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아내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 84화
한서리가 김건의 허리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마력의 빛이 담긴 파란 눈이 야광처럼 반짝였다. 김건은 입맛을 다셨다.
“아니, 평소랑은 분위기가 다른걸.”
“뭐가 어떻게 다른데?”
“…….”
짓궂은 질문에 김건의 말문이 멎었다.
한서리는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남편의 얼굴을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킥킥 웃는 한서리.
김건은 어렵사리 말했다.
“평소에는 그러니까…… 조금 더 끈적끈적한 느낌이었던 것 같은…….”
“끈적끈저억?”
그렇게 징그럽게 달라붙지는 않았던 것 같았는데.
한서리는 잠시 과거의 자신을 회상했다.
당연히 생각나는 건 없었다.
다음에 할 때 의식해서 확인해 봐야지.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남편을 죽부인마냥 끌어안았다.
“하여튼, 지금은 됐어. 당장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닌데 허겁지겁 하고 싶지 않아. 이번 일이 끝나고 천천히, 편안한 마음으로 즐기고 싶어.”
그때까지 둘 다 살아 있을 수 있을 때의 이야기지만.
한서리는 뒷말을 삼켰다.
“그래.”
김건은 짧게 답하며 한서리의 어깨를 안아 주었다.
하암-
한서리는 작게 하품을 했다. 기린의 화신이 되었지만 그 힘이 항상 작용하여 사람 자체가 변하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으로서의 육체는 그대로였고, 따라서 피로를 느끼는 것도 당연했다.
그간 작전을 수립하기 위해, 그리고 남편을 향한 추적을 멈추기 위해 계속해서 능구렁이들과 사투를 벌였던 참이었다.
피곤했다.
“잠깐 자.”
김건이 부드럽게 속삭였다.
한서리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아기 새처럼 그의 품속에 파고들었다.
김건이 빙긋 웃었다.
“옛날 생각나네.”
전투와 전투로 생을 살아가던 그때.
거점도 제대로 잡지 못해서 계속해서 이동해 가던 그때는 잘 공간을 마련하기도 힘들어서 많은 사람들이 좁은 공간에 모여 부대껴서 잤다.
그나마 두 사람은 그 능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에 지붕이 있는 곳에서라도 쉴 수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흙바닥에 요 하나 깔고 눈을 붙여야 했다.
그때는 곧잘 이렇게 아내와 한 이불에서 부둥켜안고 잤다. 서로의 체온을 느끼면서 잠이 들면 그때만큼은 편안하게 현실의 고통을 잊을 수 있었다.
그때마다 항상 하던 대화가 있었다.
한서리는 날아가려 하는 의식을 가까스로 붙잡으며 몽롱한 목소리로 물었다.
“만약에, 만약에 말이야…….”
“응?”
김건이 고개를 내렸다. 반쯤 감긴 눈을 힘겹게 뜬 아내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번 일도, 마인협회의 일도 잘 마무리가 돼서…… 더 이상 싸우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오면 뭘 하고 싶어?”
싸움이 끝난 다음의 이야기.
싸움꾼들 사이에서는 금기에 가까운 질문이었다.
그 말을 하면 재수가 없다는 미신도 있고, 간혹 헛된 희망이 눈앞의 현실을 가리는 일도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싸움꾼들은 농담을 한다.
아무 의미도 없는 실언을 주고받으며 현실을 잊는다.
하지만 농담으로 버티는 것도 하루 이틀이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 한 주가 지나고 한 달이 지나 연 단위가 넘어도 계속 싸워 나가기 위해선 희망이 필요하다.
중간 과정이 어찌 되든, 무조건 잘될 것이라 믿으며 미래를 꿈꾸는 것이다.
김건과 한서리. 둘은 그렇게 꿈꾸는 것에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돌아온 이래로 한서리가 그 주제를 꺼내는 건 처음이었다.
김건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다 끝나면…… 도장이라도 차렸으면 좋겠네.”
“무술 도장?”
“응. 내가 지금까지 쌓아 온 걸 애들한테 물려주고 싶어.”
“미극공진동을 물려주려고?”
“그랬으면 좋겠지만 그건 힘들 거 같고, 내가 조상들과 부모님께 배웠던 마음가짐을 이어 주고 싶어.”
한서리는 졸린 와중에도 쿡 웃음을 터트렸다.
“그게 뭐야. 노인네 같아.”
“내가 그런 말을 많이 듣긴 하지.”
한서리가 꺼져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차려 줄게…….”
“뭘?”
“도장…… 꼭 좋은 곳에…….”
그녀는 그러면서 꾸무럭 잠에 들었다.
김건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조그맣게 오그라든 아내의 등을 살살 문질러 주었다. 그리고 방금 전에 한 말을 되새겼다.
이러쿵저러쿵 이유는 붙이지만 김건이 계속 싸움꾼의 길을 걸었던 것은 결국 그게 좋았기 때문이다.
무술이라는 세계가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무의 궁극을 추구하는 것이 그에게 기쁨을 주었기에 끝까지 달려 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아내는 달랐다.
한서리는 제대로 된 자유를 만끽해 본 적이 없는 인간이었다.
날 때부터 재능을 갖고 태어난 그녀는 항상 집안에, 혹은 상황에 휘둘려서 그 재능을 이용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 주제로 대화를 나눈 건 처음이 아니다.
그때는 너무 허황된 이야기만 오갔기 때문에 그저 웃음으로 넘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티아마트가 강림에 성공했다 하더라도 그때처럼 절망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승산이 있었다.
그러니 이제는 현실적인 꿈을 꿔 봐도 될 것이다.
김건은 아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 참. 난 당신이 뭘 하고 싶은지 듣고 싶은데.”
저번에는 실패했다.
하지만 이번엔 반드시 그 꿈을 실현시킨다.
아내가 원하는 대로, 자신 역시 죽지 않는 선에서 이 사태를 끝내고야 말 것이다.
김건은 각오를 다지며 한서리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
* * *
한서리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커다란 푸른빛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녹색과 황토색이 섞인 대지가 부서진 과자 조각처럼 널브러져 있고, 파아란 수면이 그것을 감싸고 있었다.
시야를 돌려 본다.
검게 물들어 있는 우주와 파란 수면이 마주친 가운데, 흰색 광원이 둥그렇게 행성의 모습을 그려 내고 있었다.
지구의 모습을 확인한 한서리는 다시금 고개를 내려 지구상의 한 점을 바라보았다.
커다란 대지에 박혀 있는 붉은색 광점.
그것은 티아마트가 강림한 흔적이었다.
그저 붉게만 보이는 대지. 강력한 투기가 주변 공간마저 왜곡하여 빛마저 차단당했다.
저 안에 무슨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미래를 겪고 돌아온 한서리도 마찬가지였다. 왜냐하면 당시 인류의 방침상 티아마트의 신격은 무조건 피해야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싸웠던 예외를 제외하고 인간 측이 정면 돌파를 노리고 티아마트와의 세력과 싸운 적은 없었다.
도망치거나, 다른 마신을 끌어들여 공멸을 유도할 뿐.
하지만 지금이라면 싸워 이기는 것이 가능할지도 몰랐다.
인류 최강의 세력이 생생이 살아서 지금 이곳에 모여 있으니까.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주변의 상황을 재확인했다.
성층권 위에 떠 있는 배의 갑판 위로 우글거리는 사람들이 보였다.
한서리는 비공정 위에 서 있었다.
비공정은 이동 요새인 슬레이프니르나 아서 로보타의 갑옷처럼, 인류의 기술과 마법을 응용해 만들어 낸 궁극의 병기였다.
주변에 펼쳐진 마법진이 공기가 없는 고고도에서도 기압을 유지하며 호흡을 가능케 한다. 수많은 영웅들이 갑판 위에 올라 전투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뿐인가, 자체적인 전투력도 높다. 대량의 폭탄을 탑재해 초고도에서의 폭격이 가능하며, 극대소멸공격까지 가능한 마력 대포와 기타 함포를 장착해 직접적인 전투에도 대응할 수 있다.
날아다니는 공중 요새.
그 위력은 가히 엡실론급 몬스터에 달한다고 봐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런 비공정 10대가 같은 고도에서 날고 있었다.
국적과 소속을 불문하고 전 지구에서 긁어모은 인류 최대의 전력이었다.
작전은 이미 시작되었다.
비공정의 아랫부분의 패널이 젖혀지며 폭탄이 줄줄이 떨어졌다.
한참 아래를 내려다보면 비공정의 투하 범위를 벗어난 위치를 비행하며 마찬가지로 폭격을 가하는 비행체들이 보였다.
이전의 작전에서 했던 것처럼 폭격을 가해 투기를 소모시키는 것이다.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지금 저 줄줄이 떨어지는 폭탄 하나하나가 일반적인 폭격용 폭탄이 아닌 핵폭탄이라는 것.
전 세기에 만들어 둔 것을 포함한 수천 발에 달하는 핵 샤워가 티아마트의 준동지에 떨어졌다.
와르릉, 와르릉, 천둥소리가 울려 퍼지며 지표면에서 터진 충격파가 이쪽까지 올라온다.
하지만 그 상대는 주먹질 한 번으로 대륙을 쪼개 버리는 반신이다.
설령 잠들어 있다고 해도 그로부터 발휘되는 투기는 막대하다.
의념이 담기지 못한 폭탄 따위, 대부분은 방사능이나 후폭풍을 남길 틈도 없이 투기에 먹혀 사라질 것이다.
괜찮았다.
이쪽의 목적은 타격이 아니라 소모일 뿐이니까.
폭격이 끝나면 바로 투입이다.
한서리는 이번 작전의 주축인 한 함선을 바라보았다.
불꽃 문양을 두른 함선, 수르트가 비공정으로 이루어진 진형 한가운데에 있었다.
그 주인인 스칼렛 발렌타인처럼 아름답고 열정적인 비행선.
하지만 그것은 지금 수많은 강철 구조물로 뒤덮여 있었다.
마치 쓰레기장의 조잡한 쇳덩어리 속에 붉은색 배가 파묻혀 있는 듯했다.
강철덩어리의 표면에는 범상치 않은 푸른빛이 맴돌고 있었다.
‘저것이 인류의 희망.’
약자일 뿐인 인간이 왕처럼 군림하는 반신을 사냥할 반역의 칼날이다.
전 세계에서 긁어모은 막대한 양의 마정석이 하나의 마력회로로 수르트에 이어져 있다.
저것은 쉽게 말하자면, 건물만 한 물탱크의 물 전체를 물총 하나로 일순간에 쏘아 낼 수 있도록 해 주는 장치였다.
저 마력 전송 시스템 및 비행체를 며칠 내로 만들기 위해 어마어마한 노력이 투입되었다.
전 세계의 게이트가 지구방위군의 계엄령으로 통제되며 자재를 긁어모았다.
선체를 구성하기 위한 특이 금속, 마력을 담고 흘려보내기 위한 마법 자재, 마력이 담겨져 있는 마정석 등.
본디 지구에는 없는 물건들을 공수하기 위해 수많은 나라와, 집단과, 개인의 창고가 거덜 났다.
마력 전송 네트워크를 구성하기 위해 수백 명의 천재들이 기저귀를 끼고 회의를 했으며, 그렇게 나온 설계 도안을 수만 명의 기술자가 식욕, 성욕, 수면욕을 통제당한 채 일회용품마냥 갈려 나갔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신할 수 없다는 거지.’
한서리는 이를 악물었다.
수르트로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시뮬레이션상으로 티아마트를 처치하는 것이 가능하다지만, 현실은 예측과 언제나 다르니까.
결국에는 부딪혀 볼 수밖에 없었다.
한서리는 그렇게 각오를 다졌다.
폭격이 점차 잦아들었다.
전투의 시간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한서리의 옆에 누군가가 섰다.
“뭐 해? 이제 금방 시작한다고 다들 회의실로 모이래.”
세라스 프레이저였다.
한서리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냥 잠깐, 생각 좀 하고 있었어.”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가만히 비공정의 난간 너머로 지표면을 바라보았다.
인류의 명운을 건 싸움.
그리고 저편에 보이는 행성의 끝과 검은 우주를 보고 있자면 어쩔 수 없이 감상적인 기분이 되어 버린다.
세라스는 한서리와 같은 곳을 바라보며 물었다.
“김건은?”
“결국 못 찾았대. 마인협회가 나타난 이후로는 완전히 종적을 감춰 버린 것 같아.”
김건은 지금 알리시아와 함께 다른 곳에서 투입 시기를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인류 최후의 무기가 될 수도 있는 그를 숨기는 것은 엄밀한 배반 행위. 그것을 세라스에게 말할 순 없었다.
세라스는 토닥이듯 한서리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괜찮을 거야.”
무엇이 괜찮을 거라는 건가.
납치당한 남편이 무사히 있을 것이라는 걸 암시하는 말이겠지만, 진실을 아는 한서리에게 그 말은 다른 의미로도 들렸다.
그녀는 가슴에 손을 얹었다.
왜인지, 돌아온 이후로 남편이 아닌 다른 사람의 말에도 감정이 흔들릴 때가 있었다.
불안했다. 자기 스스로가 나약해진 것 같아서.
“…….”
주먹을 꾹 쥔 한서리는 깊게 호흡을 뱉어 냈다.
괜찮다. 앞으로 한 걸음. 마인협회까지 고려하면 한 걸음 반 정도는 될 테지만 일단 한 걸음이라고 하자.
한 걸음만 잘 내디디면, 그다음부터는 강한 척을 할 필요도 없어질 것이다.
“여기 있었군.”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사이먼 베이커가 있었다.
환갑이 가까운 나이에, 마법의 힘으로 젊음을 유지하고 있었던 그의 얼굴도 요 근래 꽤 늙었다.
대마법사, 혹은 발할라의 첫 번째 별이라 불리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칭송받던 영웅은, 이 세계로 침범해 오는 티아마트를 추방시키지 못한 것과 수십 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발할라의 간부진에 숨어 정보를 누출해 온 배신자를 색출하지 못한 책임을 지고 한순간에 몰락했다.
하지만 사이먼 베이커는 여전히 이곳에 있었다.
교수도, 간부도 아닌 일개 영웅일 뿐이었지만 분명히 필요한 곳에 남아 있었다.
주변에 있던 영웅들이 자연스레 그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권력의 저 바깥으로 튕겨져 나갔어도, 그가 가진 실력과 지금까지 쌓아 온 과거는 신뢰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의 가슴속에 남아 있었다.
대마법사는 여전히 여유로운 미소를 띠며 후배들에게 말했다.
“가지. 곧 마지막 브리핑이 시작될 것 같으니까.”