감지와 제어의 정밀도가 상식을 벗어났군. 살신기를 만들어 낸 건 결코 우연이 아니었어.”
그는 경이롭다는 시선으로 김건을 훑어보았다.
“벨제불 님을 쓰러트린 것이 너라는 걸 처음 아가씨에게 들었을 때는 믿을 수가 없었다. 그전에는 그저 기린의 화신인 한서리가 한 일이라고 생각했으니까.”
“…….”
“화신들이 속속이 등장하고, 반신마저 강림하는 이 혼란을 만들어 낸 요인이 뭔가 했더니 바로 눈앞에 서 있었군.”
김건은 차가운 눈으로 박사를 노려보았다.
“웃기지 마. 이 일련의 사태를 만든 건 너희 마인협회야. 너희가 그 자리에서 화신을 불러내지만 않았으면 일이 이렇게까지 커지진 않았을걸?”
“그건 흐름을 탄 결과일 뿐이다. 바람이 부니 벽을 세우고, 비가 오니 지붕을 짓는 것과 마찬가지지. 화신 강림 건은 우리의 의지가 아니라 벨제불 님의 의지였어. 마신이라는 존재는 한 인간이, 혹은 단체가 의도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야.”
박사의 손가락이 김건을 가리켰다.
그 목소리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이 흐름의 주역은 너다. 네 뜻과는 상관없이, 네가 가진 재능이 마신들을 자극하고 있는 거야. 그들 자신조차 눈치채지 못하는 영역에서부터 말이지.”
마음에 드는 가설을 발견하면, 온갖 사건들을 조합하고 끼워 맞춰 어떻게든 말이 되도록 이론을 지어 낸다.
그것이 말이 되든 안 되든 상관없다. 왜냐하면 그 이론은 그의 머릿속에서 이미 완성되어 있으니까.
박사에게는 학자의 기질이 엿보였다.
하지만 김건은 그의 학구열에 어울려 줄 생각이 없었다.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하고 다시 이동하지. 발신기는 제거했으니까.”
“알았다.”
박사가 손을 휘둘렀다.
허공에 있던 점이 물위에 떨어진 잉크마냥 확장하고, 세 사람을 집어삼켰다.
* * *
“이곳이다.”
마인협회 및 김건과 알리시아가 도착한 곳은 한 섬이었다.
태양이 뜨겁다.
하얗게 빛나는 해가 빛살을 내뿜어 눈을 찔렀지만 김건은 그것을 가릴 생각조차 못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맨 처음 도착했을 때는 그냥 어딘가 찾기 힘든 곳에 숨어 있는 무인도이겠거니, 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곳은 사람이 사는 곳이었다.
반듯하게 지어진 건물이 듬성듬성 서 있고, 그 사이를 오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주변을 지나가던 한 사람이 그들을 발견했다.
“아! 클라우 누나다!”
그 사람은 클라우를 보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히쭉히쭉 웃는 모습과 쪼르르 달려오는 모습이 천진난만한 아이 같았다.
하지만 그 얼굴은,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인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