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 81화
그는 자조적으로 말했다.
“솔직히 말해 지금 우리가 하는 건 애 보기야. 아니, 정확히 말하면 괴물 돌보기인가? 평생을 우물 속에서 웅크려 살다가 기어 나온 괴물이 하고 싶어 하는 걸 들어줄 뿐이지. 그 이상, 이하도 아니야.”
마인은 오로지 벨제불을 위해서만 움직인다.
그들에게 벨제불은 맹목적인 숭배와 경애의 대상인 것이다. 그리고 클라우는 벨제불의 일부를 부여받은 화신이었다.
설령, 그녀에게 인간의 일부가 남아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김건은 아스타로트의 말을 이해했다.
그리고 아까부터 이곳을 바라보고 있던 인기척을 향해 돌아보았다.
언제 쫓아왔는지, 화들짝 놀란 클라우가 건물 뒤로 숨어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김건은 한숨을 쉬었다.
아무데서나 추파를 던지던 당당함은 어디 갔는지, 벨제불의 화신이라는 자가 부끄럼쟁이가 되어 버렸다.
이제 와서 평범한 척해 봐야, 그에게는 불쾌하기만 할 뿐인데 말이다.
김건은 저런 인간의 말을 듣느냐는 듯 아스타로트를 바라보았다.
아스타로트는 그저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남아 있던 차를 들이켜는 두 사람에게 다가오는 인영이 있었다. 마교의 교주, 레이나 아레이드였다.
미녀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김건은 그 표정이 처음 그를 만났을 때의 알리시아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레이나는 차가운 눈으로 김건을 흘겨보았다.
“아가씨께서 조금 뒤에 같이 저녁 식사를 하자고 합니다. 준비를 해 둘 테니, 6시까지. 아가씨의 별장으로 오세요.”
빠르게 말을 쏟아 놓고는 훌쩍 등을 돌려 사라져 버린다.
일방적인 통보에 김건이 혀를 찼다. 아스타로트가 물었다.
“갈 거냐?”
“가 봐야지. 클라우가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지를 좀 알아봐야겠어.”
“그런 거라면 가 봐야 소용없을걸.”
“왜?”
아스타로트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내가 말을 해도 넌 모를 거다. 꼬마야.”
명백한 희롱에 김건은 차갑게 얼굴을 굳혔다.
“쓸데없는 소릴 하는군.”
그러면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드시지요.”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갈 즈음에 도착한 클라우의 별장.
그 주방의 식탁에 앉은 김건 앞에 요리가 올라왔다. 접시를 내려놓은 레이나는 매서운 눈으로 김건을 흘겨보았다.
멸시는 익숙하다. 평상시의 김건이라면 허허 웃으며 흘려 넘겼을 거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김건은 보기 드물게 인상을 쓰며 살기를 뿜었다.
“…….”
레이나와 김건의 시선이 부딪히며 삽시간에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김건은 어금니를 깨물었다.
결국 다 같은 악당이지만 그래도 다른 놈들이랑은 대화를 해 볼 생각이 든다.
하지만 눈앞의 여자는 달랐다.
레이나에게서는 짙은 향수의 내음이 났다.
하나 그 손끝에, 발끝에 남아 있는 썩은내를 지우진 못했다.
겉보기는 아름답지만 온몸이 피 냄새에 절어 있다.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람을 죽인 여자다.
김건은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여자는 쓰레기다.’
절대로 존재를 용납해선 안 될 괴물이었다.
지금 같은 특이 상황이 아니었으면 진즉에 진동을 쏘아 죽였다.
그 생각은 레이나도 별로 다르지 않은 듯, 그녀는 살기 어린 눈으로 김건을 내려다보았다.
“그만해.”
화신이 뿌리는 신격이 두 사람의 눈싸움을 멈춰 세웠다. 클라우가 두 사람을 노려보고 있었다.
“……실례했습니다.”
한숨을 쉬며 레이나가 물러났다.
그녀는 꾸벅, 클라우를 향해 고개를 숙여 보이곤 종종걸음으로 식당을 빠져나갔다.
“많이 먹어.”
클라우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듯 식사를 권했다.
김건은 불쾌감을 털어 내며 식기를 잡고 식사를 시작했다.
눈앞에 놓인 고기를 나이프로 썰어 입에 넣고 씹는다.
……맛은 있었다.
분위기상 요리를 만든 건 레이나로 보였다.
전장에서 오래 지내느라 신경이 굵어져서 그런지, 살인자들이 있는 공간에서 살인자들이 해 준 밥을 먹고 있는데도 음식이 술술 들어갔다.
‘나 참.’
김건은 속으로 자조했다.
회귀를 하긴 했지만 그도 사실 엄청난 경험을 쌓은 건 아니다.
끽해야 30대 초반. 정상적인 사회였다면 아직 피라미로 치부될 나이였다.
돌이켜 보면 평생을 싸움꾼으로 살아 온 그의 상대는 대부분 적아가 확실한 몬스터들이었다.
인간들끼리의, 선악과 적아가 불분명한 머리 아픈 싸움은 해 본 적이 없다.
김건은 생각을 비웠다.
과거가 어찌 되든 마인협회는 지금 당장의 아군이었다. 놈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굳이 성질을 드러내서 사이를 망칠 필요는 없었다.
김건은 되도록 편안한 마음으로 식사를 즐기자고 마음먹었다.
그러고 보면 클라우는 사람의 정신 상태를 오감으로 읽어 낼 수 있다고 했다.
살짝 고개를 들자 이쪽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클라우가 보였다.
그녀는 김건의 경계심이 옅어진 것을 알아챘는지 조심스럽게 물었다.
“맛이 어때?”
“맛있어.”
“다행이네.”
“…….”
“…….”
침묵.
클라우가 어쩔 줄 몰라 하는 게 느껴졌다.
김건은 먼저 말문을 열었다.
“갑자기 왜 마음이 바뀌었지? 세상이 망하든 말든, 그런 건 신경도 안 쓸 것처럼 보였는데.”
처음 등장을 했을 때도, 고양이를 가지고 협박을 할 때도, 마인협회를 이끌고 기습을 했을 때도, 클라우는 오로지 자기 주관으로만 움직였다.
사회적 제약, 주위의 환경, 예의 따위는 하나도 모른다는 듯 천방지축으로 날뛰었다.
그러던 인간이 갑자기 머리를 숙이고 들어왔다.
그것도 지금의 위기를 같이 헤쳐 나가자는 목적으로.
김건은 갑작스러운 클라우의 심경 변화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게…….”
클라우는 어물어물 대답을 피했다. 그녀는 화난 부모님을 앞에 둔 아이처럼 한참이나 김건의 눈치를 살피다가 겨우 목소리를 짜냈다.
“네가, 날 너무 싫어하니까…….”
후우.
김건은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정말로 궁금해서 물었다.
“난 대체 네가 왜 그렇게까지 날 신경 쓰는지 모르겠는데. 벨제불 입장에서야 한 번 크게 쏘였으니 경계 정도는 할 수 있겠지. 그걸 빼면…… 화신 입장에서는 그렇게 대단할 것도 없는 인간인데 말이야.”
“무슨 소리야. 너만 한 인간은 거의 없어.”
방금 전만 해도 말을 더듬더니, 갑자기 술술 말한다.
거기에 조금 질책하는 듯한 시선이 누군가와 비슷해서, 김건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김건이 심리적 거리를 벌리자 이번에는 클라우가 한숨을 쉬었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으며 정신을 다잡은 그녀는 포크를 들며 처음과는 다르게 매끄럽게 물었다.
“한서리한테 내 정보를 들은 적 있어?”
김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아 출신에 어린 시절을 연구소에서 보냈다는 것 정도는. 그 연구소는 원인 불명의 사건으로 파괴되었다 들었고.”
“그 연구소가 뭘 하는 곳이었는지 알아?”
“몰라.”
“세뇌 마법을 연구하던 곳이었어. 나는 어렸을 때부터 정신계 마법에 재능을 보였기 때문에 거기에 팔려 갔었던 거고.”
정신계 마법은 그 위험성 때문에 필요에 의해 지정된 몇몇 용도 외에는 사용은 물론이고 연구하는 것 자체가 불법이었다.
당연히 사람을 마음대로 조종하려 하는 세뇌 마법은 금기에 가까운 영역에 있었다.
클라우는 코웃음을 쳤다.
“세뇌 마법의 유용함은 말할 필요도 없겠지.”
유용하다뿐인가, 제대로 작동만 한다면 세계를 지배할 수도 있는 능력이었다.
하여튼 헛된 꿈을 꾸는 바보들은 항상 있다.
김건은 탄식했다.
“그럼 네 정신 제어 마법은 그 연구소에서 배운 건가?”
클라우는 비웃듯이 말했다.
“일부는 그래. 대부분은 벨제불의 능력이지. 아니, 벨제불이 내게 씐 것도 연구소에서의 실험 때문이었으니, 마냥 그렇다고 할 수도 없나?”
벨제불을 건드렸다라.
직접적으로 들은 건 아니지만 김건은 연구소가 파괴된 원인을 알 것 같았다.
클라우는 고기를 한 점 씹어 삼키고 난 뒤에 말했다.
“돌이켜 보면 꽤 재미있는 곳이었어. 놈들이 잡아 온 실험체들이 하는 걸 보면 반응이 가지각색이었거든.”
여유를 찾은 나긋나긋한 손이 와인 잔을 잡는다. 붉은 액체가 클라우의 입술 사이로 흘러 들어갔다.
“고결하던 성자가 한순간에 이기심으로 가득한 쓰레기가 되고, 평생을 남에게 들러붙어 살던 기생충이 갑자기 고상한 귀족처럼 굴기도 하지. 때가 꼬질꼬질해서는 이리 오거라~ 근엄하게 말하는 걸 보고 있으면 웃지 않을 수가 없지.”
클라우가 큭큭 웃는다. 김건은 질색을 했다.
“……내가 듣기에는 그냥 끔찍한데.”
“…….”
크흠, 큼.
클라우는 헛기침을 했다.
“……하여튼, 내가 그 꼴을 보면서 깨달은 게 뭔지 알아?”
김건은 어디 말해 보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클라우가 이어 말했다.
“인간은 짐승과 별로 다를 바가 없다는 거야. 입이 달려 있으니 감정이니, 긍지니, 사랑이니, 온갖 미사여구를 갖다 붙여 치장하지만 그 속을 뒤집어 까 보면 결국 짐승과 똑같아. 배부르고 등 따시면 좋아하고, 춥고 배고픈 걸 싫어할 뿐이지.”
김건은 그 말에 동의할 수 없었지만 잠자코 있었다. 지금 이 자리는 각자의 철학에 대해 토로하는 곳이 아니었으니까.
말을 하다 보니 긴장이 풀린 모양이다.
클라우는 맨 처음 김건과 마주쳤을 때처럼 여유로운 미소를 띠며 와인 잔을 가지고 놀았다.
“벨제불의 화신이 되고 나니 그 생각이 더 강해졌어. 아무리 잘난 척하던 놈도 손가락 한 번 튕기면 내 마음대로가 되니까, 모든 게 재미가 없어지더라. 그래서 지금까지 그냥 하릴없이 숨만 쉬며 살아왔지.”
향을 즐기던 클라우가 잔을 비웠다.
빈 잔을 내려놓으며 의미 모를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그냥 우물 안 개구리였던 거야.”
옅은 한숨이 흘러나온다.
여자의 얼굴 위로 조금이지만 후회의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근래에 들어 생각해 본 거지만…… 곰곰이 떠올려 보면 분명히 있었어. 온갖 정신 제어에 마지막까지 발버둥 치며 저항했던 사람들이. 난 그걸 그냥 힘으로 짓눌러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은 다음, 원래의 모습을 잃어버린 그것을 별거 아니었다고 착각하고 있었던 거야.”
빨간 눈망울이 김건을 향했다.
“그리고 내게 그걸 일깨워 준 건 너야. 벨제불의 화신이 공유한 기억이 너의 존재를 알려 줬지. 지금까지 만난, 아니 본 인간 전부를 되짚어 봐도 너처럼 내 흥미를 끄는 사람은 없었어.”
클라우가 김건을 마주 봤다. 마기가 휘몰아치는 붉은 눈에서 전해지는 비정상적인 열의에 김건의 피부에 소름이 돋았다.
“아무리 강인하고 아름다운 정신 세계를 갖고 있다 해도, 벨제불의 힘 앞에서는 한순간에 짓이겨질 뿐이야. 다들 부서지기 쉬운 장난감이었어. 그러니 흥미가 생기지 않았던 거야. 하지만 넌 달라. 짓이겨지기는커녕 벨제불의 화신을 손짓 한 번에 날려 버렸어.”
“사람들은 네 장난감이 아니야.”
김건이 한 말은 그것뿐이었다.
클라우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럴지도.”
이제는 완전히 처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클라우는 아무것도 모르던 김건을 놀릴 때의 음흉한 미소를 지으면서 손수건으로 입을 닦았다.
“일단 앞으로 무슨 일어날지는 나도 몰라. 그래도 티아마트를 쫓아내기 전까지는 같은 편이니까, 되도록이면 사이좋게 지내자고.”
“그래.”
김건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건 단순히 형식적인 대답이었을 뿐이다.
바로 앞에, 마주 보고 식사를 하며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도 둘 사이의 거리감은 여전했다.
무덤덤한 시간이 지나갔다.
김건은 묵묵히 밥만 먹었고, 클라우는 반쯤 먹다 입맛이 없어졌는지 식기만 깨작이고 있었다.
식사를 마친 김건은 기다려 주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초대받은 손님으로서 예의상 말했다.
“잘 먹었어.”
가볍게 목례를 하고 나가려 하는 등을 클라우가 붙잡았다.
“잠깐만.”
“…….”
더 할 말이 있냐는 듯한 표정으로 김건이 클라우를 돌아봤다.
클라우는 한참이나 우물쭈물하다가 겨우 말했다.
“……잘 자.”
김건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대로 클라우의 별장을 빠져나갔다.
* * *
섬의 밤은 일찍 찾아왔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돌아오자 금방 깜깜해져서, 김건은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일어나니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새벽이었다. 김건은 습관대로 한참 동안이나 수련을 하다가 아침 먹을 시간이 되어서야 행동에 들어갔다.
그가 맨 처음으로 발길을 향한 곳은 알리시아의 방이었다.
“일어나셨습니까?”
똑똑, 문을 두들기자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방으로 들어가자 텁텁한 공기가 흘러넘치며 피와 땀이 섞인 비린내가 코끝을 맴돌았다.
김건은 바로 창문을 열며 핀잔을 주었다.
“환기 좀 하시지.”
“귀찮아. 아파 죽겠는데. 움직이기도 싫어.”
알리시아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치료 마법의 도움이 있겠지만 용족의 자체적인 재생 능력도 강한 모양이다. 대충 풀어 재낀 붕대가 침대 위에 나동그라져 있었다.
상처는 대부분 나은 듯하고, 자세히 보니 잘린 손가락도 돋아 있었다.
모로 누워 있는 알리시아의 손에는 책, 종이로 만들어진 진짜 책이 들려 있었다.
김건은 이 와중에도 독서에 열중하는 그녀를 보고 혀를 찼다.
“그건 어디서 구한 겁니까?”
“시설을 잘 살펴보니 도서관이 있더군.”
반병신이 될 정도로 두들겨 맞고 적진으로 도망 와서도 찾는 것이 도서관이라니.
김건은 그 열정에 감탄했다.
딱히 알리시아와 가까운 사이는 아니지만 아무리 그래도 눈에 너무 밟힌다.
김건은 대충 널브러져 있는 붕대를 주워서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책을 보던 알리시아가 불쑥 말했다.
“팀장님에게서 연락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