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 79화
허리가 꼬부라진 노인이 아이마냥 해맑은 목소리를 내며 친근함을 표시하는 것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세상이 단절된 듯한 이질감을 주었다.
처음에는 치매에 걸린 노인인가 싶었다.
하지만 강아지처럼 달려온 그가 클라우의 눈짓 한 번에 조용히 저 멀리로 사라지는 것을 본 김건은 노인에게 어떠한 정신 제어가 걸려 있음을 깨달았다.
“안녕하세요!”
노인이 지나간 뒤에 다가온 사람은 반갑게 손을 들었다.
하지만 그 역시 보통은 아니다. 그의 어깨 위로 달려 있는 것은 나무고목처럼 말라붙은 살덩어리였다.
온몸이 괴이하게 비틀린 그는 가까스로 휠체어 위에 걸터앉은 것처럼 보였다.
움직이는 게 용하다는 생각이 들정도로 꼬부라져 있는 팔. 그 끝에 달린 손가락으로 자동 휠체어의 버튼을 조작해 다가온다.
살아 숨 쉬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울 듯한 몸을 가진 그는, 김건의 앞에서 더없이 행복하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날씨가 참 좋죠?”
“저리 가.”
그 또한, 클라우의 한마디에 잠자코 물러났다.
당혹스러워하는 것은 알리시아도 마찬가지였다.
“여긴…… 대체 뭐냐?”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높은 언덕 하나 없이 모든 지표면을 평평하게 다져 놓아 어느 방향을 돌아보더라도 그 끝이 어디인지 다 보이는 작은 섬.
가로세로 길이 수 킬로미터는 될까 싶은 작은 크기.
그럼에도 의외로 사람은 많았다.
지대는 평평했지만 조경은 잘 되어 있고, 시설도 멀쩡히 갖춰져 있었다.
누군가는 담소를 나누며 산책을 했고, 누군가는 기구에 매달려 운동을 했으며 누군가는 벤치에 앉아 책을 읽었다.
그것을 보고 있으면 마치 인기 있는 공원에라도 온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알리시아가 당황한 건 그저 사람이 많았기에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 멀쩡해 보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이 육안으로 이상이 드러나는 기형아, 혹은 병자다.
외견상 멀쩡해 보이는 사람도 드문드문 보였지만, 대부분이 눈앞이 흐리멍텅한 노인이었다.
더욱 기이한 점은,
그들 모두가 울상은커녕 행복해 죽겠다는 얼굴들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명백히 정상이 아니다.
김건이 바라보자 클라우는 시선을 피했다.
대신 박사가 말했다.
“이곳은…… 일종의 쓰레기통이다.”
“쓰레기통?”
“병에 걸렸거나 선천적 장애를 가진 가족은 대부분의 인간들에게 막대한 짐이 된다. 가진 힘이 크고 재산이 많아도 마찬가지야. 직접 편의를 봐주기엔 너무 힘들고, 남한테 시키기에는 약점이 될 요소가 너무 많아져. 잘해 주면 잘해 주는 대로, 못해 주면 못해 주는 대로 이용의 대상, 혹은 공격의 대상이 되지.”
“…….”
“그렇다고 죽여 없애기에는 도덕적, 사회적 리스크가 너무 커. 정신적 부담도 무시할 수 없고.”
무시무시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늘어놓는다.
가족을 생각하는 마음가짐은 인간이나 용족이나 다르지 않다.
박사의 발언에 알리시아가 눈썹을 일그러트렸다.
“그냥 보이지 않는 곳에 버리는 것이 사실 제일 편한 방법이다…… 이곳은 그렇게 판단한 자들이 서로 힘을 모아 만든 장소다.”
박사는 하늘을 가리켰다.
잘 보이지는 않지만 희미한 역장이 섬 위에 펼쳐져 있었다.
그것은, 발할라를 덮고 있는 결계와 비슷한 종류의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나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에 버려 봐야 남들에게 구실만 제공할 뿐이지. 이곳은 비밀의 섬이다. 발할라 정도로 정교하진 않지만 결계를 쳐 놓아 위성과 레이더에도 쉽게 걸리지 않아. 직원들 역시 완벽히 막대한 빚이나 인질로 매수되어 있고, 보급은 분기마다 한 번씩 극히 제한적으로 한다. 보안은 완벽해. 사회의 고위층들만이 이용할 수 있는 최상급 쓰레기통이라 할 수 있지.”
그 말뜻을 깨달은 김건이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물리적으로 단절되어 있을 뿐 아니라, 정치적인 장벽으로도 보호받고 있다는 건가.”
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발할라라고 하더라도 확실한 물증 없이 이곳을 수색할 순 없어. 하지만 물증은 없지. 위성 촬영은 불가능하고, CCTV도, 녹음기도 없어. 이곳은 밖으로 흘러나가는 정보가 극히 적은 장소다.”
김건은 이를 깨물었다.
“이곳이 은신처로 쓰기에 좋은 곳이라는 건 알겠어. 그런데 사람들에게 정신 제어를 걸 필요는 뭐지?”
“냄새가 나니까.”
이번에는 클라우가 대답했다.
그녀는 오똑한 코를 톡톡 두들기며 말했다.
“나는 인간의 정신 상태를 냄새나 소리 등의 오감으로 읽을 수 있거든. 그리고 절망에 빠진 인간에게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악취가 나지.”
클라우가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조금 매서운 눈으로 박사를 흘겨보았다.
“맨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코가 떨어져 나가는 줄 알았어.”
클라우가 다시금 코를 찡긋거렸다.
바로 앞에서 화난 사람의 냄새가 났기 때문이다.
김건이 으르렁거렸다.
“고작 그따위 이유로 사람들의 마음을 가지고 놀아?”
클라우가 입을 다물었다. 빨간 눈을 토끼처럼 뜨고는 김건의 눈치를 살폈다.
“감히……!”
그 모습을 본 레이나가 분노를 토해 내려 했다.
박사는 손을 들어 그것을 말렸다. 그는 침착하게 말했다.
“그럼, 자네는 이곳의 사람들이 스스로의 처지에 한탄하며 절망과 함께 살아가기를 바라나?”
“…….”
“오지 않는 가족들에게는 배신감밖에 느낄 수 없고, 불편한 몸은 끝없는 고통을 선사하지. 아마 하루하루가 지옥일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이겨 내야 한다고 생각하나? 이들에게 그런 강인함이 있다고 보나? 마치 자네처럼?”
이건, 정답이 없는 질문이다.
김건은 이를 갈았다. 하지만 섣부른 말로 가치를 규정짓지는 않았다.
그는 어디까지나 부외자일 뿐이다. 그에게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을 구원할 능력 따윈 없다.
김건이 입을 다물었다. 박사 역시 답을 종용하지 않았다.
클라우가 나섰다.
“따라와. 이곳에서 지낼 동안 있을 곳을 안내해 줄게.”
질끈 눈을 감은 김건이 물러났다. 박사는 다른 마인들과 함께 묵묵히 클라우의 뒤를 따랐고, 알리시아는 한숨을 쉬며 지끈거려 오는 팔을 감쌌다.
한 사람과 한 용.
그리고 화신과 그를 따르는 마인들이 병자들의 숲으로 숨어 들어갔다.
그렇게, 클라우가 만들어 낸 거짓 낙원에서의 하루가 시작되었다.
* * *
숙소와 각종 편의 시설들을 안내받고 나니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아침에 알리시아의 레어에서 눈을 뜬 것이 7시 즈음이다.
발할라의 습격, 교수들과의 전투, 마인협회의 등장, 아내와 클라우의 협상, 그리고 추격을 뿌리치기 위한 밑작업까지.
고작 5시간 사이에 얼마나 많은 사건을 겪은 건가.
김건은 미쳐 날뛰는 운명의 소용돌이에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알리시아는 몸을 치료하기 위해 숙소에 틀어박혔다.
마인협회의 인원들 역시 뿔뿔이 흩어졌다.
마지막까지 김건의 옆에 붙어서 섬을 안내해 주던 클라우마저 씻고 싶다며 제 집으로 돌아가고 나서야, 김건은 겨우 혼자가 될 수 있었다.
가만히 방에 처박혀 있기에는 답답하다.
밖으로 나온 그는 공원처럼 꾸며져 있는 섬의 벤치에 앉았다.
나무가 만들어 준 그늘에 숨어 우수수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을 바라보다가 눈두덩이를 문질렀다.
“음…….”
아까 나노머신을 파괴하기 위해 신경을 혹사시킨 후유증이다.
아직도 눈이 붉게 물들어 있고 뜨끈뜨끈한 두통이 머리를 지지고 있었다.
그냥 곱게 박사의 장비로 나노머신을 제거할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하지만 필요한 일이었다.
나노머신을 제거한다고 하면서 또 다른 종류의 나노머신을 주입할지도 모른다.
아내와의 계약상, 김건에게 해를 끼칠 짓은 하지 못할 테지만 모든 일이 끝난 뒤, 그를 추적하기 위한 밑작업 정도는 가능할 것이다.
안전이 확실하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의 긴장은 유지하는 게 좋았다.
김건은 그늘에서 선선한 바람을 쐬며 가만히 호흡을 골랐다.
딱히 수련은 아니다.
신경계에 무리를 준 다음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는 게 정답이다.
그는 호흡을 정돈하며 어느 정도 휴식을 취하면서도 완전히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 정도로 감각을 설정해 나갔다.
한 번 집중할 때에는 시간마저 느리게 흘러갈 정도로 기어를 끌어올리는 만큼, 그는 쉴 때는 확실하게 휴식을 취하는 스타일이었다.
“…….”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
의식을 지운다.
반응하는 것은 생명 활동을 위한 본능적 움직임뿐이다.
호흡이 느려지고, 안구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는 천천히 주변 풍경에 녹아들어 갔다.
마치 의자에 동화된 조각상이 된 것 같다.
김건은 눈뜨고 자는 것과 비슷한 상태로 가만히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쾅, 쾅, 쾅.
무언가를 두들기는 소리에 김건의 의식이 돌아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한 남자가 보였다.
늙그수레한 남자였다.
마흔은 넘어 보이는 얼굴, 빼빼 마른 몸에 작업복을 걸쳤다.
그의 앞에는 허름한 창고가 한 채 있었다.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판자를 가져와 구멍난 창고의 벽면을 메우려 하고 있다.
그는 못질을 위해 판자를 고정시키려 했지만, 힘도 요령도 없어서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김건은 딱히 오지랖을 부리는 성격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주 매정한 사람도 아니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 중 남자를 도울 만한 사람은 없어 보인다. 그는 선뜻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와드릴게요.”
그렇게 말하며 손을 뻗어 판자를 고정시켜 줬다.
남자는 김건을 바라보고는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얼른 망치와 못을 집어 들었다.
“고맙습니다.”
그러고는 탕, 탕 경쾌한 소릴 내며 못질을 시작했다.
김건의 도움에 쉽게 구멍 하나를 메운 남자는 땀을 훔치며 웃어 보였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클라우 아가씨의 손님 분이시죠? 저는 이 섬의 관리인인 마틴이라고 합니다.”
“김건입니다.”
김건은 짧게 말하며 수레 위에 쌓여 있는 다음 판자를 집었다.
마틴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다음 작업 장소로 김건을 안내했다.
마틴은 말이 많았다.
“여기엔 얼마나 있으실 건가요?”
“클라우 아가씨랑은 무슨 사이십니까?”
“혹시 사귀는 사이는 아니지요? 아가씨 표정이 심상치 않던데.”
김건은 짧게 답했다.
“아닙니다.”
마틴은 와하하 웃었다. 그리고 계속 말했다.
그는 사회에서 빚더미에 올랐다가 결국에는 범죄를 저지르고 이곳에 온 모양이었다.
이것저것 할 게 많아 힘들기는 하지만 그래도 감옥보다는 낫다고 하는 걸 보니 이곳에 나름대로 정을 붙이고 사는 사람 같았다.
적당히 수다에 어울려 주며 고개를 끄덕이던 김건은 문득 이 남자가 언급하는 이름 중에 클라우가 꽤 많다는 걸 깨달았다.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
적에 대해 아는 건 중요하다.
클라우와는 언젠가 다시 싸울 날이 올 것이다.
과거부터 시작해 취미, 습관, 성격 등 아무거나 좋다.
싸움꾼인 그에게는 물론이요, 별거 아닌 소소한 정보라도 앞날을 설계하는 아내에게는 상당한 도움이 될 터였다.
그러고 보면, 베일에 휩싸여 있는 마인협회의 정보를 캐기에는 지금만 한 호기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첩보 활동은 특기가 아니지만, 기회가 주어진 만큼 김건은 나름대로 정보를 캐내 보기로 마음먹었다.
“클라우 베리스…… 클라우에 대해서 잘 아십니까?”
마틴은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글쎄요. 그분이 이곳에 오셨을 때부터 알았지만 잘 안다고는 못하겠습니다. 먼발치서 지켜본 적은 많지만 직접 대화를 나눠 본 적은 거의 없어서요.”
“이곳에 왔을 때부터 알았다고요?”
마틴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정확한 일자는 기억 안나지만…… 아마 10년은 됐을 겁니다.”
10년이라, 생각보다 역사가 길다.
김건이 물었다.
“부모라거나, 보호자는 없었나요?”
“처음에 올 때는 두건을 뒤집어쓴…… 아직도 성함을 잘 모르지만 ‘박사’님과 함께였습니다. 하지만 그분도 그냥 이곳에 데려다주셨을 뿐이었고, 그 뒤로는 쭉 혼자서 지내셨어요.”
“10년 전이면 꽤 어렸을 때 아닙니까?”
“어렸죠. 키가 지금의 반만 했을 때니까요.”
“그럼 그때부터 혼자 자랐던 겁니까?”
“네, 지금까지 쭉 혼자 지내셨죠.”
클라우가 지금의 김건과 비슷한 나이라고 가정하면, 그녀는 열 살도 채 되기 전부터 병자만이 가득한 섬에서 홀로 살아왔다는 것이 된다.
꽤 열악한 성장 배경.
하지만 그것이 사람의 정신을 장난감처럼 갖고 노는 데에 정당성을 부여해 주진 않는다.
김건은 그렇게 생각하며 아까부터 묻고 싶었던 것을 물었다.
“그런데 왜 클라우를 높여서 부르시는 겁니까? 한참 어린아이일 뿐인데요.”
마틴은 계속 클라우를 아가씨라 부르며 마치 성 안의 공주님에 대해 말하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
김건은 그 내막이 궁금했다.
마틴은 망치질을 멈추고 잠시 고개를 들었다.
먼곳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마치 과거의 일을 회상하는 것처럼 보였다.
“왜냐하면 아가씨는, 이 섬의 천사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죠.”
“천사요?”
김건이 황당하다는 목소리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