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 83화
모델이라길래 뭔가 했더니, 정말 별거 아니었다.
김건은 별장의 한편을 차지하고 있는 작업실에 앉아 있었다.
등 뒤에 설치된 큰 창으로 햇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그의 앞에는 캔버스와 각종 도구들을 펼치고 있는 클라우가 있었다.
클라우가 준비를 하는 사이 김건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작업실은 온통 그림으로 가득했다.
그는 놀란 기색으로 말했다.
“꽤 그럴싸한 취미를 갖고 있잖아.”
맨 처음 봤을 때는 벽에 사진을 붙여 놓은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사람이 정성들여 그린 그림이었다.
바다, 숲, 하늘과 저녁 노을 등 자연의 풍경이 날것 그대로 그려져 있다. 비전문가인 김건이 보기에도 엄청난 솜씨였다.
클라우는 연필을 깎으면서 말했다.
“그림은 좋아. 극사실주의를 지향하는 작품은 특히. 다른 예술 작품들에 비해 인간의 주관이 크게 들어가지 않거든. 자체적으로 평가를 내리기도 쉽고. 시간 때우는 데에는 이것만 한 게 없지.”
말을 마친 그녀는 곧장 스케치를 시작했다.
지금껏 김건에게는 보이지 않던 엄한 태도로 말했다.
“움직이지 마.”
그러면서 자세를 지도한다.
김건은 클라우가 말하는 대로 시선과 몸을 고정시켰다. 그러다 입술만 달싹여서 물었다.
“얼마나 이러고 있어야 하지?”
“글쎄, 못해도 한두 시간은 그러고 있어야 할 것 같은데.”
몸을 다루는 게 직업인 만큼 김건에게 자세를 유지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클라우의 말처럼 몸을 고정시키고 그 사이에 체내의 마력을 통제해 수련에 들어갔다.
잠자코 마력을 조작하다 보니 시간은 금방 흘러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클라우가 말했다.
“됐어. 이제는 조금 움직여도 돼.”
김건은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였지만, 자세를 풀지는 않았다. 이미 그 자세로 수련을 하는 게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클라우는 물감을 섞어 색을 조합하면서 나른하게 말했다.
“이 와중에도 훈련을 하는 거야? 엄청 성실하네.”
“그냥 버릇 같은 거야. 의식하지 않아도 몸이 반응하게 만들려면 계속해서 반복 수행을 할 수밖에 없으니까.”
캔버스에 붓칠을 시작한다.
클라우가 물었다.
“넌 취미 같은 게 없어?”
“원래는 없었어. 최근에는 영화를 보기 시작했고.”
“영화? 그건 한서리의 취향인가?”
“그래.”
또 한동안 말이 없었다.
스윽스윽, 붓이 캔버스를 가로지르는 소리만이 조용히 울려 퍼졌다.
불쑥, 클라우가 물었다.
“한서리를 어떻게 좋아하게 된 거지?”
잘 모르는 사이에서 묻기에는 꽤 예민한 질문이었다. 김건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답을 강요하는 건 아냐. 그냥 궁금해서 그래. 답하기 싫으면 싫다고 해.”
클라우는 지금까지와 달리 그림에 집중한 채 침착하게 말했다.
생각 외로 취미에는 꽤 열정적인 성격인 모양이다.
지금까지 보던 천방지축 사춘기 소녀 같은 혼돈 대신, 그저 차분하게 그림에만 신경을 쏟는 여자만이 남아 있었다.
김건이 한서리를 만난 건 한참이나 미래의 일이었다.
존재했지만 존재하지 않는 일. 거기에 극히 개인적인 질문이다. 굳이 대답을 해 줄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과거의 모습과는 다른 차분한 태도가 김건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렸다.
말한다고 딱히 큰일이 날 질문도 아니다.
아까 확실히 선을 그어 둔 관계여서 그런지, 어쩐지 말하기 편한 것도 있었다.
김건은 그냥 말해 주었다.
“별건 아니야. 처음에는 오히려 사이가 안 좋았지. 난 느슨한 이상주의자지만 그 사람은 예민한 현실주의자였거든.”
“그런 것 같아 보여.”
“하지만 언젠가…… 그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버려지는 모습을 봤어.”
“그 ㄴ…… 아니, 한서리가 남에게 버려졌다고?”
클라우는 그만한 독종이 버림받았다니 믿기지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김건은 피식 웃었다.
“딱히 인간 관계가 좋은 사람은 아니니까.”
“그런 거라면 이해가 되는군. 성질머리가 그 모양인데, 이용 가치가 없으면 단숨에 버려지겠지.”
그 말을 아내가 듣는다면 노발대발하며 날뛸 것이다. 너나 잘 하라고, 어쩌면 머리를 쥐어뜯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그때는 실제로 그랬다.
아무리 위기에 처했어도 권력을 향한 인간들의 욕망은 여전했다.
인류의 종말을 코앞에 둔 상황에서도 상부에서의 알력다툼은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당시의 한서리는 능력은 있었으나 정치력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눈치는 있었지만 콧대 높은 성격이 일부러 그것을 무시했다. 그리고 그 점을 못마땅해하는 바보들은 많았다.
그 결과, 한서리는 버림패로 쓰였다.
김건은 어깨를 으쓱였다.
“하여튼 그때…… 그 사람의 표정을 봤지.”
“분해서 죽으려고 할 것 같은데.”
“아니, 울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어.”
“…….”
“부모님에게 버림받은 아이 같은 얼굴이었지. 그렇게 생각한 건 나밖에 없었던 것 같지만.”
돌이켜 봐도 그 얼굴이 왜 그렇게 보였는지는 모른다.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침묵하고 있었을 뿐인데, 김건이 본 한서리의 얼굴은 정말로 안쓰러워 보였다.
“그걸 보고 나니까, 왠지 지켜 주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고.”
그러고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의아해진 클라우가 물었다.
“그게 다야?”
“굳이 짚어 보자면 그래. 그냥…… 그 사람이 울상이 되는 걸 보고 싶지 않아. 웃어 줬으면, 아니, 평소처럼 콧대를 세우고 의기양양했으면 좋겠어.”
헛웃음이 클라우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나 참…… 정말 별것도 아닌 이유네.”
클라우는 잠자코 그림을 그렸다.
그러다 문득 캔버스 너머로 고개를 내밀며 말했다.
“지금 내 얼굴이 보여?”
“보여.”
“어때? 울 것 같은 표정처럼 보이지 않아?”
농담이 통하지 않는 남자는 진지하게 클라우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그러고는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전혀 모르겠는데.”
“그런가.”
클라우는 예의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무정한 남자네. 립 서비스로 입을 맞춰 줄 수도 있잖아?”
“글쎄, 나도 딱히 사회성이 좋은 편은 아니라서.”
“괜찮아. 좋은 모습을 봤으니까 용서해 줄게.”
난데없는 말에 김건이 의아한 듯 고개를 꺾었다.
“뭐가?”
“방금, 한서리에 대해 말할 때 네가 웃은 거 알고 있어?”
잠깐 기억을 되돌려 본다. 하지만 무의식중의 일이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클라우가 말했다.
“꽤 멋진 얼굴을 하고 있었어. 역시 모델로 삼기를 잘했네.”
“…….”
그다음부터 클라우는 말이 없었다.
마치 스스로가 그림 그리는 기계라도 되는 양 그림에만 몰두했다.
“이봐.”
김건이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앉아 있던 의자에서 내려와도 캔버스만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 뭘 하나 싶어서 김건은 다가가 캔버스 안쪽을 바라보았다.
클라우는 무서운 속도로 그림을 그려 가고 있었다.
이미 머릿속에 어떤 형상이 박혀 있는지 모델을 확인하지도 않고 붓을 놀렸다.
빠르게 그림이 완성되어 갔다.
엄청난 집중력.
김건에게 그림에 대한 지식은 없다.
하지만 그런 그가 봐도 클라우의 실력은 경이적이었다. 다른 분야에서 정점에 다다른 그는 그림을 그리는 클라우의 모습에서 동질감을 느꼈다.
클라우의 인격에는 적대감밖에 없지만, 그 실력에는 경의를 표하고 싶을 정도였다.
김건은 빨려 들어갈 듯이 클라우의 그림이 완성되어 가는 것을 보았다.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나고, 해가 지평선을 넘어갈 즈음에야 그림이 완성되었다.
네모진 캔버스 안에는 앉아 있는 김건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그림 속의 김건은 그 자신도 저런 얼굴을 한 적이 있나 싶을 정도로 멋진 미소를 짓고 있었다.
김건은 한마디로 그 그림을 평했다.
“사실주의라고 하더니.”
그가 생각하기에 눈앞의 그림은 꽤 미화가 들어가 있었다.
클라우는 웃으며 대답했다.
“작품에 주관을 담을지 말지는 내 마음이니까.”
붓을 내려놓은 클라우는 수건으로 대충 손을 닦고 주머니에서 조그만 박스를 하나 꺼냈다.
박스에 마력을 담자, 조그만 박스는 커다란 액자가 되었다.
값비싼 명화 등을 운반할 때 쓰이는 특수 액자였다.
클라우는 아직 물감도 덜 마른 그림을 액자에 밀어 넣곤 다시 마력을 발휘해 한 손 크기로 줄어든 액자를 김건에게 건넸다.
“자.”
“뭐야?”
“선물이야. 받아 줘.”
“아니, 딱히…….”
김건은 거절하려 했다. 하지만 클라우는 간절하게 박스를 쥔 손을 그의 가슴에 갖다 댔다.
“마지막 부탁이야. 더 이상 억지 부리지 않을게.”
그 의도에 불손함이 없다면, 불합리를 따질 필요도 없이 그저 평범한 부탁이라면, 딱 잘라 거절하지 못하게 된다.
언젠가, 아내가 그에게 무르다고 하던 것이 떠올랐다.
“……알았어.”
김건은 한숨을 쉬며 박스를 받아 품속의 주머니에 넣었다.
그때였다.
기다렸다는 듯이 레이나가 작업실로 뛰어 들어왔다.
“아가씨. 나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클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김건과 함께 별장 밖으로 나갔다.
박사, 그리고 알리시아와 함께 서 있는 한서리가 있었다.
한서리는 클라우와 김건이 같이 나오는 것을 보고 눈에 쌍심지를 켜며 클라우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클라우는 그것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박사가 말했다.
“발할라의 티아마트 공략전 준비가 완료되었다고 합니다.”
* * *
발할라의 판단은 이랬다.
김건을 찾으면 좋다. 하지만 기린의 화신에 이어서 마인협회까지 그를 노리고 있는 상황에 그를 추적하기엔 리스크가 너무 커졌다.
더 이상 시간을 주면 티아마트가 회복한다.
눈앞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 발할라는 눈엣가시처럼 밟히는 기린과 벨제불의 화신에게서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더 이상의 추적은 없다.
그러니 김건이 마인협회의 은신처에 있을 이유도 없었다.
한서리는 김건과 알리시아를 데리고 섬을 벗어났다.
알리시아는 지원군을 확보하기 위해 별도로 움직였다.
김건을 데리고 별도로 마련해 둔 은신처로 돌아온 한서리는 정말 오랜만에 남편과 독대할 수 있었다.
그녀는 도착하자마자 김건을 끌어안았다.
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조금 뾰족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 여자한테 뭔가 이상한 걸 당한 건 아니지?”
“딱히, 같이 밥 좀 먹고 대화 좀 나눈 게 다야.”
그랬을 것이다. 평범한 일상에서의 교류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도록 꼼꼼하게 계약 내용을 설정했으니까.
한서리는 그것보다 다른 것이 걱정되어서 물었다.
“혹시나 놈들과 대화를 나누다가 마음이 흔들린 건 아니지? 이 일이 끝나고 나면 서로 죽여야 할 사이가 될 텐데.”
김건은 꽤 사교적인 면이 약한 편이었다.
또한 상대방의 의견을 잘 들어 주고, 대부분의 갈등 구간에서는 먼저 양보하는 말랑말랑한 인간이다.
적아 구분이 확실한 사람이라는 건 안다. 그가 보이는 친절이 강자가 보이는 여유라는 것도 안다.
그래도 사람 마음이라는 건 모르는 것이다.
재벌가에 태어나 엘리트 코스를 밟으며 상류 사회의 악취 속에서 살아온 한서리와 달리, 평생을 수련에만 바쳤던 김건은 비교적 사회 경험이 적었다.
같이 지내는 동안 쓰레기 마인 놈들이 약한 척 우는 소리라도 했으면 놈들에게 동정심을 품을지도 몰랐다.
김건은 쓰게 웃었다.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지.”
“그럼…….”
마인협회는 내가 알아서 처리할게, 라고 말하기 전에 김건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아닌 건 아닌 거야. 놈들은 이미 선을 넘었어.”
김건이 마음속에 그어 둔 선.
그 선을 넘어가는 건 굉장히 어렵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 선을 넘고 돌아온 자를 한서리는 지금까지 보지 못했다.
놈들이 그 선을 확실히 넘었다면 됐다.
한서리는 안심하고 남편의 가슴에 코끝을 문질렀고, 김건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너무 깊숙하게 얼굴을 파묻은 탓에 코맹맹이 소리가 된 한서리가 물었다.
“한 시간 정도는 시간이 있는데, 어떻게 할래? 작전 개요라도 먼저 들려줄까?”
김건은 고개를 저었다.
“됐어. 난 어차피 시키는 대로 싸우기만 하면 돼. 방금 전까지 회의하다가 왔을 것 같은데. 당신도 피곤할 거 아냐. 그냥 쉬어.”
김건은 이번 작전의 구상 회의에 참가하지 못했다.
그가 무슨 천하의 군사도 아니고, 별다른 정보도 없다. 이제 와서 의견을 내 봐야 잡음만 날 것이다.
“그래?”
한서리는 고개를 들더니 배시시 웃었다. 그러고는 김건의 팔을 붙잡고 침대로 향했다.
그녀는 김건을 안은 채 침대에 누웠다.
잠깐 젖혀 두었던 이불을 들어 자신과 함께 김건의 머리까지 뒤집어씌웠다.
눈앞이 깜깜해지고 숨이 답답해졌다.
서로의 체향이 이불 안쪽을 가득 채웠다.
어둠 속에서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방금, 이상한 생각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